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명 수길(秀吉).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생이다. 1903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 미국에 건너가 수년 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곧 제1·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체결되자 귀국, 항일운동을 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 로 갔다가 통감(統監) 이토히로부미 [伊博文]와 순종의 평양 순행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1909년 1월동지들과 이토를 죽이고자 평양역에 대기하였으나 안창호 (安昌浩)의 만류로 단념하고, 그해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암살소식을 듣고는 친일매국노의 암살을 계획, 12월 명동(明洞)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李完用)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청년들이 나라를 바로 세운다!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李在明) 의사
(1886.10.16~1910.9.30)
◈주요공적
○ 1906~1907 미국의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 가입, 활동
○ 1909 명동성당에서 매국적 이완용을 비수로 찌르고 일경에 피체
○ 1910 사형순국(23세)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恨)을 기어이 설욕(雪辱) 신장(伸張)하리라
- 사형선고를 받은 뒤 선생의 최후 진술 중에서(1910. 5. 18) -
1909년 12월 22일 선생은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단검으로 공격하였다. 비록 중상에 그쳐 이완용 처단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선생의 의거가 지닌 의미는 매우 컸다. 그것은 바로 직전인 같은 해 10월 26일 결행된 안중근 의거와 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안중근의 의거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일본측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면, 선생은 곧 바로 한국측 원흉인 이완용의 처단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열(義烈)투쟁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보이는 아주 독특한 투쟁방략이었다. ‘의열투쟁’이란 원래 의사․열사의 과감하고도 자기 희생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의사’란 “이기고 지고 유리하고 불리하고(成敗利鈍)”를 생각하지 않고 침략자와 불의에 대해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람을 말한다. ‘열사’란 침략자와 불의에 대한 항의의 뜻과 의지를 자결 또는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표출한 사람을 가리킨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불의에 대한 의열투쟁은 한말 국망의 위기 속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4년 2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로부터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의열투쟁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럼으로써 한국인들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독립의지와 정의감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졌다. 나아가 그러한 의열투쟁의 전통은 일제시기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에 의해 계승되어 더욱 꽃피게 되었고,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한 투쟁방략으로 자리잡아 갔다.
1904년 2월 8일 일제는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런 다음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같은 해 2월 23일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이른바 한일 공수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일제는 이에 의거하여 한국의 군사 요충지에 일본군을 주둔시켰고, 수도 서울에 ‘한국주차일본군사령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사들이 떨쳐 일어나 일제와 매국 조약을 체결한 외부대신 이지용과 외부 교섭국장 구완희 집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의열투쟁은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일제 침략자에 대한 의열투쟁은 있었다. 1896년 2월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알고 처단한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에 오면 국망의 위기 속에서 의열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이 구국운동,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일의정서」로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곧 이어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체결된 「외국인 용빙(傭聘)에 관한 협정」이었다. 흔히 「제1차 한일협약」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협정은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고문정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일제는 이같이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정치․군사적 침략을 감행하면서 한국의 재정․외교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갔던 것이다. 나아가 하야시 일본 공사는 광무황제를 위협하여 재외 한국공사관의 철수를 명령하도록 하였다. 당시 주영공사 이한응은 이러한 사정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귀국을 미루면서 임지에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권회복은 물론 자주적 외교조차 불가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한응은 1905년 5월 일제의 한국 침략을 비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런던에서 음독, 자결하고 말았다. 조국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살신성인의 마지막 수단으로 국권회복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이로써 의열투쟁은 국외에서까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은 의열투쟁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켜 갔다. 을사조약으로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인 통감이 부임함에 따라 자주적 통치권조차 위협받는 국망의 상황을 예상한 결과이다.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통해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그에 부화뇌동한 이완용 등 매국 대신들을 질타함으로서 저항운동의 파고를 드높혔다. 게다가 연이은 전․현직 관료의 자결, 순국 투쟁은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전국적인 구국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발전시켜간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등은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乙巳5賊)’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자결, 순국함으로써 구국운동의 물결을 더욱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전 참판 홍영식과 학부 주사 이상철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의열투쟁은 이제 일제 침략 세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투쟁방략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성난 민중들은 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의 집을 습격 방화하기도 하였고, 농민 원태우는 안양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오의 처단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나철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대신들의 처단을 기도하고, 친일 활동을 일삼던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구국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국외에서도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이 분사(憤死), 순국함으로써 의열투쟁의 기상을 떨친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된 이준은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국권침탈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대표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 만방에 알렸으나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울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은 1907년 7월 분사, 순국하고 말았다. 이준의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은 언론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그에 따라 그가 이루고자 했던 뜻도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제하였다. 그리고 그 부수각서에 의해 군대마저 해산시켜 민족의 무력을 말살시켜 갔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던 1907년 8월 1일,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군대 해산에 반대한 박승환의 이러한 의열투쟁은 일제에 대한 무언의 공격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장병들은 서울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함으로써 강렬한 민족의식을 표출하고, 민족 군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더욱이 이들의 봉기는 해산군인들의 의병합류의 계기가 됨으로써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간 견인차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한인 독립운동가에 의해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고용되어 친일 활동을 일삼던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이 처단한 것이다.
