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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3 - 석문전투 후에 매소성 전투 승리와 토번의 침공으로 당군이 물러가다!
신라 김춘추는 당태종과 만나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는 당나라가 처지하기로 약조했으니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했는데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망한 왕족 부여융을 내세워 백제를 통치하자 속을
끓이다가 669년 토번(티베트)이 당나라 영토를 침입한 기회를 틈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 들어갑니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 와 고구려 부흥세력의 고연무(高延武) 가 지휘하는 연합군
20,000명이 평양을 우회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 공격해 말갈군과
싸웠는데 당군이 증원되자 후퇴해 황해도 백산에 주둔했으며 신라군 본군은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 도독부를 공격해 고사성을 점령하고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합니다.
당나라 고간은 671년 9월에 군사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해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았으며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은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소탕한후 672년 7월 평양에 도착해 남진을
시작해 백수성(황해도 배천) 인근에 주둔했으니 당군이 진영을 설치한 곳은 석문(石門) 들판 입니다.
백수성에 주둔했던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도우러 문무왕이 보낸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해도 서흥군 인근 평야에서 당군과 맞붙었는데 신라군은 당군 고간의 유인계에 넘어가
672년 8월 장군 의복, 대아찬 효선을 포함해서 상급 지휘관만 7명 전원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합니다.
고구려의 경우 초창기 야전에서 중국 왕조와 붙다가 몇번 크게 패배한 이후에는 대체로 청야전술
을 활용한 수성전으로 싸웠으니 석문전투는 주필산 전투의 전개와 비슷한데....
신라군은 고구려와 달리 중국 군대를 상대로 야전에서 싸워본 경험이 없었기에 석문 전투
에서 대패한 것인데, 혹은 한차례 승리후 들떠 지나치게 추격하다가 역습으로 몰살당한 것입니다.
석문전투 대패로 신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문무왕은 중신회의를 소집해 신하와 대책을 논의하니
노장 김유신은 당군의 계략을 알수 없으니 당분간 성을 보강해 수비에 전념해야 한다고 대답하자
문무왕은 당군 포로 170명을 송환하면서 은 3만 4천푼, 구리 3만 3천푼, 바늘 400개, 우황 120푼에
금 120푼을 보내며 사죄문(표문) 을 올리는데 너무 길어서 20분지 1로 줄이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신은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 옛날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은혜를 입어 찢어
죽는것을 면했사온데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 해도 크나큰 은혜를 어찌 보답
하겠습니까? 머리를 깨트리고 재가 될지언정 그 자애로움을 어찌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쓰게되어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되었사온데 신이 형벌을 받아 죽는다면 살아
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린 신하가 되었고 죽어서도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오니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죄를 지었음을 아뢰옵니다.”
당 황제 고종의 용서를 받아 서라벌이 침공당하는 위급한 순간을 넘긴 문무왕은 이후 672년 12월
백수산(白水山) 전투에서 당나라 고간이 고구려 부흥군과 싸워 이기자 신라는 군대를
보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했으나 역으로 고간에게 패하여 신라군 2,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히고 말았으며, 673년 5월 이근행이 호로하(瓠濾河)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
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으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납니다《삼국사기》, 《신당서 동이전》
673년 7월 1일, 문무왕은 물론이거니와 신라 백성들 모두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이 세상을
떠나니 문무왕과 신라 백성들은 김유신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신라는 당과의 싸움에서
열세인데다가 정신적 지주까지 상실하자 급격히 이탈하는 사람이 늘었으니 특히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나라에 붙으려 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당했고 그의 처자들은 천민이 됩니다.
673년 8월 신라는 제천의 사열산성, 9월 충주의 국원성, 경주의 북형산성, 의성의 소문성, 고령의 이산성,
춘천의 주양성, 남한산성 자리의 주장성, 거창의 만흥사산성, 양산의 골쟁현성 등 꾸준히 성들을 증축해
수성전에 만전을 기하는데 신라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성을 쌓은 것은 장수왕의 침공 위협이 컸던
자비 마립간 이후로 처음이었으며 한편 대아찬 철천에게 명해 전함 100척을 주어 서해를 지키게 합니다.
이때 부터 당의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군과 아홉차례를 싸웠고, 모두 승리해
당군 2,000여명의 수급을 베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전세는 신라군에게 불리해졌는데
당군은 계속 남하했고, 673년 겨울에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이 거란족과 말갈족으로
이뤄진 당군에 함락되었는데 동자성은 경기도 김포시로 한강 근처까지 당군이 내려온 것입니다.
