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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2005년 10월 14일 우리교회
1. 욕망의 흐름인 인류사
인류 사회는 욕망을 생산하는 장이다. 개인의 심리적 억압과 사회적 억압은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생산을 분석할 때, 욕망하는 기계는 사회적 기계로, 기관 없는 신체는 사회체라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계’란 생성되는 욕망이 생산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그 ‘생산적인 힘’을 묘사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동원시킨 개념이다. 즉 욕망이란생산적인 힘 내지 능력의 흐름이기에 어떠한 하나의 체제에 머물지 않으며 범람하고 흘러 넘친다는 점에서 그 욕망을 생산하는 주체를 공장에 있는 ‘기계’라고 묘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서 기계란 ‘쉬지않는 운동현상’을 말한다.
‘기관없는 신체’란 일단 ‘기관있는 신체, 곧 유기체’가 되어버리면 기존의 욕망을 철회하고 기존의 욕망 생산을 중단하고 어떤 유기체나 어떤 구조에 복속된 채 오직 하나의 기능을 반복해서 수행하는 신체의 모습이 되기 때문에 이와 차별 지우기 위해서 동원된 표현 방식이다. 일종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체는 사회적 기계의 흐름을 '등록케' 하고 그 표면에는 일정한 유형의 표상체계가 산출된다. 이렇게 산출해 놓고 보면, 그 결과는 각 사회가 가진 '정신병적' 성격이 드러난다. 즉 인류는 역사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산과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는 조작을 총칭하여 '코드화'라고 부른다. 이 코드화를 통해 영토화가 이루어진다. 영토란 속성상 탈코드화하려는 흐름들이 상대적으로 억제되는 환경을 지칭한다. 각 시기마다 코드화의 양식은 상이하다. 원시사회( 영토기계)는 다양하고 풍부한 코드들을 통해 욕망과 생산의 흐름을 조직하는 코드화가 이루어진다. 원시사회에서는 대지가 곧 영토였다. 그렇다면 중세 사회에서는 교회가 곧 대표적인 영토이다.
고대 사회, 즉 국가의 탄생을 통해 성립한 전제 군주 기계는 하나의 코드 하에 다른 모든 코드들을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 초코드화가 이루어진다.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흐름들은 코드로부터 해방된다. 즉 자본주의 기계는 탈코드된 흐름을 전제로 성립하는 유일한 사회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다양한 흐름들을 다양한 코드로 채취하기 위해 ‘ 성적도착증(性的倒錯症)’이 발생한다. 성적 도착증이란, 정상적인 성(性)의 대상을 찾지 못해서 변태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전제 군주는 그 흐름들을 하나의 원리 하에 종속시키기 위해 ‘성적 편집증’을 발생한다. ‘편집증’이라는 하나의 대상 집요하게 집착하는 증세를 말한다. (질투, 사랑 갈구 같은 증세)
한 예를 들어, 원시 사회에서 혼인을 조작하는 행위는 그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행위이지만 매우 도착증적 성격을 갖는다. 또 조선 사회에는 모든 잉여를 형식적으로나마 전제 군주에게로 집중시키다는 점에서 편집증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화폐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적’이다.
전제 국가는 자신의 외부를 내재화하면서 성립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외부를 내면화한다. 국가는 자신의 외부가 존재하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고 이를 부단히 자신의 것으로 전유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 사회의 편집증적 성격이다. 전제 국가는 어떠한 진화의 산물도 아니며 (예를 들면 생산력의 발전의 결과 등), 조직된 폭력에 의해 일거에 창설되었다. 국가의 창설자는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그 조직된 폭력에 의해 수적으로 압도적 다수인 국가 이전의 원시인들을 제압하고 그들은 국가의 신민으로 제조한다.
국가의 외부에는 ‘전쟁 기계’가 있다. ‘전쟁 기계’란 무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지도력, 가치나 힘을 어느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나 욕망의 흐름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부의 집중을 저지하기 위해 ’선물‘이나 ’낭비‘를 특징으로 하는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즉 경제적 재화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한에서만 정치적 지도력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제 국가 시대가 되면 이러한 ‘전쟁 기계’는 범죄로 간주했다. 즉 국가권력에서 벗어나는 죄악이다. 이런 현상은 국가 장치가 전쟁 기계를 장악하고자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군대’이다.
이로서 권력이란 조직원의 이탈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전능하지만, 새로운 이탈을 생산하기 위해 경직된 분자적인 구성으로 분절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항상 새로운 욕망의 생산을 탄생시킬 가능성을 노출시킨다. 즉 거시적으로는 전능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무능하다.
2. 속사도시대 (100-313년)
박해의 시대였다.
박해의 원인
①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증오하여 로마 통치자에게 고소함: 이로서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로 분류됨
②로마 황제 신격화에 대한 교회의 반발이 곧 국가 자체에 대한 반발로 이해됨
③불법적으로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인식됨
④제국 내에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교회 자체내의 법률 제정으로 국가 법과 충돌을 이르킴
⑤자연 재앙은 기독교인 탓으로 돌림
기독교가 기세를 떨치든 시대였다.
(1)교회 확장의 중심지
예루살렘 -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 각처로 흩어졌던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기독교를 확장시켰다.
수리아의 안디옥 - 바울이 서쪽으로 전도해 나가는 근거지가 되었다.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 전도의 거점
에베소, 서머나 - 소아시아에서는 서남방 해안 지방에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에베소, 서머나가 그 중심이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복음이 소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 마게도냐 지방 전도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다음으로 기독교가 흥왕한 곳이었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3세기에는 성경의 애굽어(콥트) 번역도 이루어졌으며 신학교도 세워졌다. 또한 그노시스파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고린도, 아덴 - 헬라(그리스) 지방의 복음 전파의 거점 도시였다. 아테네에서도 변증자들과 순교자들이 나왔다.
로마 - 서유럽 전도의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각처에 교회가 있었고 북은 갈리아, 남은 북부 아프리카, 서는 스페인에 이르렀다.
