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우뚝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됨이 없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해설> - 도올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삶의 체험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여기 분명 '칠십'이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이 말은 그가 70세 이후 그리고 그의 생애를 73세로 마감하기 이전의 어떤 시기에 발출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志于學(지우학)'이라 할 때 '志'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떤 나의 삶의 총체적 지향성을 말하는 것으로 주체적 결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차서 학교에 입학한다든가, 남이 하는 대로 서당에 간다든가, 부모님께서 공부하라고 하시니까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공자의 삶의 최초의 자각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자각이란 배움을 향한 자각이었다.
인간의 깨달음의 최초의 계기는 이미 15세 전후에는 대강형성되는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어떤 체험의 깊이는, 상상력의 폭이 넓은 15세 전후의 소년시절에 이미 형성되는 것이다.
'삽십이입!'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이 삼십이 되어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立이란 부모나 친지의 도움이 없이 자력으로 '선다'는 것이다. 이 선다는 말에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 나는 이제 내 두발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의 세계를 딛고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력히 표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건설하고자 하는 인생에 대한 대강의 청사진이나 방향감각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십이불혹'이란 단순히 의혹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이 사십이란 인생의 과정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이며 따라서 주변상황이나 사람들과의 충돌이 많은 시기인 것이다. 이렇게 상충되는 의견이 있을 때에 현혹됨이 없이 올바른 자기의 주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공자는 '불혹'이라 표현한 것이다. 불혹은 곧 주체성의 확립이다.
'오십이지천명', 사람이 나이 오십이 되면 이제 한 인간으로서 대강 권위의 정점에 오른다. 주변에서 리더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습이 원만한 작품의 틀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마흔 때의 주관적 확신성보다는 나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 기준을 항상 앞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기준을 '하늘의 명령' 곧 천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불혹은 자기주관을 중심으로 이야기 한 것이므로 주관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천명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며 객관적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나'라는 개체의 철저한 부정 위에서 성립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의 세계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공자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도 태연히 거문고를 뜯으며 외쳤다. "저들이 날 어찌하리오. 이몸에 주공(周公)으로부터 내려오는 문화가 깃들어 있을 진대, 하늘이 정녕코 이 문화를 버리지 않으시려 한다면 저들이 날 어찌하리오!". 공자의 生死는 이미 개인적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믿었던 것은 하늘의 소리요, 하늘의 명령이었다. 그것은 이미 나라는 개체의 논리를 떠나,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문화적 가치였다. 이러한 문화적 가치를 그는 '斯文(사문)'이라 불렀고, 그것이 곧 그의 '天命(천명)'이었던 것이다.
'육십이순', 이 말은 정말 우리의 일상적 언어 감각에 리얼하게 와 닿는 말이다.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는 말인데, 이것은 모든 것을 통달하여 거슬림이 없다는 그런 達者(달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고, 순수히 인간의 감성과 관련된 '용서'의 함의가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이지적인 냉철함이나 논리적인 일관성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남이 나에게 어떠한 역한 소리를 해도 그것을 역한 소리로 듣지 않을 수 있는 감성의 순화! 이것이야 말로 인간에게는 최종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나이 60이 되면, 이미 신체적으로도 사양길이요 쇠약의 일로를 걷는다. 그리고 이성의 날카로움보다는 단연 감성의 원만함이 돋보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난 예순이 되니까, 아무리 날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가 안나!" 혹은 "아무리 세파의 거스리는 일들이 귓전을 때려도 감정의 동요가 없어!"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닐까?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이 공자의 최후의 독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삶의 과정이 도달한 최후의 경지,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종심소욕'이란 문자 그대로 마음이 欲(욕)하는 바를 따른다는 뜻이다. '불유구'의 '踰(유)'는 '넘는다', '건넌다'는 뜻이다. '矩(구)'는 원래 목수들이 쓰는 기역자 모양의 곡척을 말하는 것이다. 콤파스를 뜻하는 規(규)와 함께 '법도', '규칙', '기준', '준칙'의 의미가 된다. 불유구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일정한 질서의 기준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마음껏 따라 가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님을 모르는 공자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남자가 하루는 노예시장에 가서 하녀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데리고 와서 훈련을 시키고 많은 규칙을 정해 주었습니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 해야 할 하루 일과를 빼곡이 적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매를 때리고, 밥을 굶겼습니다.
