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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도대체
서울의 서강대 종교. 신학연구 소에서 윤호진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가 '불교인이 본 기독교' 란 제목으로 강연한 원고
목차
1.서론 언제인가 한 기독교 친구는 나에게 "너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가는 이야기로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글로 쓴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종교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청탁 받았을 때 선뜻 승낙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라는 문제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럴 수 없는 벽을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에 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일지라도 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에게 신(神)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겠지만,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절대자(神)>의 존재를 받아 들 일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신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주어 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의 개념에는 도달시 킬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교와 접하면서(특히 기독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 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가능한대 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또 충격을 줄 수 있는 표현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 으로써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신의 창조문제 신의 창조문제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문제로 제기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불교인들이 구약경의 창세기를 읽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일종의 신화, 또는 동화와 같은 것으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지구가 아니고)같은 것이 1,000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 이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 다시 이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그러므로 이 대천세계는 우리 태양계같 은 것이 100억개 이상 모인 것을 가리킨다. 우주에는 이와 같은 대천세계가 역시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들은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가(成), 그리고 파괴되어 (壞), 원자상태로 분해된다 (空).
∞∞∞∞∞∞∞∞ 成 ▼ 壞 ▼ 空 ∞∞∞∞∞∞∞∞∞
이와같은 성,주,괴,공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되풀이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인들에게 구약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창조의 이야기가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을 읽으면서 신의 인간창조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무능(無能),무자비(無慈悲),독선(獨善) 같은 것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이고,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같은 아담 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나무 (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신이 진정으로 그의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고, 그 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불 만들었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한 것처럼,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 에 접근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먹었다 하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단 한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 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곁에 위험한 농약병을 두었다가 아기가 그 농 약을 마시고 그 대신 농약 병을 아기 곁에 둔 그 부주의에 대해 그들 자신이 책임을 느낀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전지),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신 자신도 그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뒤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버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구약에서는 신이 그의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구약을 읽으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앞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일 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지를 때는 가차없이 벌 을 주는 무자비,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장이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신상(神像)으로부터, 어떻게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불교인들에게 기독교는 최소한의 감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로 넌센스다.)
3.구세주로서의 예수 구세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붇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 후에 부활 했는가> 라는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기독경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 이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 고 있는 불교인들은 기독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들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 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경 자체내에서도 그를 신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 형제들조차도 예수가 고 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미쳤다)>라고
예수와 오 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사람들도 그를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유대신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신성모독자>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 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면, 그리고 예수의 처형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은 두고서라도 당사자인 예수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두려움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이와 같은 사실들은 예수 자신이 부활도, 메시아 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신을 이런 생각들은 기독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 역사상에서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 는 신의 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을 때 보여주는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데도 예수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히 죽음 앞에 섰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아마도 그와 같은 일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신의 뜻이었지 예수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타의에 의한 죽음이 그렇게 위대한 죽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인류사에 있어서 그 정도의 죽음은 흔해빠진 것이었다.
예수의 존재는 신의 <인류구원>이라는 시나리오에 출연한 <배우>, 또는 그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 같이 보인다. 거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 대해, <구약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유대신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 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 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 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고작 1년 남짓)의 그의 활동 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역사상의 위대한 종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에서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 보다도 불가사이하게 보이는 것은,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 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4.기독교의 사랑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유교의 인(仁)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등에서도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히 기독교만을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 는 사랑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독선적이고, 편애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구약경 속에서 야훼의 모습은 창세기에서 말라기 까지 거의 전체적으로 유대인들 만을 위한 신, 에덴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했던 첫 행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우리같은 보통인간이라해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그와 같은 치명적인 시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 신이 그렇게 무자비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선악과 나무의 시험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에 카인과 아벨의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일에서도 우리는
그 뒤에 일어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서 어떻게 아브라함 가족만을 골라 그 자손들과만 계약을 맺고 구약의 신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러나 그들에게조차도 항상 유치하고 무자비한 시험 그들이 신의 말을 잘 따를 때만 약간씩 도와준다. 또는 <나는 그 도읍과 그 주민들을 송두리째 파멸에 넘겨 버리겠다. 위협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가차없는 벌을 내리곤 한다.