(2)10대 박해
1 세기에 일어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잔인한 박해는 주로 개인적인 원한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치적인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디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서 기독교를 완전히 섬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지만 그 외 여덟 번의 박해는 특정 도시나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①네로(54-68)의 박해
로마시의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지워 박해함
②도미티아누스(81-96)의 박해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로 박해함. 이로 인해 카타콤에서의 비밀 집회가 생겨남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키고 예수님의 친척을 소환하여 취조했음
③트라야누스(97-117)의 박해
비밀 결사를 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사회 생활 부조화를 이유로 박해를 가함. 황제상에 절할 것을 강요함.
약 120의 시므온을 십자가에 처형시키고 이그나티우스를 야수를 통해 처형시침
④하드리아누스(117-138)의 박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박해함. 기독교를 불법화함
텔레스포루스가 순교당함
⑤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161-180)의 박해
가정교사의 사상적 영향(스토아사상)으로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박해함. 177년 리용과 비인에서 특히 심한 박해가 있었다.
유스티누스와 폴리갑이 순교 당함
⑥셉티무스 세르베루스(205-211)의 박해
열심있는 이교도였던 부인의 영향으로 교회를 핍박함. 특히 전도 금지령을 내려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함
오리겐의 부친이 순교당함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라는 두 여인이 장렬하게 순교 당함
⑦막시미누스(235-238)의 박해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박멸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함. 이 시기에는 사형은 하지 않았고 투옥과 유형으로 박해를 함
히폴리투스와 우르술라가 순교 당함
⑧디키우스(249-251)의 박해
로마가 옛 신들을 섬겼을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해졌다고 믿고 칙령을 내려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디키우스는 원칙에 따라 작심하고 박해했기 때문에 이 때의 박해가 가장 심했다. 그의 목적은 신자들을 죽여서 순교자를 내는 것보다 악형과 감금과 공갈로 우상을 숭배케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산시키는데 있었다.
로마의 파비아누스와 예루살렘의 알렉산드로서가 순교 당함
⑨바렐리아누스(253-260)의 박해
기독교인들로 인해 질병과 흉년이 생겼다고 믿고 257년과 258년에 큰 박해를 했다. 신자의 집회를 엄금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주요 신자들을 유형보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카르타고 감독 카프리안이 순교 당함
⑩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기독교와 같이 다루기 어렵고 강력한 조직체가 제국 내에 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기독교를 박해함. 그도 조직적인 박해를 했는데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성직자 투옥, 악형에 처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는 등 핍박을 했는데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한 제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디키우스 때처럼 순교자도 많이 나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민중들이 이전처럼 적대하지는 않았다.
(3) 교부들의 신앙 세계
기독론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논쟁다운 논쟁은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신성을 더 강조한 편이었다.
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이그나티우스 (Ignatius) : 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헤르마스 (Hermas) : 그리스도의 선재설(先在說)을 믿었다.
삼일신(3 1神)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교리는 이 시대에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희미하나마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하다.
속죄론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열고자 피를 흘리셨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以信得義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철저하지 못했고 이신칭의의 근거에 대해서도 구약 말씀들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게서 천년간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신다고 가르쳤으며 파피아스는 상상력을 크게 활용하여 천년 시대의 상태를 묘사하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크게 강조한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주의가 교회 안에서 만연되게 된 데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 철학 사상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이 컸다.
①로마의 클레멘트(90년 대 사람)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어지러운 교회에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직분 계승에 의한 장로에게 복종하기를 요청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장군이 아니요, 영광도 아니요, 위관도 아니라 각자 성실하게 자신의 위치와 사역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순결과 순종, 그리고 신앙적 겸손을 강조했다.
그는 바울 신앙에서 떠나 윤리적 관심과 율법적 질서를 강조하는 기독교로 기울어졌다. 지맂따
②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70-107)
직분의 삼중직 방식을 최초로 제시했는데, 주님의 교회는 감독들과 장도들과 집사들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세례도 없고, 애찬과 성찬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성만찬을 불멸에 이르는 의식이라고 여겼다. 성만찬을 수단으로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얻는다고 보았다.
그는 신비주의적 노선으로 나아간다.
③서머나의 감독 폴리갑(79-165)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이그나티우스의 친구요 이레네우스의 스승이다.
그는, ‘신앙의 주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했다. 십자가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과 의의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 부동하게 붙잡아 라고 했다.
3 변증가들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이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교리화하고 신조화하는 데와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증가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가장 탁월한 변증가였다.
변증의 정신과 내용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육체를 사랑하며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다.
내용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만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일 뿐이며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한 참 유신론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음.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함
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신)이다. 그가 신기한 표적을 행한 것은 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것이다.
변증가들은 변증을 위해서 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 기독교와 세상 철학들의 관계에 대해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변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신의 유일성과 기독교 도덕의 초월성이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은 구약 성경 중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의 감화력과 결과를 들어서 증거로 삼는 일도 많아졌다.
대표적 변증가
(1)유스티누스 (100-165)
철학은 매우 커다란 재산이며, 신에 의해 최고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성스럽다. 철학과 올바른 이해 없이는 어떤 자도 통찰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철학을 하여야 하며, 철학함을 매우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작업이다. 철학에도 진리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에게도 ‘로고스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 소크라테스. 헤라클레이토스, 스토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확실하고 유용한 철학이다. 그것은 기독교는 예언의 성취에 따른 증명이기에 철학보다 더 힘있고, 더 신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이 모든 인간적인 철학보다 뛰어나다,.
신앙인이라고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단지 스스로 몇 라지 특별한 통찰을 가질 뿐 결정적인 통찰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통찰은 이미 지나간 철학에서 되풀이되어 말해 왔던 것이다.
※로고스론이 무엇인가?
로고스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견해에 의하면, ‘소리내어지는 것’이다. 그 소리는 인간의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로 이해된다. 영혼적이다 는 말은 영혼이 자신 안에 갖는 것, 즉 생명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로고스란 어떠한 생명체가 자신이 지닌 본질을 내뱉는 소리로서 표현과 표현된 것의 종합적 진술을 뜻한다.
