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막걸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 속에 자리해온 소박하고 친근한 민속주다. 막걸리는 먹고 취하기 위하여 마시는 술이라기보다 기쁠 때 기쁨을 더해주고 슬플 때 슬픔과 괴로울 때 아픔을 풀어내는 절실한 벗과 같은 술이다.
조선 영조 때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부녀자들이 알아야 할 생활의 다양한 상식을 써 논 책으로, 맨 처음 주식酒食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식食보다 주酒가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여러 나라 술 이름, 고금의 술에 대하여, 술 이름 사기酒小史, 술잔 이름, 술 마시는 이야기, 술 빚는 법, 여러 가지 꽃으로 담는 술 등 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보아도 술문화가 음식문화보다 앞서고, 잔치, 제사, 상사 때에도 술은 없어서는 안될 음료로, 술을 빚을 줄 모르면 음식을 못하는 것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부담이었던 것 같다.
술 빚는 법을 보면 재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곡주인 막걸리를 빚는 법과 별로 다르지 않아 기본이 곡식과 발효제로 쓰는 누룩이었다. 「계림유사」에는 맵쌀로 술을 빚었다는 기록과 「고려도경」에는 술의 색이 무겁고 독하며 빨리 취하고 빨리 깨고 누룩으로 빚었다고 하고, 조정에서는 맑은 술을, 민가에서는 맛이 묽고 색이 진하다고 하여 청주와 탁주의 종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이화주, 백주, 천일주, 화주 등의 종류도 나온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우리 막걸리는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음직하다. 배꽃 필 때 술을 빚는 누룩을 만든다고 해서 막걸리를 이화주梨花酒로 불렸다고도 하는데 77가지 술 제조법을 기록한 ‘양주방’(1837년)엔 ‘혼돈주’란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조선 선조때 한학자인 신흠申欽의 시조에는 그 당시 술의 종류를 열거한 것으로 막걸리와 청주가 보편적인 술이었음을 보여준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할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막걸리는 발효된 뒤 막 걸러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좋은 막걸리는 단맛․신맛․쓴맛․떫은맛이 잘 어우르고 적당히 감칠맛과 시원한 맛이 있는 술이다.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여 탁주濁酒, 회주灰酒, 백주白酒, 박주薄酒라는 이름을 지니기도 하며, 양조장이 아닌 농가에서 빚은 것을 농주農酒라고 하는데, 이 농주는 땀 흘리며 일한 후에 갈증을 멎게 하는 힘도 있고 시장기도 달래주어 농민들이 즐겨 마셨다.
쌀, 찹쌀 등을 잘 쪄 낸 지에밥(술밥)에 누룩과 물로 비벼서 오지항아리에 담고 맷방석으로 덮고 이불로 항아리를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면 발효한다. 3일쯤 지나면 술이 익고, 익는 뒤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술을 거를 때 죽처럼 된 것을 휘저어 채에 거르면 막걸리가 나오고, 용수를 박아 떠내면 맑은 술이 된다. 술을 채에 거르면 찌꺼기로 술지게미가 남는다. 술지게미에 물을 부어 다시 채에 걸러 술의 농도를 조절한다. 배고픈 시절에는 그 술지게미를 끓여서 먹기도 했는데, 고려 때 시인 윤소종尹紹宗의 시에서는 술지게미를 먹는 서민의 가난이 담겨 있다.
슬프도다 유월에 심은 조 익으려면 멀었는데
아이들은 병들어 나무뿌리 씹고 있다
천장을 보고 누워 한숨만 쉬고 있는데
아낙은 머리털 잘라 지게미와 바꿔온다
그나마 쉬어서 먹을 수가 없고녀.
일제 때에도 배고픈 사람들은 양조장에 가서 술지게미를 사다가 끓여 먹고 아이들은 술이 취해 비틀거리기도 했다.
