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오산(金烏山976.6m)
<지산동 깃대봉 정상 구미정 (龜尾亭)에서 바라본 금오산 전경>
우리나라 도립공원 제1호(1970년) 금오산은 유난히 우뚝하여 거인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큰 인물 곧 일명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하고, 마루금이 부처가 누운 모습이라 해서 와불산(臥佛山) 이라고도 한다. 구미시에서 서쪽으로 우뚝한 이 산은 낙동강 부근에서 바라볼 때에 해 뜰 무렵에는 황금색이요, 하루해가 금오산 산마루에 걸리는 황혼 무렵에는 금오산은 하늘의 붉고 밝은 저녁노을과 대비되어 그늘진 산은 온통 새까맣게 보여 이런 뜻으로 까마귀 색깔을 빌어 금오산(金烏山)이라 한다. 구미 금오산(金烏山976.6m)은 밀양 삼상진에 금오산(金烏山730m), 하동 진교의 금오산(金鰲山849m), 경주의 금오산(金鰲山468m), 여수 돌산도(突山島)의 금오산(金鰲山323m)등이 있지만, 전국의 금오산을 대표하는 산으로 독립된 산처럼 우뚝 솟아 가파르고, 멀리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가까이 가보면 바위도 많다.
금오산 자락에는 즐겁지 못한 평가를 받으면서도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구국일념으로 우리의 반만년 역사에서 최초로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낸 박정희대통령의 생가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노라며 벼슬을 마다하고 금오산에 은거한,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금오산인(金烏山人)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기려 경상감사 남구암이 1768년에 지은 채미정 (採微亭;명승 제52호)) 이 있다. 조선의 인물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물 절반은 선산(善山)에서 난다는 옛 말이 있다. 금오산을 두고 한 말이다.
정상에 서면 구미시가지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고 백두대간과 가야산, 동쪽으로 낙동강건너 유학산(遊鶴山). 팔공산(八公山) 등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보호운동 발상지인 금오산 산행들머리 주차장 아래는 1946년에 준공된 금오산저수지가 있고 봄이면 벚꽃으로 장관을 이루어 볼만하다.
丹楓과 雪景을 함께 본 金烏山 山行
<오늘 산행기점 채미정 아래쪽 금오천 계곡풍경>
기상대 일기예보에 오늘오전에 비온 후 오후부터 개이겠다고 했다. 금오산 밑에 와 보니 구름이 잔득 머금어 산 아래쪽만 보인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약4.8km에 2시간30분 거리다. 정상에 오를 즈음에는 저 구름도 걷히겠지 하는 기대를 해본다. 10시20분 채미정 앞 금오천 계곡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지난지가 나흘째이니 단풍은 끝난 걸로 알고 왔는데 예상 밖에 단풍도 제법 볼만하다. 금오천 계곡을 보니 야은 길재(冶隱 吉再1353~1419) 선생이 금오산자락 구미 봉계마을에서 태어나 8세 때 가재를 보고 지었다는 시가 생각난다.
같은 입장
가재야가재야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어머니를 잃었노라. 너를 삶아 먹을 줄 알았지?
네 처지가 나와 같은지라 내가 너를 놓아주노라!
<소설이 지난 지금 뜻 밖에 단풍도 좋고>
<탐방안내소 주차장 주변풍경>
<자연보호운동발상지 비>
채미정 앞을 지나쳐 메타세콰이어 숲이 줄지어 선 도로를 따라 걷는다. 길가의 단풍나무들은 마지막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탐방안내소를 지나니 곧장 자연보호운동발상지<自然保護運動發祥地> 표지석이 있다. 1977년 9월5일 박정희대통령이 생가를 방문했다가 예고 없이 이곳에 들러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직접주우며 수행원들에게 “자연보호에 신경을 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된 자연보호 발상지다. 이어 1978년 자연보호헌장7개항이 선포되었다. 조금 오르니 쉼터가 마련된 영흥정(靈興井)샘터가 있다. 대개 산에 약수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데 지하 암반수라는 이곳에는 물이 있다. 그리 목마르지도 않는데 물맛을 본다. 물맛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산행을 하다가 목이 심히 탈적에는 계곡물도 마시는데 그것에 비하면 얼마나 소중한 샘물인가?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히 젖은 계단 길을 오르니 금오산성(金烏山城;경상북도기념물 제67-1호) 대혜문(大惠門) 앞이다. 금오산성은 내성2.7km, 외성3.7km로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중수를 거듭해 왔다 한다. 옛 금오산성마을에 고종 때 건립한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세워져있다.