만일 로고스가 드러내지 않는다면 고유한 생명의 활동을 실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로고스는 스스로 은폐해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탈은폐할 가능성이 있다고, 헤라클레이토스(B.C 540년경 철학자)는 주장한다.
그는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변화를 변화로 겪어내고 읽어낼 기준으로서 ‘일자(一者)’를 설정했다. 보편이성 또는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법칙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일자는 이전 단계의 우주론에서 근원 탐구가 삼라만상의 다양성을 포괄하기에는 다소 한계를 지녔던 데 비해 변화의 상극적임 다양성과 안정을 아우르는 풍부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뒤 스토아학파(B.C 4세기 경)에 속한 학자들은, 우주의 질서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각이 되는 것은 로고스 덕분으로 보았다.
(2)이단들
교회는 초기에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받았고 2세기부터는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각종 이단 종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런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복음을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해하고 곡해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 종파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복음을 유대교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엘카이파가 다 그러했으며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역시 그런 경향을 나타내었다.
④에비온파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⑤엘카이파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⑥그노시스파(영지주의) 130년-165년
그노시스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하는데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여러 가지 세상 종교적 신비적 요소들 곧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마술,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의 신화들과 여러 가지 다른 철학들과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물에다 애매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일종의 새로운 종교 철학이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우선적인 문제는 이 우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어찌하여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의 해석 문제였는데 특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구원과 헬라 철학의 발출설(發出說), 동양과 헬라의 이원설(二元說)을 채택하여 계통있는 사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공통적 사상을 보면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이온(Aeon ; 영원히 존재하는 자)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은 아이온의 최하급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인간들인데 이들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사탄과 자신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정신적(psychics) 인간들인데 이들은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선행으로 세상의 중간층까지만 간다. 셋째, 영적(pneumatic) 인간인데 이들은 특수계층에 속하며 참 지식(gnosis)을 가졌으며 그 지식으로 신앙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영지주의적 사유의 출발점은 후기 고대인 모두에게 고유했던 감정인, ‘세계 안에서 고향 상실’에 있다. 고향 상실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인간의 본질적 운명으로 이해된다. 초기 헬라 오르페우스 전승, 헬라적-헬라니즘적 신비, 그리고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사유와 연관하여 후기 플라톤주의 근본 기분과 유사하게 영혼은 대지 위에서 길을 잃은 낯선 자로 여겨졌다.
영혼은, 자신의 노력에 지치고, 죽음에 지배되어 있으며, 출구 없이 헤매이며 미로에 빠져 있고, 쓰다쓴 혼돈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다.
빛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영혼은 비참에 던져져 울고 있다. 여기서 발렌티우스주의자들은 ‘영적인 것’ 혹은 ‘영적인 실체’라고 명명한 것을 발견한다. 즉 그것은 ‘위로부터 유래한 본질의 싸앗들’로서 ‘오물 속의 금’과 같이 인간 안에 오염되지 않고 놓여 있다. 하늘과 세계 사이에는 신적 영역(플레로마)이 있는데 이 영역은 30계단(30개의 에온)의 영적 계급이 형성되어 있고 그 제일 밑바닥에는 바로 ‘지혜’가 땅에 닿아있다. 이 가장 어린 에온인 지혜를 깨달아야 구원이 가능하다.
영지주의 자들의 신은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 신’이다. 따라서 ‘부정신학(否定)적’이다. 그래서 창조주란 최고의 신이 아니다. 창조주(데미우리고스)는 완전한 신과 악마의 중간자, 혹은 신과 비교되는 천사이다.
“그대들이 전체 세계와 그 안에 현존하는 물질을 포기하고, 빛의 왕국의 신비를 발견할 때까지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순수한 빛이 되리라. 전체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 그대들이 ‘신의 영역’(플레로마)에 들어가면 이 세계 안에 은폐된 불이 밝혀지고, 모든 물질이 점화되어 파괴되고, 동시에 이와 더불어 소진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로고스‘라고 불리는 천상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내려오는데 그는 세계로 내려와서 인간 예수와 결속하고, 세계에 흩어진 정신의 조각들을 모은다. 이 때 역사적 예수와 하늘의 그리스도는 다르다.
⑦마니교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은 동방에 있으며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종교인데 서방으로 퍼짐에 따라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 시조는 마니(216-276)인데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서 젊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반대자들로부터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과의 싸움이며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여 생긴 것으로 본다. 사람은 빛을 이 흑암 속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解脫)의 방법은 육체를 정복하여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마니교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과 혼인과 망령된 말을 금했는데 이 점에서는 불교와 비슷하다. 마니교의 최고의 덕목은 세 가지를 인봉(印封)하는 데 있다. 첫째는 입의 인봉인데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 인봉은 손의 인봉인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봉은 가슴의 인봉으로 정욕과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는 초기의 기독교와 유사하거나 더 질서정연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니 밑에 12사도가 있고 그 밑에 70인의 감독이 있었으며 그 밑에 교사들이 있었고 또 그 밑에는 행자(行者)가 있었는데 행자 중에는 택한 자와 듣는 자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택한 자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마니교는 동서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 이르렀고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어거스틴도 젊을 때 8년간이나 마니교에 탐닉한 적이 있다.
⑧마르키온(130년경 활약- 160년 사망)
구약의 하나님은 단지 정의만 추구하나 새 언약의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존재
구약의 하나님은 악의 창조주로서 오직 이스라엘들만 사랑하고 다른 인류를 파괴시키는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제외한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의 10개 서신들만을 인정했다. 그에게는 바울만이 영웅적인 사도로, 예수님의 복음을 오염시키지 않은 유일한 사도로 간주했다.
