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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적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줄 순 없소” 이승만은 휴전 반대했다
⑪ 이승만은 왜 반대했나
복거일 소설가
입력 2023.10.25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유엔군 최고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급히 날아온 리지웨이가 김포공항의 간이 건물에서 그에게 압록강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리지웨이의 설명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당신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아이젠하워 만나 태극기 선물 -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가 미군 부대 시찰 도중 이승만에게 태극기를 선물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휴전에 반대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막는 방식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 뒤로 이 대통령은 줄기차게 휴전에 반대했다. 이미 공산군은 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지금 휴전하는 것은 힘이 부친 적군이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중공군이 다시 침입하면, 그때도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구원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얘기했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세계적 대결의 한 부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싸울 뜻이 없었고 미국의 휴전 노력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이 대통령을 성가시게 여겼다. 끈질긴 설득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미국은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반응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8월 14일까지였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는데, 이 대통령이 다시 뽑힐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가 뽑히도록 해서, 이 대통령을 쉽게 축출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미국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장면과 군정에서 줄곧 경찰 책임자를 지낸 조병옥이 유력한 후보들이었다.
대통령제에선 직선제가 옳은 방안이었고,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195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제의했다. 이어 그런 개헌의 선행 조치 삼아, 전쟁으로 미루어진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했다. 1952년 4월에 실시된 기초의원(시·읍·면) 선거와 5월에 실시된 도의원 선거에선 그가 이끈 ‘자유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서,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대 대통령 취임 1952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단에 선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서, 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고 대통령 선거는 5월 29일에 치르기로 의결했다. 5월 17일엔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 개헌안을 공고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직선제가 대결하게 된 것이었다. 이 대결에선 야당이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은 국회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막강한 미국 대사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열세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국민 동원이었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국민들은 이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국회는 타락한 지도층을 대변한다고 인식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자유당이 동원한 전국의 시민들이 부산의 국회로 몰려들어 의원들을 성토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들은 낮엔 시위하고 밤엔 벽보들을 붙였다.
이처럼 긴장이 높아지던 5월 23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긴장된 정국을 언급하고서 그는 “정치적 마찰이 생기면, 한국에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은 자신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국회 안의 공산주의자 11명을 적발했으며 그들을 체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혐의의 증거로 50달러 신권들이 가득한 가방 두 개를 보여주면서, 북한에서 홍콩을 거쳐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압수되었다고 설명했다.
1952년 5월 26일에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5월 24일에 부산 인근 금정산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를 공비들이 습격했는데, 계엄령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계엄군은 곧바로 ‘국제공산당 공작금’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을 체포했다. 다른 의원들은 숨거나 연금되었다.
특이하게도,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1916~1983) 소장인데 부산과 경남의 계엄사령관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이었다. 원 소장은 이 대통령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이 참모총장은 계엄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1개 사단을 부산 지역으로 보내라는 신태영 국방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내렸다.
격노한 이 대통령이 이 참모총장을 호출하자, 그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혼자 경무대에 갔다가 구금되거나 납치될 가능성을 걱정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나 밴플리트가 “나는 한국의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작전권이 나에게 있는 이상 부산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말해서, 이 문제는 풀렸다.
이 일화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당시 미국 대리대사였던 앨런 라이트너는 1973년의 대담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모반 음모를 밝혔다.
“어느 늦은 밤 내가 살던 대사관저 문 앞에 지프가 닿더니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들어왔어요. 그는 자신이 다른 (참모)총장들도 대변한다고 말했어요. 군부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지만, 후방 전선(home front)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그가 말했어요. (…) 육군 병사들과 해병 몇 명으로 그의 사람들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가택 연금시킬 수 있다고 말했어요. (…) 그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40 내지 50 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숨어버린 다른 의원들에게 나와서 선거를 치르라고 독려할 것이라고 했죠. (…) 자신이 참모총장인 한국 육군이 유엔군의 지휘를 받으므로,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미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 음모의 주동자들은 아주 동질적이었다. 이종찬 소장(일본 육사 49기),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일본 육사 50기) 등은 충실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고 일본군의 습속을 깊이 받아들였다. 일본군의 독특한 습속들 가운데 하나는 하극상(下剋上)이라는 기괴한 행태였다. 군국주의에 열광한 젊은 장교들이 장군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암살했다. 이런 행태는 흔히 젊은 장교들이 주동한 군부 반란으로 발전했다.