674년은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대치가 장기화되니 문무왕은 부흥군의 소멸로 오갈곳 없는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하자 격노한 당 고종은 당나라에 있던 동생 “김인문을 문무왕 대신
신라왕” 으로 책봉해 신라로 보내니 중간에 끼인 김인문은 간곡히 사양했지만 어쩔수 없이 보내져 옵니다.
또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 이근행에게 보좌하게 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이 군대는 675년에야 도착했으니.... 674년 소강상태를 이용해 신라는
여러차례 군을 사열하고 육진병법(六陳兵法)을 연마하는 등 전쟁 대비를 철저히 합니다.
나당전쟁이 674년과 675년 2월까지 당군의 남진이 없어 14개월간 소강상태가 된 이유는 673년
12월 토번이 弓日(궁일) 등 서투르크와 함께 천산북로를 공격하자 이미 천산남로를 뺏긴
당군이 마지막 남은 천산남로를 사수하기 위해서 당군 대 부대를 저 전선에 투입했기 때문입니다.
675년 2월, 유인궤 당군이 도착해 신라 칠중성을 깨뜨리고 본국으로 귀환하니 그의 작위가 공작으로 올랐고,
재상급 지위인 좌복야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칠중성은 이근행이 방어했으나 매소성 전투 전후의 기록을
보면 곧 신라군이 탈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분이 안 풀린 당 고종은 이근행에게 다시 신라를 공격하게
했고 이에 문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고 사죄하니 669년과 672년에 이어 3번째 사죄문 입니다.
신라왕의 3번째 사죄문을 받고서야 약간 분이 풀린 당 황제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군사를 물렸는데.... 하지만 그러는 사이 문무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군을 공격하여 물리친 다음 백제 전토를 수복하였고, 옛 고구려의 평양까지 공격
했으니... 이 공격으로 백제 땅을 상실한 당은 다시 격노하여 신라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합니다.
675년 9월 설인귀가 당나라에 와있던 신라 유학생 김풍훈이 문무왕 즉위 초에 처형된 대당장군 김진주의
아들로 신라에 원한관계가 있는 것을 이용해 그를 향도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확보하고, 전함 40여척, 군마 1,000필을 탈취했으니
천성 전투로, 설인귀가 한강 하구를 공략하고, 이근행은 매소성에서 임진강 이남, 한강 이북의
여러 거점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 접수해 전선을 임진강에서 한강선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달, 이근행이 200,000명(?) 의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을 거점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쳐들어왔는데 신라군이
이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군마 30,380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는데 성공했는데 당시 신라군의
병력은 알려진 바 없고, 당군의 병력이 20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아 요즘에는 신빙성이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를 보면 20만 대군이 주변 지역에서 성을 뺏고 뺏으며 전투 중이었다니 매소성 전투의 근래
수정적인 관점에서는 중국측의 기록에 따라 당군을 대략 40,000명 전후로 보고, 여기서 나온
20만은 8년간의 나당전쟁 기간 동안 투입된 모든 당군의 총합을 의미하며, 신라인들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인 매소성 전투를 기록할때 상징적으로 20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매소성 전투의 진행에 관해서는 또다른 이견이 존재하는데, 《삼국사기》 에 기록된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만 유독 당군의 "수급" 을 취한 기록이 없고, 전리품만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교전을 통해 당-말갈군의 주력을 궤멸시킨 전투라기
보다는 기습 작전을 통한 보조 전력의 손실이거나 아니면 당군이 스스로 물러간 것으로 봅니다?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을 이기자 놀란 당에서는 다시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공했고, 신라군은 맞서
싸우며 쳐들어온 당군을 막아야 했는데 이때 당군에게 고전하며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니 당나라 휘하
말갈군이 아달성(강원도 이천군) 에 침입해 노략질하였고 이에 장수 소나(신라)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이 말갈군은 기세를 몰아 적목성(강원도 회양군)까지 점령했으며 또다른 당군은 거란병, 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는데 신라군이 막아냈으나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했고, 석현성에서도
당군의 침입으로 현령 선백(仙伯),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는데이러한 피해에도
신라군은 당군과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겨 당군 6,047명의 목을 베고 말 200필을 획득합니다.
매소성 전투는 9월 29일 치뤄졌으나 그해 당군은 칠중, 적목, 석현성을 공격했고, 이후로도 크고 작은 전투가
18차례나 벌어진 것을 감안할 때, 당군의 전투력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당군의
공격 지점들을 보면 중국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원도 북부 쪽으로 빙 돌아가는 루트입니다.