그는, 은밀한 지식체를 가졌다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인간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즉 구원이란 신비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한 단순한 신앙에 의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복음을 유대교와 결부시키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모호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 인데, 그 신은 반역의 악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 데미우르고스가 인간들, 즉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신은 인간 구원에 책임을지지 않는 신이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육체 및 영혼을 악의 영역에 두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와는 달랐다. 그러나 영지주의와의 접촉으로 자가 당착에 빠져 영혼과 육체 사이에 대립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데미우르고스에게는 아무런 부채도지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의 피조물인 인간들이 태어나듯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를 가진 듯이 나타난 것 뿐이다.(가현설)
그래서 이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악한 세계와 그 율법에서 그와 그의 형제를 피신시키기 위해 십자가 사랑으로 활약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두 번 하강하셨는데, 한 번은 고난 당하고 죽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번은 사도 바울을 부르시고 그에게 진정한 그의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르키온은 영지주의자와 같이 이원론에 입각하여 물질을 죄악시하여 금욕주의로 쏠렸다.
(3) 헬라파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 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도 변증서가 계속 나오는 등 변증의 열심이 완전히 식어진 것은 아니나 교회는 점점 내부의 충실에 열중하였으며 신학교를 건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이 무렵 헬라 신학자와 라틴 신학자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지방과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로 사상의 경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①이레네우스(130-202)
최초의 조직신학자. 소아시아 서머나 출신
그는 영지주의에 맞서서 구약과 신약을 언약적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공간적으로 교회는 동일한 말씀을 가르치게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동일한 사도의 저술의 하나의 경전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많은 사건들은 신약의 메시야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총괄갱신’을 말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는 것은 인류를 회복하는 일이며 갱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에 관해 그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필연성을 인간의 신격화라는 구원론에서 찾았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서 아담의 타락을 회복시키는 구속자가 되셨고, 동정녀 마리아도 순종을 통하여 하와의 불순종을 보상했다고 보았다. 특히 마리아는 순종을 통해 전 인류를 위한 하와의 변호자와 구원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카톨릭의 원죄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관(神觀)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자유 의지로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였고 신의 피조물인 우주(물질) 역시 선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로고스이며 그의 독생자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 대해 순종하는 위치에 서며 성자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으로 본 것은 그의 순종이었다. 인류는 바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로서 주님은 인류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포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대해 증거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이미 로고스가 아니고 성육신과 속죄에 있었다. 오랫동안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신학은 이레네우스에 의해 다시 상기되었다.
②히폴리투스 (Hippolytus) 170-235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제자. 그는 주석과 연대기와 부활절 계산, 변증가, 이단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는 로마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하여 당시 등장한 두 가지 단일신론(Monarchian) 주장(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시키는 養子論的 단일신론과 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시키는 樣態論的 단일신론)에 크게 반대하여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4)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철학과 古文學의 소양이 풍부하였다. 그들은 이단을 반대하여 참 진리를 세우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으나 그 자유로운 연구 태도와 사상 자체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이 파의 대표자들이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유력한 교회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학교(학파)는 처음에 판테누스에 의해 지도되었다. 판테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이르러 이 학파는 최고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철학이란 덕이있는 인간이 만들며, ‘악덕의 작품’일 수가 없다. 철학은 진리에 도달하는데 적합하지만 진리엔 단지 부분적으로 도달할 뿐이다.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 신앙이 역할을 맡게 된다. 신앙은 진리의 힘이며 신앙을 통해서만 모든 것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철학은 예비 교육이다. 철학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교육시킨다. 야생올리브유와 좋은 올리브유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신앙은 ‘통찰의 시초’일 뿐이다. 신앙은 신을 탐구하지 않으며 단지 신이 존재한다고 고백하는 것 뿐이다. 영적인 지혜(영지)를 통해서 비로소 신앙은 완성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식될 수 없는 신이 스스로를 자신의 아들 안에서 계시하였고 그 안에서 항상 보이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얼굴’이며 ‘신에 대한 올바른 선생’이다.
신의 아들은 근원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로서 중요성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신이 세계를 창조한 자로, 즉 ‘사물들의 신적인 시초로’ 그리고 ‘존재자에 대한 무시간적이고 무근원적인 근원이지 첫 번째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클레멘트의 그리스도론도, 역사적인 아닌 주로 우주론적-신학적 사변이다.
신은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은 더 앞선 것과 인식 가능한 것에 의해 존립하기 때문이며, 생성되지 않은 것 이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인 지혜’란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나타남과 예언자들을 통해 가르쳤다.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신적인 은혜를 통해, 그리고 오직 그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통해 인지될 수 있다. 영적인 지혜는 ‘전승으로부터 계속해서 주어진다’ 이 전승은 신적인 문헌 뿐만 아니라 사도들 중 일부에게 씌어지지 않은 채 전승된 은닉된 경청자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전승도 포함한다.
②오리겐(185-254)
18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거룩한 삶을 향한 오리겐의 열망과 금욕적인 경향은 스승인 클레멘스보다 훨씬 더 하였다. 그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사람 중 하나였으며 아무 소유도 없었다. 그는 211년 경에 로마로 갔으며 215년에는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였으며 230년 경에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이스 등지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의 비난과 고소로 인해 추방당했고 가이사랴에 가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오리겐은 244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두로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다방면에서 석학이었으나 구약 본문 비판, 주석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저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에 관한 것으로서, 본문 비평과 주석이 있다. 비평서로서는 {헥사플라}(Hexapla; 6가지 번역 성경)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나온 기독교 학자들의 모든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역시 신 구약 전체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리상의 저서로서, {제1원리}(De Principis)라는 큰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인데 오늘날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변증적인 저술로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다. 이것은 8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전부 전해지고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필로와 같이 성경을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하여 구약 해석을 함에 있어서 풍유적 또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 해석법은 헬라 철학자들이 신화와 신에 관한 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오리겐은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뜻만 찾지 않고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찾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자적인 뜻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도덕적인 뜻이란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을 말하며, 영적인 뜻이란 성경 말씀 안에 포함된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항상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조화시키고 철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우화적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던 것도 바로 성경에서 철학적인 뜻을 찾기 위해서였다. 헬라 사상에 의한 기독교 해석법은 오리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은 철학과 윤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리겐의 작업은 기독교의 과학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바탕은 신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진 플라톤 스토아 철학이었다.