이 같은 한말 의열투쟁의 마지막 귀결이자 정화(精華)가 바로 안중근 의거와 선생의 의거였다. 즉,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오를 처단함으로써 인류의 양심과 민족 정의를 실현하였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던 중국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국가로부터 큰 지지와 찬양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22일 이번에는 선생이 개인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판 대표적인 매국노 이완용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당시 이완용은 총리대신으로 매국단체인 일진회와 이른바 ‘한일합방’의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던 민족 반역자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민족적 심판을 시도함으로써 꺼지지 않는 민족혼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민족대중의 각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선생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것은 고향이 이북이기도 하지만, 이른 나이인 24세로 순국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에 대한 판결문에 의하면, 선생은 1886년 10월 16일 평안북도 평양군 평양성 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평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뒤,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갔다. 그러다가 1906년 3월 미국 본토로 옮겨갔는데, 아마 공부를 더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백범 김구가 선생을 만났을 때, 장래에 목적하는 일과 과거 경력․학식 등을 물으니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공부하다 조국이 섬 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고 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선생이 미국 본토에 건너갔을 때는 공부만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을사조약 강제 체결 소식이 미국에 알려지자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내세우며 안창호를 중심으로 창립되었던 공립협회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모가 장려(壯麗)하고 미목이 청수(淸秀)하며 안광이 형형하고 이상과 지력(智力)이 명투(明透)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로 선생은 민족적 포부를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미국 본토로 건너와 곧 바로 선생은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에 동참하여 갔다고 생각된다.
선생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시기인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일제는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일제는 한국 침략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던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곧 바로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켜 민족의 자위력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공립협회는 공동회를 개최하여 매국적 숙청을 결의하고, 그 실행자를 선발하였다.
이때 그 실행자로 지원한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해 10월 9일 사이베리아 선편으로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선생은 중국과 노령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선생은 1909년 1월 이토오의 처단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즉, 1909년 1월 융희황제의 서도(西道, 평안도) 순행 때 이토오가 동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선생은 이토오를 처단하고자 평양역에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대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토오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융희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안창호가 황제의 안전을 생각하여 만류하였기 때문이다.
이토오 처단에 대한 선생의 신념은 강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동지 김병록과 함께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하였던 것이다.
이후 선생은 을사5적을 비롯한 매국적 처단을 추진하였다. 사실 이는 공립협회가 선생을 고국으로 보낸 이유이기도 하지만, 본래부터 선생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었다. 그것은 재판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거 후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이완용을 죽이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는가”라는 질문에, 선생은 “그 발의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되던 때부터 이완용을 죽이려고 생각했다”라고 대답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의거 직전 선생을 만났던 김구도 장래에 무슨 일을 하려는가 물으니, “지금 하려는 일은 매국노 이완용을 위시하여 몇 놈을 죽이고자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고 ꡔ백범일지ꡕ에서 술회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은 같은 민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5적의 처단’을 실행하기로 일찍부터 작정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늦출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1909년 11월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공포하면서 이른바 ‘합방운동’에 착수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1909년 11월 하순 평양 경흥학교(慶興學校) 안에 있는 서적종람소(書籍縱覽所)와 야학당(夜學堂)에서 여러 동지들과 몇 차례 실행 방법을 숙의하였다. 그런 끝에 이완용의 처단은 선생과 이동수․김병록이 담당하고, 김정익과 조창호는 일진회의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최종적으로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는데, 오복원․박태은․이응삼 세 사람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 및 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책임, 그리고 김용문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12월 22일 오전 11시 선생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매국노 이완용을 공격하였다. 의거 상황을 당시의 ꡔ대한매일신보ꡕ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작일(22일) 상오 11시 종현(鍾峴) 천주교당(명동성당) 내에서 설행한 비리시(比利時, 벨기에) 황제폐하 추도식에 참열(參列)하였다가 귀도(歸途)에 엄중히 전후를 경위하고 승차하야 해(該) 교회당 문전 약 6․8간 정도에 지(至)하야는 노방(路傍)에서 단발객 1인이 돌출하야 8촌 여에 한국제 회도(懷刀)로 선차 전구(前驅)의 차부를 자도(刺倒)하고 갱(更)히 약신비등(躍身飛騰)하야 차상에 좌(坐)한 이완용씨의 요부(腰部)를 자(刺)하매 씨가 도피하려 할 때에 배후로서 우(又) 기(其) 견부를 자하야 3개소에 중상을 부(負)하엿고 해(該) 자객은 평양인 이재명인데 현장에서 등시(登時) 포박되엿다더라