따라서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있었다기 보다는 천성 전투에서 당군의 보급
선단이 궤멸된후 매소성에서 당군의 전진을 막았고, 그 결과 보급이 끊긴 당군이 퇴각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니...... 당군이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자를 버리고 갔고,
그것을 신라군이 노획했기 때문에 "수급은 전혀 얻지 못하고" 전리품만 기록되었다는 것닙니다.
이후 676년 7월의 도림성(강원도 통천군) 전투에서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했는데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육지에서의 나당전쟁은 끝이 나는데 강원도로 남하하던 당군이 물러간 이유를
보자면 676년 3월부터 당나라는 대륙 반대편 서쪽에서 토번군에게 국경선 안쪽까지
공격받기 시작하니 매소성 전투의 패전을 기점으로 신라 전선에서 퇴각을 결정한 것으로 봅니다.
옛 백제 영토를 지배하던 웅진도독부를 옛 백제와 별 관련없는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기겠다는
결정을 하고 당군이 철수를 시작하니 676년 11월,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철수하려는
당군을 소부리주의 기벌포에서 공격했는데 설인귀의 당 수군에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승리했고, 당군 4,000여 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립니다.
이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나라는 사실상 패전한터라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구 백제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도 요동으로 철수시켜 7년간의 나당전쟁은 끝이 나는데 《구당서》 <장문관 열전>
에 의하면 신라를 다시 공격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와병중이던 시중 장문관이 "토번등 양면전쟁" 을
우려하며 반대하자 고종이 그만두었다고 하며 이후 683년 고종의 사망, 후계자 문제 혼란과
측천무후의 즉위로 인한 무주의 건국 등 당나라 내부 사정이 어수선해지면서 결국 신라 재공격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당나라의 심기를 거스리기 어려운 신라가 당장 대동강과 임진강 사이의 황해도를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고, 신라 하대에 북상하기 전까지는 당나라와의 완충지대로서 고구려계
의 소영주, 호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황해북도에 신라가 직접 통치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100여년 후인 선덕왕 때 일로, 헌덕왕 때에 군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습니다.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티베트) 이 성장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전혀 아니니 토번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된 것은 당 태종 때 손첸감포라는 희대의 명군이 즉위한 때부터였는데 즉
나당전쟁이 아니라 당나라가 수십년간 지속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토번의 세력이 강력해
지는 것을 견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고, 나당전쟁 시기에는 이미 토번이 강력해진 상태 였습니다.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티베트)이 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대인 토번왕 손첸 감포에 의해 토번의 국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당 제국과 서역교역로를 두고 패권을 다투면서 당 제국에서 한반도에 대한 중요도가
급감하게 된 것으로 보는데 당나라에서 보자면 황해도와 신라는 당나라 영토를 침범하는 토번과의
전투에 비해 10분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지역인데다가 더우기 먼 곳이라 "보급" 이 힘든 곳입니다.
당시 당 제국은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강성해진 토번이 가로막고 훼방을
놓아버린 것이 결정적이었으니 토번은 당 제국의 종속국이었던 토욕혼을 정복하고,
가르친링의 지휘 아래 670년 7월 대비천 전투에서 수십만의 당군을 궤멸시키며
당나라 지휘관들인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을 사로잡는등 당 제국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669년 당고종으로 부터 토번(티베트) 정벌을 명받은 설인귀는 670년, 군사를 이끌고 대비천에서 토번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나머지 토번군이 오해(烏海)성에 주둔중임을 안 설인귀는 기습공격을 계획
하면서 곽대봉에게 고지대에 요새를 구축하여 치중(輜重) 을 보관할 것을 명하고는 오해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곽대봉은 설인귀의 명을 어기고 치중대를 이끌고 뒤따르다가 토번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하니 설인귀
는 어쩔 수 없이 오해성에서 철수하지만, 대비천에서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에게 포위되어 크게
패했고 가르친링은 기세를 몰아서 안서도호부 4개의 큰 도시인 안서사진을 차지하여 토번의 영토를 늘립니다.
총사령관 설인귀는 당나라의 맹장 설눌의 아버지로 무예에 능하였으니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자 부인인 유씨가 사람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법이니 황제의 휘하에서 종군하라고
권유하자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입대했는데 하급장교의 신분으로 있던 설인귀는 당태종이
산위에서 전투를 직접 참관한다는 소식을 듣고 눈에 잘 뛰는 흰옷을 챙겨입은 뒤 전장에 나섭니다.