교회, 사도적 전승 위에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웠는데, 우선 그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다. 로고스(아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이지만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영혼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유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어서 깨끗하게 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의 구원관은 만인구원설이어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도 일정한 사후의 시련을 통해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리겐의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 곧 현세의 영적 실재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영혼은 그 세상에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우리를 타락시켰다. 그래서 구속 얻은 자들만 거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리겐은 바울 이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속죄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만인에게 미쳐서 성도뿐 아니라 악인들까지도 마침내 구원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마귀들까지 구원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대학자로서 그의 정신 세계의 규모와 수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모든 이론들이 다 참된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세상이 보다 열등한 주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와 아울러 물질 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플라톤주의적)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점에더 오리겐은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 영혼의 선재라든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을 주장한 것을 놓고 보면 그의 사상이 기독교의 정통 사상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겐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 이전까지의 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로서 이후 동방 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대의 기독론 논쟁에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그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 회의(399-400년)와 유스티누스 황제 회의(543년), 제5차 교회 대회(553년)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
신은 파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 초월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계의 피조물로부터 초월하여 신의 비가시성에 도달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의 영원한 힘과 특히 그 신성에로 스스로를 고양시켰다.
신은 자기 작품 안에서 인식된다. 모든 인간은 신에 속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 ‘정신’이라는게 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표상은 통찰하는 정신 자체이고, 그를 통해 정신은 신성의 본질에 대한 어떤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맹아 안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 신의 아들로서, 두 번째 신인 로고스가 나타나면 인간 자신들에게 뿌려진 지혜와 정의 확실한 씨앗이 바로 그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즉 로고스는 인간들로 하여금 우선 육화된 로고스에 걸맞는 형태가 되도록,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육화된 로고스가 육화되기 전에 누구였는지 볼 수 있는 데까지 초월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로 부른다.
그의 대표 저서는 < 모든 이단을 논박함(Against All Heresies) > 이다.
(5)라틴 교부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①터툴리안 (Tertullianus) 160년-225년)
터툴리안은 신학을 라틴 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근거하는 계시와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즉 ‘취득시효’를 언급했다. 이단들은 더 이상 계시를 바르게 해석할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에 대해 많이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이교 철학을 모두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으로 취급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쳤다.
이처럼 그는 철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오직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철학적 관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가(성경적 관심)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며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②.키프리안 (Cyprianus) 200-258
키프리안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터툴리안은 人性(人間)의 부패를 말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비해 키프리안은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자는 타인이며 俗人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카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영적 공동체'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외적 조직과 제도를 갖는 가시적(可視的) 공동체로 보았으며, 그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말씀}보다는 보이는 {사람}(감독들)에 의해 확실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카톨릭교회 곧 可見的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카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핍박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던 당시의 사정에서는 이런 주장을 할 필요성이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이나,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신약 교회의 특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인간의 제도에 근거하여 교회를 유지하려고 의도한 키프리안의 신학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잘못된 신학이며 훗날 나타나게 될 교황 제도를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교회를 크게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6)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이런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축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던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런 수찬 정지는 구원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징계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완화해 주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회하는 죄인을 받아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게 되자 음행과 간음한 자 및 배교를 한 자들까지 교회가 받아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서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217-222)는 어떤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해준다는 성명을 내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배교자는 제외했으나 박해로 인해 무수한 배교자가 속출하자 그것도 결국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넘어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 엄격파들은 그 입장을 거부하고 로마의 신학자 노바티안을 따름으로 분열하였다. 대다수인 나머지는 관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로마 회의(251년), 카르타고 회의(252년)에서 다수파인 관용파가 승리하여 교회는 회개한 배교자들의 교회 가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들은 배교자 등 죄인들의 죄책 등급을 다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등급에 따른 고해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햇수(年數)가 결정되었다. 고해(告解; penance) 개념은 세례의 속편(續篇)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고해로써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므로 반복할 수 없었고 세례는 세례 받기 전까지의 죄만 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후의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구제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와 같이 생각했다. 곧 순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이 순교를 그렇게 갈망하고 그것을 자청했던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고해였다. 이런 사상은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에 나타난다.
3. 공의회 시대
역사적으로 성경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이미 교회 회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의 기원은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였다.
하지만 이후 약 300년 동안 교회는 공의회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지난 2000년 동안 모두 21번의 공의회가 카톨릭 위주로 모였다.
주요 쟁점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회 325년 니케아 회의 : 아리우스 정죄
2회 381년 제 1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정죄
3회 431년 에베소 회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정죄
4회 451년 칼케돈 회의: 유티케스주의의 정죄
5회 553년 2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성론자 정죄
6회 680-681년 제 3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의지설지지하는 교황을 파문시킴
7회 787년 제 2회 니케아 회의 :성상파괴 논쟁
8회 869-870년 제 4회 콘스탄니노플 회 : 포티우스 분리문제
9회 1123년 제 1회 라테란 회의 : 성직자 서임권 논쟁
10회 1139년 제 2회 라테란 회의: 이중 교황의 분열 종식
11회 1179년 제 3회 라테란 회의 : 교황 선거법
12회 1215년 제 4회 라테란 회의 :발도파와 십자군
13회 1245년 제 1회 리용 회의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14회 1274년 제 2회 레용 회의: 동서 교회 연합
15회 1311-1312년 빈 회의 : 템플 기사단 문제
16회 1414-1418년 콘스탄츠(현 스위스 지역) 회의 :교회의 개혁과 후스의 처형
17회 1438-1439년 펠라라/피렌체 회의 : 동방 교회와의 통합 문제
18회 1512-1517년 제 5회 라테란 회의: 교회의 개혁
19회 1545-1563년 트렌트 회의; 신교문제와 교회 개혁
20회 1869-1870년 제 1회 바티칸 회의 :교황무오설
21회 1962-1965년 제 2회 바티칸 회의 :교회와 신앙의 개혁
예루살렘 사도 회의 다음 가는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는 정통적인 신학 정립에 있어서 교회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동과 서로, 그리고 개혁으로 갈라지기 전의 교회는 에큐메니칼한 교회, 하나의 교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후 그리스도 교 안에는 여러 교파가 대립되어 각각 자기 주장을 내세워 혼란을 거듭할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하여 교회의 교리를 확립한 니케아 공의회는 에큐메니칼 공의회 였다.