1945년 8월에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막고 전쟁을 계속하려고 소좌 1명과 중좌 1명이 일으킨 모반은 대표적이다. 그들은 동참을 거부하는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위조 명령서로 병력을 동원해서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왕의 측근 대신들과 일왕의 육성 녹음판을 수색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진압군이 이르자, 그들은 자결했다. 이렇게 봉기한 장교들에겐 일왕도 폐위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잘 알았으므로, 히로히토는 항복 방송을 하기 전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두 동생으로부터 충성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1952년 5월에 모반을 기도한 한국군 고급 장교들은 그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일본군의 습속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지니는 권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고, 기회가 오면, 군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종찬의 제안은 불법적이었지만, 라이트너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무부에 그 제안을 보고하고 받아들이라고 건의했다. 이어 그는 유엔 한국위원단과도 이 제안을 논의했고 “하늘이 보낸 기회”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라이트너의 경솔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큰 문제였지만,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달포가 지난 뒤, 라이트너는 이종찬과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미국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의원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미국의 지원으로 손쉽게 이승만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버텼던 야당 의원들은 낙심해서 이 대통령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에서 발췌한 몇 개 조항을 넣은 절충안이 국무총리 장택상에 의해 마련되었다. 뒤에 ‘발췌개헌안’이라 불린 이 개헌안은 7월 4일 국회에서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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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52년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이 72%가 넘는 523만여 표를 얻었고, 2위인 이시영이 76만여 표를 얻었다. 이 대통령은 기형적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선거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제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엔 한국위원단의 1953년도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 구조는 대의적(representative)이고 민주적으로 유지된다”고 평가했다.
대의(大義)와 소절(小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승만은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젊어서는 막일도 했지만, 주로 연설 사례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박식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잘해서, 그는 늘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그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바삐 움직였다.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부부는 뉴욕에 있어서, 시간이 촉박했다. 이승만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차를 몰았다. 곧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기동경찰 오토바이 두 대가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더 빨리 몰았다.
그렇게 빨리 몬 덕분에, 그들은 경찰차에 따라 잡히지 않았고, 이승만은 시간에 맞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열변을 토했고, 청중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그머니 돌아보니, 그들을 쫓아온 기동경찰관 두 사람도 입구에 서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 사이, 경찰관 한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가왔다. “20년 동안 기동경찰을 하면서, 내가 따라잡지 못한 교통 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너무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을 시키시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그 뒤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에게서 운전을 배워서 자신이 차를 몰았다.
이 사소한 일화에서도 이승만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늘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에 막히지 않았고, 작은 고려 사항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민족을 이끌고 난세를 헤치면서, 그는 소절(小節)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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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64
2023.10.25 06:36:36
주변인물들에게 휘둘려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워 아쉬운점이 있긴했지만,이승만 대통령은 참 애국자이고 건국대통령이 맞습니다
답글작성
292
6
2023.10.25 06:12:59
그 때 윈산까지 접수하고 휴전해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답글작성
238
2
2023.10.25 06:33:00
사악한 무리들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악은 진멸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하늘이 명령합니다.
답글작성
232
2
2023.10.25 07:09:37
이승만은 가만보면 민족주의 좌파 페미들이 열광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데 왜 까이는지 이해불가. 다른 유명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중국에 망명하여 다른나라 시민권을 취득해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30여년을 넘게 있었고 미국에서 대학 석박사 다땄으며 태평양전쟁을 예언한 이승만의 저서 (Japan inside out)가 미영 사관학교의 필독서가 될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미국으로 망명해서 편하게 상류층 생활을 누릴수 있었음에도 그는 미국의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 대한의 사람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길이보전할 의지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글2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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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9:34:24
자유인은 스스로에게도 책임 지는 사람 아닐까요.
2023.10.25 12:22:33
투철한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아닐가요.
2023.10.25 07:51:20
정말 알면 알수록 위대한 분이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에 감격을 합니다. 이런 위대한 분을 대한민국 국민들 절반도 모른다니 한탄스럽고 개탄스럽습니다. 이런 글 너무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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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06:19
건국대통령의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오늘의 대한 민국을 만든 바탕인데 지난 60여년 동안 온갖 거짖과 조작으로 그의 뜻을 왜곡시켜서 이제는 소수만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 복거일 선생, 건강하게 이승만 전기를 끝내시기를 빕니다.
답글작성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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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00:09
이승만 대통령의 큰 치적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시장경제, 법치의 헌법완성, 한미동맹"으로 국가의 큰 바탕을 만들었다.~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 핵공격으로 일본을 항복시켜 세계 2차대전을 승리하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빛나는 건국 탄생일이다. 국민들의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92%로 당선되고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했다...공산세력의 6.25남침때도 굳건히 자유민주를 지키고, "자유통일한국"을 간전히 원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미국에 당찬 주권행사와 당당함, 큰 그릇이었다.
