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9일 (수) 촬영.
몇 년째 흉물로 방치되어 있는 동인천역 민자역사. 볼적마다 열 받는다. 인천의 얼굴인데....
길 건너편엔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창고가 지금도 폐허 수준으로 남아 있다.
예전엔 이곳도 흉물스러웠지만 이제는 역사성이 있어 정감이 간다.
앞에 있는 건물들을 헐고 광장을 만들고 저 창고 건물을 활용 하면 인천에 새 역사가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창고가 있는 곳으로 들어 가는 골목엔 50년도 더 묵은 상점들이 수두룩 하다.
이 곳이 과거 인천의 중심지였었나 싶게 초라한 건물들이다. 건물 뒤로 창고 건물의 지붕이 조금 보인다.
예전엔 이 곳이 공구 상가로 번영을 누리던 시절도 있었으나 현재는 슬럼화되어 폐업한 가게가 더 많다.
이곳이야말로, 시 차원에서 건물들을 모두 수용하고 재개발하여야 할 곳이다. 창고 상가로...
이 거리에 광장을 만들고 창고들을 활용해 상업, 위락시설을 만들면 관광객이오고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공구상가 거리에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의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희생자 57명의 명단.
위령비
일천구백구십구년 시월 삼십일 인현동 화재로 희생된 오십칠명의 넋을 위로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듣는다. 조우성(시인)
오늘도
축현리 언덕배기에는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은 저마다반짝이며 노랠하는데
아들아, 딸들아
너희는 어디 갔느냐
이제나저제나
불현듯 문 앞에 들어설 듯한
그 싱그러운 웃음
그 풋풋한 젊음
가슴에 지우지 못하고
삼백예순 날
너희 안부
물어볼밖에 없는
못난 아비 못난 어미를
오오, 용서해 다오
전생에서 내생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인연
오롯이 챙기지 못한
세상의 허황한 꿈을
너희에게 용서받지 않고는
편히 잠들 자 없는 이 세상을
모두 모두 용서해 다오
이제는 결코
참적(慘迹)의 슬픔 없는
세상으로 가꿀 것이니
아들아, 딸들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너희들의 나라
그 먼먼 꽃밭에
오늘은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처럼 반짝이는
너희 노래 소리를
우리 모두모두 함께 듣는다
건너편 전동, 전환국 터에 있는 조선시대 동전 모형.
전환국(典圜局)지
이 곳은 주화를 제조하던 전환국 자리로서 종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상평통보가 무거워
고종 22년(1885년)에 서울에 전환국을 설치 1887년부터 서양식 주화를 제조하였으나 제조에 필요한 동을
일본에서 수입 사용한 관계로 원료 운반이 용이한 이 곳으로 1892년 5월에 이전 조업하다
경인철도가 완공된 후 1900년 8월에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 곳은 인천여자고등학교의 옛 터 이기도 하다.
옛 인천여자고등학교
인천여고 터 건너편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주택, 내가 초등학교 때 걸어다니던 66년 전과 같은 모습이다.
100년은 됐음직한데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신기하다. 그만큼 튼튼하게 지었다는 증명도 된다.
축대도 무너지지 않고....
문짝만 바뀌었다. 나무문이였는데....
송월동으로 가는 길, 옛 해군병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 갔다 내려 왔다.
참 높고 길었던 축대였는데 지금 보니 아담하게 느껴진다. 축대 위 나무가 있는 곳은 한국은행 사택이다.
이 곳 골목들도 시간이 멈춘 곳이다.
옛 생각에 이 곳에 생긴 김밥집에 들어가 봤다.
김밥 두 줄을 시켜 놓고 먹다 보니 주인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틈틈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좋아서,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 두 명이 깔깔거리며 들어와 정적이 깨지고 나는 김밥을 남긴 채 나왔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살던 집도 그대로였다.
자유공원으로 올라 가는 길.
이 곳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자유공원으로 갈까 하다가 홍예문을 넘기로 했다.
자연석에 자유공원이라 새기고 라이온스 클럽에서 했다고 자랑질 해놓은 모습이 옛스럽다.ㅋㅋㅋ
홍예문
이 문은 인천을 상징할 만한 대표적인 축조물의 하나로 인천 항구와 한국인 촌의 경계 지역이며,
일본인의 지계(地界)를 확장하기 위하여 1905년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한 인천 유일의 동혈승지로서
남북을 전망하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휴식처로서 많이 이용되었던 곳이다.
명칭도 홍여문, 홍예문, 무지개문 등 다양하게 불리워지고 있는 곳이다.(홍예문 입구 안내석에 써 있는 내용)
홍예문은 일본 공병대가 설계, 감독을 하고 중국인 건축기술자가 공사를 맡았으며 한국인 노무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웠다. 암반을 뚫는 어려운 공사여서 당시 50여 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홍예문을 나와 신포동으로....
가는 길에 박물관을 만났다.
초연다구박물관이다.
그런데 문을 닫아서,
뒤로 가보니.
박물관 정원이 있다.
박물관 정원 뒤로 폐허가 된 일본식 주택이 겨우 서 있다.
나무로 만든 창문 틀.
100년은 됐을텐데 페인트는 벗겨졌어도 창틀은 견고하다.
곧 떨어질 것 같은 2층의 창문 틀.
박물관 정원도 알고 보니 일본식 주택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위와 같은 집인데 철거 했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석물과 석탑들이 낮설다.
어느나라 양식일까?
박물관도 일본식 주택을 리모델링 했다고 했다.
박물관 위의 일본식 주택은 술 파는 집.
우연히 박물관 운영자를 만나 사무실로 초대를 받았다.
사무실로 들어 서며 마주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사무실이 아니라 박물관 같았기 때문이다.
이 곳에는 만여장이나 되는 LP판과 CD, 그리고 수 억대의 오디오 기기들이 있었다.
관장은 처음본 사람임에도 오랜 지인처럼 궁굼해 하는 나를 위해 오디오를 틀어 주고 차를 대접해 주었다.
찻잔도 차도 품격이 있었다. 한과와 마카롱도 함께....
차 식지 말라고 불까지 피워주고. ㅎㅎㅎ
LP판 들.
CD와 오디오 기기들.
대형 스피커, 가격이 상상을 초월 했다.
옛날 타자기도,
미국의 극장에서 사용했다던 대형스피커.
방송용 턴 테이블.
진공관식 앰프.
과분한 대접을 받고 다시 길에 나섰다.
신포동은 다시 젊어지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 가면 슬럼화 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눈꽃마을로..
많이 한산해졌다.
문이 닫힌 곳도 있고.
시장 골목에 신포시장 지원센터도 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신포시장에 "추억의 신포옛길"이란 곳이 있었다. 원주시장 정도되나 싶어 올라 갔더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상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살림집이나 창고같은 시설들만 있었다.
혼자 다니기가 겁날만큼 인적도 없고 미로같은 좁은 길 뿐이다.
벽화밖에는 볼 것이 없다.
이 곳을 왜 추억의 신포옛길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1958년 창업한 신신옥의 사장, 지금은 작고했지만 아드님이 대를 이어 신신옥을 이어가고 있다.
창문을 통해
본 신포시장.
옛날 통닭집에서
7,000원짜리 통닭 한 마리 사들고 왔다.
간판들이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