안시성 앞 벌판인 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은 고구려및 말갈병 15만을 격파하는데 흰 옷을 입고 미친듯한
활약을 펼치는 설인귀의 모습이 당태종의 눈에 확 꽃혔고 전투가 승리로 끝난후 당태종은 저
흰옷의 장수를 자신의 앞에 데려오라 명하자 한걸음에 달려온 설인귀에게 당태종은 '짐은
오늘 승리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노라!' 라고 말하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설인귀는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진영을 격파하자 하급 장교에서 일약 유격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658년에 우령군 중랑장으로 적봉진을 함락하고 다음 해에 석성을 공격했고 659년 황산에서 고구려
장수 온사문과 교전했으며 661년에 철륵이 10만의 병력으로 난을 일으켜 당군을 공격하자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화살 3발로 적장 3명을 죽여 적들을 격파했고 661년 8월 고구려 원정에 참가합니다.
그러다가 667년에 3차 여당 전쟁에서 설인귀는 신성,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회군하였으며
668년에는 3천 병력으로 부여성을 함락하고 이후에도 평양성 전투에도 공을 세웠으니 고구려 멸망후
안동도호부 도호가 되어 고구려땅을 다스렸으며 670년 고종의 명으로 10만 군사를 이끌고 토번을 공격
하였지만....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의 명장인 가르친링에게 참패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전락 합니다.
당시 패전의 여파는 엄청나서 설인귀가 그간 쌓았던 무수한 공로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뻔
하였으나, 설인귀를 총애했던 당고종이 그를 비호해준 덕분에 목이 달아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니 그 덕분에 이듬해인 671년에 설인귀는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나당전쟁에 참여해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676년에
기벌포 전투 해전에서 패하니 대비천에 이어 기벌포에서도 대패하자 이번에는 고종조차도
설인귀를 감싸주기 어려웠는지 이후 설인귀는 한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큰 전공을 기억하는 고종의 총애는 그치지 않아서 설인귀는 다시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682년에 돌궐이 공격해오자 당고종은 설인귀를 보내 이를 격퇴하도록 하였는데 그 과정이 드라마틱
했으니 당시 돌궐군의 장수는 당 군대의 사령관이 설인귀라는 말을 듣고는 "설인귀는
이미 죽었을텐데 그럴리가 있겠느냐" 며 반신반의했다는데 이때 설인귀가 앞으로
나와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이에 기겁한 돌궐군은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당 고종은 설인귀를 몹시 총애하였는데 설인귀가 황궁 경비를 담당하던 시절, 뒷산에서 일어난 홍수가 황궁
을 덮쳐 고종의 침실까지 물이 밀려들어 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달아
났으나 설인귀 만큼은 목숨을 걸고 황궁에 남아 경보를 울려서 고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고종은 이후 평생토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설인귀의 크고 작은 실책을 모두 비호해 주었다고도 합니다.
설인귀는 무인으로서는 특히 궁술에 뛰어났으니 황제 앞에서 기사술을 시연하는데 어찌나 강궁이었는지
그가 쏜 화살이 5중 쇠갑옷을 관통했다고 하며 위에 서술된 세명의 철륵족 선봉장을 세개의
화살로 사살한 무용담에서 당시 군중에서는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관문으로 되돌아오네 (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 이라는 말이 퍼졌다고 합니다.
흰 전포를 입고 전장을 질주해 '백포 장군' 이란 별명이 있었다니 뛰어난 무력으로 명성이 천하에 퍼졌지만
고구려, 신라, 철륵, 토번과의 전국을 놓치는 등 대전을 치르는 사령관으로서의 실적은 미묘하다는
점도 여포와 비슷한데 토번과 전투 및 기벌포해전에서 패했지만 고종 총애를 받아 중형을 받지 않았습니다.
설인귀는 668년 평양성 공격에 참가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다음해 669년 토번과 대비천 전투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면 당군은 평양성 함락후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로 중국으로
귀환했다는 얘기가 되며.... 대비천전투 패전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전락하지만
이번에는 이듬해 670년에 나당전쟁이 발발하면서 복귀하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는가 봅니다?
그의 행적에서 엿보이듯 대비천 전투 패전이후, 당의 대외 영향력은 모든 방면에서 도전을 받기 시작
하는데.... 대비천 전투(大非川戰鬪)는 670년 7월 대비천에서 일어난 토번과 당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대비천(大非川)은 칭하이호의 남쪽에 위치하며 포라하(布喇河)라고도 불립니다.
토번을 성장시킨건 전대인 송첸캄포이니 토번 33대 왕이자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토번을
통일하였으며 실질적으로 티베트 왕조를 건국한 시조로 평가받는 명군으로 재위 기간은
617년 - 649년으로 추정되는데 야룽왕조의 32대 챈뽀인 남리 송첸이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토번 귀족들에게 암살당한후 불과 13세의 어린나이로 33대 챈뽀로 즉위합니다.