<신라의 도선국사가 입산수도 했다는 도선굴(道詵窟)의 기도객>
대해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폭포소리가 들리는 지점에 갈림길이 있다. 우측은 도선굴로 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대혜폭포다. 나는 도선굴을 거쳐 대혜폭포로 갈 참이다. 내가 금오산에 올적마다 들리는 곳 가파른 길로 올라 바위벼랑을 타고 나가면 바위 벼랑에 있는 도선굴이다. 간밤에 내린 비로 얼어붙어 매우 미끄럽다. 도선굴(道詵窟)이다. 신라의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입산 수도했다는 굴이다. 이곳은 크게 두 개의 굴이 있는데 그중 도선굴 안에는 좌우 두 개의 굴이 또 있다. 각각 촛불을 켜놓고 남녀10여명이 기도중이다. 한쪽 굴에는 불상까지 모셔져 있다. 인간 세상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마는 그렇지 못하는 문제도 많다.
<일명 명금폭포(鳴琴瀑布)라고도 불리는 대혜폭포(大惠瀑布)>
<할 딱 고개 바위 전망대에서 건너다본 도선굴 옆에 또 하나의 굴>
도선굴에서 내려와 대혜폭포(大惠瀑布)다. 이 폭포는 금오산 골짝을 거문고 타는 소리로 울린다 해서 일명 명금폭포(鳴琴瀑布)라고도 한다. 산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일반관광객은 대개 이곳까지 왔다가 내려간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왔지마는 이제부터 정상까지는 급경사를 올라야한다. 계단을 타고 오른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설경이 좋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할 딱 고개까지만 갔다가 내려온단다. 급경사를 올라 한숨 쉬는 곳 할 딱 고개이다. 계곡 건너편 도선굴 주변이 보일뿐 정상부는 온통 먹구름으로 가려져있다.
<약사암 일주문 (東國第一門)앞 바위에서 바라본 설경>
할 딱 고개에서 부터는 급경사 눈길이다. 산 아래에서는 바람도 없었는데 고도를 높일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눈꽃을 다 날린다. 눈꽃이 떨어진 나뭇가지엔 상고대가 대신한다. 이윽고 정상아래 약사암 일주문 동국제일문 앞이다. 바위에 기대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먼 곳은 시야가 흐리지만 가까이는 설경이 좋다. 구름이 걷혔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잔뜩 구름이다.
<약사암 앞의 풍경>
계단을 타고 약사암으로 내려간다. 약사암(藥師菴) 주변은 금오산의 백미이다. 때문에 금오산에 오면 필히 들르는 장소인데 오늘은 한가하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구미시가지와 낙동강 그리고 건너편 유학산과 팔공산이 바라보여 조망도 좋은 곳이다. 다시 일주문을 나와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976m)이다. 정상에 시설물이 있어 철책선 바깥에 정상석이 있다. 나는 경부선 열차나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적에는 항상 구미시가지 서쪽에 우뚝한 금오산에 눈길이 간다. 때문에 금오산이 잘 보이게 상행 시에는 왼편에 하행 시에는 오른편 좌석 표를 산다.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1712~1791)선생의 시가 생각이 난다.
