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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_ 동물원 외 5편 / 박재민
동물원
사랑스러운 것들이 가득한 동물원이 문을 열었다.
손이 끊긴 지 오래되어 낙엽과 먼지가 나뒹구는 동물원엔
꽥꽥 소리와 꿀꿀 소리와 끼잉 소리와 여타 지저분한 소리가 가득하다.
정신 나간 것들이 여기저기서 울고 날뛰고 바닥을 긁고 똥을 싸는데 하나같이 철창에 몸을 딱 붙이고들 있다.
한 명도 없는 손님들이 이리저리 기웃거리자 그것들은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한 명도 없는 손님들 중 누군가는 시끄럽다며 철창에 발길질이다.
손이 끊긴 지 오래된 이 동물원에는
동물원보다도 오래 산 거북이와 동물원을 먹고 사는 돼지와 동물원보다 똑똑한 원숭이가 있고
기승위로 짝을 짓는 개구리, 대면좌위로 짝을 짓는 토끼, 강간을 당한 돌고래가 있고
사자 고기를 먹고 자란 사자, 기린 고기를 먹고 자란 기린,
제 깃을 모두 뽑아 먹은 백공작과 미처 못다 뽑은 깃털까지 싹 청소해준 비둘기가 있고
고개를 든 채 굳어버린 펭귄 석고상과 기다려 자세로 굳어버린 강아지 돌부처가 있고
뱀이 있고 길고양이가 있고 까마귀가 있고 해파리가 있고 낙엽과 먼지가 있고 손님이 버린 애인과 손님이 버린 부모가 있고 한 명도 없는 손님들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정신이 나간 채 철창에 몸을 딱 붙이고들 있다.
바람이 지저분하게 스쳐가고
한 명도 없는 손님들이 모두 떠나자
사랑스러운 것들이 가득한 동물원은 문을 닫았다.
흑사병
몸안에서 콜라가 부글부글 끓는 병에 걸렸다.
네가 십오 년 전에 권한 콜라 한 잔 때문이라고 나는 억지로 믿는다.
냉장고에 쌓아둔 콜라가 자꾸 줄고
내 몸에선 김 샌 콜라 냄새가 난다.
너와 나는 흰 사이다와 검은 콜라를 따라놓고 바둑을 둔다.
나는 네가 지어놓은 집을 엎지른다.
아침에 나는 네게 콜라 한 잔을 권한다.
네 몫의 콜라가 자꾸 줄고
나는 무색무취
나는 아침에 먹은 콜라를 모두 토해낸다.
나는 몸안에서 콜라가 부글부글 끓는 병에 걸렸다.
어릴 때 나는 콜라가 싫었다.
하지만 네가 따라놓은 콜라는 맛있어 보였다.
너는 무색무취
나는 십오 년 전에 병에 걸렸다고 억지로 믿는다.
“흑사병입니다.”
진단을 받았다.
나는 콜라병을 흑사병으로 잘못 말했다고 억지로 믿으며 콜라병을 흔들었다.
아니면 콜레라를 콜라로 잘못 말한 건가?
탄산이 폭발하고
내가 지어놓은 집이 엎질러졌다.
콜라빛 밤
나는 아침에 네게 권한 콜라를 도로 탐낸다.
김 샌 콜라 냄새
목구멍에서 시원한 탄산이 폭발한다.
나는 콜록콜록하며 네게 소리친다.
“너 때문에 흑사병 걸렸잖아. 네가 나한테 흑사병 걸린 콜라를 줘서.”
너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면 네가 권한 건 그냥 물 한 잔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건 김 샌 콜라였다고 억지로 믿는다.
몸안에서 콜라가 부글부글 끓는
나는 병에 걸렸다.
죽음이 너를 갈라놓을지라도
운동장 귀퉁이에 애벌레 하나가 꼬물거리고
빙 둘러앉은 우리 손엔 돌이 들려 있었다.
우리 손은 곧 끈적끈적해졌다.
끈적끈적한 바람이 분다.
물로는 바람을 씻어낼 수 없다.
운동장에 돌이 굴러다닌다.
저멀리 큼직한 돌도 꿈틀거린다.
우리를 끈적끈적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돌이다.
