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중국과 고대그리스는 동시대에 존재했지만 서로 상대방이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통신과 교통이 그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했다가 로마제국의 속주로 편입되던 시기에, 중국은
50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진시황의 秦제국이 짧은 통일시대를 거친 뒤 유방
의 한나라가 두 번째 통일왕조를 이룩했다.
서양 사학자들은 세계의 역사서를 거론할 때 중국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5?)의
『史記』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서 곧바로 2400년을 건너뛰어
독일 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를 논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는 하나의 전쟁을 다룬데 불과하지만,사마천의 『史
記』는 정확한 기록을 근거로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漢왕조에 이르는 수천 년 간의 역사
를 담았다. 심지어 『史記』는 위대한 영웅들의 일대기까지 담고 있다. 즉 『史記』는 그리스의 두
역사서보다 300년가량 늦게 나왔다는 사실 외에는 학문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史記』는 그리스의 두 역사서에 비해 분량도 엄청나게 많을 뿐만 아니라 정확성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헐썩 앞서있다. 『史記』에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연대뿐만 아니라 진시황이
태어난 시기와 장소, 보위에 오른 시기, 대륙을 평정한 내력과 시기, 심지어 진시황과 신하들 간
에 황제의 칭호를 놓고 오간 대화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칭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황제를 폐하라고 부르도록 정한 호칭은
2000년 뒤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史記』가 중국 최초의 역사서는 아니다. 『史記』만큼 충실하지는 않지만 공자의 『春秋』
를 비롯하여 『史記』 이전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역사서가 나와 있었다.
『史記』가 그리스의 두 역사서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결정적 요인은 집필환경의 차이
였다.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민간인 신분으로 개인적인 결정에 따라 책을 썼다.
사마천 역시 개인 자격으로 『史記』를 집필하기는 했지만, 한나라 조정의 관리로서 왕실과 전국
각지에 보관되어 있는수많은 사료를 참조하여 『史記』를 쓸 수 있었다.
사마천은 『史記』 서문에서 왕실에 보존 중인 역사서 103종, 6경을 비롯한 민간서적 24종, 제자
백가들이 쓴 서적 52종, 왕실문서 20종, 문학서 7종, 수많은 비석의 탁본, 수십 장의 건축설계도,
공식 출장에서 얻은 신화‧전설‧민담 등을 참조하여 『史記』를 집필했다고 밝혀놓았다.
『史記』 집필에는 꼬박 15년이 걸렸다. 고비도 있었다. 기원전 99년에는 ‘이릉의 화’를 당해 목숨
을 잃을 번하기도 했다. 이릉 장군은 5천 군사를 이끌고 흉노 땅으로 쳐들어갔다가 흉노족의 8만
기병에게 제압되어 무장해제를 당했다.
이릉은 끝까지 항복을 거절했지만, 이를 모르고 있는 한나라 무제는 그가 항복한 줄 알고 대로
하여 이릉의 가족을 모두 참살했다. 이에 사마천이 나서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史記』를 완성해야 할 소명이 남아 있었다.
사마천은 궁형(宮刑. 男根을 잘라내는 형벌)을 자청하여 겨우 처형을 면했다.
역사 기록에 대한 소명의식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한나라가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한나라 황제들 역시 상굿도 역사 기록의 중요
성을 인식하지 못해 누대의 수많은 기록을 폐기하거나 멸실했다. 이를 한탄하던 부친은
사마천에게 반드시 정확한 역사 기록을 남기도록 당부 했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한나라 황실
에 대한 복수였다. 이릉을 변호했다가 남자로서 죽음보다 수치스러운 궁형을 자청했으니,
무제에게 직접 복수할 방법이 없어 한나라 황실의 잘못을 조목조목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려
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뜻대로 무제는 올곧은 신하를 박해한 우매한 군주로 그려졌고, 자신은
2000년 세월이 지난 후에도 훌륭한 역사가로 대접받고 있다. 인류사에 달리 유례가 없는
멋진 지적인 복수였다.
사마천이 『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죽간에 먹으로 써서 제목을『太史
公書』라고 붙였다. ‘太史公’은 사마천의 아호다.
종이는 사마천이 죽은 지 195년 뒤인 기원후 105년 후한 황실의 환관 채륜(50?~121?)이 발명했다.
『太史公書』는 『본기』 12권, 『表』 10권, 『書』8권, 『世家』 30권, 『列傳』 70권 등 총 130권에 52만
6500자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역사서다. 『太史公書』는 종이가 발명된 뒤 책으로 완간될
때 제목이 『史記』로 바뀌었다.
『본기』에는 전설시대의 삼황오제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황제 또는 황제에 준하는 권력자들의 행적
과 업적이 서술되어 있다. 『表』에는 『史記』에 나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연대순으로 나열되
어 있다. 『書』에는 도덕‧음악‧천문‧치수‧군사 등 고대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상세하게 집약해
놓았다.『世家』에는 춘추전국시대의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세상의 변화에 큰 흔적은 남긴 권력자들
의 업적을 담았다. 『列傳』에는 제자백가 지식인에서부터 정치인‧기업가‧광대‧무장강도‧자객
등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의 행적을 담고 있어 역사서라기보다는 전기문학에 가깝다.
『列傳』의 후반부에는 「흉노열전」「남월열전」「동월열전」「조선열전」「서남이열전」「대원열전」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의 역사다. 사마천은 『列傳』의 마지막을 자신
의 자서전인 「太史公 自書」로 장식했다.
사마천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천하의 문화‧제도‧인물‧사건 등을 두루 포함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서술체계를 창조했다.역사학계에서는 그가 창조한 서술체계를
기전체(紀傳體)라고 한다. 기전체는 『본기』와 『列傳』이 『史記』의 중심이라는 판단에서 후대 역사
가들이 붙인 명칭이다. 이 기전체는 한자문화권에 속한 모든 나라의 역사 서술체계로 자리를 굳힌
뒤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인류의 역사서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역사서 한 권을 뽑는다면, 단연
『史記』를 뽑을 것이다.’ - 유시민의 주장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