白雲吟 (백운음)
白雲有起滅 (백운유기멸) 흰 구름은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靑山無改時 (청산무개시) 푸른 산이야 그 모습 바꿀 때가 없지
變遷非所貴 (변천비소귀) 이리저리 변하는 건 좋은 게 아니야
特立斯爲奇 (특립사위기) 우뚝한 그 모습이 아름다운기라
<금오정(金烏井) 앞에서 올려다 본 정상 일대의 풍광>
정상일대의 통신 탑들도 찬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꽁꽁 얼어 긴장된 모습이다. 사람도 벌벌 떠는 데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불안해서 떨고, 몰라서 떨고, 겁이 나서 떨고, 몸이 아파 떨고, 추워서 떤다. 나는 지금 떨고 있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시리다. 두꺼운 장갑도 갖고 있지만 정상에 오래 머물 것이 아니라서 견뎌보는 중이다. 혹한의 날씨가 아닌데도 바람이 심하게 부니 새파랗게 질려 추워서 떨었다. 아직도 추위에 적응이 아니 되었나? 정상에서 철책선을 따라 반 바뀌 돌아 남쪽 돌탑이 있는 바위봉에 올랐다. 여기서 약사암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나는 그것을 알기로 미끄러운 눈길을 헤매고 찾아왔다. 시야가 흐려 아쉽다. 여기에 올 때쯤이면 구름이 걷히기를 바랐는데 13시가 가까웠는데도 구름은 여전하다. 산 아래서는 정상에 오를 때까지 구름이 걷히지 않기를 바랐는데 막상 정상에 오고 보니 구름이 빨리 걷히기를 바란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서도 이렇게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같은 문제를 두고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니 생각이 달라져 인간세상 다툼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정상남쪽 암봉에서 내려다 본 금오산의 백미 약사암 주변풍경>
이제는 기약 없이 구름이 걷히기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 하산이다. 앞으로 하산 길은 정상~산성마을 금오정(金烏井)~ 대해폭포~탐방안내소~주차장 6km에 미끄러워 2시간 거리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성마을에서 올라오는 젊은이를 만났다, 산행 중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그는 미끄러워 힘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불쑥 내어밀며 사진 한번 찍어달란다. 이럴 경우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은 없다. 바람은 불고 장갑을 껴도 손이 시린데 장갑을 벗어야하니 번거롭기는 짝이 없다. 그렇지만 선의의 요청을 어찌 거절하겠는가?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부탁을 받고 서로가 안전산행을 기원하며 작별하고 옛 산성마을에 내려오니 고종 때 건립했다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있는데 비명은 보이나 비문은 마모되어 보이질 않는다. 바로 앞에 금오산성 성안 고산습지가 있다. 여러 개의 습지가 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왠지 낮선 느낌이다. 예전엔 그냥 늪지대였는데 오늘 보니 바닥을 긁어내어 저수지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환경보호인가?
<금오천의 발원지 옛적 산성마을의 공동우물 금오정(金烏井)>
이곳 옛 산성마을 여러 습지 가운데 금오천 발원지 금오정(金烏井)이 있다. 이 샘은 옛적 10여 호의 산성마을 주민들의 공동 샘이었다. 이 샘은 전에 왔을 적에는 샘물이 펑펑 솟아올라 용솟음치듯 흘러 넘쳤다. 오늘 보니 물만 고여 있을 뿐 솟는 샘물이 보이질 않는다. 이 샘보다 위쪽에 있는 습지 바닥이 더 낮아 보인다. 때문에 습지 바닥을 긁어낸 이유가 아닐까 의심이 간다. 자연보호 발상지인 금오산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화왕산 용늪도 자연환경을 복원한다고 바닥을 긁어내어 문제가 생기자 다시 원상복구 하려해도 막대한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원상회복이 불가능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한다.
자연보호란 사람에 의해 파괴된 것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고 자연보호를 함에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연을 파괴 하지 않는 것과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 이것 두 가지 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여기 금오정에서 옛 산성마을 사람들은 오래전(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에 떠났지만 오래된 이 샘이 등산객들의 목을 축일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2006년 한맥문학 신인상을 수상한 이 의리 선생의 시 한편을 생각해 본다.
오래된 샘
지금껏 살아오면서/가장 그리운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망설임 없이 내 유년이라 대답하지요//달빛 은은하게 내린 뒷산//산 짐승 울음소리 내 귀를 밝히고/생솔가지 얹은 모깃불 옆에 멍석 깔고 누우면/밤하늘별이 다 내 품안에 들어오던/유년의 앞마당이 가장 그립습니다.//아직도 꿈을 꾸면/뒷산 벼랑 끝은 여전히 가슴 떨리고/물러서다 몇 번씩 헛디딘 발은/못자란 내 작은 키를 키우고 싶어/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시간여행을 합니다//지금도/세상일에 지치고 지루할 때면/아무도 몰래 이 샘에 와/목을 축입니다
<저수지로 변한 금오산성 성안 고산습지>
금오정을 떠나 아래쪽 고산습지 뚝 길을 걸으면서 이것은 아닌데 이것은 아닌데 몇 번이고 돼 뇌이면서 습지가 저수지로 변한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금오산 계곡을 타고 내려와 대혜폭포다. 고지대는 설경을 이루었지만 여기는 바람도 없고 손도 시리지 않다. 때문에 혹한이 아니라서 빙벽을 이룬 대혜폭포를 보지 못하고 내려간다. 지금부터는 올라오던 그 길로 내려간다. 금오산성 대혜문(大惠門)을 지나고 영흥정(靈興井), 자연보호운동발상지(自然保護運動發祥地), 탐방안내소를 지나 채미정이다.
