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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 리더에게 셀 모임을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사람은 셀 시작하면서 항상 나누기 원합니다. 태신자 명단 작성하여 이성훈 전도자에게 전해 주세요
2. 셀 맘에게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이 크듯, 셀에서는 셀 맘의 역할이 큽니다. 셀 원과의 화목과 친교에 관심을 갖아 주시기 바랍니다.
3. 셀 나눔 삶 나누기 :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서 일어난 사건(경험) 나누기 내 가정 삶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이야기 말씀 나누기 : 오늘 말씀에서 내가 받은 은혜 나누기 오늘 말씀에서 새롭게 안 사실 전도 나누기 : 한 주간 전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
5월 25일은 전야제 26일은 “새생명 전도축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전도”(막1:36)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고,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막1:17)고 명하셨습니다. 목동교회는 매년 전도에 최선을 다합니다. 목동교회 는 앞으로 “사도행전 29장 그 교회 우리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영혼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기도 모임 5월 3일 금요일 8시 지도자 기도회 5월 17일 – 18일 오산리 기도원 5월 24일 금요일 9시 교회 전체 기도회
부서별 준비 청년부 4월 27일 수변길 걷기 5월4일 런닝맨 학생부 5월 4일 야구장 5월 11일 드림 콘서트 전체 5월 5일 태신자 명단 제출 5월 11일 게스트 준비모임
목회자 일정 5월 7일 교역자협의회 임시총회 5월 8일 등촌중학교 교직원 설교 5월 13일 3개 지방회 체육대회
5월 26일 새생명 전도축제
제목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절
오른손을 높이 들고 믿음으로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위에 차고 넘치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오늘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 치매에 걸린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신은 농약을 먹고 죽은 70대 부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귀찮아서 할아버지가 살해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건강할 때는 괜찮았지만, 병에 걸려 더 이상 아내를 돌볼 수가 없게 되자,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고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시간이 좀 지났지만, 외국계 은행의 30대 젊은 지점장이 자살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성공을 위해 자신의 인생전부를 그 직장에 쏟아 부으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은행 지점장이 되고, 넓은 아파트와 고급 외제 승용차를 가진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자살을 했을까요?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라는 무거운 짐을 견디다 못해,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짐이 무겁고, 또 얼마나 그 삶이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겠습니까? 이처럼 오늘날, 세상 살아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참으로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새빠지도록 수고하고 노력하였지만, 쥐꼬리만한 돈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고달픈 우리 인생입니다. 남편문제, 자녀문제, 물질문제, 건강문제, 성적문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다 짐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는 근심 걱정이 없다”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진 대로,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부족함이 없을 줄 알았는데, 대통령 자리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모세’라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오래 산다고 해보았자, 수고와 슬픔만 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분이 계십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삶의 짐이 너무 많고, 무거워 주저앉고픈 사람이 계십니까? 오늘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힘든 자들,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 다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쉼을 얻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만나 쉼을 얻고, 모든 문제를 해결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스무 살 먹은 여대생이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신용카드를 만들게 되었고, 쓰다 보니 한도액을 초과하여 카드가 정지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카드를 만들어 현금서비스를 받아 메꿨습니다. 결국에는 카드가 빵구가 나, 날마다 은행에서 “돈 갚으라”고 전화가 옵니다. 급한 마음에 사채업자의 돈을 썼다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나중에는 사체업자에게 시달리다가 ‘신체포기 각서’까지 썼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어떠한 사람이 필요할까요? 급하다고 사채업자를 만나게 되면, 그의 인생은 정말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행에서 면제를 해준다든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을 만나면, 그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대상자가 누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고, 또한 우리의 무거운 짐들을 벗게 해주실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찾고 계실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고의 짐을 진자’와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고의 짐’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스스로 일을 만들어 고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키지 못할 율법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 수가 무려 613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지키는데 더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하신 말씀이 본문 앞에 나오는 11장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왜 그렇게 사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너희가 왜 율법에 얷매여 힘들게 사느냐? 나를 통하여 자유함을 얻으라” 이런 말씀입니다. 이것이 비단 이들 뿐이겠습니까? 오늘날도 이처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교회에 갔다 왔어. 이제 나는 복을 받을꺼야” 이렇게 어떤 형식과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를 못 갔는데 벌을 받으면 어떻하지...” 불교가 그렇고, 천주교가 그럽니다. 나의 선한 행위로 죄사함을 얻고, 어떤 행위를 통해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유함을 얻고 행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무거운 짐’이란, ‘타의에 의해서 짐을 진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여대생은 자기 실수로 당한 고난이었다면,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이란, 자신이 원치 않는데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부잣집 아가씨가 남편을 잘못 만나는 바람에 그의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또 어떤 자매가 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 때문에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집은 원치 않는 아이 때문에 매일 우울한 가정이 있습니다. 알고 봤더니, 아이가 정신지체장애자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 중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남편과 아내의 짐입니까? 아님 자식의 짐입니까? 물질에 대한 짐, 질병의 짐, 시어머니의 짐입니까? 이때 예수님을 찾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ꁕ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ꁕ” 그렇습니다. 