그런데 그 하녀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굉장이 이상했습니다. 따듯했습니다. 주인이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주인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주인이 와서 꽃다발을 들고 청혼을 합니다. 그래서 그 주인과 하녀가 결혼을 합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여자가 첫날밤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새벽 5시면 어김없이 깨어납니다. 그녀는 빨리 옷을 입고 부엌으로 가서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제는 종이 아니지, 내가 이 집의 주인이냐 내가 그의 아내가 되었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하인은 종의 신분에서 주인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을 노예해방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주님께로 받았습니까? 주님께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누구의 종이었습니까? 우리는 양심과 도덕과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차라리 도덕이라고 생각하고 양심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는 양심과 도덕에 따라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에 죄의식과 수치심,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그마한 질병이 찾아오고 가슴이 뜨끔해도 ‘작년에 내가 어느 사람에게 거짓말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하늘이 나를 치는 것은 아닐까? 사업이 흔들리면 ’하나님이 내 사업을 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수업이 수치심과 정죄감, 죄의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사는 사람들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모른 척 해서 그렇지 이런 죄책감과 두려움에 모두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누구라서 이 최책감과 두려움에서 자유하면 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런 모든 부족과 잘못의 값을 영원히 지불하셨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 얘들아, 내가 다 갚았다; 무엇을 갚았습니까?
우리의 죄의 값을 우리의 실수의 값을 예수님이 다 갚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로마서 8장입니다. 8장1-4까지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하 룻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육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제2위 하나님 독생자를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향한 율법의 요구, 우리가 갚아야 할 내 잘못과 양심의 가책, 죄 값을 하나님이 갚으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 정죄감도 죄책감도 수치감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도덕으로 깨끗함을 얻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보십시오. 우리가 완벽하게 살면 죄책감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올바로 살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마음속에 들끓는 죄악을 보지 않아서 그렇지, 죄악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도덕을 따라 사는 사람,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 행위를 따라 하나님 앞에 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수치감과 정죄감과 죄책감에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거기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그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도덕을 따라 행하려고 하는 자, 양심을 따라 완벽하게 살려고 하는 자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신분을 설명해 주신 것이 바로 5장 1절 전반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면서 두 가지 명령을 줍니다. 5장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두동사가 두 개입니다. 하나는 ‘굳세게 서라’ 또 하나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입니다.
종에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 바울은 먼저 후반부, 부정적인 것부터 설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은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멜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찾아오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사도 바울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어떤 결과가 찾아옵니까? 세가지 엄격한 문장을 사용해서 설명해 주는데, 첫째로 2절에 나타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땅은 다 지나가되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반드시 이루어지겠거든, 하물며 말씀으로 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몸으로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만드신 그 일이 헛것이 되다니요!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때입니까? 우리가 이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내 양심과 도덕에 딸라 살고, 내 노력으로 십일조와 새벽기도를 드리고, 내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일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저주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주면서 이루어진 이 일이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저주스런 삶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를 보면 겉으로 경건합니다. 열심히 새벽기도하고, 철야하고, 지성을 드립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헛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라 그러한 일을 행할 때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다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거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주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목적을 잘못 오용해서 그 율법을 ‘내가 한번 지켜 보겠다. 하나님, 당신의 도움은 필요없습니다. 내 노력으로 내가 천국을 얻고, 내가 성화하고, 내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도덕과 양심으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와 은혜는 영원한 싸움입니다. 율법주의를 우리가 알기 쉬운 말로 하면 도덕주의입니다. 종교생활입니다. 인본주의요, 내 노력입니다. 내가 내 정성으로, 내 정성과 노력으로 내가 선행을 많이 쌓음으로 , 내가 고행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호의를 얻고자하는 노력입니다.
모든 종교를 보십시오. 불교와 유교와 토속종교, 모든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것을 좇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유익이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도 종교를 믿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교회 나옵니까? 겉으로 보면 경건합니다. 직분을 받았고 오래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나보면 복음을 믿고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합니다.
주일날 한번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호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 속에 거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 결과를 몇 가지로 또 설명하고 있습니다. 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나”
진리를 순종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 이 단들을 보십시오. 또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을 보십시오. 굉장히 경건하고 착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리라”
누룩은 조금만 밀가루 반죽에 넣으면 전체를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와 같습니다. 밀가루 반죽의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무섭습니다. 도덕주의는 무섭습니다. 인본주의는 무섭습니다.
