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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우리가 가고 있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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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씩 자의반 타의반으로 많은 사람들을 길로 나서게 하는 것이 '여름휴가'라고 불리는 일정이다. 경비는 경비대로 나가고, 길은 밀리고 산이나 바다 할 것 없이 많은 인파로 붐빈다. "다음에는 안 나온다"고 다짐하지만 매번 휴가철이 오면 여지없이 움직이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고3아이를 둔 탓에 이번에는 홀로 가는 휴가 길이 되었다. 애초에 여름휴가 일정을 재미와는 관계없이 정한 잘못이 크지만 이왕 나온 길 계속 걷기로 했다.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려 <여름살기>란 이름으로 길을 나섰다. 먼 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가능하다면 튼튼한 두 다리를 이용해 걷기로 했다. 걸어가며 만난 세상 서울 청량리역에서 남양주 마석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휴가철이라 이미 길은 사람과 차량으로 몸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석모란공원묘지로 가는 첫 일정은 변함없었다. 묘지입구는 한낮의 폭염 아래서도 서늘하고 습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곳에는 전태일· 박종철· 김경숙· 계훈제· 최종길· 문익환님을 비롯한 수많은 시대의 선배들이 있었다. 비석마다 절을 하면서 연방 부끄러웠다. 그들이 갔던 길에 비추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양주시 56번 도로를 벗어나 효촌초등학교에 들어서자 방학을 맞은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교실이며 놀이기구마다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심미선· 신효순양이 졸업했던 초등학교다. 2002년 6월 세상이 월드컵 열기로 가득할 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이들이다. 불행하게도 학교에는 어떤 상징물도 없었다. 난데없는 방문에 관리인 아저씨는 "왜 지난 일을 들쑤셔?"라며 언짢아 했다. 세상은 이미 그들에 대해 잊기를 요구하는 듯 했다. 살아있으면 스무 살을 갓 넘긴 아가씨였을 두 중학생의 추모비는 56번 도로에 여전히 외롭게 있었다. 가해자 없는 억울한 죽음 앞에 또 부끄러웠다. 파주와 문산을 거쳐 임진강으로 갔다. 날은 더웠고 길은 뜨거웠다. 북녘 땅으로 가는 끊어진 다리 옆에 통일대교란 새 다리가 있었지만 여전히 임진강은 흐르지 않는 강이었고, 분단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대북지원단체 일로 몇 번 갔었던 북녘 땅은 여전히 낯설었고 남녘 땅은 토라져 돌아선 듯이 보였다. 강을 사이에 둔 갈라진 땅이 서러워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철책선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얼마나 부끄러움이 깊어야 새 날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살지 않는 부끄러움 전철을 이용해 평택으로 갔다. '평'화를 '택'하라는 평택에서 두 번째로 헬리콥터소리를 들었다. 몇 년 전 평택 대추리에서 헬기소리를 들었는데 다시 그 소리가 쌍용자동차 위에서 들렸다. 헬기에서는 최루액을 구토하듯 쏟아내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살아가는 우리의 전쟁터 같은 오늘이다. 경찰과 기자와 가족과 노동자, 용역업체, 경영자가 뒤엉킨 그곳에서 평화로 가는 길은 사라진 듯 했다. 마지막 일정인 용산으로 갔다. 참사 200여일이 다 되도록 장례를 못 치르는 또 하나의 전쟁터가 그곳에 있었다. 6차로 대로변의 참사현장은 여전히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검찰의 수사기록 1만여 쪽 중 공개 /김유철(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
첫댓글 산님. 고맙습니다. 신문에서 보았군요. 두손모음.
지현님 목소리와 눈 웃음을 못 뵌지 꽤나 된듯 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립다고 문자라도 보낼까 말까 얕은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마음아픈 휴가... 허나 의미있는 걸음이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