이단 논쟁이 격화되고 교회가 분열되자 온 교회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가 어려워져서 어떤 공의회가 진정한 에큐메니칼 공의회 인가가 분명치 않게 되었으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첫 번째의 일곱 공의회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인정하고 그 공의회들로부터 나온 자료들과 가르침들이 교리와 신조의 기초로서 받아 들여 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공의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25),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 에베소 공의회 (AD 431), 칼게돈 공의회 (AD 451),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680~681), 제2차 니케아 공의회(AD 787)이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논쟁들 중에서 기독론 논쟁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 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중 예수님의 신성을 확립한 이 논쟁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Nicea, 325년 5월)에서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 회의는 318년 아리우스 (Arius)에 의해 발생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소집 되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323년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지역 주교관구에서 정죄 되었으나 논쟁은 깊어만 갔다.
314년 8월 1일 도나투스 논쟁을 중재한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 하였는데, 그는 325년 초 안디옥을 거쳐 니코메디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디옥에 머물며 안디옥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아리우스와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정죄되고 안디옥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황제는 도나투스 논쟁을 해결할 때처럼 교회의 분쟁을 중재하여 자신이 지켜온 로마 제국이 이분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감독들을 소집함으로써 최초의 세계교회 회의를 열게 하였다.
니케아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카라로 예정 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 (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틴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은 세 개의 파로 나위어져 있었다. 가이샤라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도파, 안디옥의 루시안에게서 공부한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좌파, 그리고 정통 우파인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및 기타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헬라어의 300을 가리키는 T 는 십자가를 의미했고 18의 수 IH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참석자의 수는 주님의 수난의 표식과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기에 주께서 회의에 계셨다고 하여 이회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의 표식과 예수의 이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단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는 하나의 승리였던 것이다.
회의에서는 ①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일로 주장) ②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안의 래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③ 성직자의 직위 ④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⑤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⑥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시작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중엽에 걸쳐 필론Philo(B.C 20 경 사람)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헬라철학과 유대교라는 양대사상을 연결하려 했다.
즉 헬라철학과 유대교 사상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들일 뿐이며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진리명제의 문자적 의미와 우화적 해석을 내세웠다. 여기서 그는 신은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으로 초월하시기에, 제 2신에 해당하는 중재자 개념을 제시했다.
필론은 그런 중재자로서 ‘로고스’를 말하는데 이는 지성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신에 의해 창조된 것들 중에서는 ‘로고스’가 가장 고귀하고 서열상 최상이지만 여전히 신보다는 열등하게 위치되어진다.
이처럼 플라톤과 그의 후배들에 의해서 신론이 이런 식으로 흘러오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가 철학적으로 딜레마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스토아 학파의 경우. 로고스 사상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서 신학 초기의 핵심적 주제였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사상을 뼈대를 제공하는 가교로 간주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실재의 보편적 법칙’을 의미하던 로고스가 스토아 학파에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신적 힘’을 뜻하는데 까지 확장되므로서 신관 구성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인간론이나 구원론에 있어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주목하므로서 구원이란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죄에 관심하므로서 신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보편적 로고스에 의한 참여 사상에 신론을 통해서 주입이 되어버리면 스토아주의 만인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혼합이 되어 버린다.
뿐만아니라 스토아 학파의 운명주의적 신의 섭리론은 나중에 예정론의 내용을 가득 채우게 되는 정신적 토양이 된다. 이런 신관이 초대교회에 흘러 들어오면서 환영도 받지만 동시에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에서의 완전성과 부동성의 일치는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어가면서 하나의 신학적 딜레마로 등장하게 된다. 지고의 신인 성부는 완전-부동하시되, 성자는 고통과 죽음까지 당했으니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있음과 선함의 정비례 관계에서의 정점인 신은 있음 자체이며 그런 한에서 지고의 완전자이며 동시의 지고의 신이다. 그런데 지고의 완전성이 전능성을 의미한다면 지고의 선(善)성과 함께 신의 주요한 속성일진대, 이 세계에서 엄연히 실제로 경험되는 악의 현실과 관련하여 그 양대 속성이 어떻게 엮여야 할 것인가하는 소위 신정론(神正論) 문제가 바로 여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이 전능한 동시에 지선(至善)하다면 이 세계에 도무지 악이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신의 두 속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전능함에도 악을 허용할 만큼 지선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고의 선이기는 하지만 악을 폐기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도전 받는 상황을 상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와 연관하여 초대 교부철학과 신학의 집대성자인 어거스틴을 비롯한 플라톤의 기독교 후예들은 기꺼이 플라톤에 의해 제시된 ‘있음 자체’라는 신 개념에 호소한다. 즉 없음이 전혀 없이 있기만 한 있음이라는 의미에서 있음 자체인 신은 바로 그 있음 자체라는 본성에 의해 전능하고 동시에 지선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동일화의 바탕에서 더욱 있을수록 더욱 선한 것이어서 완전히 있기만 하는 한 있음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지선이라는 정비례 관계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있음과 선함의 이런 정비례 관계는 거꾸로 더욱 없을수록 더욱 악한 것이어서 완전히 없음은 당연히 최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있음은 선한 것이고 없음은 악한 것인데, 악한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서 기껏해야 ‘선의 결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이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데 어두움이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 빛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악은 실재성이 없음으로서 형이상학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으니 신의 전능성과 지선성의 공존에 어떤 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 교부들 중에는 성부도 성자와 함께 고통을 받았다는 성부수난설과 신의 수난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 이들은 신의 완전-부동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도 여지없이 이단으로 찍히고 말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신이 완전- 부동성은 헬라적 개념 결합일 뿐이며, 유대교에서도 고백되어 온 민족신으로의 여호와는 부동적이고 초월적이기만 하지 않고 지극히 내재적이고 역사개입적이어서 이 구도에서 신의 완전성은 고난받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역동성과 결합되어야 하는 개념이었다.