교회에서 만약 목사가 절대적인 제자장의 역할로 “여러분 제자장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십일조 안하면 벌 받습니다. 주일성수 안하면 교통사고 납니다”라고 설교해 보십시오.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꽉꽉 차고 헌금 또한 늘어납니다.
그런데 복음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는 그렇게 부흥을 빠르게 하지 못합니다. 급속도로 부흥하는 교회를 관찰해 보십시오. 율법주의로 가르치는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신기하게도 복음이 빨리 번지기보다는 율법주의가 빨리 번지는 것이 오늘날의 형태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작은 누룩이 이렇게 번질 수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막아야 하겠습니까? 목사가 이것을 막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율법주의가 우리 교회 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2절에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율법주의는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고 합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신학자들이 이 갈라디아서 5장 12절 말씀을 신약성경에 나온 말 중에 가장 심한 말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대표로 내세우는 것을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할례는 남자들의 포경수술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건강 위생으로 행하지만 과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는 할례를 하나의 징표로 주셨습니다. 너희는 반드시 내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받고 나서 율법으로부터 해방 되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복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 복음 풀러스 무엇, 복음에 무엇인가 더해야 한다. 복음을 믿고 나면 율법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할례를 바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할례를 강조하는데 할례가 그렇게 중요하면 너희 스스로 잘라 버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차라리 내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고자가 되거라, 굉장히 심한 말입니다. 왜 은혜의 사도가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했습니까? 율법주의가 그만큼 우리 신앙에 해롭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은혜 속에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종의 메지 말고 또한 배우자나 자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도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굳게 서라!
두 번째로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굳게 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가 어떻게 굳게 설수 있는가? 두 가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의의 소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의의 소망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구원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서는 세 가지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신분적인 구원, 두 번째는 과정적인 구원, 마지막은 종국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신분적인 구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얻습니다. 마치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없는 어느 임금이 길을 지나다가 거지를 보았습니다. 그 거지를 은혜로 데려와서 자기 호적에 올렸습니다.
그러면 그 거지가 언제 임금의 아들이 됩니까? 그 날입니다. 지식도 없고 왕자 같지도 못하지만 그는 신분적으로 임금의 아들이 되어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신분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분적 구원을 얻었을 때,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날, 예수께서 나를, 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십니다. 그 순간 나는 죄의 모든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종국적인 구원을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아! 목사님이 저렇게 구원을 얘기하지만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유혹이 오면 이겨야 하는데 이기는 순간보다 지는 순간이 많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거짓말 합니다. 혈기를 부리지 말아야 하는데 또 혈기를 부립니다. 음란하지 말아야 하는데 음란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언젠가는 그러한 것들이 해결할 날이 옵니다. 어떤 날입니까? 우리가 죄를 보아도 전혀 유혹이 느끼지 않는 날, 전혀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든가, 내가 예수님한테 가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종국적인 구원입니다.
예수 믿는 않는 자들은 죽음 이후 영원히 지옥 가서 살겠지만, 예수 믿는 자는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셔서 완벽한 몸, 썩지 않고 죄의 유혹를 느끼지도 않을 몸을 다시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것을 의의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의롭게 되어지는 날,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과정적인 구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숙제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의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5절을 다시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으로’, 이 말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성령과 우리가 의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14:16,17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성령을 주셨습니까? “방언이 터지고, 병자를 고치고, 꿈에 무엇을 봤다. 가슴에 무엇을 느꼈다. 하나님이 빛을 보았다. 그러한 것들을 느끼라고 성령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오직 한가지 목적은 우리가 율법주의를 따라 살지 않고 진리를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진리가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는 막연한 도덕적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까? 예수님이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에 관계된, 십자가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에 관계된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갈보리 십자가가 환하게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성령 충만한 자입니까? 방언을 잘하는 자입니까? 병을 고치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가끔 보면 꿈에 무엇을 봤다. 방언을 한다. 난리를 피우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딱딱한 십자가 교리를 설교하면 ‘할렐루야’ 하면서 눈이 갑깁니다. 분명코 그런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십자가의 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까? 의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의의 소망은 누구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좇아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실 때 성령과 동행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눈에 비로소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질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역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 말은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 믿음을 사랑으로 나타내야 된다는 말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믿음은 믿음인데 그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굳게 서는 비결입니다. 즉 은혜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랑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입으로 말하나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은혜의 복음의 믿음이 아닙니다. 율법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는가?- 은혜를 따르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가, 율법을 좇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가-이를 식별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사랑이 있는가?”
