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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군 청계면 복길리는 대부분이 바다에 터전을 두고 생업을 이어가는 농어촌 마을이었기에 무속 신앙이 만연했다. 마을에 당골(무당)이 있었으며, 배를 건조하거나 조업을 나갈 때 시루떡을 해놓고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런 마을에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였던 이남규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는 지역사회에 소금과 빛이 되었고, 각종 미신을 몰아내고 130세대 중 많은 주민이 교회에 다닐 정도로 신앙이 깊은 예수마을 성지(聖地)를 이뤄 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군이 마을에 들어와 기독교인을 탄압했다. 그런데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며 전세가 역전됐다.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태극기를 걸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공산군이 9월 29일 다시 복길마을에 들어와 바닷가에 주민들을 모아 끈으로 묶어서 3척의 풍선 배에 싣고 ‘저도’ 앞바다 가운데에 수장시켜 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주모자는 당골 최난수, 머슴살이를 했던 사술이 형제 등 4~5명이다. 이들이 복길마을을 급습한 30여 명의 인민군과 손을 잡고 마을주민들을 살상한 것이다. 2003년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학술 심포지엄 자료에 따르면, 130세대에서 149명이 피살당했다고 한다. 모든 가구에 희생자 가족이 있을 정도로 뼈아픈 상처를 간직하게 되었다.
故 정대성 장로가 당시의 끔찍했던 현장을 증언한다.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때리고 수장시켜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변했다. 헤엄을 치거나 물 위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총대로 머리를 때려죽이거나 죽창으로 배를 찔러 창자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죽창으로 항문에서 입까지 산적처럼 꿰어져 죽었다. 이는 실로 천인공노할 만한 풍경이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복길리 청년들은 자치대를 조직해서 산으로 숨어든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공산군을 잡아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눈에다 불을 켜고 달려들었지만, 당시 청년 자치대 대장이었던 정대성 장로는 원수를 악(惡)으로 갚는 일을 막아선다. 그 자신도 부인과 누이가 죽임을 당했지만, 이들을 용서하고, 40여 명의 생명을 살려주면서, 예수 믿기를 요청하였다. 용서와 사랑의 구원선이 된 교회는 다시 회복되어 지금은 마을 전체 120가구 중 90%에 가까운 수가 기독교인이 되어 자랑스러운 예수마을 로 회복되었다.
김은실 권사(앞줄 왼쪽)와 가족들
6.25 불구덩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특별한 교인이 있다. 16세의 김은심 소녀(현재 북교동교회 권사)는 공산군 대장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는 사람 손들어!” 할 때 교인들이 무서워 손을 들지 못할 때, 담대히 손들고 “나는 예수 믿습니다.” 고백한다. 웬일인지 대장은 그 용기를 좋게 보고 풀어주었다. 그 소녀가 자라 김은심 권사가 되었고 그의 형제와 후손에게서 북교동성결교회 김주헌 목사를 위시해서 14명의 목회자와 5명의 장로로 신앙의 열매로 결실한다.
당회록에 기록된 순교자 명단
1960년에 작성된 당회록에 당시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기록해 놓은 명단을 필자가 확인한 바는 다음과 같다. 김창재 집사(40세) 김판수 주교사(남20세) 김천수(남14세) 김보배(71세) 이선옥(남24세) 이영자(18세) 박복례(39세) 이애순(19세) 김동길(남23세) 이금덕(20세) 곽만임(49세) 이옥림(20세) 이홍수(남20세) 이판석(남20세) 박득봉(남20세) 양소례(32세) 천과동(60세) 함천화(56세) 정성금(30세) 김복례 성도이다.
현재 담임하는 문유신 목사는 주민 149명의 피살자 중, 순교한 복길교회 순교자가 43명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음이 확실하기에 마지막 시대에는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해야 지역사회에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일본과 북한의 만행을 용서할 수 있어야, 세계 238 국가에 나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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