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만업
참고 견디는 것이 성공의 근본이며 행복을 낳는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대중을 맞이한 대의만업(大義萬業, 1901~1978)스님. 한 없이 부드러웠지만 불교 정화불사 전면에서 한국불교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의스님의 수행일화를 <대의대종사전집>을 참조하고, 불교학생회 시절 대의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초격스님(파주 보광사 주지)의 회고를 종합해 정리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성공의 근본이며 행복을 낳는다”
제방선원서 정진…불교 정화불사에 ‘앞장’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각별한 관심 기울여
○…도(道)를 알기 위해 집을 나선지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년 만업’은 전국 각지를 주유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흡족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설악산 오세암에 발길이 닿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녘 법당에서 한 스님이 종송(鐘頌)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차종성편법계(願此鍾聲遍法界) …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아침 공양이 끝난 후 부전스님에게 본인이 생각한 종송의 뜻을 설명했다. ‘청년 만업’의 이야기를 듣고 난 스님이 “정각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이 된다는 뜻입니다”라고 답하고, “정각의 내용을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스님은 “嚮貳컁� 안다”고만할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후 ‘청년 만업’은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또다시 길을 나섰다.
○…정선 정암사에 도착했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모셔온 영험 있는 도량이다. 그곳에 주석하는 동일(東一)스님.학송(鶴松)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청년 만업’이 “도술(道術)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하자, 동일스님과 학송스님은 “그것은 요사스러운 사도(邪道)로 정도(正道)가 아니다”면서 “가장 크고 올바른 도는 불도(佛道)”라고 일러주었다. “불도를 닦아 견성성불하면 생사를 해탈하여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다”는 두 스님의 권유로 ‘청년 만업’은 방황을 끝내고,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의 법명은 동원(東元)이다.
<사진>노년의 대의스님 모습. 온화한 미소와 수행자의 위의가 동시에 보인다. 출처=‘대의대종사전집’
○…정암사에서 1년 정도 수행한 동원스님(대의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수행 처를 옮겼다. 대중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스님 회상에들어 수행하고, 이어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는 만공(滿空)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과 산사의 수행가풍에 감화를 받은 스님은 마하연을 출가 본사로 정하고, 정식으로 승적(僧籍)에 올렸다.
○…1945년 봄. 만공스님에게 대의(大義)라는 법호를 받았다. 의로움을 실천하며 살라는 뜻으로 그 후로 줄곧 이 법호를 사용했다. 같은 해 8월15일 드디어 해방이 찾아왔다. 당시 덕숭산 수덕사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보며 정진하던 대의스님은 무룡(武龍)스님과 같이 덕산면 장터로 달려갔다. 1000여명의 면민이 모인 가운데 대의스님은 “이제 일제가 물러가고 자유를 찾았으니, 일심 단결하여 잘 살아보자”는 내용의 연설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스님은 면민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대전 심광사에 주석할 무렵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언제나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스님 때문에 심광사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다른 스님이나 신도들이 “시끄럽다”고 불만을 토로해도 대의스님은 “어린이들이 희망”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스님은 다락에 보관해 놓은 과일을 어린이들의 간식으로 내 놓았다. 또 당신이 어린이.청소년 법회의 법사를 자청하고 나서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 덕분에 1970년대 심광사는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스님은 법문을 할 때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부모님의 은혜이고, 둘째는 국가의 은혜, 셋째는 스승의 은혜, 넷째는 친구의 은혜이다. 대의스님은 “이것이 대(大)우주의 진리이며 인간 생활의 법칙이며 사회의 원리”라면서 “이 진리와 법칙에 순응하는 자에게만 삶의 광명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청담스님(가운데)·성철스님(오른쪽)과 함께한 대의스님(왼쪽).
○…“많은 시은(施恩)만 지고, 허송세월하면서 승려된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후회막급이며, 세인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반듯이 걸었고, 정화불사의 전면에 나섰던 대의스님의 ‘겸손의 말’이다. 청담스님은 대의스님을 두고 ‘정화운동의 주인공’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청담스님은 “만약 대의가 먼저 죽으면 내가 장례위원장이 되고, 내가 먼저 죽으면 대의가 장례위원장이 되자”고 했을 만큼 가까웠다. 두 스님이 각별한 사이였을 뿐 아니라, 불교정화운동의 큰 뜻을 함께한 동지였음을 증명하는 일화이다.
■ 대의스님의 효도가 ■
부모말씀 곧잘듣고
부모뜻을 잘받들어
부모마음 즐겁도록
이몸바쳐 다해보소.
깊고깊은 부모은혜
이몸받고 태어나서
부모은중 모르오면
사람이라 할수있소.
세상에서 제일큰복
효도하여 받게되오
누구누구 할것없이
효심갖고 살아가소.
지성으로 섬기어서
부모은공 갚으시오
자비공덕 모르오면
사람이라 할수있소.
■ 어록 ■
“참선은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는 첩경(捷徑)이기는 하지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아 온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는 불.보살 앞에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참회하는 것이 가장 요체가 된다.”
“모든 일을 참고 견딤은 만사 성공의 근본이다.… 인욕(忍辱)이 곧 행복을 낳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개개인의 신.구.의 삼업(三業)이 청정해지면 국가가 청정해질 것이고, 나아가 세계도 청정해져 그대로가 안락국토(安樂國土)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취한 꿈에서 깨어 인과응보의 법칙을 다시 깨닫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른 길을 갑시다.”
“한 생각 밝으면 극락이요, 한 생각 어둔 것이 곧 지옥이며, 한 생각 슬기로우면 보살이요, 한 생각 어리석으면 곧 축생입니다.”
■ 행장 ■
1901년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신기리에서 부친 이병규(李柄奎) 공과 모친 이억순(李億順) 여사의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만업(萬業). 본관은 전주.
혜암스님 회상으로 출가
만공스님에게 법호 받아
1919년 19세에 도인(道人)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1932년 정선 정암사에서 혜암(惠庵)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33년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1934년 금강산 마하연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행했다. 이어 금강산 표훈사, 금정산 범어사, 설악산 백담사, 도봉산 망월사, 통도사 백련암, 법주사 복천암, 예산 수덕사 등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36년 7월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고, 1945년 만공스님에게 대의(大義)라는 법호를 받았다. 1941년에는 계룡산 갑사에서 ‘업장 소멸 및 조국해방 기원 백일기도’를 이듬해에는 설악산 봉정암에서도 백일기도를 했다.
<사진>대전 심광사에 있는 대의스님 부도.
1945년 해방 후에는 상경해 서울 선학원에서 3년간 <선가귀감>을 번역하여 3000부를 간행했다. 1949년에는 육군본부 순국영령 봉안소인 장충사(忠司) 사장(司長)으로 취임했다. 1953년 김천 직지사 주지를 지냈고, 1954년부터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다. 서울 화계사 주지(1954년), 서울 조계사 주지(1955년), 경기도 종무원장(1956년), 계룡산 갑사 주지(1957년), 조계종 총무부장(1958년), 속리산 법주사 주지(1959년), 조계종 감찰원장(1960년), 선학원 이사장 등의 소임을 보면서 종단중흥과 정화불사의 전면에 나섰다.
이밖에도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1969년), 대한일민계몽회 총재(1970년), 조계종 장로(長老,1971년), 대한불교 총연합회 이사장(1972년), 한민족총회 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1974년)을 지냈다.
1978년 도의앙양충효사상고취 명심서예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이 해 6월22일 조계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8세. 법납 47세.
대전·파주=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