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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수(安正脩) - 고려시대
『고려사(高麗史)』17권 세가(世家) 제17권 인종(仁宗) 20년 11월(1142년 11월 25일 음력) 癸丑。遣安正脩。如金。賀萬壽節。 25일에 안정수(安正脩)를 금 나라에 보내어 만수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임술 20년(1142), 송 소흥 12년ㆍ금 황통 2년 ○十一月,(생략) 遣李永章,如金,進方物,李陽升,賀正,安正脩,賀萬壽節。 ○ 11월에 (생략) 이영장(李永章)을 금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이양승(李陽升)은 신정을 하례하고, 안정수(安正脩)는 만수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동문선(東文選)』제35권 윤언이(尹彦頤)이 지은 표전(表箋)「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廣州謝上表]」에서 昨於丙辰五月。被中軍彈奏。奉勅落臣行職。受梁州防禦使。臣卽日奔去。越戊午年。伏蒙聖慈除臣廣州牧使兵馬鈐鎋管勾學事。禮部侍郞。許令催赴。至庚申十二月。朝謝並得施行今已拜官者。坐廢六年。分已甘於萬死。銜恩一旦。勢若出於再生。仰天無言。撫己揮涕。中謝。 竊以上之馭下。莫不欲忠。臣之事君。期於見信。然不可必。故或相乖。周公不免於流言。絳侯尙遭於繫急。望之帝之傅也。終於飮毒。屈原王之親也。卒以沉江。聖賢猶或如之庸瑣何足筭也。如臣賦資朴鄙。受性褊剛。智謀不足以周身。學豈能於華國。少甞僥倖。聖考賜之賢科。逮更因緣。陛下擢於要路。時或預聞國政。頻然入侍經筵。妄意遭時。過於用慮。遇事輒言其中否。橫身不顧於是非。先進爲之寒心。後生因而指目。媒孽所短。傅會而文。彈書屢至於升聞。以爲可殺。仁后雖知其贛直。莫得而寬。因竄逐於遐方。欲保全其餘命。而臣受貶之夕。臨行之時。罔知得罪之端。徒極積憂之念。及覩中軍所奏。曰彦頤與知常。結爲死黨。大小之事。悉同商議。在壬子年西幸時。上請立元稱號。又諷誘國學生。奏前件事。盖欲激怒大金。生事乘閒。恣意處置。朋黨外人。謀爲不軌。非人臣意。臣讀過再三。然後心乃得安。繄是立元之請。本乎尊主之誠。在我本朝。有太祖光宗之故事。稽其往牒。雖新羅渤海以得爲。大國未甞加其兵。小邦無敢議其失。奈何聖世反謂僭行。臣甞議之。罪則然矣。若夫結爲死黨。激怒大金。語言雖甚大焉。本末不相坐矣。何則。假使強敵來侵我邦。夫惟禦難之不遑。安得乘閒而用事。其指朋黨者誰氏。其欲處置者何人。衆若不和。戰之則敗。且容身之無地。何恣意以爲謀。况臣不預大華之言。與知常而同異。不參壽翰之薦。惟陛下所洞明。自一落於江湖。已六更於寒暑。祿廩久闕。衣食難周。親舊皆絶其交。妻孥俱失其所。形骸憔悴。兀若枯枝。精魄驚忪。茫如醉夢。活至今日。有賴聖知。重念臣以至弱之資。從西征之役。忘身以衛其國。乃義分之當然。成事皆因於人。何勤勞之足道。今將有說。非敢爲功。只期微懇之粗伸。或乞宸心之一照。昨於乙卯年。中軍以賊粮盡爲策。然㐫黨未降。日月漸久。江冰釋盡。計無所出。臣於三月。始立距堙議。爲人所沮。未得施行。至十一月。中軍於楊命門。始作距堙。令知兵馬事池錫崇與臣彦頤等。遞番到彼。檢視積土多少。計至數月。可附到城上。臣又與前軍使陳淑議定火攻。令判官安正脩等。作火具五百餘石。越九日早辰。以趙彦所制石砲投放。其焰如電。其大如輪。賊初亦從而滅之。至日暮火氣大盛。賊不得救。