선생은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달려든 것이다. 그리하여 제지하려는 차부(박원문)를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선생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도망하려 하자 다시 어깨 등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선생은 정말로 확신과 신념에 넘치는 행동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즉, 선생은 “나는 모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이 거사를 행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방관만 하느냐”고 호기롭게 말하였다. 또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연창하였다. 그리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담배를 청하여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유유히 피웠다고 전한다.
나아가 일본 순사가 선생을 이완용의 관저로 데리고 갔을 때, 농상공부대신인 역적 조중응이 선생을 보고 “네가 흉행을 한 자냐”하고 물었다. 이에 선생은 눈을 똑바로 치켜 뜨고 “너 조중응은 귀중한 인사를 이 모양으로 하대하느냐”며 오히려 추상과 같은 호령을 발하고, 곁에 있는 순사를 보고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니 권연초 한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유유히 피워 물었던 것이다.
붙잡혀서도 선생은 당당하였다. 경시청에서 일본인 순사가 선생에게 “공범이 있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놈의 공범이 필요하냐. 그런 필요 없는 문제는 묻지도 말라.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하였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의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협조하고 도와준 자를 말하라”라는 물음에, 선생은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내외의 방청인들이 운집한 가운데에서 태연하고도 엄숙한 어조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통렬히 꾸짖었다. 그런 다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완용을 처단하였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결국 선생은 애국적인 변호사 안병찬의 성의 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도 선생은 최후 진술을 통해,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 하면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선생의 굳은 신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후 선생은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체제의 정식 발족을 코앞에 둔,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2월의 독립운동가」 공적 개요
이재명(李在明) 선생
(1886.10.16~1910.9.30)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재명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6년 10월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서 노동에 종사하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미 본토로 옮긴 뒤, 공립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1905년 4월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창설된 공립협회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이 의열투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공립협회에서의 활동과 이후 헤이그특사사건․광무황제 강제 퇴위․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 급박하게 전개되던 망국 상황을 목격하면서부터이다.
특히 공립협회가 국내와의 연계 활동을 강화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는 매국노를 처단할 의열투쟁의 실행자로 자원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국내는 물론 만주․노령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1909년 1월 융희황제의 서도 순행 때, 평양역에서의 이토오 처단 시도였다.
그러나 융희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이토오 처단을 실행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로 가 기회를 엿보다가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하며 나라와 민족을 판 매국노들에 대한 처단을 동지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완용을 비롯한 이용구․송병준 등이 그 주요 대상이었다.
이완용 처단 책임을 맡아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던 그를 공격할 수 있었다. 제지하는 차부를 제끼고 이완용의 허리․어깨 등 3곳을 공격하여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침략의 일본측 원흉인 이토오가 처단된데, 이어 민족 반역자에게 정의와 민족의 심판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민족적 기개는 경시청에서도, 법정에서도 유감없이 표출되어 민족대중을 각성시켰다.
결국 1910년 5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받고, 그해 9월 30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이때 나이 불과 24세였지만, 오늘날도 민족혼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첫댓글 23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신 이재명의사님! 고히 잠드소서,고맙습니다,그리고 죄송합니다.
안중근 참모중장의 이또히로부미 처단 두달 후 2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매국노에게 비수를 꽂았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 이재명
이완용이 69세로 죽기까지 그를 괴롭힌 건 심한 해소천식이다.
독립투사 이재명 의사에게 폐를 찔려 고질병이 되어 폐렴으로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