변치 않는 바람이 있을까.
몸통이 끊어진 애벌레들로 끈적끈적해진 운동장에서
우리 모두 빙 둘러앉아 맹세할 수 있을까.
죽음이 너를 갈라놓을지라도?
죽음이 나를 갈라놓을지라도?
불
우리는 산불이 된다.
산을 내려가서 도시로 가고
산불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는 열매를 먹는다.
우리 내장 속 불씨도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불구경을 좋아한다.
우리는 산불이 된다.
산은 빨간 열매를 맺고, 세상은 까만 열매를 맺는다.
비가 와야 한다.
벌레가 파먹을 열매가 아직 남아 있을 때
도시가 하얀 열매를 맺기 전에
비가 와야 한다.
비가 퍼부어야 한다.
우리는 떨어야 한다.
우리는 떨어져야 한다.
우리는 잔불이 된다.
하늘에서 투명한 열매가 익는다.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벌레 한 마리가 우리 젖은 내장에 기어들어
뜨거운 씨앗을 파먹는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뜨거운 도시를 구경하러
세상은 우리와 산불 중 무엇을 먼저 만들었나.
우리는 산불이 되는가.
산불이 우리가 되는가.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우산을 편다.
도시에는 색색 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서
점점
하얘져간다.
*(하얘져간다)의 활자들은 하나씩 회색에서 하양으로, 변하며 증발하는 색깔 사용.
마지막 '다'는 흰색 활자. 일부러 그렇게 인쇄한 듯.
유통기한
2024. 11. 11.
썩기 전에 어서 마시렴
내일의 우유를 미리 마시렴
어제의 우유를 이어서 마시렴
스스로에게 선물하렴, 가장 선물다운 선물을
뭐하는 거니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잖니, 아직은 안 지났잖니
썩어가는 우유를 썩히지 말고
11월 11일의 우유를 어서 마시렴
하지만 엄마, 송아지는 이미 없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마시렴
아이는 그렇게 자라는 거고
아이는 그렇게 죽은 거니까
우유는 원래 송아지 것이니까
네가 마셔도 되는 우유가 아니니까
스스로에게 선물하렴,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오늘의
가장 선물다운 선물을
(2024. 11. 11.)
불면증
잠드는 법을 잊어버린 한 개구리가 있었다.
개구리의 눈은 겨울에도 깜박였다.
얼어붙은 연못 속에서 개구리의 눈은 낌박였다.
그는 늘 살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태어나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먹고, 눈을 깜박이고, 호흡해 왔다.
그의 뒷다리는 쭉 뻗기 위한 뒷다리였다.
그의 뒷다리가 쭉 뻗었다.
그러나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살아 있기에, 깨어 있기에, 그는 잠들 수 없었다.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
사이좋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받는 아이.
아이는 늘 사랑받았다.
그래서 아이는 늘 행복했다.
아이는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개는 뛰었다.
헐떡거리며 뛰었다.
체온을 조절하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개는 혀를 늘어뜨렸다.
개의 뒷다리는 땅을 박차기 위한 뒷다리였다.
개의 뒷다리가 땅을 박찼다.
개는 뛰는 것을 좋아했다.
개는 행복했다.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을 만드느라고 부모님이 돌아오라고 한 시간보다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눈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눈사람은 행복했다.
밤이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왔다.
개구리의 눈이 깜박였다.
아이는 밤늦게 집에 돌아갔다.
밤이 늦었는데도, 집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개는 계속 뛰었다.
두 다리,
아니
네 다리가 붙어 있는 한 그는 계속 뛸 것이다.
뒷다리가 붙어 있는 한 그의 뒷다리는 계속 땅을 박찰 것이다.
혀가 붙어 있는 한 그는 계속 혀를 늘어뜨리고 헐떡거릴 것이다.
그는 끝없이 호흡할 것이다.
밤이 늦어서, 아무도 눈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개구리는 폴짝 뛰었다.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개구리는 잠들 수 없었다.
아이도 폴짝 뛰었다.
아마 아이는 그날 학교에선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개도 폴짝 뛰었다.
살아 있기에, 깨어 있기에.
아무도 눈사람을 보지 않았다.
개는 개구리를 먹었다.
아이는 개를 먹었다.