답글작성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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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56:08
개일성이나 김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과 통찰력 그리고 인격에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가지!...
2023.10.25 08:37:24
이 분은 진정 우리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시다.
답글작성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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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24:28
자유대한민국에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뛰어넘을 애국자가 있으면 나와봐!! 멸공!!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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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29:56
맥아더는 평양 진격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만주 공격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를 허락치 않았다. 아쉽다. 만주벌판을 원폭 하나로 불바다를 만들었으면 김일성가는 없었을텐데!
답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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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7:23:10
트루만 대통령 아닌가요?
2023.10.25 09:41:06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시점에 나이가 85세더군요. 옛날에 85세이면 초고령입니다. 그때쯤 이승만 대통령이 그 고령에 북괴와 싸운다고 또 국내 간첩들과 싸우며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해겠습니까. 그걸 너무나 이 나라 국민들은 잘 모르는 것 같네요.
답글작성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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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12:24
그렇다. 그때 이승만이 옳았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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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15:10
미국이 북진 통일을 방해한 배경에는 미 국무부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기 대문이다. 심지어 루즈벨트,트루만,아이젠아워 까지..한국도 마찬가지였고.. 공산주의 해악과 폐단을 맨 먼저 꿰뚫어 본 지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도 없던 이승만이 유일하다. 미국이나 영국의 지도자들조차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해 보고서야 이승만이 옳았음을 깨달았으니...ㅠ
답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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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39:15
위대한 이승만의 말을 들었으면 오늘 북핵 위기가 없다.
답글작성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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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06:11
이러니 좌파들이 극렬하게 이승만을 싫어하지...
답글작성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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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12:48
구국의 이승만 대통령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공산화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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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0:00:38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개'들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들 안위 만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는 놈들부터 처단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2023.10.25 10:00:38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개'들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들 안위 만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는 놈들부터 처단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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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46:05
적이 힘을 키우라고, ................... 즉 핵무기 개발하라고 뒷돈주고, 시간 벌어준....김대중(북은 핵개발 의지 없다, 내가 책임진다), 노무현(북핵은 자위용, 보유에 일리 있다), 문재인(북, 핵포기 의지 있당께!! 이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을 처형하고 부관참시하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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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26:02
미군의 오판도 있지만, 2차세계대전으로 너무 많은 군인과 국민이 죽어서 미국과 유럽 모두 전쟁에 질려버린 때라서 확전하기엔 부담이 너무 큰 상황이기도 했다. 솔직히 입장 바꿔봐도 먼 극동의 나라에 젊은이들의 뼈를 묻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이승만의 혜안은 백년을 앞선 것이었고 결국 북진통일을 못하는 바람에 지금 후손들은 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답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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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3:19:40
중국과 소련에 핵이 없을 때 핵으로 때리고 작은 국가로 쪼개놨어야하는데 아쉽네요
2023.10.25 11:10:10
명답입니다....다만 그때 조금만 더 이승만대통령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지금 통일된 대한민국이 있었을겁니다....우리 힘이 없던 때라......아쉬울 뿐입니다..
2023.10.25 07:55:22
휴전때 전라도 를 북에 주고 북한 강원도 이북 땅과 교환 하자고 했어야 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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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35:26
존경합니다. 기념관을 지어서 대대로 업적을 남겨야합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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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19:10
종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역사였다. 지금까지 그 수치는 남아있구나. 색출해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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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43:49
그 당시 이승만의 판단은 정확했다. 시대적인 판단은 국가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 때 미국은 전쟁피로감으로 더 이상 출혈을 감수할 의사가 없었고 한국은 중공군을 몰아낼 힘이 없었으므로 현 휴전선상에서 마지 못해 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안보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국제정세는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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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42:27
미국 입장은 외면하고 이렇게 한국 의 이승만 입장으로 글을 서주어 너무 고맙다 미국은 2차대전에서 너무나 많은 군인을 잃었고 오년도 안되어 한국전쟁에 7만여명을 동원하여 5만8천명을 잃어 미국여론이 들끓었다 한반도에서 발을 빼라고 그럼에도 이스안은 휴전불가 북진통일을 외친건 우리입장에선 생존이냐 멸종이냐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안타가운것ㅇㄴ 휴전에 응하겠다하고 황해도와 강원도는 남한이 차지한 상태에서 휴전에 응하겠다 했으면 미국은 남은 전략길ㄹ 총도원 해서 삼팔서주변에 밀집된 45만명의 중공군을 괴멸 시키고 남포에서 원산가지 전선을 확보할수 있었을것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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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11:42
