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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시
MBC 특별다큐멘터리 《삼국유사, 일연의 꿈》이 올해 2월 29일 방송됐다. 특별다큐 제작은 일본 시네마현의 작은 섬 오키의 바닷가에서 정령주(精靈舟 :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배)를 신라로 보내는 기원 배를 띄우는 것으로 출발했다.
오키 도서관에 비치된 「오키향토연구(隱岐鄕土硏究)」 책에서 “오키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한반도 신라 서라벌에서 온 것으로 전한다”고 기록됐다. 이 때문에 매년 8월 15일 고국인 한반도에 혼령을 띄워 보내는 연례행사를 가진다.
특별다큐제작과정에 확인한 시네마현 이즈모 해변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조된 사이다와 생수 및 음료수 PE 등 빈병과 프라스틱 빈 통 등이 한반도 동해에서 파도를 타고 이곳으로 떠 밀려와 바닷가에 쓰레기로 널브러져 있었다. MBC는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삼국유사』 권1 기이(記異) 연오랑세오녀』와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延烏郎細烏女의 원문을 옮겨본다.
《第八阿達羅王卽位四年丁酉, 東海濱, 有延烏郎細烏女, 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 而非眞王也〕, 細烏怪, 夫不來, 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 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來(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 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인 정유년(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 하나가 나타나면서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라며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자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찾아갔다. 거기서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세오녀 역시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윗돌 역시 그전처럼 그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왕께 아뢰고 세오녀를 왕에게 보냈더니 부부가 서로 만나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천문을 맡은 관리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린 괴변이 생겼다’고 했다. 왕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 때 연오랑은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뜻이다. 지금 어떻게 돌아가리오. 하지만 나의 왕비가 짜놓은 가는 생초 비단이 있으니 이걸로 하늘에 제사 지내면 된다’고 말하면서 그 생초를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뢴 뒤 그의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과 같이 빛을 찾았다. 그 생초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의 창고’라고 불렀으며,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했다. 한편, 영일현 도기야는 과거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로 지금은 통합 포항시의 동해면 도구리이다.
MBC는 특별다큐 《삼국유사, 일연의 꿈》을 제작하면서 이처럼 일본에서 시작해 일연이 직접 답사하여 발로 쓴 역사서를 확인하면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승려생활을 마친 마지막 사찰이자 그의 어머니가 계셨던 군위군의 인각사도 거쳤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해 11월 MBC 특별다큐제작 담당부장께서 전화가 왔다. “영남일보 신문에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머물던 암자가 비슬산 대견봉 아래 절터로서 ‘보당암’이라는 정황을 보도한 기사를 접했다”며 제작 중인 특별다큐 제목과 제작과정을 설명했다. 그 뒤 “일연이 주석했던 포산의 보당암이라면 빠트릴 수 없다”며 “이를 꼭 반영해서 1월 말까지는 제작을 완료할 계획이다”고 덧붙이면서 현장 조사 및 촬영에 협조를 당부해 왔다.
아마도 특별다큐멘터리 제작은 이미 『삼국유사』와 관련된 모든 인물과 자료 및 현지를 총동원해 다큐제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뜻밖이자 생소한 이름으로 ‘보당암’이란 절터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계셨던 암자라는 사실에 《삼국유사, 일연의 꿈》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보재암지과 보잠샘을 발견하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채록해 이를 연구 분석한 결과 이곳은 일연스님이 머물던 포산의 보당암이고, 보당암 샘터로 추정해 이렇듯 보당암은 포산의 대견봉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담당부장께서 자료를 요구해 현지 암자 터까지 함께 넘겨주면서 현장답사와 취재 때도 동행했고, 영남일보는 이를 2015년 9월 18일 커버스토리 전면에 실어 보도했다. 아래 영남일보 보도 기사 제목과 부제 및 기사 전문의 주요골자에서 보듯 벌써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해 지면을 옮긴다.