通夜打放。其楊命門幷行廊僅二十閒。及賊所積土山悉皆焚盡。十二月並潰。人馬可以出入。臣卽至中軍。具陳本末。請及時攻擊。無使賊設備。人有忿然以爲不可者。臣亦作氣力爭。十四日又至前軍。議急擊可破。人人皆曰候積土畢。方可攻賊已於前所設木柵以禦。臣懇請急攻。猶未之决。十六日元帥至前軍。悉集五軍僚佐議之。人人皆執前議。是日賊又築重城。其勢不可後之。先是池錫崇在軍監役。與臣意協。繼有副使李愈,判官王洙,李仁實等八人和之。於是元帥始從其議。取十九日。分兵三道。實入用事。破如枯竹。一無留難。臣於是日。顓掌中軍。與判官申至冲,金鼎黃,將軍權正鈞,房資守,錄事林文璧,朴義臣等。密整軍旅。早至七星門。一積木火之。火發然後。賊覺驚惶。倉卒不得救。燒蕩門廊。計九十七閒。望之虛豁。擬欲直入。會天陰雨。收兵入營。翌日曉頭。賊魁鄭德桓,維緯侯小官四人潛出城。資守令麾下捕至營。臣送德桓緯侯於元帥所。別令別將金成器等。率所捕小官二人。往景昌門諭賊。賊將洪傑出降。是日前軍在廣德含元門外。賊尙閉拒。傑與義民啇議。捉僞元帥崔永。仍率二領軍士來歸。然後賊大將蘇黃鱗,鄭先谷,朴應素等。文武九十餘人。相繼來降。其餘雜類。不可勝數。臣遣資守領軍士。望李徵正及降賊徐孝寬。率兵入城。封宮闕倉廩府庫。令徵正守闕。收其鑰匙六七樻納營。而聞左軍入自北門。縱兵發大府財帛。臣遣義臣止之不聽。更遣正鈞得止。大府完。於是臣遣臣男子讓於元帥所。報以實日子。元帥方至中軍。更命李仁實,李軾等。封宮闕倉廩府庫。因具表奏。此其大略。難以具陳。當此之時。自謂小酬於國事。胡爲厥後。翻然忽構於誣辭。遂使惷愚陷於寃枉。永惟平昔之所坐。亦是微臣之自貽。臣伏讀蘇軾受貶時表。曰臣先任徐州日。河水浸城。幾至淪陷。日夜守捍。偶獲安全。又甞選用沂州百姓程棐。令購捕㐫黨。致獲謀反妖賊李鐸,郭進等十七人。庶幾因緣僥倖。功過相除。以子瞻豪邁之才。尙譊譊之若此。况彦頤孤危之迹。遂嘿嘿而已乎。窮迫而然。冒陳奚已。而又金精會經於吏訊。浹七月而復顯官。惟忠同癈於江南。至三年而還舊位。惟臣不肖。與世多乖。名旣掛於深文。人爭逞其浮議。論罪未解。歷年于玆。敢愛殺身以自明。固貪於戀聖。久能忍垢而假息。有待於求伸。豈謂皇慈。特推大度。憫臣大窮之狀。憐臣無二之心。每煩訓諭於有司。再起孤忠於遠竄。仰陶新化。漸可齒於平民。終滌惡名。竊更期於後日。此乃至人無外。厚德包荒。念犬馬或霑蓋帷。謂簪履不忍捐棄。救臣餘生衆怒交興之際。收臣殘質幾年流落之中。特賜眞除。盡還舊祿。罔誣僅釋。日將出而蔀屋明。枯朽其蘇。春已還而時雨降。固非木石無情之比。敢昧乾坤造化之私。壯氣已衰。無復平生之彷彿。丹心尙在。誓殫晚節之驅馳。雖至塡溝。敢忘結草。 지난 병진(丙辰)년 5월에 중군(中軍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의 탄주(彈奏)를 입어 칙지로 신의 관직(官職)을 면(免)하여 양주(梁州) 방어사(防禦使)의 직을 받아 신이 즉일로 달려갔삽고, 다음 무오(戊午)년에 성은(聖恩)으로 신에게 광주 목사 병마금할 관구학사 예부시랑(廣州牧使兵馬鈐鎋管句學事 禮部侍郞)을 제수(除授)하옵고 부임을 독촉하옵기에 경신(庚申)년 12월에 이르러 조사(朝謝)하게 하여 아울러 시행하여 지금 이미 재임중이옵나이다. 좌폐(坐廢)한 지 6년에 분수로 이미 만사(萬死)를 달게 여겼사온대 은명(恩命)을 받자와 일조에 이 몸이 다시 살아난 듯하오니, 하늘을 우러러 말이 막히고 제 몸을 어루만져 눈물을 뿌리옵나이다. 중사(中謝)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위에서 아래를 제어할 때 충성을 요구하지 않음이 없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기어이 신임을 받고자 하였으나, 반드시 그렇게는 안 되어 때로 혹 서로 어긋남이 있었었나이다. 