그래서 진보가 원수 취급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의 고향이 미제앞잡이와 미제들에의해 존재 자체가 소멸되었을테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진보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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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14:00
이순신장군이 사후 수백년이 지나서 가치를 인정 받았듯이 이승만대통령의 진정한 영웅성이 밝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아버지는 이승만대통령이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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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0:59:53
이러한 훌륭한 분이니 주사파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임종석, 이인영, 조국등이 싫어할수밖에 없네. 멸공!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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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56:25
중공은 우리의 철천지 원수다. 14침략에 대해 사과받고 배상받을 지도자는 없는가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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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43:48
국회의원 들 50여명이 대만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지금도 전쟁이 나면 똑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본다. 말로만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OO들 오직 지 뺏지만을 위해서 이재명 방탄하고 검수완박법 등 악법을 양산하는 놈들이 무슨 애국심이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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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9:14:33
역시 천재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기사아닌가? 당시 이런 분을 뒷 받침 할 정치인들이 있었다면 이 나라가 4,19라는 혼란 기를 맞아 하마터면 김일성 세상이 되 지금까지도 김정은 핵돼지 밑에서 심음하며 죽지 못해 살뻔 했다는 것 생각하면 오싹해 옴을 느끼게 된다. 역시 천재 맥아더 장군의 백년 앞을 내답보는 혜안을 따랐더라면 오늘날 과같은 중공은 없었을 것이고 지구 전체가 자유국가 들로 채워져 태평성대를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2023.10.25 11:43:16
솔직히 이승만 대통령 반대 하는 사람이 솔직히 말해서 공산당지지 하고 김일성 지지하는 세력이지 진짜 어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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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23:01
이승만 당신이 옳았습니다. 그때 밀어붙쳐 통일 시켰어야 해습니다. 천추의 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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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4:19:47
적극지지하고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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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3:21:23
중국과 러시아에 핵이 없을 때 중러에 각각 30개정도 투하해서 박살을 내야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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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13:38
1.예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은 나라에 도움이 안되고 안위가 불안할 때는 도망가는구나. 6.25때 국회의원 얼굴에 대표적으로 이재명이 어른거린다. 2.참군인으로 칭송받던 이종찬 장군도 기회주의자구나 3.그때 지도자가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나라 지키지도 못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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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09:42
70여년 전 초대 대통령이 대비한 북적에게 분재인 노무현 감대중이 교언 요설로 국민 속이면서 북적에게 협력하며 시간을 벌어주어서 지금은 북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당하게 됐으니 북이 막말과 위협을 할 때 마다 외적 보다 내부에 있는 이적자가 더 무섭다는 걸 실감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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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1:05:40
정치는 현실이고 미래다 감성에 젖어 이론만 화려한 사회주의를 선동질 하는 악마의 화신 좌파들은 존재가치가 단1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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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0:32:58
복거일 선생에 의해 지난역사의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거짓을 벗고 진실이 밝혀지니 후손에겐 정말로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에 대한 안목을 ??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폄훼와 함께 이 글에 언급된 장군들에 대한 과도한 호의적 칭송이 얼마나 허구였는 가를 알게되었다. 역사에 대한 진실이 인간의 손에 의해 변형되어 전수될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되어 진실만이 후손들에게 전달되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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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8:25:33
조선이라는 나라때문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비극입니다. 당파싸움과 무지한 지도자는 이 나라의 암입니다. 글은 알지만 상식은 많지만 지혜가 없는 국민들이 변해야 합니다. 지금은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경험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도움이 않됩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는 과거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과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 개척자의 정신으로 살아 갑시다. 통일은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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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3:43:53
'1952년 5월 26일에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의 23개 시·군''부산과 경남의 계엄사령관'(?) 1962년까지는 '부산, 경남''부산과 경남'이 아니라 '경남'이다. '경상남도 부산시'이었다가 '1963년 정부 직할 부산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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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2:22:08
(편견) 6.25 때 국군의 주적은 슬프지만 같은 동포였다(X). (사실) 인천 상륙 이후 북괴군은 궤멸 됐다. 가뜩이나 인구도 적고, 생각 있는 시민들은 월남하여 예비대를 동원할 수 없었다. 하여 실질적인 침공군의 주력은 중공군이었다. 중국 놈들만 아니었으면 통일 됐다. 국군은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이 선동한 동포들에 총을 겨눈게 아니라 대부분을 중공과 싸웠다.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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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10:36:08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일깨워준 이승만.. 이러한 국보급 위인을 우리는 공경하고 그 뜻을 잘 받들어 자유의 소중함과 그 위대함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