〔 커버스토리 ① ‘스토리가 있는 동굴’ 을 찾아가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이곳이 보당암 석굴 일연 스님의 정진처?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팀이 지난 10일 비슬산 대견사 아래 50m 지점 암벽 중간에 정방형의 석굴을 발견했다. 권영시 전 앞산공원관리소장은 이 석굴이 보당암과 관련이 있으며 굴 안에서 일연 스님이 수행 정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각사 보각국존비에 ‘일연이 보당암에서 주석하며 참선했다’기록권영시 전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 비슬산 대견봉 암벽 아래서 발견주변에 절터와 샘도 있어…“대견사와 보당암은 별개라는 증거” 주장
‘대견사의 전신은 보당암이 아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될수 있을까? 권영시 전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63)이 비슬산 대견사로 가는 옛 등산로 대견봉 산정부에서 보당암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 보당암으로 창건된 사찰이란 게 정설이었다.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팀이 확인에 나섰다. 지난 10일, 권 전 소장과 정만진 대구지오 자문위원 등은 커버스토리 ‘대구지역 동굴을 찾아서’ 취재차 비슬산에 올라가 보당암으로 추정되는 절터와 샘, 석굴을 확인했다. 비슬산 아래에서 가면 휴양림 연못에서부터 직선으로 올라 임도 끝 힐링 쉼터(옛 절터)를 지나 산정부 좌측으로 오르는 8부 능선에 위치한다. 대견사에서 가려면 사찰 뒤 나무 데크로 된 서쪽 능선을 따라 대견봉 방향 ‘뽀뽀바위 전망대’에서 아래쪽으로 50m쯤 내려가면 찾을 수 있다. 이곳은 현재 등산로가 아니다. 산길은 물론 토끼길 흔적도 없다. 잡목과 덤불로 우거진 밀림을 헤치며 바위틈을 비집고, 때론 엉금엉금 기어가야 하는 난코스다. 수년 전 권 전 소장이 답사한 적이 있지만 그사이 한 번도 가지 않아 길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이날 일행은 오전 ‘보당암 석굴 찾기’ 1차 시도에 실패하고, 오후 늦게 대견봉 남편 암벽 쪽으로 내려가서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석굴 20m 위쪽 지점에 절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있었다. 평지에는 옹벽과 기와, 도기 파편이 널려있었다. 석굴은 여러 개의 바위가 중첩된 중간에 위치했으며 높이와 폭은 약 1.5m, 길이는 3m 가까이 되는 정방형 구조다. 석굴 안으로 두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석굴 서편은 좌선이 가능할 정도로 바닥이 평평했다. 또 천연 샘물이 있어 사람이 기거해도 될 듯했다. “수년 전 등산로를 내고자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 인근에 허물어진 움막이 있었습니다. 미관상 보기가 흉해 공익요원과 함께 철거했지요.” 권 전 소장은 당시 이 석굴이 보당암 석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재작년 ‘삼국유사 재해석과 왜곡 사이’를 주제로 열린 한 세미나에 참석한 이후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발표자였던 김정학 전 천마아트센터 총감독이 일연 스님이 대견사에 가고자 입산해 안주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군위 인각사 보각국존비에 ‘일연이 포산(현 비슬산) 보당암에 주석(駐錫·입산 후 안주)하며 참선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었다.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 건립한 사찰로 신라~고려~조선을 거치면서 모든 문헌에 그 명칭 그대로 기록됐을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보당암이 대견사의 전신이 돼버렸더군요. 그래서 사실 확인에 들어갔습니다.” 권 전 소장은 비슬산과 접해 있는 달성군 유가면 용3리 주민을 찾아 일일이 탐문한 결과, 하나같이 보당암 추정지를 ‘보재암지’라 부르고 샘을 ‘보잠샘’이라 부르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 삼국유사를 다시 뒤졌다. “삼국유사 피은 8편 ‘포산 이성’에 도성과 관기 두 대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도성은 북쪽에 있는 굴에서, 관기는 남령의 암자에 기거했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이 기록으로 추정한다면 대견봉 정상부 남쪽 인근에 기거했을 것이고, 그 암자는 보당암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실제 도성암과 관기암 절터 일직선상에 보당암이 있거든요.” 권 전 소장은 일연 스님의 득도처가 비슬산이고, 비슬산 보당암·묘문암·문주암 등지에서 약 22년간 머물렀는데 여러 정황을 추정해 볼 때 보당암과 대견사는 완전히 별개의 사찰이라고 주장했다. 동행한 정만진 위원은 “언어의 속성상 대중이 발음을 쉽고 편하게 하다 보니 보당암지와 보당샘이 보재암지와 보잠샘으로 변화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명문(銘文)기와나 문헌에 나와 있으면 쉽게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발굴을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호 위클리포유에서는 비슬산, 앞산, 팔공산 등지에 위치한 천연동굴과 인공굴을 소개한다. 〕 이상이 영남일보 전문이고, 아래 신문은 영남일보 전체지면이다.
한편, 군위 인각사의 「고려국화산조계종가지산하보각국존비」 비문에는 일연스님의 생애를 새겼다. 이 비에서 포산에 22년간 머문 암자가 보당암·무주암·묘문암이라고 기록했다. 보당암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승과에 합격한 22살에 지금의 비슬산인 포산에 와서 22년 동안 머문 암자이고, 몽고가 침입했을 땐 문수오자주를 염송해 감응이 있기를 기다리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로부터 계시를 받은 암자가 무주암과 묘문암으로 이듬해엔 거기에도 거처했다.