전대 챈뽀였던 자가 독살됨으로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나약하기 짝이 없는 힘없는 군주로 시작
되었지만.... 분열되었던 토번 여러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서 전국을 6대 행정구로 개편해 통일 왕조를
세웠으며 이미 발전되어 있던 당나라로부터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토번의 농업과 목축업을 발전시킵니다.
이후 라싸를 제국의 수도로 하여 토번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대하였으며 티베트 문자를 만들기 위해 인도에
특사단을 파견하였으니 토번은 그 덕분에 문학과 번역, 그리고 법률 기록이 가능해졌는데 당서에 의하면
인도에서 침략한 군대를 당나라와 함께 몰아낸 후 수많은 비단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이후 당나라에
요청하여 누에와 회반죽, 술을 만드는 기구, 종이와 먹을 만드는 장인들을 통해 기술을 전파받았다고 합니다.
토번의 국력이 강성해지자 서쪽의 사막으로 이어진 실크로드와 서촉 지방을 공격하여 서역과 당나라의
직접적인 교류를 방해하며 당나라를 압박했고, 이후 634년경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 황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겠다며 통혼을 요청하였으나 당나라에서 묵살하자 대군을 파견해 당나라
의 속국이였던 토욕혼을 함락시킨후 당나라의 국경지대인 송주를 공격하자 놀란 당태종은
후군집을 보내어 이를 격파하였고 다시 토번이 통혼을 요청하자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 보냅니다.
이후 당나라는 서역교역로의 패권을 두고 기나긴 세월 동안 토번과의 화친과 전쟁을 반복하게 되는데
원래 당나라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왕비가 아니라 아들이자 후계자인 궁송궁첸(621-643)
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는데 혼인후 3년이 못 되어 궁손궁첸왕이 급사하자,
토번 유목민의 습관을 따라 다시 왕위에 오른 그의 시아버지 손챈감포의 왕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을 오면서 결혼 예물로서 금으로 칠한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왔으며 이후 네팔
의 츠존 공주도 아축불과 미륵불상을 가져왔는데 특히 문성공주는 당나라의 불경들과
당의 선진적인 천문학, 풍수지리, 의학, 신학 등 18종의 과학 서적들도 코번에 같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왕비로서 당나라에 존재하던 풍수지리 사상을 근거로 터를 잡아 대규모 사찰을 짓고, 암벽에 경문과
불상을 암각하고, 탑과 불상을 수없이 조성하여 토번에 불교 미술을 전파, 확산시켰으니 이후 티베트
사람들은 그 업적을 기려 문성공주를 ‘바다의 연꽃(쵸패마)’ 이라 부르며, 타라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문성공주는 티베트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니 송첸감포왕의 초상이나 동상에는
관세음보살 처럼 정수리에 근본 스승인 아미타불을 정대하는 형상이 묘사되어 있으며
20여년후인 663년 토번(티베트)의 가르통첸이 토욕혼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자
당은 위협을 느겼으며 그로 인해 669년 당 고종은 설인귀로 하여금 토번을 치게한 것입니다.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듣는 것에 불만이 있어 기습을 하라는 설인귀의 지시를 무시하자 그런 상황을
이용해 가르친링은 곽대봉과 설인귀의 군대를 궤멸시키니 그후 설인귀·곽대봉과
아사나도진은 생포돼 가르친링에게 끌려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말라는 훈계를 듣고서야 풀려납니다.
곽대봉은 먼저 설인귀(薛仁貴)와 같은 반열에 있었는데, 토번(吐蕃)을 정벌하게 되면서 그 밑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설인귀가 말한 것은 곽대봉이 대부분 이를 어겼으니 군사가 대비천(大非川,
청해호의 남쪽)에 이르러서 곧 오해(烏海, 청해성 다마현의 고해)로 향하여 가려고 하면서 설인귀가 말합니다.
"오해는 험하고 먼곳이라 군사들이 가는데 심히 어려우니, 치중(輜重)을 스스로 가지고 간다면 이롭게
되기가 어려운데, 의당 2만명을 남겨 두어 대비령(大非靈, 청해호의 남쪽) 위에다 두개의 목책을
세우고 치중을 모두 목책 안에다 두고, 우리들은 경무장의 정예를 인솔하여 배나
빠른 속도로 밤낮으로 가서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것을 습격하면 그들을 격파하는 것은 분명하다."
