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이 서일과 의기투합해 자신의 소유지 왕청현 서대파에 또 하나의 독립군 부대를 창설했고, 십리평에 연성사관학교를 세웠으며, 김좌진을 훈련소장에 임명했다.
그 부대가 바로 "대한북로군정서"라는 것이다. 토지도 최운산이 내놓았고 자금도 최운산이 댔다. 그 앞 9년 동안 서일은 최운산의 지원으로 교육사업에 힘썼고, 그 사이 대종교를 중광했다고도 했다.
내가 모르는 이름의 부대가 등장했고, 모르는 자금 흐름이 적혀 있었고, 무엇보다 대종교를 중광한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먼저 부대 명칭부터 짚는다.
사료가 가리키는 흐름은 분명하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군정회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가 만들어졌다.
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이었다.
두 달 뒤 임시정부가 "한 민족에 두 정부는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명칭 개정을 요구하자, 대한군정부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해 별칭으로 북로군정서가 함께 쓰였다. 공식 표기는 대한군정서, 통용 표기는 북로군정서다.
학계 일부가 '대한(북로)군정서'로 병기한 사례는 있으나, "대한북로군정서"라는 단일 명칭은 1차 사료에도 학술 통례에도 없다.
다음은 인물 검증이다. 대종교를 중광한 인물은 홍암 나철이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오기호 등 동지들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한 그날이 중광절이다.
서일은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중광단을 조직한 인물이고,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으로부터 교통을 인수받기로 했으나 무장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5년 뒤로 미뤘다가 1921년 자결로 인수를 잇지 못했다.
중광의 주체가 뒤바뀐 서술은 단순한 표기 오류가 아니다. 대종교 중광 사건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쓴 글이라는 신호다.
세 번째는 최운산-서일의 공동 창설설이다. 봉오동 일대를 사재로 일군 최운산 3형제는 군무도독부 계열의 핵심이었다. 1920년 5월 군무도독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과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고, 그해 6월 봉오동에서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격파했다.
학계 정설은 이 통합을 세 부대의 결합으로 정리한다. 일제 정보 기록도 대한북로독군부의 전력을 대한독립군 계통과 군무도독부·국민군 계통 둘로 나눠 파악했다. 북로군정서는 이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다. 군무도독부 계열과 북로군정서는 1920년 5월 단계까지 별개의 부대로 남아 있었다.
두 계통이 한 전장에서 만난 시점은 1920년 10월 청산리다. 그해 10월 10일 삼도구 묘령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합동 작전회의를 열었고, 며칠 뒤 청산리 일대에서 함께 일본군을 격퇴했다. 협력은 이 자리에서 처음 가시화됐다. 그 이전 단계, 곧 십리평 사관연성소 설치와 운영 시기에 두 계통이 자금과 토지를 공유했다는 1차 사료는 없다.
무기 구입도 마찬가지다. 서일이 직접 러시아 영토로 출장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대 자체의 자금 회로가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 정보 연락망 역시 별도 체계였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는 북로군정서가 각처에 정보연락기관인 경신분국(警信分局)을 두었음을 명확히 기록한다.
그러므로 사관연성소가 최운산의 사유지에 세워졌고 자금이 모두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서술은 시점부터 어긋난다. 그 반대편에 학설로 정리된 사실이 있다.
북로군정서의 자금 조달은 모연대(募捐隊)가 맡았다. 대한군정서 관할 구역 주민 대다수가 대종교 신자였기 때문에 모연대를 통한 군자금 모집이 효율적으로 작동했다는 분석은 학계 연구에 정리돼 있다.
정사 서술 또한 군자금이 관할 지역 주민의 모금, 국내 파견 요원의 모금, 함경도민이 모아준 자금으로 충당됐음을 명시한다. 무기 구입도 마찬가지다. 서일이 직접 러시아 영토로 출장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대 자체의 자금 회로가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
정보 연락망 역시 별도 체계였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는 북로군정서가 각처에 정보연락기관인 경신분국(警信分局)을 두었음을 명확히 기록한다. 모연대와 경신분국, 그리고 십리평 사관연성소가 한 묶음으로 묶이는 북로군정서 자체 운영 체계가 학계에 정리돼 있다.
그렇다면 "최운산 한 사람이 모든 토지와 자금을 댔다"는 서술은 이 자체 운영 체계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효과를 낸다. 거기에 두 부대의 협력 시점까지 1920년 5월로 앞당겨 잡는 서술은 사실관계 자체를 어긋나게 한다.