-보당암 석굴 내부, 사람 키 높이에다가 석굴에는 샘도 있다-
『삼국유사』 <피은 8>의 ‘포산이성’은 비슬산 남령의 암자에 은거했던 관기성사와 도통바위에서 은거한 도성성사, 이 두 성사의 축지법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서 두 성사의 움직임을 곧바로 직시할 수 있는 포산에서의 중간 자리가 대견봉의 보당암이다. 보당암으로 추정하는 절터가 바로 대견봉에 있다.
덧붙인다면 위 보각국존비에서 보당암과 함께 기록한 무주암과 묘문암 역시 필자가 발견한 대견봉 아래에 있는 두 암자 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암자 터는 문수보살이 계시한 보당암에서 지근거리이자 대견봉과 동일한 능선에 자리하고 있으며, 암자 터마다 석탑이 자리하는 것 또한 예사 암자가 아니어서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 보당암 절터와 보당암 샘터를 이미 오래 전에 발견했다고 앞에서 밝혔다. 발견 이후로 보당암의 실제자리 여부와 보당암의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 고문헌을 끊임없이 뒤졌다. 그러다가 경북대학교 고문헌실에 소장된 『동문선』을 읽다가 <보당암 중창 법화삼매참소> 글귀가 눈에 잡혔다. 이때 어느 문헌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보당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는 데서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위 참소 글귀 원문을 복사해 연구 분석한 결과 보당암의 실제자리가 대견봉 아래로 추정했고, 이를 필자의 도서 「포산(包山)서 되찾은 일연의 흔적과 비슬산 재발견」 편찬에도 언급했다.
‘보당암지를 보재암지, 보당암 샘을 보잠샘으로 불리어 온 해설 장면’
필자는 비슬산을 수없이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됐고, 고지도인 《동여비고》에도 그려지는 등 고문헌과 고지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속성사·정백사로 추정하는 절터까지도 찾아냈다. 《동여비고》에 그려진 두 사찰의 위치를 비교 추적 조사한 것이다.
-보당암으로 추정하는 암자 터-
MBC 담당부장의 요청으로 《삼국유사, 일연의 꿈》의 방송 제작에 참여하면서 필자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자료를 아낌없이 넘겨줬다. 그게 필자가 발견해 조사 분석한 보당암의 실제자리 현장, 동문선에 실린 <보당암 중창 법화삼매참소> 원문 사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콘텐츠도서로 선정된 「포산서 되찾은 일연의 흔적과 비슬산 재발견」 필자의 도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교해 만든 경북대학교 고문헌실 소장 《동여비고》 영인본 복사 고지도, 군위 인각사의 <보각국사비문>에 새겨진 일연의 생애와 포산의 보당암·묘문암·무주암 암자 기록사실, 이 외에도 여태껏 공개하지 않았던 고려시대 사찰 터와 석탑지의 현장까지 몽땅 MBC 특별다큐제작 담당부장께 넘겨줬다. 그러자 방송국에선 이를 확인 조사하기 위하여 문화재 등 전공 교수 및 기와와 도자기 전공 학예연구사 등을 초빙하였고, 함께 현장 조사까지 마쳤다.
이 후 문화재전문가들은 필자가 제시한 자료와 현장을 토대로 조사 및 연구 분석하여 보당암의 근사치를 찾아내면서 또 다른 학계 등 전문가들의 판단이 필자의 자료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동문선에 실린 <보당암 중창 법화삼매참소>-
-경북대학교 고문헌실 소장 《동여비고》 영인본 복사 고지도-
김재원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은 “대견사를 보면 누구든 아 여기는 교통 상 군사상 요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쪽은 승도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을 겁니다. 그러니까 승과에 급제해서 내려온 스님이 이렇게 번잡한 큰절에 있었겠는가, 자기수행을 위해서 조그만 토굴 같은데서 안계셨겠느나...”했고,
이종문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는 “비슬산은 삼국유사를 편찬했던 일연선사가 참으로 오랫동안 머물면서 수행하는 한편, 삼국유사의 편찬을 예비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준비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 산이다..”고 했다.
또한 필자가 추정해 주장하는 보당암 절터는 상하 축대에 두 건물이 있었다는 결론을 얻고 영상물까지 제작하여 특별다큐 방송 때 전파를 타게 했던 그런 곳이었다.
최태선 중앙승가대학교 문화재학전공 교수는 이 절터 축대를 보면서 “조선시대 기법이 아닌 고려시대 기법으로 만들은 것이고”, 발견된 기와를 시대적으로 볼 때 “전체가 고려시대, 주로 12세기에서 13세기, 14세기까지는 안가는 것...”라고 했다.