<금오천 계곡과 그 주변 풍광이 좋은 채미정>
채미정(採薇亭)은 중국의 주(周) 나라가 은(殷) 나라를 멸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즉, 두 선비 이공(夷公)과 제공(齊公) 형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 등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충절을 지키다 죽은 고사에 유래하여 지은 정자 이름이다. 사연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곳 금오산에 들어와 은거했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금오산인(金烏山人), 야은 길재 (冶隱 吉再 1353~1419)선생이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끝내 벼슬을 마다하고 충절을 지키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오늘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 철새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쉽지 않는 선택을 한 야은 선생의 충절과 학행을 기려 경상감사 남구암이 1768년에 지은 채미정 (採微亭;명승 제52호)) 이다. 이곳은 주변 풍치가 매우 좋다. 앞에 금오천 계곡물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며 금오산 정상이 쳐다보인다. 정자 앞에는 내려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다리를 건너 흥기문(興起門)을 들어서면 채미정(採薇亭), 그리고 야은선생의 영정을 모신 경모각(敬慕閣)에는 좌사간길재(左司諫吉再)라는 제목의 숙종어필오언구(肅宗御筆五言句)가 걸려있고 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遺墟碑)의 비각(碑閣), 기념비 관리사 등이 있다.
左司諫吉再(좌사간길재)
歸臥烏山人 (귀와오산인) 금오산 아래로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 (청풍비자릉)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聖主成其美 (성주성기미)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勸人節義興 (권인절의흥)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 함 일세
금오산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던 중에 이미 망해버린 고려의 옛 도읍지 황성옛터 개성을 돌아본 회고가(懷古歌)와 한거(閑居)는 널리 알려져 오늘날까지 전한다.
회고가(懷古歌)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한거(閑居)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초가 옆에 시냇물 흐르고 홀로 편히 지내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여유) 신선한 바람 밝은 달빛에 흥이 절로 나누나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바깥손님은 오지 않으나 산새가 이야기하고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나무로 된 평상을 옮겨 누워 책을 보노라
<금오산 관광시설지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오산>
채미정을 나와 주변풍광을 감상하고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15시10분, 오늘 행로는 채미정~탐방안내소~대혜문~도선굴~대혜폭포~할딱고개~약사암~정상 현월봉~금오정~대혜폭포~대혜문~탐방안내소~채미정~주차장, 약12km 4시간50분 소요되었다. 오늘 날씨가 좋았다면 팔공산종주 산행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눈 산행은 시간이 많이 걸려 짧은 해에 시간이 부족하다. 어제 밤 일기예보에 오늘은 오전에 비온후 오후에 개 인다 했다. 그러면 금오산에는 정상에 눈꽃을 볼 수 있겠다 싶어 비교적 산행거리가 짧은 금오산을 택했다. 실제 와서 보니 뜻밖에 아직 단풍도 볼만하고 설경도 볼 수 있었으니 오늘 금오산 산행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2012년 11월26일 월요일 구름
첫댓글 금오산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름이 짙어 사진이 조금 어두운 느낌이 드네요.
그래도 구경 잘 하셨다니 감사합니다.
주로 밑에서만 놀았는데 윗세상도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선산 곱창이 땡기네요....
4월 중순 벚꽃 필때 다시 한번 찾아보세요. 참 좋습니다.
시가 있는 산행기...잘 보았습니다.도선굴에는 꼭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집니다. 카메라를 들고..ㅎㅎ
도선굴은 채미정에서 2km 밖에 않되지요.
길은 비교적 평탄한데 입구100 m 정도가 바위 벼랑을 타고 가지요.
날씨가 따뜻해지면 기도객이 더 늘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