괴로울 때, 고달프고 힘들어 할 때 예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돈 있는 사람만 오라고, 능력 있는 사람만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자도 오고, 가난한 자도 오고, 괴롭고 세상에 시달린 사람들 모두 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자유하고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그 짐을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쉬게 한다’는 말은,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 맡기면, 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하였고-, 시편 37편 5절에선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또 55편 22절에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하셨습니다. 또 찬송가 363장에는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도와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그렇습니다. 내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여 여러분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가게걱정, 자녀걱정, 결혼걱정, 물질걱정, 사업, 직장, 앞날, 수금문제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오늘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내가 세상에서 그렇게 집착하던 것, “이것 없으면 안 돼” 하던 것, 오늘 다 내려놓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해결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동영상 하나 보겠습니다. 이 동영상은 일찍 남편을 잃고서 3명의 자녀를 키워, 모두 미국 명문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 시킨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돈 일원 한푼 없이, 아이 세 명을 기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미국의 명문 대학교라니요? 본인의 간증대로, 이런 기적은 빈 털털이가 된 여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만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대신 그 짐을 지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어찌 이 여인뿐이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해서,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적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인해 걱정이나 스트레스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린 자녀가 자기 부모를 철떡같이 믿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철떡같이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대로 해결함도 받고, 또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 19일
마태복음 5:13-16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에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이 이 ”세상의 부패“를 전제하듯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합니다. 가끔 옥상에 올라가 밤에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밝은지 모릅니다. 서울의 야경을 보면 상상하지도 못할 환상의 나라에 와 있는 듯한 이런 야경의 황홀함이 서울의 밤을 밝히고 있지만 점점 이 세상은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점점 어둠으로 짙어만 가고 있는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따라서 빛 된 자로서 빛을 비추어 나갈 수 있는 이런 믿음의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소금이 썩어 가는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면서 강력한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여 불변하며 각가지 맛을 내어야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이 험한 세상 속에 비추어야만 되는 것이지 빛이 어두움을 비추지 못한다면 빛의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이 어둡고 캄캄한 밤과 같이 어두운 이 세상에 비취는 빛이 되어야만 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두운 곳에 우리가 빛으로 남아서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이런 빛 된 믿음의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1) 우리는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14절 롬13:12, 눅22:53) 롬 13:12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을 갑옷을 입자”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점점 밤이 깊어 어두움에 이르더니 점점 세상을 덮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더욱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 속한 자로서 행하여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생활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니 무슨 말입니까? 전기가 얼마나 발달되었으며 또한 지식은 얼마나 발달되었습니까? 현대인의 문화와 지성은 얼마나 잘 계몽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어둡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을 보십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인 어두움을 보십니까? 왜 어둡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이 말씀을 하신 주님 자신이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빛을 얻으리라”(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그러나 그 분은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반드시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태양이 사라질 때, 달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그 달의 역할을 우리에게 일임시키신 것입니다.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빛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나 자신이 빛이 될 수는 없지만, 나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반사(反射)하는 영광스러운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혹 우리 가운데 지난날 어두움 속에 살던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주안에 있는 자는 빛의 자녀로서 빛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빛 된 참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믿음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라고 말씀했습니다. 흠없고 순전함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빛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이 어느 곳 어느 구석에서라도 빛을 발할 수 있는 빛 된 사명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가정에 빛을 비춰야 합니다.(15절, 딤전 5:18) 본문 15절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가정에 빛을 비추어야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 말씀은 가정에 빛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참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면 먼저 내 가정에 빛을 비추는 빛 된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만 합니다. 딤전 5: 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한다면 나의 친족 특히 나의 가족을 잘 돌아보아서 빛을 비출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한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그렇지 아니한 자는 어떤 면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정에서 빛을 비추지 못하면 내 가정의 천국 문을 막는 자가 되므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장본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내 가정을 정말 사랑해서 믿음의 빛을 비추어서 그 빛 앞에 온전히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복된 가정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어떤 시골 마을에 교회를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주일만 되면 두 형제는 먼 교회를 향해서 갑니다. 