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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변모 사건, 미리 보는 하느님 나라와 부활
창세 22,1-18; 로마 8,31-34; 마르 9,2-10 / 사순 제2주일; 2025.3.16.
봄이 왔습니다.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봄이 왔음을 느끼게 하는 전령은 꽃입니다. 눈 쌓인 들판에서도 차갑게 얼었던 흙을 뚫고 땅 속에서 힘겹게 뿜어 올린 수분과 양분으로 꽃을 피어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순서는 동백도 있고 산수유도 있지만 기품으로는 매화가 으뜸입니다.
꽃이 피면 나비가 날아 다닙니다. 꽃이 만들어내는 꿀을 빨아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이에 꽃은 번식을 위한 가루를 나비의 다리에 묻혀 수분을 합니다. 꿀은 꽃의 안쪽 깊숙한 곳에, 꽃가루는 바깥쪽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나비가 태어나는 과정은 차가운 흙을 뚫고 꽃이 피어나는 과정보다 더 험난합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번데기를 거쳐서 나비가 되는 자연 확률은 0.5%입니다. 200개의 번데기 중 199개는 나비가 되기 전에 다른 더 큰 곤충이나 새들에게 먹이로 잡아 먹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까지도 네 번의 번데기를 만들고 헤쳐 나오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애벌레의 껍데기인 고치는 애벌레의 생명을 보존하는 애벌레의 집입니다. 그런데 애벌레는 몸집이 커짐에 따라 네 번이나 자기 집을 바꿉니다. 변화하는 것이지요.
번데기 고치 안의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애벌레는 나비로 변화될 날개를 만들어냅니다. 아주 가냘픈 날개이지요. 그리고 날개를 움직여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좁은 속에서 얼마나 날개를 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애벌레는 기를 쓰면서 노력합니다. 하지 않았다가는 날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혈액이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날개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아주 느리게 진행됩니다.
네 번째 번데기에서 애벌레는 그야말로 몸부림을 치면서 고치를 빠져 나옵니다. 처절함, 그 자체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안쓰러워서 가위로 번데기 입구를 조금 잘라서 나오기 쉽게 해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애벌레가 쉽게 나오기는 했는데, 나오자마자 날지도 못하고 땅에 풀썩 떨어져서 죽고 말더랍니다. 날개짓을 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는 번데기 고치를 빠져나오느라 힘을 쓰는 가운데 날개짓을 할 근육을 키우게 되어 있는데, 그 과정을 생략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안타깝지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벌이는 그 어떤 노력도 쓸모없지 않습니다. 자연 확률은 1%가 채 못된다지만 우리가 의식을 하는 가운데 신앙의 힘으로 노력한다면 100%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변화는 가능합니다.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훨훨 사용하면서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러니 이 믿음이 생겨날 확률은 0.5% 정도가 아니라 0.0001%에도 미치지 못할 수가 있지만, 일단 믿음이 생겨나면 거룩한 변화를 이룩할 확률은 100%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그 중 이스카리옷 유다를 뺀 나머지 열한 제자를 사도로 양성하셨고 이로써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거룩한 변화를 위해 일하시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사순 제2주일인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대한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한 이야기와, 바오로가 신앙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도우심에 대해 강조하며 격려하는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야 하는 목표를 향하여, 몸소 거룩한 변화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준이 되시고, 그 변화의 내용은 자기 봉헌이어야 하며, 이는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우리를 도와 주시는 예수님의 간구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 미사의 말씀의 초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속죄양을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가 생겨난 기원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던 데에서 비롯하였습니다(창세 8,20).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사의 또 다른 기원을 알게 해 줍니다. 당시 우상숭배에 물든 이민족들은 전쟁 포로나 사회적 약자의 아기들을 불태워서 제사를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몹쓸 제사 풍속을 없애시고자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백 살에 얻는 귀하디 귀한 아들 이사악을 당신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백살에 겨우 얻은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칠 것인지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일이 필요하기도 하셨겠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정작 더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형식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칼로 찌르려던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말리시고는 근처에 있던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즉 짐승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 곧 번제의 기원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려던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인신공양을 근절시키려던 동기가 더 컸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천 년 이상 내려오던 번제의 제사 풍속을 예수님께서는 더욱 근본적으로 혁신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애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아예 제사적인 실존 즉, 봉헌적인 삶을 사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제사적 실존을 통째로 마무리하는 의미로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기억하여 계승하는 미사는 그냥 제사가 아니라 ‘미사 성제(聖祭)’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대사제로 인정하는 히브리서가 서기 1세기 경에 쓰여질 무렵에 이러한 확신이 초대교회에 널리 펴졌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치셨고 이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4.10). 이것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인격적 제사, 즉 미사성제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려던 사건은 십자가 수난을 기념하는 미사성제의 예형(豫型)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제관으로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을 기념하는 미사는 아브라함의 봉헌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수난에 담긴 참된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미사의 복음인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평소와 달리 얼굴도 빛나시고 옷까지도 하얗게 변하셨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기적으로만 나타내시던 분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으로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장차 당신이 짊어지실 십자가 수난이 지닌 본질인 부활의 실상을 미리 보여주신 기적인 동시에,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서부터 내세에 이르기까지 누릴 영원한 생명의 실상입니다.