구약에서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라, 피조물들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공갈협박을 하고,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유대신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의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 대한 편애는 볼 수 있어도 인류전체에 대한
신이 인류구제를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지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그러나 불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행위 가 아니라, 신이 인간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인간들에게 신의 독생자의 피를 손에 묻히게
전지전능한 신이 그의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구상했던 것이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는 말인가.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불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이와 같은 유대신의 행위와 모습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야훼의 지극한 사랑>을
신약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행위와 그 가르침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느낌과 반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몇몇에 대한 사랑>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받고 주는 사랑> 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그의 추 종자들,
예수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의 대리자로서 전 인류를 구제하러 왔다고 한다면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어느 의미 에서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병들고 가난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 그러므로 예수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했던 베드로와 같은 착한 제자가 아니라 유다와 같은 악한 제자였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번 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그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이 보인다. 처음부터 그들은 극도로 적대시하고 <원수>로 대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그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만류하고 설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 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지금까지 보아온 구약에서의 유대신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그리고 반대자, 원수, 또는 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 자기편,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기편이 아닐 때는 배척하고 증오하고 복수했다.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한 근본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 2,000년간, 그리고 현재까지 어디에서나 분쟁과 전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등에서 기독교가 이르는 곳에서는 그것은 기독경에서 볼 수 있는 그 와 같은 철저한 <배타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는 많은 피를 흘렸다. 이것도 같은 원인에 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기독경을 읽으면서, 그런데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처럼 말해지고,
5.예수의 기적과 부활 <그때 세존(붓다)께서는 물 위로 걸어 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카아샤파는 멀리서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사문(沙門,수도자)은 물위로 다니는구나'>
난다는 사뢰었다. '너는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여승들, 남자 신도들, 여자신도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여전히 떡은 남았다. '너는 이 떡을 가져다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그래도 떡은 남았 다.> (증일 20,28)
이것을 읽으면서 기독교인들은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 다. 기독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똑같은 내용이기 때문이 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기적)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의 교주나 성인들과 관련된 이와 비슷한 기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종교에서 그들의 교주가 행한 기적만이 참된 것이고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이 모두 가짜이거나, 아니면 모두 진짜여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말한다면 기독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기적만이 <진짜 기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행한 기적만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인 들에게는 우주를 창 조한 신이 파견한 존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해준다든지, 몇 덩어리의 빵으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든지,
오히려 그런 앙징스럽고 유치한 기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유대신의 대행자로서의
예수의 부활문제에 대해서도 기적에서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모두 가짜이고 예수 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만약 다른 종교의 부활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게다가 이 부활사건은 기독경 그 자체의 기록에 의해서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두고라도 예수를 직접 따라다니면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수 없이 보았고 그리고 유대신 야훼의 선민으로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온
예수가 부활 운운한 것을 <고약한 사기>라고 보고,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하면, 부활사건 자체의 역사성 여부는 두고라도,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를 되 살려주었다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하게 보일 것인가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보잘 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기독교가 심각하게 부실한 근거로 세계역사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는 원인은
6.결론 결론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가 이룬 업적, 그리고 기독교인 들의 여러가지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접할 때는 지금 까지 보아온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뿐만 아니라 거부반응까지 가지게 된다. (불교는 대단히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교리의 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 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근본 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이것은 마치 붉은 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세상이 붉게 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붉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푸른 안경을 낀 사람의 설명이 통할 리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관점이 더 옳은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교의 교리가 <진짜>이고, 기독교의 것이 <가짜>라든지,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참된 것이고, 불교의 것이 엉터리라고 주장해 보아야 아무런 해결도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익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한 종교에 대해 확고한 입장에 서 있을 때는, 다른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해 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이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의 이해>라는 것은, 붉은 안경을 끼고 세계를 붉게 보거나, 푸른 안경을 끼고 세계를 푸르게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 뿐이다. 그 러면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글의 시작 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렇게 할 수 없는 벽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와 같 은 생각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기독교 자체의 이분법적이고 ㅠ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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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
허허...대단한 통찰력...맞습니다...향은 아무리 덮어도,향내가 나는 법...공격적인 선교는 문제중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