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Netflix사에서 제작한 <옥자>는 영화배급 및 상영 방식의 변화로 제70회 칸 영화제에서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다. 경쟁부문에 진출하였고 또 괜찮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기존의 영화상영방식을 고집하는 심사위원장이 영화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기존의 영화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디지털 시대의 현실에 맞게 처음부터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기기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게 포맷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배급과 상영 방식에서 나타난 변화가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미래 영화 산업에 어떤 지각 변동을 일으킬지 궁금해진다.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옥자>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옥자>에는 <플란더스개>에서 볼 수 있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 <살인의 추억>에서 볼 수 있는 빠른 전개방식, 그리고 <괴물>에서 등장하는 괴물과 한 가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설국열차>에서 자본주의라는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의 운명 등이 이런저런 계기에 따라 등장한다. <옥자>는 형식적으로는 미자의 모험이야기이라도 특히 유전자 공학 시대에 자본의 힘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얽이고 설키는 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스포일러 있음)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적인 경영을 위해 이미지의 중요성을 아는 CEO다.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질렌할) 박사의 노력으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슈퍼돼지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지만, 소비자들이 GMO에 대해 보이는 혐오감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슈퍼돼지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양육한 것이라 속이기 위해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그녀의 계획에 따르면, 우량 품종의 돼지를 통해 얻은 26마리의 새끼들을 자연적인 사육방식으로 기른 것처럼 꾸미려 새끼들을 전 세계 농가로 보내 위탁하여 사육하게 하고 10년 후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슈퍼돼지가 자연산임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려는 계획이다. 물론 그동안 유전자 조작을 통한 슈퍼돼지의 생산은 은밀히 계속된다.
10년 후 대한민국의 어느 산골, 미자(안서현)는 할아버지(변희봉) 그리고 옥자라 불리는 돼지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 초반부 미자와 옥자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알게 해주는 시퀀스는 비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판타지라도 영화 전개상 꼭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미자에게 옥자는 단지 가축이 아니라 ‘식구’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산골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미자에게 옥자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위험에 처한 미자를 자신을 던져 구해줄 수 있을 만큼 희생적이며 또한 물고기 사냥이나 과일 따는 일에서도 미자를 돕는다. 그래서 미자는 할아버지가 미란도 그룹에서 준 사육의 대가를 받은 후에 옥자를 뉴욕으로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미자에게 옥자는 금 돼지로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고 단지 사육하는 가축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미자와 미란도 그룹 사이에서 동물해방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동물보호 단체가 끼어든다. 그들이 옥자를 납치하는 목적은 미란도 그룹이 은밀히 행하고 있는 동물실험과 유전자 조작의 실체를 폭로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성공시키는 데에 옥자를 이용하는 데에 있다. 미자는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고 옥자와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오랜 동안 준비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한 통역자의 거짓으로 옥자는 결국 미란도 그룹에게 다시금 넘겨져 뉴욕으로 끌려간다. 그들은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운 실험실의 내부를 촬영하여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폭로할 계획으로 옥자의 신체 일부에 카메라를 삽입한다. 옥자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지하상가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의 사건은 영화의 주요 장면 중 하나이다.
한편, 미국의 미란도 그룹 실험실로 끌려간 옥자는 도착하자마자 강제 짝짓기를 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 장면을 끔찍하게 지켜보면서도 ALF는 계획의 성공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정된 축제를 통해 소비자에게 슈퍼돼지가 자연적으로 사육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려는 루시의 계획은 동물해방전선의 방해로 실패한다. 경영을 넘겨받은 루시의 쌍둥이 언니 낸시(틸다 스윈튼)는 유전자 조작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목표 지향적이고 경영에 있어서 매우 공격적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려는 감동적인 슈퍼돼지 퍼포먼스도 그녀에겐 불필요한 일에 불과하다. 값싼 고기를 공급함으로써 소비자의 불만을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건강이나 동물의 동물권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슈퍼돼지를 통해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래서 미자가 집에서 가져온 금 돼지를 제시하자 서슴지 않고 옥자를 내준다.
영화 이야기만으로는 마치 GMO 푸드에 반대하거나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시위용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옥자를 두고 벌어지는 인간의 각종 욕망과 그 치열한 현실을 볼 수 있다. 할아버지에게 옥자는 손녀 딸 미자의 앞날을 위한 자본이고, 루시에게 옥자는 유전자 조작과 끔찍한 동물 실험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방패막이일 뿐이고, 낸시에게 옥자는 돈을 벌기 위해 사육하는 동물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다. 동물애호가이면서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미란도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죠니 박사에게 옥자는 인생의 재도약을 보장하는 도구이다. 그리고 동물해방전선에 속한 사람들에게 옥자는 동물해방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소비자들은 맛있는 고기를 공급해주는 우량 돼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옥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옥자는 단지 욕망충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에 의해 옥자에게 이입된 각종 욕망의 목록들을 정리해보면 단순히 채식주의를 주장하거나 유전자 조작에 반대하는 의미로만 볼 수 없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괴물>과 <설국열차>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려진다. <괴물>에 등장하는 괴물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유출한 결과 강에 서식하는 생물의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출현한 괴물이다. 괴물과 서민으로서 한 가족의 투쟁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오늘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괴물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옥자’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한편, <설국열차>는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당하는 자들의 반란에 관한 이야기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가는 힘은 자본가가 아니라 결국 무산계급의 희생에서 비롯한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무산계급의 존재는 그야말로 자본가에 의한 사육에 가까운 행위를 통해 보장될 뿐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한 목적에 충성하는 미란도 그룹 내의 인물들과 그들이 미란도 그룹을 유지하는 방식들을 보면서 노동자와 서민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또 움직인다는 내용을 담은 <설국열차>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두 영화에 빗대어 살펴볼 때 ‘옥자’는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받치고 있고 또 움직이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다. 욕망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욕망이다. 그러나 슈퍼돼지가 비록 인간의 욕망 덩어리로 여겨진다 해도 미자에게서 옥자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미자는 옥자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미자는 옥자와 더불어 지내지만, 미자에게 옥자는 옥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미자에게 옥자는 비록 형상화된 욕망 덩어리라 해도 언제든 통제 가능한 존재이다.
현대문명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일까? 전 세계 인간은 현대문명을 통해, 특히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동력으로 여겨지는 인공지능 기술과 IoT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첨단 기술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류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인간은 오히려 그것에 사로잡혀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개발된 문명의 이기들은 괴물이 되어 오늘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이끌 것이다. 제1, 2차 세계 대전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욕망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며 또한 욕망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일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욕망은 의지의 표상이다. 그러나 욕망은 통제되어야 하며, 인간은 결코 욕망의 노예일 수는 없다. 욕망은 통제될 때 비로소 우리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되며, 욕망의 통제는 오직 성령이 공급하시는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욕망사회일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간절해지며, 따라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