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때문에 공간에 집착하는지 엄미정 씨도 잘 모르겠다며 갸웃했다. 다만 가족 간 프라이버시도 지켜지고, 공간과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 지루하지 않고 신비스러운 집을 원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무언가 품고 있는 가을 숲처럼 훔쳐보고 싶은 집이 완성되었다.
전에 살던 집은 탁 트여 있었다. 주방에서 거실 발코니 아래쪽까지 훤히 보였고 안방에서 아이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탁 트여서 오히려 뭔가 텅 빈 느낌. 이사를 결심하면서 집 구조는 꼭 바꾸자고 결심했다. 허물없는 가족이어도 프라이버시는 있고 때로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기도 한 법. 모던하고 통일감 있으면서도 가족의 취향에 맞춘 개별 공간으로 집을 개조했다.
겉만 보고는 모를 일이다. 흔하디흔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 오묘하고 신기한 분위기의 전실을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이다. 번쩍이지만 노골적이지 않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갤러리 타입 타일과 화려함을 주는 샹들리에 펜던트가 있는 전실은 엄미정 씨의 집에서 가장 화려한 곳. 그냥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데이 벤치를 두어 신을 신고 벗을 때 앉을 수 있도록 했고, 한쪽 벽 전체를 신발장으로 만들어 신발, 우산, 신문 등 잡다한 것들을 수납하는 등 편리성과 실용성까지 도모했다. 데이 벤치와 신발장 모두 블랙 컬러를 선택해 분위기를 눌러준 것도 눈에 띄었다.
“전실과 안방 화장실이 저희 집에서 가장 화려해요. 또 제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집 안 전체를 화려하게 하면 부담스럽고 쉽게 질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가장 소소한 공간이지만 가장 욕심을 내서 제 취향대로 확 저질러본 거예요.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상의하면서 결정했지만 전실과 안방 화장실은 타일이나 컬러까지 제가 직접 시안을 드리고 부탁했어요.”
지난 2월에 공사를 끝내고 입주했으니 이 집에서는 모든 계절을 처음 맞는 셈이다. 밖에선 폭염이다 뭐다 하는데 거실과 딸아이 공부방 쪽의 창문이 일직선으로 뚫려 있어 맞바람이 불었다. 집에 있으면 더위가 잘 느껴지지 않는단다. 그토록 더운 올여름에도 에어컨을 3번밖에 안 켰다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슬슬 선선해지는 초가을이 되니 오히려 집 안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여름엔 그저 밝다 깨끗하다 이런 느낌이었는데, 날씨가 변하고 햇살이 변하니까 집 분위기도 변하더라고요. 전실도 주방도 복도도 모두 가을과 닮아 있는 분위기거든요. 어쩌다 보니 제가 꾸려나가는 공간들의 분위기가 비슷해진 것 같아요.”
거실과 주방, 딸아이 방을 연결하는 복도는 집 안을 연결해주는 곳이라 가장 고심을 많이 한 부분이다. 거실과 통일감을 주되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중립적인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바닥재와 벽은 거실, 조명과 커다란 원목 프레임의 거울로는 주방의 느낌을 연장했다. 긴 복도를 그냥 놀리기 아까워 한쪽 벽에 장을 만들어 수납공간을 두었다. 복도 장은 바닥에서 띄우고 아래쪽에 조명을 넣어 갤러리를 걷는 것처럼 세련된 분위기로 구성했다.
복도를 지나 들어온 주방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어두운 컬러의 대리석과 벽지, 묵직함이 느껴지는 식탁에 다이닝 공간과 조리 공간을 나누는 벽을 두어 2개의 공간을 만들었다. 요즘은 공간을 크게 확장하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는데 이곳은 어딜 가나 벽이 있다. 굳이 가벽을 세워 공간을 분리한 이유가 궁금했다.
“가벽이라고 많이 생각들 하는데 가벽을 세운 건 아니에요. 옛날 방식으로 지은 아파트라 그런지 내력벽이 많더라고요. 그런 벽들은 없앨 수가 없으니까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고, 벽을 좀 파서 그 안에 수납장이나 냉장고 등을 넣기도 하는 등 최대한 집을 활용했어요. 주방을 분리하는 이 벽도 없앨 수 없는 벽이죠. 오픈 키친도 좋지만 공간이 분리되니 식사할 땐 오붓하고 식사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외지에서 흔히 보던 구조다. 각 공간별로 테마를 달리하고, 모두 독립적인 구조처럼 보이지만 같은 아이템이나 컬러를 베이스로 깔고 변화를 주기 때문에 위화감을 주지 않는 분위기. 안방의 데이 벤치와 딸아이 방 베란다의 데이 벤치, 안방의 뮤럴 벽지와 주방의 포인트 벽지처럼 말이다. 또 그 공간들을 연결하는 복도는 집 안 전체의 컬러와 요소를 넣어 집 안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평소에 인테리어 잡지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내 집을 직접 꾸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외지나 국내 인테리어 잡지를 보면서 다음에 이사하면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에 드는 시안을 스크랩해두었다가 이번 공사하면서 대방출했죠.”
공간에 위트를 가미한 인테리어는 딸아이 공부방에서 빛을 발한다. 붙어 있는 방 2개를 트고 공부방과 놀이방을 한 공간에 만들었다. 전에 살 던 집에서 쓰던 공주 취향의 귀여운 가구와 이사하면서 붙박이를 활용한 책장과 붙박이에 맞추어 짠 시스템 책상을 양쪽에 대칭으로 두어 아이 마음대로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양쪽으로 책상을 비롯한 방 분위기가 다르다 보니 분위기가 전환되어 아이도 질리지 않는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단다. 두 책상 사이에는 막힘이 랜덤으로 있는 책장을 두어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시야 막힘이 없는 개방감을 주었다.
모던하고 심플한 복도나 거실과는 달리 방은 오히려 비어 보이는 분위기로 연출했다. 안방은 아늑한 분위기의 가구를 사용해 코지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딸아이의 방은 아이 취향을 살려 사랑스럽게 연출했다. 특히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아이의 방은 예전 집에서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옅은 톤 가구라도 방 안에 넣으니 꽉 차고 좁은 느낌. 그래서 소품들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고 파스텔 벽지로 방 전체를 환하게 만들고 침대 헤드 쪽에는 안방과 마찬가지로 뮤럴 벽지를 사용해 방에 포인트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볼수록 이 방 저 방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엄미정 씨의 집. 마치 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도 뜯어보고 있는 것처럼 알면 알수록 아이디어에 감탄하게 되고 더 궁금해지는, 매일 봐도 지겹지 않은, 사계절 다른 색을 내는 아파트. 엄미정 씨의 집은 보통 아파트들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집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