이재환 경북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손에든 도자기 파편을 가리키며 ”고려시대 조각이고 긴 병모양의 토기의 입술부분입니다. 이건 고려시대 비슷한 토기이긴 한데 어깨의 파상무늬 즉 물결무늬가 있어요.“ 라고 했다.
또 최태선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는 건물의 축대를 실측하면서 세련되고 견고한 축대는 제법 큰 건물이 있었다는 걸 말해 준다며 “대견사지 서편의 산록에 있는 터는 동서가 15m정도 남북은 2단 정도입니다만 축은 남북 남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2단의 축이 약26m, 그러니까 한단이 13m 되는 ‘암(庵)’이라는 명칭에 닥 맞는 공간이었습니다. 상단은 부처님을 모시는 주불전이 있었고, 그 앞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스님이 사셨던 곳이다. 세련된 축대조성 기법은 조선시대 기법이 아닌 고려시대 기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곳 암자 터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왓장이 동시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혹여 보당암이라는 중수 기록이 나오는 14세기를 근거로 했을 때, 고려와 조선이, 조선시대에 한번 중건되는 반증하는 자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렇듯 사실 필자가 영남일보를 통해 보당암을 제기했고, 특별다큐 《삼국유사, 일연의 꿈》을 제작하면서 ‘보당암’이라는 뜻밖의 사실을 접한 MBC는 필자가 섭렵한 자료에다가 죄다 뒤진 현장을 제공해 준 사실에 반가워했으며, 이 때문에 2월 중으로 방송해야할 특별다큐제작 일정이 그 만큼 바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1월 19일부터 12월 29일까지 비슬산에 동행하기를 여러 차례였고, 이로 인해 방송이 나가면서 그간 누구도 보지 못했던, 고문헌 속에서 잠자던 보당암이란 암자 명칭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던 것이다.
한 번 더 언급한다면 이 암자 터는 전문가들이 분석한 축대, 기왓장, 도자기 등에 서 시대적으로 고려시대의 암자 터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보당암이란 글귀 자체는 오직 군위 인각사의 「고려국화산조계종가지산하보각국존비」에서만 기록됐을 뿐, 그 어떤 고문헌에도 기록자체가 전무했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발견한 암자 터를 연구 분석한 것을 계기로 영남일보에서 커버스토리로 보도한데 이어 MBC TV에서 특별다큐멘터리로 《삼국유사, 일연의 꿈》을 방송함으로서 이제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필자가 제기한 보당암 절터를 놓고 명확한 사실적 검증을 위해서라면 영남일보에서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명문(銘文)기와나 문헌에 나와 있으면 쉽게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발굴을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과 같이 필자 역시 해당기관에서는 발굴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 특별다큐방송에서도 보당암에 대하여는 “이 암자 터는 비슬산 상단부,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합니다. 외부와 차단돼 수행하기 좋은 장소, 일연이 삼국유사를 구상한 곳, 그 역사적인 장소일지도 모른다. 보당암의 진위여부와 이에 대한 보다 면밀한 후속연구는 학계와 지자체가 함께 풀어 갈 숙제로 남게 됐습니다”고 했다.
한편, 필자는 방송이 나가고 곧바로 강화도에 들렀다. 강화도엔 일연스님이 고려 원종 2년에 왕의 부름으로 이곳 강화도 선월사에 있었으므로 그 사찰을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일연스님이 보당암에 있을 당시 무신정권 시대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 주지로 갔었고, 그 때 대장도감분소가 남해에 있으므로 판각된 대장경판의 업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강화도에는 고종 32년 최우가 창건했던 선원사의 절터도 있기 때문에 대장경을 봉안했던 사찰이라는 점에서 함께 탐방해 보고 싶어서였다.
강화군청과 강화문화원에도 들렀지만 선월사는 찾을 수 없었다. 몇 차례 더 상경해 강화도를 들락거리다 마지막에는 도감소를 설치하고 대장경을 판각해 봉안했던 선원사지를 찾아갔다. 이 절터는 낮은 산자락에 위치하였고, 발굴 작업을 거쳐 금당 터, 회랑 터 등 여러 건물지를 표기해 놓은 절터 앞에는 지금 새로운 사찰 선원사만 자리하고 있을 뿐 현재의 사찰 앞으로는 도로가 가로 놓여 있으며, 주변으로는 그 옛날 웅장했던 선원사 모습과 달리 너른 들판이 보였다.
-선원사지-
하지만 필자는 아직도 보당암의 끈을 놓지 않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고려사』를 비롯한 실록이나 고사를 정독하면서 혹 보당암이나 일연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을 놓치고 책장을 넘기진 않았나? 기대를 걸고 꼼꼼히 훑어보고 있다.(끝)
비슬산〔包山〕연구소장 권영시
*방송 장면과 사진을 수록하였으나 용량초과로 게시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