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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그들은 어떻게 자식을 크게 키우고, 무한한 존경을 받았을까?”
역사학자 백승종이 들려주는 12명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특별한 훈육법
아버지 자리가 사라진 시대,
아버지한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
대한민국 아버지들이 위기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이 3가지가 필요하다는 오래된 농담은 이 시대 아버지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즘 아버지들은 자기 집에서 ‘왕따’라며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매달 월급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 말고는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처한 현실이다.
아버지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산업화로 인해 사회 구조가 크게 변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된 직장생활을 감당하느라 자기 집 하숙생으로 전락하다시피 한 아버지는 차츰 가정에서 소외되었다. 때마침 민주화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면서 아버지들이 내심 당연시하던 가장의 권위도 무너졌다. 게다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량해고와 조기퇴직 바람까지 불자 경제력마저 상실한 아버지의 위기는 한층 심각해졌다. 아버지의 위기는 변화의 산물인 것이다.”(‘책을 펴내며’ 중에서)
엄마가 전담해서 자식을 관리하고 교육하면 시험 성적을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한테서 배워야 할 중요한 문화적 자산을 배울 기회를 놓치게 된다. 엄마한테 배울 수 있는 것과 아버지한테 배울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전통적으로 자식은 아버지에게 사회와 관계하는 기술을 비롯해 다양한 지혜를 배운다. 이것을 배울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엄청난 손실이다. 아버지 자리가 사라진 시대는 위태롭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아버지를 위해서나.
‘아버지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 시대 아버지들을 대신해 역사학자 백승종이 조선시대 12명의 아버지를 만나보았다. 오랫동안 미시사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면면이 독특한 12명 아버지들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500년 전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산 아버지들의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조선의 아버지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들이 애써 추구한 인생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상당 부분 유효하다. 그들은 힘써 현실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고, 매사에 성실한 태도를 견지했다. 성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을 존중했으며, 비상한 인내심과 자상함으로 끝까지 가족을 보살피고 사랑했다.”(‘책을 펴내며’ 중에서)
오늘날 아버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보편적 가치는 무엇일까. 김숙자, 유계린,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충무공 이순신, 명재상 이항복, 사계 김장생, 박세당,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 이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대답해줄 것이다.
이 책에는 유일하게 ‘불행한’ 아버지 영조 임금이 등장한다. 아버지 영조의 열등감과 심리적 불안이 친자 살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치 닿게 된 속사정을 알아본다. 실패담은 그 어떤 성공담보다 울림이 크다. 독자는 비극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존경받는 아버지들은 자식을 어떻게 키웠을까
우리는 조선의 아버지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철저한 가부장제 시대이니 권위적이고 일방적이고 엄격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 책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 그 시절 아버지들은 우리의 짐작과 사뭇 다르다. 조선의 아버지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 자상하고 따뜻했다.
아버지 이황은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마구 야단치지 않았다. “거듭해서 조용히 타이르고 훈계했다. 본인이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는 큰소리 나는 법이 없었고, 화목했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썼다. 같은 말이라도 정성껏 쓴 편지를 대하면 자식 입장에서 잔소리를 들을 때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는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투정도 부리고 세심하게 챙기기도 했다. 그는 서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남달랐고, 그 아들에게 서예와 난치는 방법을 세세하게 가르쳤다. 영웅 이순신도 자식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라도 자식을 곁에 두지 못하면 몹시 힘들어 했다. 박세당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는 아들들에게 예법보다 건강이 더 중요하다며 ‘예법을 무시하라’고 말했다. 17세기 후반 성리학의 시대에 양반이 그렇게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학자 박세당은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아버지였다.
· 말로만 훈계하지 않고 몸소 모범을 보였다
아버지들은 말로만 자식에게 훈계하지 않았다. 아버지 자신이 자식에게 가르친 내용을 몸소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천주교 탄압이 거세지면서 정약용 일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가문이 해체될 지경인 데다 유배가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 아버지 정약용의 시름이 깊어만 갔다. 앞길이 막혀 어깨가 축 처진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했다.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를 천시하고 비루하게 여기지만, 그런 태도야말로 너희 스스로를 비통하게 만드는 꼴이다.” “늘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라.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당당하라.”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뜻하지 않은 불운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훈계가 말에 그칠 뿐이라면 소용없는 일. 아버지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폐족의 위기를 당당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성호 이익은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를 일으키는 데 신경을 썼다. 한번은 지방 고을의 수령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음식물을 보냈다. 그러자 아버지 이익은 돌려보내면서 편지로 이렇게 꾸짖었다. “백성에게 물건을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이 그릇된 것이다.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다니 안 될 말이다. 나는 고향집에 남아서 제철에 내 밭을 경작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 이익은 아들 덕분에 호사할 생각이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관료의 자세를 배웠고, 아버지를 한없이 존경했다.
· 자식을 존중하고 예를 다했다
아버지들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삶을 살았다. 밖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아내와 자식에게 권위를 부리거나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았다. 이황과 이익은 노비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귀하게 대접했다.
17세기 조선 사회에 예학의 새바람을 일으킨 아버지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은 부자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공경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직접 가르치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맹자는 일찍이 좋은 부자관계를 위해서는 부자간이라도 좋은 일을 행하라고 상대에게 권하지 말라고 말했다. 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내 자식을 직접 가르치기가 어려워 옛 선비들은 자식을 맞바꾸어 친구의 아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장생 부자는 달랐다. “아버지는 권위를 부리거나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온화하고 관대하고 참을성이 많았다. 아들이 질문하면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대답했다. 아무리 가까운 부자간이라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부자간에 서로 공경하고 예를 다하다’ 중에서)
·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조선의 아버지들은 엄청난 시련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았다.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며 삶의 본질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조선은 당쟁과 사화가 끊이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버지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풍랑에 좌초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김숙자는 젊은 시절 ‘불법 이혼’을 했다. 이혼의 굴레는 오랫동안 전도유망한 청년의 발목을 붙잡았다. 알고 보면 ‘사기결혼’을 당한 셈이었는데, 조정은 김숙자를 벼슬에서 내치고 본처와 살라고 명령했다. 김숙자는 재결합을 거부하고 새 아내와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했다. 김숙자는 자신의 비운을 받아들이고,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시골집에 칩거하며 모범적으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넘어진 자리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말년에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다.
·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아버지들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벼슬자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올곧은 삶을 보면서 우리는 올바른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진정 아버지답게 산다는 것은 ‘어른’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어른’으로 살다간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저자는 이 시대 아버지들뿐만 아니라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인생의 좌표 하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노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