즉 인간과 함께 고난받을 수도 없는 부동성은 있음의 성질을 충족시킬지언정 참된 뜻에서의 완전성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오히려 미흡한 것이었다.
고난받을 가능성을 거부하는 부동성보다 고난받을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역동성이 완전성을 더욱 폭넓히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의 배경 속에서 신약성경의 선재언명(先在言明)을 해석하려 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 문제의 종교사적 측면을 검토해 보자.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및 그 분의 하강을 언급한다고 칠 때, 그 신약성경이 성경외적 신화적 표상들을 넘겨 받았으며, 또 넘겨 받았으면 오늘의 우리로서는 우리의 표상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시킬 수 있으며 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선재와 육화(肉化)라는 표상들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기상천외의 새로운 관념들이 아니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신약성경는 이러한 관념들로 그전부터 미리 주어져 있는 도식들을 재기용(再起用)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자기의 운명에 관심을 둔 영지주의적 해석은 신약성경에 말씀하시는 뜻과는 다르다. 영지주의적 관심은 구속주의 육화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본질의 기원을 깨달음(인식)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구속주가 되어 구원받는다는 데 있었다.
구속주 신화는 인간이 자기의 참된 본질을 자신에게 확보하기 위한, 말하자면 하나의 실물예시(實物例示)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 본질에서 이미 소외되어 있고 그러기에 구원이 필요로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운명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 비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하고 특수한 운명에 대한 해석과 소개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원형이 아니다. 그노시스(영지 靈知)에 있어서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구세주도 아니요 구원이 필요한 구세주도 아니다.
영지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유의한다면, 영지주의적 표상들은 기껏해야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표현하려는 동원된 2차적인 표상을 함께 사용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신약성경의 기원을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찾아야 한다. 영지주의와는 달리 이 테두리 안에는 하나의 역사적 사고(思考)가 확립되어 있다.
구약성경 및 유대교의 표상에 의하면 구속사상 중요한 인물들과 사건들은 관념적으로나 혹은 묵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이 세계 안에서 실재해 있어온 바이다.
묵시문학 계통의 표상에 의하면,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인자(人子)’라는 인물과 그의 할 일과 연결되어 있다.
지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러난 것이며 그분의 반영이며 모상(模像)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조언자로서의 구실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만물의 어미’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기독교의 교부신학은, 경전화와 교리화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제도화와 함께 전개된 교부학과 그리고 교회 밖 이교도들의 공격에서 교회를 방어하기 위한 호교론으로 구별될 수 있다.
먼저 사도 교부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초대교회의 열광적 환상들이 다소 가라앉으면서 소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일정한 규범이나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런 필요성에 의거하여 경전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교리와 신조의 정립도 포함되었는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나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100년 경 사람) 등이 당시 이를 주도한 대표적 교부들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신과과 기독론의 정립에 힘을 쏟았는데 당시 이교도들과의 관계에서 신의 유일성 개념 확립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고 그 유일성 안에 절대성, 창조성, 그리고 전능성이 개념들을 포함시켰다.
특히 기독론에서는 영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가 그의 구원활동을 위해서 역사의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피력했다. “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침묵 가운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다”
이로써 일찍이 초대 교부시대부터 한 존재가 신(神)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중성의 선포를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클레멘트가 지적하듯이, 그리스도를 신격화하게 되면 두 가지 방식의 기독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가 아니면 아예 육체로 변하여 나타났는가? 이다.
나이 어린 기독교가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 헬레니즘 세계의 통속철학적 사상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 두 정신은 충돌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후 2-3 세기에 벌어졌던 이른 바 ‘단원설(單元說), 또는 유주론(唯主論)’과의 대결은 이 충돌의 첫 조짐이었다.
단원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결합하려던 신학적 노력들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단원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되,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힘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 힘은 비위격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가 하면 (여기에 속하는 것이 테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190년 경 사람)의 이른바 동력적 단원설이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이 특별한 출현양식으로 이해하려 했다.(여기에 속하는 것이 노에투스 Noetus, 사벨리우스Sabellius, 프락세아스Praxeas의 이른바 의태적 단원설이다.)
터툴리안은 이 마지막 양태적 단원설에 ‘성부수난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탈을 쓰고 수난을 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대결에 이르기는 기원 후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와의 논쟁과 더불어서였다.
아리우스는 기원후 260년경 리비아에서 출생했고, 오리겐의 신학적 후배인 안디옥의 루키아누스의 제자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 내지 주장은 이른바 중도(中道) 플라토니즘에 해당된다. 이 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노골적인 부정신학(否定神學)에 있었다.
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고, 출산되지 않으며, 생성하지도 않고, 기원도 없으며, 불변적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에 기본적 문제는 생성하지도 않고 분여(分與)될 수도 없는 이 존재, 곧 신을 생성과 다양이 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시키고 매개하느냐에 있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아리우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로고스’개념이었다. 여기서 로고스는 일종의 제2급 신으로서 피조물 중에 첫째요, 가장 탁월한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사업의 중개자로 파악되어 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시간에서 무(無)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가변적으로 그르칠 수 있는 존재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순전히 시련을 극복한 그의 도덕적 자질과 그 실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로고스론은 구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 로고스론이 하나의 우주론적 사별과 하나의 도덕으로 변모한 셈이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기독교의 헬라화를 의미하며 이 헬레니즘화는 사실 심각했다.
2세기 중엽에 순교자로 널리 알려진 유스티누스Flavius lustinus, Justin Martyr(100-165) 는 호교론자였다. 기독교의 사상을 당대의 마술적이거나 미신적인 풍조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정신적 사고를 제공해 주는 로고스 철학으로 보았다.
그는 기독교 사상은 삶에 의미에 관한 포괄적 진리를 가르칠 만큼 보편적인 것이어서 비록 무신론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이성에 따라 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까지 갈파했다.
