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심(宋諶)
[생졸년] 1590년(선조 23)~1637년(인조 15) / 향년 47세
조선시대 선전관, 전라도병마우후, 홍원현감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사윤(士允). 아버지는 창의별장(倡義別將) 송대립(宋大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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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승지 송공 묘갈명(贈 承旨 宋公 墓碣銘)
나는 이미 참의공을 위해 묘갈명을 지었다. 공의 휘는 심(諶), 자는 사윤(士允)이며 참의공의 셋째 아들이다. 소 부인(蘇夫人)이 용꿈을 꾸고 공을 낳았기에 용생(龍生)이 어릴 적 이름이다. 참의공이 용맹을 떨치고 죽었을 때 공은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몇 해 지나자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하루는 바둑을 두고 있기에 어른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꾸짖자 사죄하며 말하기를,
“깊은 원한을 아직 갚지 못하여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으니, 일본으로 달려가 오랑캐의 창자를 밟으려는 생각을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습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금의 사변(事變)을 보고자 함이요, 바둑을 두는 것은 계책을 써서 승부를 결정짓는 묘리를 터득하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니 어른이 이로 인해 낯빛을 바꾸었다.
14세가 되자 균전사 권진(權縉)이 검전(檢田)하러 왔는데, 공이 법을 어겨 체포되었다. 형벌을 받게 되자 갑자기 소리치기를,
“명공께서는 법을 지켜야 마땅하나 뜻 있는 아이에게 어찌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권진이 일부러 성난 척하며 재촉하자 공은 재빨리 뛰쳐나갔는데 쫓는 사람이 붙잡을 수 없었다. 권진이 기이하게 여겨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았다.
자라서 무예를 익혀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을과 제1명으로 급제하였다. 흥양(興陽)으로 돌아와서는 십 년 동안 집에서 지내자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객지에서 벼슬할 때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혼조(昏朝 광해군) 때였으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예법대로 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자 능성(綾城) 구굉(具宏) 공이 통제사로 있다가 평소 공의 이름을 들었기에 즉시 보좌관으로 천거하여 문하에 두고 자식처럼 여겼다. 천거를 받아 선전관에 임명되고 누차 옮겨 전라 병마우후(全羅兵馬虞候)가 되었다.
을해년(乙亥年,1635, 인조 13), 홍원 현감(洪原縣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오랑캐의 난리가 일어나 성상이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여 여러 도의 근왕병을 불렀다. 북병사 이항(李沆)과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등이 들어가 구원하려고 공을 척후장으로 삼았다. 가다가 양근(楊根)에 이르러 여러 도의 군사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항 등이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으려 하자 공이 대의로 꾸짖어 그들의 뜻을 크게 거슬렀다.
강화를 맺어 오랑캐가 물러나자 조정에서 북도에 명하여 오랑캐 군사가 돌아가는 길을 끊어 노략질을 금하게 하였다. 공은 대신 중영을 거느리고 여러 사람과 함께 철령(鐵嶺)을 넘어 오랑캐 백여 급을 베었다. 남산역(南山驛)에 이르자 적이 척산(尺山) 아래 주둔하여 정예병을 숨기고 약한 모습을 보여 유인하였다.
이항 등이 공과 전영(前營), 후영(後營)으로 하여금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실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이항이 말하기를,
“일단 시험해보라. 설령 복병이 있더라도 전군이 뒤따르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접전을 시작하자 오랑캐 기병 수천이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나왔다. 전영과 후영은 화살 한 발도 쏘지 못하고 모두 무너졌다. 공이 홀로 힘껏 싸워 적병이 두 번 세 번 패주하였으나 군사가 고립되고 지원이 없었다. 이항 등이 한창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기에 공이 큰 소리로 구해달라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관청의 하례(下隷) 박귀학(朴貴鶴)이 말고삐를 잡고 청하기를,
“대군이 이미 물러났으니 공도 훗날을 도모해야 합니다. 부질없이 죽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공이 꾸짖으며,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마흔 여덟에 정유년 왜란 때 돌아가셨는데, 내 나이 마흔 여덟에 정축년 호란 때 죽는다면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공은 하루종일 활을 쏘느라 손가락이 전부 짓물렀다. 화살이 다하자 검을 휘둘러 적을 공격하니 검도 부러져 마침내 적의 칼날에 죽었다. 배리(陪吏) 강충로(姜忠老)가 차마 떠나지 못하여 함께 죽었으니 실로 2월 15일이었다. 이항 등은 도리어 공이 함부로 군사를 내었다가 패배했다고 무고하였다.
김시양(金時讓) 공이 힘껏 공을 위해 신원하고, 또 이항 등의 죄를 바로잡으니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공은 김공에게 지우를 입어 감격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또 정려를 받았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으니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이천 서씨(利川徐氏)이다.
2남을 두었으니 문상(文祥)은 통덕랑으로 은거하여 나오지 않았다. 이우(二憂)라고 자호하였으니 남북의 원수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남 문우(文祐)와 현령 이성우(李聖雨)에게 시집간 딸 하나는 원배(元配) 소생이다. 문우와 서자 문형(文亨)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문상(文祥)의 아들은 가징(可澂), 필징(必澂)이며, 가징의 아들은 정갑(廷甲), 정렬(廷烈), 정기(廷夔), 정익(廷翼)이다. 필징의 아들은 정악(廷岳)이다. 문우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욱(薁)과 신(藎)이다. 욱의 아들은 동악(東岳), 동석(東錫), 동철(東哲), 동보(東輔)이다.
신의 아들은 정희(廷熹)이다. 공은 본현 당산(棠山)에 장사 지내고 두 부인을 부장하였다. 명을 청하러 온 사람은 정악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신하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도함이 / 臣忠子孝
영원한 큰 법도라네 / 萬世大經
하나를 얻기도 어렵거늘 / 得一猶難
한 집에 모였네 / 乃萃家庭
고흥의 한 모퉁이 / 高興一曲
바다 안개 자욱하네 / 海氣冥冥
누가 외진 곳이라 하였나 / 孰云荒僻
참으로 신령한 땅이네 / 允矣地靈
하늘이 두 대를 아끼어 / 兩世天慳
요절하지 않게 하였네 / 不夭之齡
시대의 운수를 현인이 개탄하니 / 歲運賢嗟
어찌 하나같이 정(丁)을 만났는가 / 一何屬丁
열사의 남은 한은 / 烈士遺恨
남해를 메우지 못한 것 / 未塡蠻溟
내 그 뜻을 장하게 여겨 / 我壯其志
이 명을 짓노라 / 庸作斯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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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증 …… 묘갈 :
이 글은 송심(宋諶)의 묘갈명이다. 송심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사윤(士允)이다. 1590년(선조23) 태어나 1637년(인조 15)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나는 …… 지었다 :
본서 제37권에 실려 있는 송대립(宋大立)의〈증 참의 송공 묘갈(贈參議宋公墓碣)〉을 말한다.
[주03] 어찌 …… 만났는가 :
송심의 부친 송대립이 정유재란 이듬해에 왜적과 싸우다 죽고, 송심이 정축년(1637)에 후금과 싸우다 죽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
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