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당시 강화도의 외규장각 소장품은 왕실 관련 귀중품 99점과 도서 1,007종 5,067책이었다.
프랑스는 이 중 359점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질러 버렸다.
이때 국보급 의궤(儀軌)류인 숙종 때 태조 이성계를 그린 '태조대왕 영정정모사의궤' '인현왕후 숭모의궤' '인조대왕 산릉의궤' 등이 모두 불탔다.
1864년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천주교도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협조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됐다.
오히려 대원군이 머무는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출입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알려진 천주교 탄압의 과정에서 조선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중 중 9명이 학살되고
국내 신도 8,000여명도 죽임을 당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 리델 신부가 중국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1866년 10월 병인박해의 보복을 명분으로 프랑스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6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강화해협에 도착하여 강화도를 향해 맹 포격을 실시한 후 갑곶돈대에 상륙했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였다.
의궤(儀軌)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御覽用) 의궤인 것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었다.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록서고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강화부 궁전도. 가운데 건물이 ‘외규장각(外奎章閣)’ 이다.
강화읍성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고려의 궁궐로 사용되어
고려궁지로 불려진다. 외규장각은 1781년 조선시대 정조 때 강화읍성 내 행궁 자리에 만들어졌다.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설립된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 도서 가운데서도 특별히 보존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서적과 왕실의 족보, 어필, 어제, 옥인, 금보등을
강화도로 이송 보관하였다.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화 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난관 끝에 최대한 고증에 입각한 외규장각이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프랑스군이 강화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 할 당시 조선인의 문화수준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문화인이라 자부하던 그들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는 이런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람들의 책 문화에 그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