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만주’가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에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투쟁의 근원지이자 동시에 싸우면서 나라의 동량을 키워내는 작업이 이곳에 움터났기 때문이다. 명동학교(맨위), 윤동주 생가(가운데), 그리고 대성중학교(왼쪽 아래)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
만약 한민족 독립투쟁의 역사를 짙게 기억하고 있는 용정이 자치주의 주도가 됐다면 연변 조선족의 정체성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만주에 대한 기억은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된 간도, 항일운동의 공간, 이주지로서의 만주, 한민족 탄생의 공간 등으로 확대 혹은 축소되면서 복원돼 왔다. 그리고 만주와 간도라는 고유명사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한국과 중국은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간도에 대해 각기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 17세기부터 20세기 이전까지 중국에서 만주는 만주족과 그 거주지를 가리켰다.
당시 만주는 지리적으로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고 동북부 지역을 포함했다. 현재 중국은 이 지역을 동북 3성으로 부르면서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만주라는 단어는 일제의 식민지였던 滿洲國(1932~1945)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국의 만주가 포함하는 지역은 동북 3성과 내몽고 동부에다 熱河省(지금의 河北省의 承德지역)이다. 한국, 북한, 일본과 러시아 등 만주 주변의 국가들도 만주라는 지리적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내포적 의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間島 혹은 墾島라는 고유명사도 사용하지 않는다. 間島의 원래 명칭은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의미에서 墾島다. 1909년, 일본은 청나라와 맺은 間島協約에서 조선인의 주권이 삭제된 間島를 사용하면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청에 넘겼다. 그리고 일본의 만주국은 間島省을 설립하고(1934) 間島市(현재의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성 중심도시로 삼았다.
만주공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접근방식은 상상적이었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과거 부여와 고구려, 발해 같은 강건한 왕조국가에 대한
자기만족적 기억을 상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 조선 독립투쟁의
흔적들을 집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각했다.
만주국의 간도성은 현재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고 중국과 일본이 인식하는 간도의 범위도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국의 동북 3성을 간도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간도라는 명칭보다는 부여, 고구려, 발해를 만주라는 용어로 묶어내는데, 이는 중국의 동북 3성과 내몽고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합한 지역이다. 고유명사 만주와 간도는 사용되는 시기와 국가의 입장 차이로 인해 다층적인 단어가 됐다.
중국과 한국이 부여와 고구려, 발해라는 옛 왕조를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노력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만주, 간도 그리고 그 용어를 둘러싸고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주권이 직간접으로 충돌하고 있다. 지금 만주는 급변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조선족들이 연길과 중국 동부연해지역 그리고 한국 등지로 밀물처럼 빠져나감에 따라, 연변의 조선족 농촌공동체는 급격히 붕괴되었다. 연길의 조선족 비율에는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용정 등 농촌의 조선족 인구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한국의 상상과 중국의 만주공간 재편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만주공간과 이곳의 조선족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역사적 상상과 향수의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그것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상상력이 이 공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공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접근방식은 상상적이었다. 한국은 만주공간을 과거 부여와 고구려, 발해 같은 비교적 강건한 왕조국가에 대한 자기만족적 기억을 상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 조선 독립투쟁의 흔적들을 집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각했다. 그리고 민족적 차원에서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는 백두산과 묶이면서 만주공간은 성지순례의 관광경로에 포함됐다. 만주 일대에 산재한 역사 표상체들은 한국 관광객들이 소비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진정성을 부여했다.
항일유적지, 고구려와 발해지역 관광이라는 장소신화 관광은 역사의 정당성과 현대의 견고함으로 인식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한국사회는 만주공간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상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기만을 원했다. 공간에서 조선족 거주민을 분리시킨 한국사회는 청도와 같은 중국 동부연해지역으로 그들을 이동시켰다. 만주공간은 조선족의 대거 이주로 인해 더욱더 공동화돼 갔다.
만주 일대의 공동화된 공간은 한족이 채워가고 있으며,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는 각종 계획을 추진하면서 만주 공간 전체를 실질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연길, 용정, 도문을 하나의 광역시로 통합하려는 延龍圖 계획, 장춘-길림-도문을 연계해 개발개방 선도지구로 조성하려는 長吉圖 계획은, 만주에 새겨져 있는 조선인 항일운동 기억의 삭제라는 부산물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