설인귀는 무리들을 인솔하고 앞서 가서 하구에서 토번을 쳐서 그들을 대파하여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아주 많았으며 나아가서 오해에 주둔하고서 곽대봉을 기다렸는데 곽대봉은
설인귀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고 치중을 인솔하고 천천히 나아갔으니 오해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토번군 20만을 만나 곽대봉의 군사들은 대패해 달아나며 치중을 모두 버립니다.
설인귀는 물러나서 대비천에 주둔하였는데 토번의 재상인 논흠릉(論欽陵)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와서 그를 치니, 당의 군사는 대패하고 죽거나 다쳐서 거의 다 없어졌으니 설인귀와 곽대봉은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함께 몸을 빼내어 죽음을 면하였고 논흠릉과 화의를 약속하고
돌아오니 대사헌 악언위(樂彦瑋)에게 칙령을 내려서 군부대로 가서 패배한 상황을
조사하게 하고 묶어서 경사로 호송하게 하였는데, 세 사람은 모두 죽음에서 면제되고 제명됩니다.
이후 토번은 당의 수도 장안에서 320km 떨어진 소라한산(素羅汗山) 전투에서 4만으로 20만명에 이르는 당군
을 또다시 격파하니 당나라는 대패 책임을 물어 사령관 왕효걸의 작위를 박탈하여 평민으로 격하하고
부관 누사덕은 강등시켰으니 머나먼 땅 신라와의 갈등과 달리 토번 제국이 아예 당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실질적인 위험으로 부상했으니 토번군이 수도 장안을 위협했기 때문에 신라땅 따위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우호적 관계였던 당 태종과 토번의 송첸캄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토번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당나라를 대상으로 당의 실크로드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으니 향후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 50년 가량을 토번이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그 중요한 싸움들 중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대비천 전투 입니다.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군과 싸운 같은해인 670년 칭하이호(靑海湖) 남쪽 대비천(大非川)에서 당군이
대패하니 토번의 재상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서역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중요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
(安西四鎭), 즉 카라샤르(焉耆)ㆍ쿠차(龜玆)ㆍ호탄(于闐)ㆍ카슈가르(疏勒)등 도시들을 장악합니다.
토번군에 의해 국경의 완충지대였던 당의 속국인 토욕혼도 사실상 멸망되어 수도 장안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으니 아무리 대국이라 해도 멀리 떨어진 동서 2개 전선에서 싸울수는 없는지라
원거리라 보급이 힘든 머나먼 땅 신라 황해도와 임진강에서 신라와 싸울 형편이 되지
않는데다가 기벌포 해전 패배로 군량 보급길이 막히자 당군은 매소성에서 물러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는 신라가 매소성 전투에서 20만 당군에게 승리했다고
기록해 우리 국사 교과서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된 것인데.... 실상을 보자면 3~4만 정도
의 당군은 이 무렵에 토번군에 대비천전투에서 대패해 수도 장안이 위험하니 물러간
것이고..... 삼국사기에도 적의 "수급" 을 취한 것은 전무하며 말과 무기류를 획득한 것만 나옵니다.
나당전쟁 관련 기록은 김부식(金富軾) 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장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이후
15세기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18세기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 - 고려
정통론에 입각해 역사가 쓰여졌는데 그후 일부 실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
하고 나섰으니..... 한 백겸은 신라가 한반도 동남쪽에 안주하여 서북 일대를 포기했다고 봤습니다.
《발해고》 저자 유득공은 신라 삼국통일에 대해 회의하였고(남북국시대론), 김정호는 아예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일제 시기의 선학들은 나당전쟁 그 자체에 무관심했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를 부정적
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전쟁의 끝맺음인 당나라 격퇴도 자연스레 애써 외면하고 의미를 축소했습니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삼국의 전 영토를 아우르지 못한 데다가, 698년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신라의 '통일'
은 불완전했다는 것인데 나당전쟁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이는 일제시기 일본의 학자 쓰다 소우키치
(津田左右吉) 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니, 쓰다 소우키치는 와세다대학에서 이병도를 지도한
사람이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20년부터 광해군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한 사람 입니다.
