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 장진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한다. 죽음을 앞당기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목소리만 잃은 채 다시 교도소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어린 죄수. 하지만 장진에게 이 생에 남아있는 미련은 아무것도 없다.
모자를 것 없어 보이는 삶 안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여자가 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연의 삶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우연히 TV에서 사형수 장진의 뉴스를 본 연은 그에게 묘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향한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죽음의 순간을 사형수 장진에게 털어놓으며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데….
그들이 쉬는 들숨과 날숨은 각자의 삶을 어디로 데려갈까…
연은 장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찾고, 사계절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는다. 죽음 외에는 가진 것이 없던 장진에게 삶의 온기를 다시 불어 넣어주는 연. 계속되는 만남을 통해 둘은 단순한 욕망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지만 연의 남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채고 이들의 사랑을 막기 시작한다.
김기덕 감독은 첫 영화 <악어>로 데뷔한 후 10년이 지난 2006년 열세번째 영화 <시간>을 개봉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열세편의 작품들로 인해 세상은 놀랐고 그 놀라움만큼 그를 향한 관심은 커져갔다. 하지만 그 관심은 수많은 오해와 논란이 큰 자리를 차지했고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아왔음에도 국내 영화계에서는 차갑게 외면 받기 일쑤였다. 자신만의 강한 색을 씌운 작품 세계를 통해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뚜렷이 담아낸 영화들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영화를 받아들이기엔 국내 영화계와의 골이 너무 깊었다. 기형적 형태의 배급 시스템을 비판하고 한국영화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전작 <시간>의 개봉 당시, 그는 더이상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인생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2007년, 그의 열네번째 영화가 개봉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다. 고심 끝에 신작 <숨>과 함께 관객들 앞에 다시 선 그는 이제, 논란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함께 발전해나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 신작 <숨>은 영화가 제작되기도 전에 국내 투자를 통한 제작이 아닌 해외 판권의 선판매로 제작비를 충당해 만들어졌다. 2006년 가을 AFM(아메리칸필름마켓)에서 베네룩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터키 등에 팔렸고, 얼마 전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렸던 유러피안필름마켓을 통해 구소련연방, 스페인, 브라질 등에도 팔리면서 이미 총 10여개국에 판권이 선판매 되었다. 또한 완성본이 공개되지도 않은 지금 상황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있을 칸마켓을 통해 판매국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마련되는 자본으로 제작비의 거품을 걷고 치밀한 계획 하에 최소한의 비용과 함께 효율적으로 영화를 찍어낸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최근 정체되어있는 국내 영화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영화를 봐달라고 강요하기보다 자신이 담아낸 이야기를 그저 대화하듯 나눠보고자 하는 김기덕 감독. 그는 이제, 불편한 간극을 줄이기 위한 한 발자국을 요구하기보다 한 발자국을 먼저 내어놓기 위한 첫걸음으로 영화 <숨>을 가지고 관객들 앞에 다시 선다. 전작 <시간>을 찾아와준 관객 3만명 그리고 신작 <숨>을 향한 국내 관객들의 추이를 눈여겨볼 만할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다.
들이마시는 숨을 막고자 하는 남자 막혀오는 숨을 내쉬고 싶은 여자 올곧은 숨을 쉬고픈 그들을 만난다!
이미 죽음을 선고 받고도 스스로 송곳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는 사형수 장진. 기존 김기덕 감독의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선입관으로 본다면 역시나 ‘김기덕’스러운 파격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장첸이라는 배우를 만나게 되면서 사형수라는 단순한 설정을 넘어서서 증오와 고통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의 내면을 애절하게 풀어내며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대사가 없다 한들 대만 출신의 배우 장첸에게 낯선 한국영화 출연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 도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 ‘김기덕’이었고 그 도전은 가히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던 장첸과 김기덕은 언젠가 함께 작업하기를 약속해온 터였다. 왕가위, 허우 샤오시엔, 이안 감독 등 세계 유명 감독들과 작업해왔던 장첸에게도 김기덕 감독의 흔치 않은 작업 스타일은 예상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김기덕 감독의 작업 스타일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움과 함께 배우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며 이번 작업에 커다란 만족감을 표했다.
