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염도 나기 전부터 윤경(潤卿.이수광)과 종유(從遊)하여 이제 백발이 되었으니, 그를 아는 것이 아마 얕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위인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소탈하고 중후하며, 화열하면서도 절제가 있고, 조용하게 자신을 지키고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정제되고 전아(典雅)하며 난삽한 말을 쓰지 않는데다 특히 시에 뛰어나 자연히 남들이 미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원고를 읽고는 또한 윤경이 주력한 곳이 전적으로 문사(文詞)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평소 스스로 그를 깊이 안다고 여겼던 것이 그저 윤경을 얄팍하게 안 것이었다는 점이 유감스러웠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두가 이렇게 윤경을 잘 알지 못하니, 어찌 늙고 혼미한 이 몸뿐이겠는가.
윤경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일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아 참으로 ‘그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惡其文之著也]’ 자이니,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으로도 윤경의 간직한 바를 알 수가 있으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
다만 그 중 몇 조목의 말은 너무 고상함을 면치 못하기에 삼가 천박한 소견을 그 글 아래 기록하여 돌려준다. 이택(麗澤)의 의리는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서로 강구하는 법이다. 이는 바로 퇴지(退之.한유)의 이른바 “당신에게 보탬이 되지 않으면 나에게 보탬이 있을 것이다.[不有益於高明 則有益於僕]”라는 것이니, 윤경은 회답을 해줄지어다. 천계(天啓) 3년(1629) 7월 모일(某日)에 쓰다.
번역: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註: 정 부학공(鄭副學公)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이 글 <鄭副學公書芝峯稿後>는 《우복집》 권15에 〈書芝峯采薪雜錄後〉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택(麗澤)’이란 친구 간에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태괘(兌卦) 상전(象傳)〉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붕우간에 강습한다 [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자의 본의(本義)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어 서로 적셔주니, 서로 유익함이 있는 상(象)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그 상을 보고서 붕우들과 강습하니, 서로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