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에서
-白石과 子夜 그리고 法頂 스님을 만나다
지난 일요일(7월 3일)
성북동에 자리한 吉祥寺를 찾았다
초파일 무렵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몰려든 인파에 밀려 제대로 경내를 둘러보지 못한 데다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 서둘러 빠져나왔었다
짦은 시간이었지만 사찰보다는 화려한 도시 속의 아늑한 섬 같다는 느낌이었다
엊그제 다시 찾았던 이유는
내심 白石 시인을 사랑했던 김영한 보살의 지순한 사랑의 향기와
法頂 스님의 비움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길상사를 검색하면 그 전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한 번쯤 검색해 보기를 권한다
白石 시인(1912년~1995년)은 본명이 백기행으로 김소월과 동향인 평북 정주 출생으로
같이 오산고보를 나온 김소월의 후배이다
1936년 '사슴'이란 첫 시집을 냈고
이후 함흥 영생 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 재직 중
회식자리에서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39년 만주로 떠나면서 자야와 헤어지고 남북으로 분단되면서는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1987년 白石이 해금되자 시인인 李東洵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白石 詩 全集'을 발간하였고
이를 안 자야가 李東洵 영남대 교수를 만나면서 그 슬픈 사랑 이야기가 알려졌다
白石 詩 全集(초판 28쇄 발행 2012년 12월 25일)에 나오는
李東洵 교수의 白石에 대한 해설 중 일부분을 소개한다(白石 詩 全集. 177쪽)
- ...백석은 무너진 시대 안에서의 주체적 정서와 자아를
모국어로써 견결히 유지하려 하였고,
이러한 그의 어법은 실제로 청록파 계열을 비롯한 [문장]지 출신 시인들과,
윤동주를 포함한 당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백석의 시에서 집요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주체적 자아 복원의 시정신은
그것이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
김영한(1916~1999.11월 14)은
(子夜는 白石이 지어준 아호.당나라 이태백의 시 '子夜五歌'에 나오는 여인이란다.
기생의 이름은 眞香)
1916년생으로 白石보다 4살 아래로 이러저러한 전생의 업때문인지
16세부터 기생으로 살다가 1970년대 제3공화국 박정희의 요정 정치와 맞물려
대원각을 경영한 후
90년대 중반 法頂 스님에게 당시 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보시했고
法頂 스님은 길상사로 칭하고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천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 후 약 2억 원을 白石문학상으로 내놓아 지금까지 계속 수상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100억여 원을 과학도를 위해 써달라고 내놓았다
입적하면 다비식을 치른 후 기거하던 집(현재 吉祥軒)뒤 작은 언덕에 白石 시인의 詩처럼
"눈이 푹푹 내리던 날 뿌려 달라"고 유언하였단다
1953년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李東洵 교수를 만난 뒤 그의 도움으로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하규일 선생 약전''내 사랑 백석'을 출간냈다
끝에 白石이 子夜에게 써준 시를 옮긴다
수십 년을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살면서도
죽을 때까지 간직했던 白石에 대한 김영한의 사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틋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이 그리도 깊은데 오랜 세월 가슴 저밀었던 그리움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도대체 저 사랑의 끝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어쩜 대원각의 보시야말로 그 지순한 사랑의 절정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저승에서 만나 꽃 피울 사랑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불교로 귀의했는지도 모른다
비워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눈물겨운 사랑을 보았다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후원하기 위한 근본도량으로 法頂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맑고 향기롭게 모임은 우리들 마음과 세상 그리고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순수시민단체의 모임으로 法頂 스님이 평소 주창해온 것을
실현하고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하여 法頂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합니다'
無所有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法頂 스님의 '텅 빈 충만'(1990년. 2월 5일.1판 20쇄)이라는 책의 한 구절(73~74쪽)이다
-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 소리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하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길상사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단 하루도 길상사에서 머물지 않았다는
法頂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眞影閣의 앞 마루 구석에
길상사에 대한 소감을 남겨놓으라고 빈 노트가 있었는데
같이 간 친구가 소감을 써보라고 하기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 사랑의 향기가 그윽하고
無所有의 비움이 충만한
吉祥寺에서 절로 깊어지다 - 雪山 李相元
길상사 경내에 있었던 시간 내내
나는 밧줄이 풀려 먼 바다로 떠내려가는 배처럼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을 뒤로하고
맑은 영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일주문, 그외 사찰 건물의 단청은 예전에는 궁궐식 단청이었으나 사찰식으로 바꾸었다
대웅전이 없고 극락전이 대신 그자리에 있다. 대원각시절의 본체였단다.보이지는 않지만
추녀끝에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고 특이하게 단청이 없었다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극락전에 모셔진 불상은 아주 작았다. 법정 스님의 뜻에 따르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나무아래서 수행중인 아기 보살,미소가 잔잔하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法頂스님으로부터 吉祥華란 법명을 받았던 김영한 보살이 울려퍼지기를 바란 범종이다
명상의 글..시적인 표현으로 내용이 깊다.
- 여기 침묵의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
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실으라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오 그대 안에 저 불멸의 달을 보라 -
관세음 보살상, 모습이 특이하다.천주교의 성모상을 떠올리게 한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으로 종교간의 화해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옆 모습, 오른 쪽 건물은 설법전으로 스님의 설법하는 장소로 이날은 사람들이 많았다
吉祥軒- 김영한 보살이 기거하던 곳으로 작고 아담했다
吉祥華 법명의 김영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가는 길
김영한 공덕비, '눈이 푹푹 내리던 날' 이곳에 그의 재가 된 몸이 뿌려졌다
영정,그 앞에서 김영한 보살의 천상복락을 기도했다
물소리를 들으며 수행중.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나니 오직 분별하는 것을 꺼릴 뿐이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툭트여 명백하리라-
대원각 시절의 손님 맞이방이 지금은 기도소나 스님 처소로 쓰이고 있었다
청향당도 스님들의 수행하는 장소다
능소화 핀 길, 스님들이 수행 장소로가는 길이다
眞影閣- 법정 스님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아주 작았다
법정 스님의 쓰시던 필기구와 보이지 않지만 스님의 저서가 이사진 맞은 편에 진열되어
있다. 진영각 입구에 긴 마루가 있었는데 방문객들이 스님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나
길상사를 보고 느낀 소감을 적는 노트가 한쪽에 놓여있다
수줍게 가슴을 감추고 있는 도라지꽃. 저 아래 극락전의 향기로 가슴을 열 것이다
속이 깊어 深井이란 호를 지어준 친구(오른쪽)와 함께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통하는 문이다. 松月閣이라는 이름이 멋진 풍류를 느끼게 한다
길상선원으로 기도하는 장소다.
이외도 침묵의 집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다 담지 못하여 아쉽다
아름다운 소나무에 닿은 석탑. 사람들이 주위를 돌며 소원을 빌고 있었는데
길상사에 있는 유일한 탑이다
일주문 옆 휴게소, 싱크대와 물이 구비되어 있다
맺음말
집에서 가까워 수시로 찾을 것 같다
숲 속에 있는 정원 같은 길상사,
그 창건의 유래가 말해주듯
도시인의 지친 심신을 하루쯤 온전히 맡겨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
白石이 子夜 김영한에게 써 준 詩다
子夜는 셀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 詩를 읽었단다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두막집
* 고조곤히 - 고요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