그러나 이케우치 히로시의 이러한 의도는 일제의 식민사관인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일환으로, 조선이 문약
하고 당파사움에 시달렸다는 식의 이야기로 연결될 수도 있고 거기에 맞춰 만주사 쪽에 연결하여
편협하게 추켜세워 올린 것에 가까운데 쓰다 소우키치는 백제, 고구려 고지는 당 본토에서 거리가
멀어 교통이 불편하고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허점을 신라가 이용해 병탄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매소성 전투는 신빙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나당전쟁을 신라와 당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라
의 욕심으로 당이 정벌을 단행한 것으로 인식했으니 즉 검모잠의 '반란' 을 지원하던 신라가
당이 차지하고 있던 백제 고지를 '침략' 했기 때문에, 당이 이에 대한 조치로서 신라를
'정벌' 하게 되었으며, 이후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는 '방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학자 진인각(陳寅恪)은 토번(吐蕃)의 발호로 인해 서북지역이 위급해지자 당이 동북지역을
경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동북지역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을 취할수 밖에 없었고, 결국
한반도를 방기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이렇게 토번 전선을 중요시하고 한반도 전선이
좌우되었다고 보았는데 서구 학계에서도 대체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나당전쟁을 이해했습니다.
이병도는 검모잠 세력이 당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신라군과 합세하여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에 요동에
있던 당군이 한반도로 남하해 고구려의 남계와 신라의 북계에서 나려 연합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전투를
통해 드디어 676년 요동으로 철수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결국 당 세력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90년대를 전후하여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니 민덕식은 나당전쟁의 원인
을 개괄하고 최대 격전장소였던 매소성의 위치 비정을 중심으로 검토하였으며, 허중권은 나당
전쟁의 전투 양상을 계량화하기도 했고 이호영이 일련의 연구들을 집성하여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 硏究》를 펴냈으며 안국승은 매소성을 경기도 연천의 대전리산성으로 비전하였습니다.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 들어 국내 학자 서영교는 나당전쟁의 전개가 서역(西域)의 전황과 맞물려
돌려갔다고 파악하여, 한반도에 국한된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으니
669년 토번이 천산남로(天山南路)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의 주력군이
평양에서 서역으로 투입되었고 이에 670년 3월 신라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675년 9월 매소성에 주둔하던 말갈족 출신 이근행(李謹行)이 말갈병을 이끌고 서역으로 이동하자 이듬해
676년에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는 것이니 즉 동아시아의 '약소국' 신라는 서역 상황을 주시하다가
당군 주력이 서역으로 이동하자 전쟁을 감행할수 있었고, 당군이 서역으로 이동하여
끝났으니 종전은 매소성전투 승리의 산물이 아니며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배근흥은 675년의 매소성 전투는 전투기록이 불완전한 점에서 볼 때 신라가 승리한 전투가 아니며, 이때는
당의 서북 변경이 토번 때문에 위험해졌기 때문에 매소성 전투는 당군이 철수하면서 발생한 것
이라고 이해했으며 또한 676년 설인귀는 상주(象州)로 유배중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할수
없었으므로, 설인귀가 패했다는 기벌포 해전도 국내 학계의 입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즉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의 중점은 매소성 전투나 기벌포 전투가 아니라 그 이전의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최근 배근흥은 나당전쟁 연구상의 문제점을 다시 언급하면서, 나당전쟁
의 결과는 신라가 다시 당에 신속(臣屬) 하여 나당 간의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나당 모두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는 당라 종번(唐羅 宗蕃) 론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노태돈은 나당전쟁에 대해 소위 '한반도 방기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니 즉 나당전쟁
은 669년 4월경에 시작되었으며, 670년 3월에 신라군이 요동에 진출하므로 토번은 나당
전쟁의 개전과 구체적인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고, 나당전쟁의 개전은 별다른 제3의 변수
가 없는 가운데, 일차적으로 신라의 정세 판단과 전쟁의지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으니 토번의 발호로 인해 나당전쟁이 시작되고 종결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외부적 상황에 대한 검토없이 신라의 승리를 강조하는 견해인데 이러한 연구들의
입장 차이는 각국의 이해관계 혹은 연구자들의 성향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670년대 토번의 발호로 인해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이 동북에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이에 따라
676년 이후 한반도에서 더 이상 당과의 교전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나당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켜 신라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견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한편 단순히 당군
의 이동 유무에 따라 전쟁이 시작되고 종결되었다는 견해도 수긍하기 어려운 관점인가 합니다.
실제로 과거 학계에서 연구하였던 나당전쟁은 바라보는 시각을 한반도에 국한하였으며 학계의 시각은
자주적인 승리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으니 교과서에 과장되게 기록되었고 이는 세계사
속의 흐름을 바라보며 이해하는 근래의 역사관에선 한계가 명백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나당전쟁 관련 교과서 교육은 당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토번 제국의 행보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전무" 했는데... 하지만 실제로 같은 시기인 669년~670년에 발생해
당 제국이 토번과 기나긴 세월을 두고 대립하면서 군사 전략안들을 서쪽 토번을
향해 크게 집중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데도 우리 교과서는 완전히 "무시" 하는 것 입니다.