말하지만 유스티누스와 같은 호교론자들은 기독교만을 옳고 다른 종교들은 거짓이라는 배타주의적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로고스가 궁극적 기준일진대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했다고 선언하다 다소 포괄적인 방식을 취했다.
신론으로 말하지만, 일찍이 플라톤의 신개념의 원형이 되었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라는 개념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창조성과 전능성을 포함하는 인격성을 지닌 유일신 사상이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영원․불변․부동․필연 등의 속성을 지닌 존재와 인격적으로 행동하는 신 사이의 긴장이다. 로고스의 보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전자의 요소, 즉 플라톤의 신개념의 요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인격신 사상은 그것 없이 기독교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절대적 요소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대가로 지불해서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이런 상황은 당대 현자들이 공격거리였고 호교론자들이 엄청난 수고를 요구하고 중대한 과제였다.
그렇다면 당시 유스티누스를 포함한 호교론자들이 해결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사변적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존적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로고스는 신의 자기계시의 원리로서, 한편 자신에 대해 자신을 나타내는 신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 신의 말씀으로서 신과 동일하지는 않으나 결코 분리될 수는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바로 여기는 헬라철학의 존재개념과 기독교의 인격신 사상 사이의 적극적 조합이 구축된다. 즉 예수님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영이 인간 예수님과 결합했다는 양자론으로써가 아니라 로고스가 친히 인간화했다는 변화론을 택함으로서 보편성과 인격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모색했다.
교회 밖의 공격이 당대의 철학사상이나 이교적 교리에 의한 것이었다면 사실상 교회 안에서의 도전이 더 크고 위험했다는 점을 다소 주목을 요한다.
특히 영지주의의 문제에서 이런 점이 더욱 절실하다. 영지주의란 지식, 신비적 합일, 성적 결합 등을 뜻하다는 그노시스를 중시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적 운동이다.
그런데 이 혼합주의 파급효과가 지대해서 헬라철학의 종교화나 유대교 사상과의 혼합을 초래했음은 물론 로마법 사상과 기독교 신학에도 스며들어갔다.
당시의 대표적 영지주의자인 마르키온은 선악이 두 영역을 철저히 구별하는 이원론을 따라 구역의 신과 신약의 신을 구별하고 이 피조세계는 악하므로 세계로부터의 초월을 뜻하는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는 영과 육 사이를 분리를 토대로 에온이라는 천상의 구원자가 육화한다는 것은 가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정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인지라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를 그토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교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거부했는가?
1세기에 교회 밖 이교도들의 공격에 대한 호교론이 로고스 개념의 적극적 수용과 변형을 통해서라면 2세기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단인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그런 호교론을 더욱 체계화적으로 사용하여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제 로고스론의 뿌리였던 헬라의 삼신론과 같은 다신교 사상은 헬레니즘의 신비주의가 강조하는 신의 초월성에 힘입어 기독교 신학 안으로 온전히 채택될 만큼 일신론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레네우스와 이에 쌍벽을 이루는 터툴리안은 위대한 신학적 공헌을 이룩한 인물들로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사도들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고 여기서 정경채택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었다.
정통파가 ‘한 하나님’을 옹호한 제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부들은 일제히 ‘한 감독’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교회의 정치 제도를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신론의 영지파적 수정론을 그 교회제도에 대한 공격이라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므로 영지파와 정통파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변론할 때에 그들은 그때마다 영적 권위에 관한 문제점을 거론하였다.
로마교회로부터 내려온 바 가장 오랜 문헌 중 하나인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약 90-100)의 서신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로마교회를 대변하는 위치에서 클레멘트는 위기를 맞은 고린도의 크리스챤 공동체에 서신을 보낸 것이다.
사실인즉 고린도교회의 모모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클레멘트는 소수의 성급하고 독단적 인물들이 그들의 직위에서 축출했으며 아무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이름 있는 사람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슬리로운 자들과 젊은 자들이 노인들과 대항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을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여 ‘반란’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축출 당한 그 지도자들에게 본연의 권위를 회복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존경하며 순종해야 된다고 경고하였다.
무슨 근거로 인하여 그런 말을 했는가? 클레멘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이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곧 모든 것들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이시며 주인이시다.
그는 곧 법을 제정하시며 반역자들을 징벌하시며 공손한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재판장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는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는가?
이에 관하여 클레멘트는 실천적인 신학을 논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적 권위를 세상에 있는 통치자들과 지도들에게 위임하신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그같은 지명 받은 통치자들은 누구인가?
클레멘트는 감독들과 사제들과 집사들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거나 머리를 숙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짓는다.
이같은 이론에 말려들어 클레멘트는 어떤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통하여 임명을 받은 교권자들을 불순종하는 자는 ‘사형을 받는다’고 경고하였다. 이 서신은 기독교의 역사상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층으로 나누는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라는 엄격한 질서에 따라 조직될 수 밖에 없었다.
성직자계층 안에서도 감독이나 사제이거나 집사이건 간의 각자의 위계 안에서도 각 사람의 서열을 정할 것을 클레멘트는 주장하였다. 각자는 반드시 자신의 지위에 해당되는 규칙과 계율을 언제나 준수해야 한다.
이 서신은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고린도에서 발생한 논쟁에 관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그들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어떤 종교적 관심사가 문제점이었던가?
그 서신은 그 문제점을 똑바로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서신의 저자가 그 문제점을 무시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마치 고린도교회를 신적 권위의 본보기로 확립할 것을 뜻했다.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인, 주님, 사령관 및 임금의 자리에서 통치하시듯이 그는 땅에서는 자기의 통치권을 교회 성직제도의 회원들에게 위임하시며 그들은 장군들이 되어 통솔하는 군대에 명령을 내린다.
또한 그가 세우신 임금들은 백성을 다스리며 법관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장의 역할을 한다. 클레멘트가 간단하게 말하고자 하는 점은 로마 이외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제2세기 초엽에 이르러 수렵하게 된 사실을 로마의 크리스챤들은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는 것이리라
놀랄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이론을 주장한 중요한 임무들은 바로 감독들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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