눈사람은 아이를 먹었다.
다음날 아침, 눈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눈사람을 먹은 것이다.
잠드는 법을 잊어버린 누군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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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 소감 |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쓴 시들
원래는 필명을 쓸 생각이었다. 꽤 멋진 필명도 정해놨었다. 왜 필명을 쓰려 했냐 하면, 인간으로서의 나와 시인으로서의 나를 분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으로서의 나는 별로다. 애초에 인간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겠지만 세상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인간은 착취하는 쪽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저 그런 착취하는 인간이다. 그래도 적어도 내가 쓴 시는 착취당하는 이들을 위한 시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인간 박재민보다 좀더 멋진 시인 아무개를 상상하고 창조했다.
하지만 본명으로 활동하면 어떻겠느냐는 편집부와 심사위원분들의 제안을 듣고 돌이켜보니, 내 시는 결국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쓰인 시들이 태반이었다. 착취하는 인간 박재민을 위로하기 위해 쓰인 시들. 나보다 멋진 어떤 시인이 멋진 시를 쓴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시의 형식을 빌려 내 얘기를 늘어놨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나와 시인을 분리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본명을 쓰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이게 더 맞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제안해주신 편집부와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물론 가장 감사한 점은 내 시를 뽑아주셨다는 것이다. 일단 세상에 한 발 내디뎠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숨이 트인다. 앞서 말했듯 내 시는 결국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 시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건 적어도 누군가 보기엔 괜찮았고, 세상에 소개할 만하다는 뜻일 것이다. 정말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덧붙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내게는 과분한 모든 것,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 입히는 것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이 시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 모든 것이 있는 한, 그래서 내가 계속 죄책감을 느끼고 아파하는 한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나 말고도 누군가 위로받을지도 모른다는 한 줌의 희망으로.
박재민 / 1998년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 수료. 2025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당선.
| 심사평 |
2025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1,271명이 8,541편의 응모작을 보내주었다. 심사위원 박연준, 신해욱, 유희경은 응모작을 한 달 동안 나눠 읽으며 본심에 올릴 작품을 선별했다. 본심에 오른 15명의 작품 96편을 다시 삼 주 동안 살펴본 뒤 7월 말에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성진, 「원」 외 6편
고우주, 「목소리는 서쪽에서 온다」 외 4편
김유경, 「곰취」 외 5편
김해서, 「봄비」 외 4편
박재민, 「동물원」 외 5편
유나이, 「투기」 외 6펀
이세진, 「대화의 기술」 외 13편
정승현, 「당장 불을 켜」 외 4편
정언강, 「소설小雪」 외 5편
채희범, 「이스터 에그」 외 6편
최사랑, 「걸려 있는 하루」 외 5편
최지원, 「근미래」 외 4편
함인우, 「Hubble Deep Field」 외 4편
함정재, 「귀가」 외 4편
홍수연, 「삭朔」 외6편
이 중 최종 심의에 오른 작품은 「곰취」외 5편,「동물원」외 5편,「소설小雪」외 5편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응모작들의 특징과 장단점을 충분히 논의한 뒤 「곰취」외 5편과「동물원」외 5편을 두고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중한 토론이 이어졌고, 마침내「동물원」외 5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응모자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신해욱] 심사자의 눈을 떠나 시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
심사를 진행하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수상작과 함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묶어 신인상 작품집을 만들면 안 될까. 시를 향한 마음이 가장 순도 높고 뜨겁게 녹아든 작품들인 만큼 여타의 시선집과는 다른 특색이 있을 텐데(출간의 현실적 난점들이 곧바로 떠올라 여기서 생각을 멈추기는 했다).
심사의 자리에 있으면 늘 불안하다. 단 한 명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이 많은 응모자들 가운데서, 이토록 다채로운 스펙트럼 사이에서 어떤 심사자의 눈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작품이란 허상에 가깝다. 사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눈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나의 관점과 취향이 작용하지 않을 리 없다. 알아채지 못한 특별함과 고유함이 또한 없을 리 없다. 뭔가를 놓쳤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수상 후보작품들도 독자를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 신인상 작품집이라는 형태를 상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바람을 담아, 심사위원 셋만 읽기에는 특히 아까웠던 응모작들에 대해 간단한 소감을 적어본다.