토번은 당 태종에게 당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송첸감포는 대군을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했고,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도 공략한후, 송주(쓰촨성 쑹판현) 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토번의 준동에 격노한 당 제국과 격돌하는등 군사적 갈등이 번번 하였습니다.
당 황실에서는 견디다 못해 문성공주를 평화사절로 시집보내기도 했지만, 당제국과 토번은 이후로도 기나긴
기간 동안 화친과 전쟁을 반복했으니 나당전쟁과 시기가 겹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이상훈이 주장
하는 토번의 발호라는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당간의 전쟁 자체에 대한 좀 더 넓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국통일전쟁기 자체는 한국 사극이나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에서 적지 않은 빈도로 다뤄진 시기
이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까지는 다루더라도 신라와 당의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매체는 거의 없으며 그냥 일종의 마무리, 후일담 형식으로 간략히 묘사되는 편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망하고 부흥운동 까지는 나오지만 그 이후 고구려인들이 어찌되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데.... 오늘날 한국인들의 성씨를 분석해 보면 고구려인의 후예는
진주 강씨 97만에 신천 강씨 5만 3천, 횡성 고씨 1만, 익산 이씨 2천명 등이니 설사 고려계인
평양 조씨 5만을 양보해 고구려계로 쳐 주어도 3~4% 정도니 대부분은 중국땅으로 잡혀간 것입니다.
삼국지가 제갈량 사후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대부분 삼국통일전쟁 전반부를
다루면서 전쟁씬이 많고 분량이 쏠리며 신라에서 주연급인 김춘추, 김유신도
죽은 이후이다 보니 삼국 통일전쟁 후반부인 나당전쟁은 소홀해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신라와 당은 676년 이후 수십년간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는데 당은 전쟁으로 신라가 획득한
옛 고구려(황해도), 백제 영토에 대해 신라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명목상 고구려 고씨, 백제
부여씨 왕실 유족을 당나라 수도 장안에 거주시키며 이들을 '고려 조선왕', '백제 대방왕' 으로 대우했습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거의 50여년이 지난 725년 11월, 당 현종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도 일본, 신라, 말갈인 사신 외에 고구려, 백제 왕가의 유족을 굳이 왕으로서 참여시켜서
마치 고구려와 백제가 (당의 속국으로) 아직 존재한다는 퍼포먼스를 해서 신라를 압박했습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725년까지도 당나라는 한반도 재침공 계획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하는데, 물론 이
시기에 고구려 고토에는 발해가 세워진 이후였는데 이 시기 당은 신라는 물론 신생국 발해와도 사이
가 나빴으므로 신라의 삼한일통과 국가로서의 발해를 모두 승인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신라 역시 이에 대항해 나당전쟁 이후로도 한때는 적이었던, 이제는 반당이란 뜻이 일치하는
일본과 사신을 역대 최대로 활발하게 주고받으면서 후방을 다졌고, 내부적으로도 군사
제도를 개혁하며 군비를 강화하는 등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당나라와 약간의
교류는 있었지만 당나라의 요구를 신라가 대놓고 거절하는 등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가 옛 고구려(황해도), 백제 영토를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한 것은 성덕왕 시기였으니
언제까지나 초강대국 당나라와 척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성덕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문무왕 14회,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에 성덕왕은..... 무려 46회 입니다.
730년대 흑수말갈과 대문예 문제로 동아시아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자 당나라도 더 이상 신라를 마냥 적대
하고 있을수 없다고 판단했으니 나당전쟁 후 60여년이 지난 735년에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황해도),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니 북방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방의 신라와 손을 잡은 것 처럼..... 북방의 발해 견제 차원에서 다시금 신라의 효용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라 역시 그동안 대동강 이남 ~ 임진강 이북 지역, 즉 개성을 포함한 패서 지역은 신라가 영향력 아래 두고
있기는 했으나, 당나라와의 대립 탓에 대놓고 직접 지배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무려 60년 동안
옛 고구려 핵심지역 고구려 유민들은 황해도땅에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살수 있었으며, 백산말갈인들
또한 유입되었고 그 때문에 발해 건국기에 고구려 유민들이 또 다시 해당 지역에 유입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735년 부터 신라는 당나라와의 영토 분쟁이 사라진 이후에도 황해도를 곧바로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끝내 재령강 이동 지역 즉 황해도 동부 14개 군현만
편재 했을 뿐 재령강 이서 북쪽 지역은 끝내 군현을 편재하지 못했으니,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의 편재는 신라가 아닌 후삼국시대인 태봉 시대에 궁예가 편재한 군현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