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원도심 곳곳에는 한국근대사의 아픔이 서린 소중한 근대건축물이 남아있다. 하지만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많은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전의 근대건축물이 최근 7년새 27채나 사라졌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다. 슬픈 과거사가 녹아 있다고 해서 흔적도 없이 부숴버리는 것이 최선책은 아니다. 후세에 건축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며 아픔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 대전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과 개발에 밀려 사라진 대표적인 건축물 4곳을 짚어봤다. |
◇남아있는 근대건축물
△충남도청·도지사 관사촌(중구 선화동 287·대흥동 326-67)=충남도청사와 도지사 공관 인근의 관사촌은 도시의 탄생과 함께하며 오랫동안 대전의 상징이자 중심적인 기능을 한 건물이다. 특히 6·25 전쟁 당시 도청은 임시 중앙청사로 쓰였고, 도지사 관사는 임시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등 국가 운명의 고비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1931년 1월 13일, 당시 사이코 마코토 총독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공주 지역민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같은해 6월 15일 기공식을 갖고, 1932년 8월 29일 14개월만에 서둘러 총공사비 35만9000원으로 건물이 준공됐다. 도지사 공관은 1932년 4월 27일 도청사가 준공될 즈음 기공해 9월 15일까지 약 5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시공됐다.
1931년 1월 13일, 당시 사이코 마코토 총독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공주 지역민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같은해 6월 15일 기공식을 갖고, 1932년 8월 29일 14개월만에 서둘러 총공사비 35만9000원으로 건물이 준공됐다. 도지사 공관은 1932년 4월 27일 도청사가 준공될 즈음 기공해 9월 15일까지 약 5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시공됐다.
도청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임시 청사로 사용했으며 1952년에는 충남도의회 청사로 잠깐 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일간 도지사 공관에 기거했으며 이시형 부통령은 보문산 입구에 있는 한식가옥(현 '별당')을 숙소로 사용하면서 국무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곳 관사에서 미군과의 작전 및 지위를 규정한 '대전협정'이 맺어지기도 했고, UN과의 쉴새 없는 교섭과 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도청과 관사촌은 근대 시기 관사 건축의 전형을 찾아 볼 수 있어 2004년 등록문화재 18호로 등록됐다. 올해 충남도청과 지사관사가 내포로 떠나게 되면서 그 활용방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옛 한국산업은행 대전지점(동구 중동 92-1)=이 건물이 있던 자리에 일제는 1912년 한성은행 대전지점을 처음 설치했다. 1918년 10월에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으로 신축했다. 조선식산은행은 당시 대전의 상공업자를 상대로 자금을 모아 일본인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현 건물은 1936년 10월에 착공해 그 이듬해 12월 지상 1층 규모로 준공됐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양식을 취하고 있는 이 건물은 만주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화강석타일과 테라코타를 사용해 마감했다. 폭과 높이의 비가 2대 3으로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건물 전면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다소 그늘진 모습도 보인다.
6·25 때 북한군이 금고 입구의 외벽을 부수고 내용물을 갈취하려 했으나 워낙 견고해 포기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지금도 당시 시공한 3겹 8층의 아스팔트방수와 두터운 신더 콘크리트 및 방수턱, 옥상걸이쇠 등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1997년 5월 대전지점이 둔산으로 이전하면서 철거 논의가 있었으나 건축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취소됐다. 2004년도에는 인근 우체국의 증축을 위해 대전우체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 다비치안경원 소유로 돼 있으며 지난달 대전시와 안경사박물관 활용을 위한 MOU를 맺고 개관을 위한 준비 중이다.
◇사라진 근대건축물
△옛 연정국악원 (옛 우남도서관·중구 대흥동 214)=현재 대전 중구 우리들공원 자리에는 우리나라 제1공화국의 역사적인 산물이 있었다. 바로 연정국악원 건물로 사용됐던 옛 우남도서관이다.
이 건물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탄신 8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 입면에 밝은 갈색의 자기질타일을 정성껏 붙인 우아한 형태로 그 당시 최고의 기술을 총동원한 신식건물이었으며 준공 시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살펴봤다고 한다. 그후 당시 도립이던 충남대의 국립대학 승격을 위해 대학의 부속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학생 의거로 정권이 무너지자 이 건물도 규탄의 대상이 돼 버림을 받았다. 그 후 1961년부터 KBS대전방송국이 목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약 17년간 사용했다.