비운의 왕비인 인복대비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대비의 어머니 노씨蘆氏 부인이 술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섬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웠던 것이 연유가 되어 왕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 해서 모주母酒라 불렀다는 전설도 지니고 있다. 그처럼 가난한 농민들이나 서민들이 술지게미로 배고픔을 달랜 역사도 막걸리 속에 담겨 있다.
봄 안개비 내리는 날은/ 밤의 속살도 뽀얗다/ 맛좋은 사람들과 주점에 앉아
푹 썩어 문드러진 홍어탕에/ 막걸리 한잔 치는 건/ 홀딱 젖는 일이다.
이미 나태해진 그리움도/ 폭풍처럼 벽을 뚫는 밤/ 이 비가 그치면 단숨에
봄이/ 터지겠다// ―송희 「비 오는 날. 막걸리 한잔 치자」라는 시에서,
이처럼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다. 지금은 많은 종류의 술 제조법과 서구식 술들로, 서민들도 잘 마시지 않는 막걸리가 되었지만 막걸리를 먹는 집을 흔히 대포집이라고 했는데, 그런 집에서 막걸리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담겨 나오고, 젓가락 장단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의 한 맺힌 노랫가락이 있어야 맛이 난다. 도토리묵과 파전, 때론 김치뿐이어도 그래도 꿈과 낭만이 젖는 술이다. 옛사람들은 길을 가다 주막이나 술청에서 쉬어가며 술을 마셨다. 그곳에서는 사발로 술을 팔았고, 주모는 술을 퍼주면 머슴은 안주를 들고 다니며 술먹는 나그네에게 주며 빈 사발의 수로 돈을 받았다. 그때는 술청에 서서 술국을 먹으며 막걸리 한 사발로 시장기를 달래고 길을 갔다. 막걸리는 어둡고 괴로운 시대를 지나가는 답답한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역할도 했다.
나그네 주인이여/ 평안하신고/ 밑에 앉힌 술단지/ 그럴 법 허이/ 한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저 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같은 나그넷 길/ 멀기도 허이/
이렇게 시작하는 시인 오상순의 한잔 술은 이처럼 끝없이 방랑하는 나그네의 위안으로 술이 있었다. 술이 좋아 술을 마시는 이태백이 어찌 없었겠는가만은 막걸리는 어두운 시대를 지나는 젊은이들의 가슴에 위로가 되었고, 우리의 희로애락을, 한과 정을 담아냈다.
외가에서도 여름에 밀농사를 지어 그 밀을 맷돌에 갈아 밀가루를 빼고 나면 밀기울이 남는데, 그것을 물에 버무려 틀에 넣고 꼭꼭 밟아 쑥을 베어다 덮고 띄워 누룩을 만들었다. 그것을 빻아 가루로 두었다가 술을 빚을 때 썼다. 쌀이나 찹쌀 등을 시루에 쪄서 식힌 다음 그 찐 밥에 누룩을 섞고 항아리에 담아 두면 술이 익고, 익은 술을 10여일 놔두면 맑은 술이 맨 위에 뜨는데, 그것을 따로 떠내면 청주, 약주. 맑은 술이라고 했다.
동네의 잔치가 있든가 갑자기 부고가 날아올 때면 부조로 막걸리 한 동이를 잔칫집이나 초상난 집에 보냈다. 봄철 농사가 시작되는 논갈이 논두렁 가래질에도, 온 마을이 모두 나서서 논에 갈을 꺾어 넣을 때에도 막걸리는 농부들에게 지치고 피곤한 농사일을 힘들지 않게 돕는 역할을 했다.
예전에는 그 지방을 대표하는 이름난 술도 있어 자랑을 삼았다.
평양의 문배주, 면천의 두견주, 경주 법주, 서울 송절주, 한산 소곡주, 전주의 이강주, 안동의 송화주, 제주의 오메기술, 등 지방마다 대표적인 민족주들이다. 그래도 막걸리는 이들 술보다 제일 맛좋은 술이리라.
(변해명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