다시 주인과 하녀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하녀가 결혼한 후에 남편이 보니까 이 여자가 이상해졌스니다. 옛날에는 시키는 일만 하고 꾀를 부리기 일쑤였느데,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다섯시는 고사하고 네시 반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인이 감시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합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왜요? 남편이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겉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밥 짓고 일하고 똑같이 모든 것을 다하지만 문제는 겉이 문제가 아니라 동기가 문제입니다. 주일출설 잘하고 새벽기도 잘하고 금요철야 잘하고 중보기도 잘하고 성경공부 잘하고 십일조 잘 바칩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 때문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한다면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유익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굳게 설 수 있습니까? 사랑의 동기에서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지도자들이 그들을 사랑이 아닌 위협과 억압으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사랑이 아닌 율법주의로 다스리는 자들의 특징 몇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런 자의 삶을 살지 않는지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비교해 보십시오.
율법주의로 사는 자들의 몇가지 특징은 첫 번째, 언제나 은혜보다 행위를 강조합니다. 설교의 대부분은 행위요, 가르침의 대부분이 행위입니다. 자녀에게 말하는 모든 것이 행위입니다. 두 번째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의 목록을 강조합니다. ‘내가 너에게 이것 하지 말라고 했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강조합니다.
세 번째 회색지역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습니다. 흑백이 너무 분명합니다. 그는 늘 자기가 법입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 항상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우리 교회는 뭐가 잘못됐다고 하면서 늘 잘못돼다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내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죄감을 갖게 합니다. “나와 틀리면 다 잘못됐어‘ 이것은 무섭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배우자는 과연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줍니까? 당신의 자녀는 당신에게서 사랑의 동기를 느끼고 있습니까?자녀과 당신에게 왜 순종합니까? 두려움 때문입니까? 아니면 사랑때문입니까?
달라스 신학교 학장인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16세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그가 긍정적인 사람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세 살부터 운전을 배웠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매우 긍정적인 분이시라 그에게 운전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는 더한 분이었습니다. 운전하다가 잘못해서 전봇대를 들이받고 차가 찌그러졌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얘야, 괜찮다. 범퍼야 돈 주고 사면 되지만 우리 귀한 손자야 돈주고 살수 있냐” 운전면허를 따 갖고 오자 말자, 아버지가 키를 던져 주시면서 휘발유를 가득 채워 놨으니까 두 시간 동안 네 마음대로 운전하고 다니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사고를 얼마나 냅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의 간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얼마든지 120km, 150km 속도를 내고 휘발류를 다 쓰기까지 두 시간 동안 돌아 다닐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자기를 믿어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80km를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시간이 아니라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 걱정 하실까 그 키를 아버지에게 돌려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여러분 멍에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루 종일 멍에를 메고 밭갈고 짐을 나르는 소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다가 그 멍에를 벗길 때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가지 더 부탁드립니다. 당신도 그 멍에를 메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 그 어떤 사람도 당신이 지기 어려운 그 멍에를 그들의 등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짐을 다른 사람의 죄책감을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다른 사람의 불안함을 평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가는 데마다 우리 주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회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댓글아~~~멘!!! 마음이 너무 홀가분합니다. ...무거운 멍에를 메고 죽을것같은 고통으로 살기힘들다고 지친다고 푸념하며 지내오며 나의 멍에를 온 식구들의 등에 올려놓고 식구들을 힘들게 했는데 ......ㅠㅠ ..깨닫고 사랑으로 진정 자우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마음이 너무 홀가분합니다. ...무거운 멍에를 메고 죽을것같은 고통으로 살기힘들다고 지친다고 푸념하며 지내오며 나의 멍에를 온 식구들의 등에 올려놓고 식구들을 힘들게 했는데 ......ㅠㅠ ..깨닫고 사랑으로 진정 자우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