1965년 12월 이 건물 앞 대지에 있던 어린이 놀이터에 3층의 베이지 색조를 한 시립도서관(옛 중구청사)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근처에 있던 우유처리장과 함께 중부출장소로 사용되다가 중구청으로 바뀌고, 1978년 중구청에서는 옛 우남도서관을 별관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연정 임윤수 선생의 국악 자료 기증을 계기로 시립연정국악원으로 사용됐다. 이후 중구청사의 건립이라는 명제로 개발 논리에 밀려 철거하겠다는 자치단체의 움직임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보존해야 할 소중한 근대건축물이라며 반대했지만 2003년 이후 결국 철거됐다.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중구 대흥동 201)=해방 후 대전은 도청과 대전역을 연결하는 중앙로를 중심으로 하는 축과 대전역을 앞지르는 도로변 쪽에만 산발적으로 개발돼 있었다. 이 중앙통에서 가장 번화가로 형성된 곳이 구 상공회의소와 동양백화점이 있던 중앙로 네거리 일대다. 이 자리에 있었던 옛 한국은행 대전지점은 1948년부터 설계를 시작해 한국동란 이전에 착공 했다가 기초공사 중 6·25가 터져 중지했다. 그 후 다시 자재를 준비해 휴전 무렵인 1953년에야 준공할 수 있었다. 이후 1977년도 한일은행에서 인수해 사용하면서 상업은행과 합병돼 1998년 말 한빛은행으로 바뀌었으나 1999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세인의 무관심 속에 철거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대한토건협회 창설이사로서 국내 건축계의 원로이며 대전 출신 건축가인 유원준(1909-1993)씨가 시공했다. 유씨는 삼성초와 대전중학교를 거쳐 서울대 전신인 경기고등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유병우 소장은 "그는 조선건축회 정회원으로 설계 활동을 한 한국 건축계 초창기의 산증인"이라며 "동년배이면서 같은 건축학도인 시인 이상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유씨는 5·16 군사혁명 이전까지 한때 국내에서 수주액이 가장 큰 건설회사였던 '신광토건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고향인 대전에 설계 시공한 작품으로는 유등천변에 있던 옛 조폐공사의 공장 건물과 한빛은행 동대전지점, 신현술 산부인과의원(원동)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옛 대전역사(동구 정동 1)=대전역은 1904년 6월 지금의 대동에 목조로 지어진 간이역 수준의 역사가 개설되면서 시작됐다. 1912년 3월 호남선 철도 전통식(全通式) 후 대전이 분기역이 되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됐고, 1919년에는 대구 역사를 본떠 개축됐다. 1920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역사 안에 지하도가 설치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양측에 두 개의 둥근 돔을 갖춘 중세 서구식의 대전 역사가 갖춰졌지만 6·25로 인해 소실됐다.
그 후 임시 건물을 세워 사용하다가 미국 정부의 전쟁복구기금으로 시멘트와 스틸새시 등을 지원 받아 1958년 7월 7일 착공해 같은 해 말에 경부선의 주요 역사로 준공됐다. 당시 대전 역사를 설계한 건축가 이상순(롯데건설 고문·대한건축학회 부회장 역임)씨는 국립 철도고등학교와 서울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원로 작가다. 당시 26세라는 젊은 나이였기에 마음껏 기량을 펼치게 됐다.
처음 준공 시에는 북측에 이용객이 휴식을 위해 들를 수 있는 일반음식점인 그릴이 있었고 입구에는 커다란 V자형 기둥에 떠 받쳐 진 덮개가 있었으나 늘어나는 교통 수요로 인해 소화물을 취급하는 방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사라졌다. 1970년대 후반에는 남측으로 한 차례 증축되면서 여객의 출구로 바뀌었다.
1998년에는 본 건물에 빨간색과 녹색 등 원색으로 덧칠을 해 최초의 순박한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2004년 3월 31일 한국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본 건물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북쪽으로 수평이동해 현대적인 역사로 새롭게 개축됐다.
△성산교회 목사관(중구 선화동 362-22)=대전 중구 선화동 성산교회 옆에 위치한 이 건물은 사회복지법인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사회사업 유지재단 소유의 건물이다.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2년 전인 1930년에 준공됐다는 기록이 있다.
유병우 씨엔유 건축사무소장은 "1981년에 이곳(선화동 일원)에서 살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일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 이 건물은 1907년도에 설립된 대전전기주식회사(후에 한국전력에 통합됨)의 지사장 사택으로 신축됐다"며 "해방 후 사범부속학교의 교장 사택, 혹은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인 엘마 길보른 부부가 매입했으며 6·25전쟁으로 인해 급증한 모자가정의 복지를 위해 동양선교회로부터 파견된 박영애 전도사에게 기증됐다"고 설명했다.
박 전도사는 이곳을 일부 증축해 33세대의 96인을 수용하는 '루씨모자원'을 개원하게 되는데, 이 명칭은 길보른 선교사 부인 이름인 루쓰(Ruth)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 인근 대지를 추가 매입해 1959년 시골 풍의 하얀 교회당(98㎡)을 신축했다가 1989년에 그 자리에 박 전도사의 아들인 임동혁 목사가 현재의 성산교회를 신축했다.
근대의 주택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 가옥은 지난해 12월 화재로 전소돼 시민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 대전일보 정민아 기자의 글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