9년 동안 최운산이 서일의 교육사업을 댔다는 부분도 같은 자리에 놓이는 미확인 주장이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가 경신분국과 모연대를 명확히 기록하면서도 최진동·최운산에 관한 서술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이 북로군정서의 자금·정보 회로 안에 있던 인물이었다면, 대종교 내부 사료가 그 흔적을 지웠을 이유가 없다. 한쪽 가문의 주장은 가문의 자산일 수는 있어도 정사가 되려면 1차 사료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 의문을 끌고 후반부 논점으로 넘어간다. 1921년 11월 27일 일본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에게 전달된 일제 정보부 기밀보고서 '원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의 사망에 관한 건'에는 본문과 별도로 별보(別報)가 첨부돼 있었다.
그 별보는 서일의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러시아 과격파의 지원을 받는 최명록(최진동) 일파와 서일 일파가 늘 반목했고, 최근 최명록의 세력이 커지면서 서일 측은 고립되고 부하까지 흡수당할 위기에 몰렸으며, 마지막 희망이었던 태평양회의에서 조선 독립이 의제로 오를 가능성도 사라지자, 차라리 죽어서 명예를 남기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로 짚을 점이 별보의 사료적 위상이다. 같은 보고서의 본문은 자유시 참변과 당벽진 토비 습격(1921. 8. 26)에 따른 절망을 자살 동기로 적시했다.
별보는 그 본문에 덧붙은 보조 가설이다. 일제 정보부 내부에서도 확정된 사인이 아니라 후순위 추정이었다는 뜻이다. 이 위상을 흐리면 보조 가설이 마치 정설처럼 읽히게 된다.
별보의 세 가지 주장을 하나씩 본다.
첫째, 최진동이 러시아 과격파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 자유시로 이동한 최진동·홍범도·안무 계열은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소비에트와의 연계를 유지했고, 최진동은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받았다. 이 점은 사실에 가깝다.
둘째, 서일 측이 고립되고 세력을 잃었다는 것.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만주로 회귀한 서일·김좌진·이범석 계열은 자유시로 간 다수파에 비해 소수파였던 것이 맞다.
셋째, "최진동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는 묘사. 최진동 본인도 자유시 참변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뒤 9월에야 흑하 일대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서일 자결 시점인 8월 27일은 양쪽 모두 패전 직후의 재정비 단계였다.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할 만큼 우위에 있던 시기가 아니다.
태평양회의 대목은 사실관계가 들어맞는다. 워싱턴 회의(1921. 11. 12~1922. 2. 6)에서 한국 독립이 의제로 다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1921년 여름부터 굳어졌고,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이 사실상 좌초할 것이 가시화된 시점이었다. 다만 그 좌절감이 서일 개인의 자결 동기로 직결됐다는 인과는 별보의 추정일 뿐, 1차 사료로 입증되지 않는다.
1차 사료가 가리키는 동기는 다른 자리에 있다. 서일이 남긴 절명사가 그것이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자유시 참변과 당벽진 참극에 대한 책임감이 글에 직접 박혀 있다. 최진동과의 알력은 정황 변수일 수는 있어도 1차 동기로 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별보 자체의 성격을 한 번 더 짚을 필요가 있다. 통상 일제 정보보고서를 두고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과 노선 갈등을 부각하는 편향이 있다"고 평가한다.
친소·반소 노선 분열을 자살 동기로 끌어오는 별보의 구조도 그 편향에 부합한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일제 외무성 내부 보고용이지 공작용이 아니다.
당시 독립군이 볼 일도 없는 기밀문서를 굳이 가공해 작성할 동기가 일제에게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정보를 모아 분석한 일제 정보 책임자의 인식 편향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별보는 거짓 정보가 아니라, 정보 분석의 편향이 묻은 보조 가설로 읽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편향까지 함께 읽어내야 보고서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놓쳤는지 가늠할 수 있다.
매체 기사의 부정확과 일제 보고서 별보의 위상을 한 자리에 놓는 이유는 같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정설처럼 유통되고, 보조 가설이 1차 사료를 밀어내는 일이 북간도 무장투쟁사에서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한 시기일수록 가문의 주장이든 일제의 추정이든 그 위상을 분명히 표시하는 작업이 먼저다. 그래야 다음 연구가 그 위에 쌓일 자리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