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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이 1960~70년대 까지 전국 7대 도시에 들 정도로 명성을 가졌다가 쇠락(衰落)한 이유는 공업화의 기로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행정적인 정책 부재도 물론 있었지만, 구 시가지의 불편한 인프라와 주거 환경으로 인해 새로운 주거지대 로 대두한 바로 이웃 신흥 공업도시 창원의 폭발적인 성장에 따른 마산 구 도심지 공동화 현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 한 데 주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슬럼화 되어가는 서구 대도시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역을 재개발하여 친환경적인 주 거, 특성화된 지역으로 거듭났던가를 벤치마킹하지 못하고 바로 이웃 도시와 같이 공단 유치와 컨테이너 항만 건설등 하드 웨어적 토건주의 정책으로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지방행정 당국자는 물론, 정책 입안자들의 근시안적인 대처도 문제였지만 관과 민 모두 공동 커뮤니티 구성원으 로서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의식부재도 한 몪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 ~~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1970-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은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이른바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 이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20년사』에는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양덕동 석전동 산호동 일대에 살던 마산시민들의 곡창이었고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1967년에 방추(紡錘)가 22,400개였던 것이 1979년에는 무려 344,000 추로 세계 최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고용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거대기업을 둘러싼 2차고용 3차고용의 효과가 얼마였겠는가.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의 결과다. 녹아내리게 했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는데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되었다. 고등학교 학급 수가 120, 한 학년에 40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 운 규모다. 이른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였다.
답을 찾지 못한채 길을 걷던 중, 눈 앞에 한가닥 실마리가 보였다. <건설 초기 모습> <확장 또 확장> <고향에서 가져운 팔도잔디를 가꾸는 한일여고생들> <최고 전성기 때의 한일합섬, 오른쪽 운동장이 한일여고 팔도잔디> 그것은 아파트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겠지만, 한일합섬이 몰락하게된 원인 중 한조각은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 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 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 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도 양덕동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은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모두 ‘한일’이나 ‘한효’가 들어간 이름이었다. '한일'이야 회사명이지만, ‘한효(翰曉)’는 한일합섬의 설립자인 김한수 회장의 호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 집을 짓기만 하면 재미를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 거대기업도 집 장사로 그 시절 재미를 좀 보았고, 사주(社主)는 쉽게 돈버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자신을 있게 한 기존의 섬유산업은 수명이 다해, 저 멀리 퇴조의 징후가 보였지만 미래를 위한 진지한 모색도 과감한 투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장사의 단 맛에 빠져 본격적으로 공장규모를 줄이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제품창고 헐고 아파트 지어 ‘1차’ 기숙사 헐고 아파트 지어 ‘2차’ 모노마 탱크 헐고 아파트 지어 ‘3차’ 서쪽 편 공장 헐고 아파트 지어 드디어 ‘4차’까지.
들었다. 비례해서 마산경제도 점점 쇠락해 갔다. ‘한일 5차’, 바로 그 옆에 마지막 남은 터는 ‘한일 6차’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긴 시간을 한눈에 보면,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섰고 다시 그 모든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거대기업의 몰락,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의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온갖 곳 보이는 땅마다 ‘아파트와 아파트’로 채우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이 한일합섬 몰락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물든 한일아파트의 수십층 높은 벽이 마치 몰락한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잔영처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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