「당장 불을 켜」 외 4편. 응모된 시 전편에서 은은한 엉뚱함이 고르게 빛났다. 외롭지만 외로워하지 않는 시들이었고 친절하지만 설명하지 않는 시들이었다. 절묘한 보폭을 유지하며 장면에서 장면으로 건너뛰는 구성 방식, 무심한 듯 돌발적으로 삽입되는 행동과 이미지는 화자의 캐릭터와 일관성 있게 조응하고 있었다. 수줍게 날이 선 세계를 일구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화의 기술」 외 13편. 심금을 울린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작품이 많았다. 폭넓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섣불리 감상에 빠지지 않는 시적 근력이 돋보였다. 노래와도 같은 가락에 실려 아름다운 이미지가 이어지는 「오늘의 날씨」는 절창이라고 해도 좋았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오늘은 당신이 죽은 다음 날/태어난 적 없는 사람의 하루와 닮아 있어요”라고 읊조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小雪」 외 5편. 묘한 단속적 흐름이 매력적이었다. 내레이션이 많은 단편 독립영화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건 시간감을 살려내는 독특한 방식, 독백 중심이면서도 자기 안에 갇히지 않는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핏 산만하게 다가왔으나 그 자체가 이 시들의 개성이라는 걸 깨닫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개성이 좀더 예리하게 벼려진다면 시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영상과 마주하게 될 것 같다.
「곰취」 외 5편. 수상작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기 어려운 원고였다. 「겨울나무 되기」와 「혼자 아픈 칠일」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었고 그 에너지를 다루는 언어 또한 유려하면서 생동감이 넘쳤다. 물리적 길이, 감정의 파고, 말의 운용 방식, 모든 면에서 스케일이 웅장했다. 그러면서도 시의 클래식한 특질에 충실하다는 것이 또한 흥미로웠다. 화자/시인의 거리를 거의 없앤 자아의 강력한 구심성, 말에 실린 진정성의 무게, 반복과 변주를 통한 리듬의 창출. 이 응모작들은 시라는 장르가 예로부터 잘해온 영역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새롭게 융합한다. 확장과 분출을 동력으로 삼는 시들은 으레 실험과 해체의 방향으로 흐를 것 같지만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 시적 전통의 한가운데에서 시를 갱신하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물원」외 5편. 「곰취」외 5편과 여러모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작품들이었다. 일단 짧았다. 다뤄지는 대상이나 상황은 명확하고 초점도 뚜렷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딱히 뭘 숨긴 것도 아닌데 어째서 비밀스럽지? 투박하게 중독적인 이 호흡의 기제는 뭐지? 가벼운 웃음을 지우지 못한 상태로 얼굴을 굳게 만드는 무엇. 사로잡혀서 계속 쳐다보게 만드는 무엇.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오늘의/가장 선물다운 선물”(「유통기한」). 어디로 파편이 튈지 알 수 없는 폭발물이 담긴 선물 상자를 손에 든 것 같았다.
요컨대 나는 이 응모작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명료하고 단순하게 직진하는데도 정체불명으로 남는 이 시들 앞에서는 한 사람의 사심 충만한 독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판별하고 구분 짓는 자리에서 내려와, 내 읽기의 무능함을 고백하게 하는 작품과의 대면. 그런데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결국 이 무능함에 원천을 둔 게 아닌가. 각각 개성과 장점이 다른 응모작들 사이에서 「동물원」 외 5편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이 작품들로 인하여 심사자라는 나의 위상 자체가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심사의 눈이 무장해제되는 순간 심사의 손을 움직이게 된 것이 오늘치의 아이러니겠다.
수상자에게 나의 설렘을 전한다. 안타깝게 기회를 얻지 못한 응모작들은 마음속 신인상 작품집에 수록해 두었다. 언젠가 지면에서 보게 된다면 반갑고 기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 박연준 시인, 유희경 시인의 심사평 생략.
―《문학동네》 2025 가을호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공부할 수 있도록 열어주심에 대해서, 시 일부만 필사 했는데
내 손으로 다 옮겨 쓰고, 세 차례 검토하여 스크랩도 복사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선생님 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