그런데 농촌에 할 일도 많은데 주일만 되면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 밭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부모는 돌아오는 아이들을 때리면서 다음부터는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래도 또 교회를 가니까 부모가 교회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아이들을 불러서 ‘내일은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다 따고 밭을 잘 갈아 놓아라’고 합니다. 저녁을 먹고 이 두 형제가 고민을 합니다 내일은 주일인데 고민을 하던 두 아이가 밤에 몰래 밭에 나가서 부모님이 시킨 그 일을 밤새도록 일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침이 되어서 밭에 가자고 아이들을 부르지만 아이들이 없자 부모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오기만 하라 단단히 혼을 내서 다음부터는 교회에는 얼씬도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고 밭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밭이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킨대로 밭일을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추나무 나무마다 피가 맺혀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밤새 이 고추를 따느냐고 손이 부러트고 피가 나서 나무 나무마다 피가 맺혀있었습니다. 부모의 가슴이 뭉클해지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 예수를 영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촛불을 처음 켰을 때에는 그 불빛이 희미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온 방을 비추듯 우리들이 한 자루의 초가 되어 녹아질 때 여러분의 가정의 영적인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 날 것을 믿고 가정에 빛을 비추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갈6:10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라는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빛 된 믿음의 생활가운데 거하는 가정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3) 사람들 앞에 비춰야 합니다. (16절,살전5:7,요3:17,요일2:11) 어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닙니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무슨 이유로 등불을 가지고 다닙니까?” “이 등불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나에게 부딪혀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빛은 나와 타인에게 동시에 은총을 제공합니다. 이런 빛이 우리들 속에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를 가리켜서 “사람들 앞에 비추는 빛”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5: 5절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라 말했고, 빌레몬서 1:6절에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게 미치도록 역사함”이라고 말하심은 선한 일을, 착한 행실로써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 이 변화는 하나의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전환점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이 나를 빛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 내가 빛이 되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내 영혼과의 진정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참으로 그리스도 에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이 빛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1) 이 빛은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시119:105, 요12:35)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을 가는 도중에 광야를 거치게 되었는데 사막의 길은 방향을 잡기가 대단히 어려운 곳입니다. 40년의 광야 길을 하나님은 방향을 지시해 주기 위하여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불기둥이 인도하는대로 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등대의 역할은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망망대해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어부들에게 항구로 돌아가는 뱃길을 알려주기 위해 등대 불이 비췸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등대 빛을 보고 뱃길을 바로 잡으며 원하고 바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삶의 방향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향하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떠한 길을 걷는 것이 바른길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의 안내자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것은 빛이 올바른 위치에 놓여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등불이 등경 위에 있지 아니하고 발아래 놓이거나 그릇에 가리워져 있다면 불은 켜나마 나 이듯이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줄 것이 없다면 그 빛은 이미 꺼진 것입니 다. 빛을 발하지 않는 등은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겉치레 일 뿐입니다.
둘째는 불을 끄지 않고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 기름 없는 등은 아닙니까? 이 기름이 혹시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한번 살 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름이 떨어진 상태로는 제 아무리 등이 아름다워도 빛을 더 이상 발 할 수 가 없습니다. 2) 결실의 역할을 합니다.(16절, 요1:3,4) 곡식과 과일 등 모든 식물은 빛을 잘 받아야지만 잘 결실 하는 것입니다. 여름에 과일들 중에서도 태양 빛을 잘 받은 과일들은 잘 익어서 참외나 수박처럼 맛이 달콤하지만 장마철에 과일을 먹어보면 제 맛이 안 나고 싱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빛을 잘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이라는 것이 결실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농업 진흥청의 한 전문가가 말하기를 수확기에는 단 하루라도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수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 때의 하루 햇살은 오 만석의 결실을 하게도 하고 못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벼농사에 있어서 하루의 햇빛이 오 만석의 결실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빛이 결실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빛 된 믿음의 성도로서 결실이 맺어지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매 맺는 신앙이 되어져야 합니다.
▣ 아프리카에서 충성스럽게 선교를 하던 선교사 한 분이 일생을 선교에 바치고 자신이 선교했던 그 땅 아프리카에서 죽었습니다. 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 충성스러운 선교사의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 놓았습니다. “당신이 올 때에는 어둠이었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날 이 시대는 참으로 빛을 발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어두운 당신의 가정은 당신을 요구합니다. 어두운 당신의 직장은 당신을 요구합니다. 어두운 당신의 사회는 당신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 되었는가? 주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들어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선하고 착하게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는 사람들이 우리의 가치가 정말로 존귀하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인격자,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성품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여부를 빛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는 귀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적인 역사, 즉 소금과 같은 희생되어지는 모습과 외적인 빛의 역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와 같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어두운 세상과 가정과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5월 12일 설교 펌
♡♥♡ 행복이 가득한 집 / 엡5:22-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