장첸과 호흡을 맞추며 새로운 히로인으로 떠오른 지아의 발견도 반갑다. 연극무대를 통해 연기력을 다져왔던 그녀는 김기덕 감독의 전작 <해안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숨>에서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된 후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사형수 장진을 찾아가고 연민과 사랑으로 그의 고통스런 삶의 구원이 되어줌과 동시에 자신의 삶 또한 구원을 얻게 되는 연을 연기했다. 절제된 감정선을 유지하며 깊이 있는 내면 연기를 펼침과 동시에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로 주변의 공기를 휘어잡는 그녀의 매력적인 연기는 영화 속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전작 <시간>에 이어 김기덕 감독과 두번째 작업을 하게된 하정우의 출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외도로 아내와의 신의를 먼저 져버렸지만 뒤늦은 용서와 화해를 구하며 영화 속 얽히고 설킨 관계 속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인물인 남편 정을 연기했다. 김기덕 감독과의 작업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운동경기를 치르는 것 같은 흥분을 준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는 그는 이번 작업에서도 예의 보여왔던 집중력을 발휘,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들숨과 날숨이 맞닿는 그곳에 남겨질 <숨>
“내 영화는 즐기는 영화가 아니라 느끼는 영화다. 살면서 드러내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느낄 것이다. 행복을 주기보다 불행을 이기는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질문해 보기 바란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2007년 동아일보와의 e-mail 인터뷰
김기덕 감독이 착해졌다. 좀더 풀어보자면 그는 친절해졌다. 인간 욕망의 아이러니를 날것으로 담아왔던 그가 이제는 한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서 관계를 통한 화해를 말하고자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빈집> 등 전작들에서 김기덕의 유함이 엿보였다 한다면 신작 <숨>에서는 그의 세상을 향한 화해의 손길이 정점에 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통해 강하게 쏟아내고 뱉어내던 그가 이제는 영화를 통해 담아내고 삼킨다. 작품 세계의 급격한 변화라기보다는 그의 친절함이 이제는 숨겨져 있지 않고 드러났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숨>은 그래서 더욱 마음으로 느껴져야 할 영화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음양이 함께 조화를 이루듯 들숨과 날숨이 공존하고, 그 공존의 형태가 삶의 의미에 대입되어 형상화된 영화라고 밝혔다. <숨>에서 만나보게 될 인물들은 죽음을 말하고, 증오를 드러내며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들을 표출하지만 종래에는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용서와 화해로 풀어나간다.
행복을 안겨주기보다는 상처의 치유에 우선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에 주인공들은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또한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회복해간다. 하지만 삶만이 치유일 수는 없고 또 죽음만이 치유일 수도 없다. 그에겐 삶이 고통이고 죽음이 치유이며, 그녀에게는 죽음이 고통이고 삶이 치유일 수 있다. 이들의 음으로서의 작용과 양으로서의 작용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다져지고 만져져서 완성되어간다. 관계와 관계를 통한 화해, 그것이 바로 <숨>이라는 영화가 관객들과 함께 느껴보고 나눠보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올 수 없는 치밀함과 집중력으로 완성된 김기덕 영화의 진수 <숨>
전작인 <시간>의 작업 환경도 만만치 않았다. 17회차라는 촬영 회차에 혀를 내두르던 이들에게 김기덕 감독은 다시 10회차 완성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최소의 비용으로 영화를 찍어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촬영 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숨>은 15일간 10회를 촬영했고 이러한 촬영 일정은 20번 이상 수정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철저한 준비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작업을 이끌어내는 김기덕 감독의 능력은 명실공히 세계적으로 손꼽힘에 부족함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짧아서 더욱 혹독했던 촬영 과정은 해외에서 촬영을 위해 한국을 찾았던 장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더욱 을씨년스러움을 드러낸 교도소에서 죄수복 하나 걸쳐 입고 영화를 찍어낸 장첸은 열흘 정도 한국에 체류하며 4회차 만에 모든 촬영분을 소화해내야 했다. 하정우 또한 나을 것이 없었다. 짧은 촬영 회차에 TV드라마 촬영까지 겹쳤던 그는 결국 5회차 만에 촬영을 마쳤다. 이같이 빠른 촬영의 진행은 출연하는 배우들 뿐만이 아니라 현장에 참여한 스태프들 모두에게도 엄청난 치밀함과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힘이 바로 김기덕 감독의 힘이고 그 힘을 받쳐주는 배우들의 힘, 또 스태프들의 힘이라 하겠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 관객들의 눈길을 끌 요소 중 하나는 김기덕 감독의 출연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와 같이 본격적인 출연이라기보다는 카메라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감독의 위치를 카메라 앞으로 옮겨놓은 듯이 자리하고 있다. 사형수 장진과 연의 불가능한 만남을 성사시켜주는 보안과장 역으로 관계의 가교 역할과 관조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뜨거운 창작열과 그에 못지않은 기민함으로 언제나 부족함을 남기지 않는 김기덕 감독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러하였듯 <숨>을 거쳐 다음 작품으로 또 그 다음 작품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