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반역자 간도 특설대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민족반역 독립국 토벌부대'
일제는 1938년 조선으로 구성된 독립군 토벌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또는 간도특설부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다.
간도특설대의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부사관과 사병은 전원 조선인들이었다.
일제가 만주에 간도특설대를 만든 목적은 ‘이이제이’, 즉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전략 때문이라고 한다.
간도특설대는 무자비한 진압 등으로 만주에서 악명이 높았다. 아래는 연변 작가 류연산씨의 저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에 나온 간도특설대의 만행.
▷1939년 5월 야간 토벌 작전 중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였다.
▷1939년 7월 자신들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 1941년 겨울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군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채를 들고 기념촬영
▷ 1941년 1월 포로로 잡힌 여성 항일부대원 4명을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했다.
▷ 1944년 4월 팔로군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를 잘라 솥에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을 만들었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라는 ‘특설부대가’에서 알 수 있듯이 간도특설대는 철저히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조선인을 토벌했던 특수부대였다.
간도특설대의 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역사학자 필립 조웰은 "일본군의 만주점령 기간 중에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그들이 점령한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북경의 동북쪽으로 이동해 모택동의 팔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도 받지 못한 채 팔로군 토벌작업을 계속 벌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팔로군측이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전투가 종식되었다.
소련군에게 쫒기던 간도특설대 대원들은 일본군이 남긴 돈을 나눠 갖고 각자 살기 위해 뿔뿔히 흩어져 한반도로 도피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대원들은 해방 후 과거를 숨기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에 들어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 군사령관, 고위 관료로 출세했다.
해병대의 경우 신현준, 김석범에 이어 김대식 등 간도특설대 출신이 사령관을 맡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자발적으로 당시의 일을 고해하거나 참회한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이 특수부대가 바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이 3년간 근무했다고 만 밝힌 '간도특설대'
이번에 죽은 백선엽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며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역시 “그때 나는 만주국 내에 특별히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창설하려는 데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지 하급 간부 요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한 처지라,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라며 해방된 이후에도 별다른 심적 부담을 느낀 흔적이 없다.
광복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무산되면서, 간도특설대 출신자들 중 상당수는 이전의 실전 경험을 십분 활용해 국군의 해병대와 육군의 지휘부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민족반역자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점이 아프다.
이 비극의 역사가 헝크러진 역사의 뿌리가 되다니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이 통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