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호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아파트에서 서울 연희동 산자락에 이사온 것은 15년 전 해가 잘 드는 마당 그 마당에 정원을 가꾸고픈 마음이었다 봄에 진달래 지면 철쭉·라일락이 핀다 여름 전령사 백일홍은 분홍 꽃망울 터뜨린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와 겨울 바람을 견뎌내고 봄이면 잎새 도움없이 꽃을 피운다 나무와 꽃을 키우며 자연의 섭리와 인생을 배운다
내 집은 서울 강북의 단독주택이다. 15년 전 그간 살던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을 찾아 서대문구 연희동 산자락 아래로 이사 왔다.
부모님이 사시던 집도 아니고 굳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나의 선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저녁에 참석하는 행사나 모임이 강남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아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단독주택에서 살기로 한 나와 내 아내의 결심은 해가 잘 드는 마당, 그리고 그런 마당에 우리의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절실한 바람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원에는 15년간 애지중지 키운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다. 봄에 가장 먼저 봉오리를 틔워 올리는 매화와 진달래가 질 때쯤이면 철쭉과 라일락이 핀다. 모란과 장미가 기염을 토하면서 여름이 시작되면 키 큰 고목인 목 백일홍의 분홍 꽃망울이 터져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이런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면서 봄이 오기도 전부터 나와 아내는 봄꽃을 사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은평구의 구파발 화원들을 드나든다.
내가 유난히 나무와 꽃을 좋아한 건 어려서부터이다. 어릴 적 고향 강원도 시골집에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었다. 그 시절 다른 시골집들과 달리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무와 꽃들이 아주 잘 어우러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빛깔의 고운 꽃들이 화단에 가득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에 와서도 작은 집 마당 화단에는 꽃들이 탐스러웠다.
선친도 꽃과 나무를 참 좋아하셨다. 꼼꼼하시긴 해도 다소 무뚝뚝하시던 선친은 아침 일찍 작은 화단에 물 주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좋은 비료는 수소문할 정도로 나무와 꽃에 정성을 들이셨다.
젊은 시절에는 나무나 화초에 관심이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20대에도 나무를 키웠다. 1975년 결혼 승낙을 받고 처가에 선물했던 군자란은 그 후 다시 내 손에 들어와 수 대에 걸쳐 번식시켜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있다. 증권사 사장 시절에는 매년 질 좋은 칸나를 한 포대 수확해서 직원들에게 분양해주기도 했고 협회장 취임 후에는 삭막했던 회사 1층 로비에 대나무, 행운목, 군자란, 초화(草花) 등을 심어 실내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지금도 잘 자란 소나무를 보면 좋은 인연을 만난 듯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전국의 유명한 소나무 군락지를 찾아 탐목(探木) 여행도 한다. 해외출장이나 여행을 가도 짬이 되면 '보태니컬 가든(식물원)'부터 찾는다.
나무나 원예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때늦은 한파가 몰아쳤던 어느 해 이른봄이었다. 술자리에서 며칠 전 서둘러 심은 장미가 퍼뜩 생각나는 바람에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가시에 찔려가면서 장미에 신문지를 싸주고서야 잠자리에 든 적도 있다.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아내보다도 나무가 더 신경 쓰이느냐는 아내의 타박도 무리가 아니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변화무쌍한 자본시장에서 35년을 일해 왔고 젊은 시절 방랑 벽도 있었던 내가 원예에 몰두한다는 것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정원'의 기원은 아라비아 유목민으로부터 비롯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설계된 정원의 절제미가 유명한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도 중세에 이곳을 지배한 이슬람왕조인 나수르 왕조가 수 대에 걸쳐 건설한 것이다.
17세기 초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대상이었던 네덜란드의 튤립도 터키를 통해 네덜란드에 전해져 당시 유럽인을 사로잡았다. 원예사에서 유목민의 족적이 이처럼 큰 걸 보면 원예와 방랑은 본질적으로 어딘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나무와 꽃을 키우다 보면 자연의 섭리와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매화는 앙상한 가지로 겨울의 그 추위와 바람을 견뎌내고 봄이 되면 잎새의 도움도 없이 꽃을 피운다. 어떤 시련도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듯이.
좋은 골프채나 첨단기기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지만 마음에 드는 나무에는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내 정원은 욕심껏 나무를 키우기엔 좁다. 결국 새 나무를 심으려면 전에 있던 건 뽑아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항상 좋은 걸 모두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걸 알지만 말이다.
나무의 가지를 쳐주는 전정(剪定) 작업은 경영자로서 조직 관리에 대한 고민과 통한다. 때로는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병든 가지, 혹은 멀쩡한 가지라도 정리해야 할 때가 있다. 애써 키운 것이 아깝지 않을 리 없지만 나무를 모양 좋게 잘 키우려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나무를 좋아하듯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래서 사람을 정리하는 결단의 순간은 유난히 힘들다.
비슷한 시기에 심은 나무라도 기울인 정성에 따라 달리 자라난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내가 노력한 만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보람과 즐거움이 아니던가.
가끔 정원 일을 하다 아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약속이 있어 나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40년 전 선친과 나의 모습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아들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처럼 나무를 돌보며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거라는 걸. .


출처 : 조선일보 20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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