놀라운 광경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변하시가 했더니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당시보다 1250년 전 인물이요, 엘리야는 800년 전 인물이었습니다. 지상의 일을 천상에서 지켜 보시는 하느님의 차원에서 가능한 일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시간과 관계 없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통공의 현실입니다.
타볼산에서 일어난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십자가 수난이 지닌 본질인 부활의 실상을 미리 보여주는 동시에,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이전에도 평소에 공생활 내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일이고,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신 것도 그리하셨습니다. 세 사람만 데리고 가더라도 나머지 제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지리라고 보셨겠지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무렵 제자들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들을 보고서 범상치 않은 분임을 짐작하기는 했겠지만 설마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은 생겨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명백히 드러내신 이 사건은 수난과 죽음 보도, 빵의 기적 보도 등 매우 중요한 다른 사건들처럼 네 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 이 타볼산 기적의 효과가 처음으로 나타난 때는 제자들이 빈 무덤을 목격한 때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레나의 급한 전갈을 받고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은 놀랍게도 비어 있었습니다. 물론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따로 잘 개켜져 있었고, 시신을 둘렀던 아마포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시신 도난에 대한 염려는 덜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믿게 된 계기는 막달레나의 발현 체험이었습니다. 발현하신 그분을 만났다는 증언으로 말미암아 빈 무덤 체험이 부활 신앙의 계기가 되게 해 주었던 것인데, 바로 여기에 타볼산 효과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막달레나의 발현 증언을 듣고 나서는 부활에 대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에게도 직접 여러 번 나타나셔서 기어코 그들을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사도로 변화된 그들 중, 특히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끌다가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치명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첫 주교로서 헤로데 영주에 의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치명했으며,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느라 치명하지는 못 했지만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간 초대교회의 본산을 지키면서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를 돌보았고, 박해받던 신자들을 격려하느라 사목 서한, 묵시록에 이어 요한복음서까지 귀중한 계시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어렵사리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상기시키며 격려하였습니다. 한낱 사람에 불과한 로마 황제를 신격화해서 숭배하라는 박해를 받고 있던 그 교우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믿는 이들이 진정으로 믿고 섬겨야 할 참 하느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신 근거가 창조주 하느님께서 친히 세상에 보내신 아드님이시라는 사실과 아드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가장 닮은 분이시라는 사실도 강력하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1-32).
이렇듯 선명한 성경의 증언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강력한 증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신앙 진리가 세속적인 메시지와 무신론 사조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뚜렷한 시대의 징표에서는 물론 평범한 일상의 징표에서도 특히 십자가에서 그분의 본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낯설지만 빛나는 예수님, 시공을 초월해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환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겪기 전에 미리 그 본질을 깨닫게 해주시는 예수님, 이분이 우리가 믿는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미리 부활의 영광을 알려주심으로써 소명을 받아들일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을 이미 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더 분명하게 주어진 메시지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거룩한 변화로 나타날 신앙과 교회 쇄신의 봉헌, 즉 십자가는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할 수 있는 제1차 관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제2차 관문은 신앙이 쇄신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예수님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십자가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죽고 나서 내세의 상급이나 벌로 받을 최후의 심판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성취할 탈렌트(마태 25,14-30)와 미나(루카 19,11-27)로 상벌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더 큰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아서 복음화에 불리울 수도 있고, 또는 이미 가진 줄 알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는 쇠락해 가는 처지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께서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게 될 여러분 자신의 거룩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비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42ㄴ-44. 51ㄴ). 우리의 거룩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지름길은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성경의 말씀에 맛들이고 지금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애벌레를 사도라는 나비로 100%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 세 제자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 모두를 그렇게 사도요 선교사요 순교자로 변화시키신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미사에서 여러분은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사순 시기가 바로 거룩한 변화를 위한 번데기 시절입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자연의 날씨로도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때는 부활절 무렵이고 한 달 남짓한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신앙의 날갯짓을 배워서 부활절이 되면 신앙의 봄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