주공(周公)은 유언(流言)을 면치 못하였고 강후(絳侯)는 결박을 당하였으며, 망지(望之)는 황제의 사부(師傅)였으나 마침내 독약을 마셨고,굴원(屈原)은 왕의 친척이었지만 끝내 강물에 빠져 죽었사오니, 성현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용렬하고 미세한 자야 어찌 족히 이르리이까. 신과 같은 자는 천품(天稟)이 워낙 비박(鄙朴)하고 천성이 치우치게 강하여, 지모(智謀)가 족히 제 몸도 갈망하지 못하였사오니 학술이 어찌 나라를 빛낼 수 있사오리이까. 젊어서 일찍이 요행으로 성고(聖考)께서 현량과(賢良科)의 급제를 주시옵시고 뒤에 다시 반연으로 폐하께서 요로(要路)에 발탁해 주시어 때로 혹 국정(國政)에 참여하고 자주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때를 만났다 하여 지나치게 염려를 하고, 일을 만나면 곧 말하여,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엔 그 말을 듣거나 안 듣거나 살거나 죽거나를 돌아보지 아니하니, 선배들이 한심히 여기고 후생들이 이로써 지목하여, 온갖 중상ㆍ모략으로써 덧붙여 글을 꾸며 탄핵(彈劾)의 상소가 여러 번 위에 들려 신을 죽임이 가하다 하였나이다. 인왕(仁王)께서 신의 우직함을 아시오나 중론(衆論)을 어쩔 수 없어 중론에 의해 먼 곳에 귀양보내어 그 잔명(殘命)을 보전케 하고자 하였사온데, 신은 폄명(貶命)을 받은 날 저녁 길을 떠나던 때에도 죄를 입은 까닭을 통 알지 못하여 한갓 극도로 근심만 쌓였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중군(中軍)의 상주(上奏)한 바를 보니 이르기를 “언이가 지상(知常)으로 더불어 사당(死黨 사생을 같이하는 도당)을 맺어 대소사를 모두 같이 상의하였고, 지난 임자년 서행(西幸)하셨을 때 글을 올려 연호(年號)를 세우고 황제를 일컫기를 청하였으며, 또 국학생들을 유인하여 전건(前件)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대금(大金) 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내어 틈을 타서 마음대로 제 붕당 외의 사람들을 처치해서 불궤(不軌)를 도모함이니, 인신(人臣)의 도리가 아니다.” 함이었나이다. 신이 재삼 이 상소를 읽고 나서야 마음에 안도되었었나이다. 왜냐하면 첫째 연호 세우기를 청한 것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본조(本朝)에서도 태조와 광종(光宗)의 고사(故事)가 있고, 비록 신라와 발해(渤海)는 연호를 세웠으나 대국이 일찍이 군사를 움직인 일이 없었으며 소방(小邦)이 감히 그 실책을 의논하지 못하였었는데, 어찌 이 성세(聖世)에 그것을 도리어 참월(僭越)한 행동이라 이르오리이까. 다음, 신이 일찍이 의논한 죄는 있거니와 사당(死黨)을 맺고 대금을 격노하게 하려 했다 함은 말이 비록 심히 크나 본말(本末)이 서로 맞지 않나이다. 왜냐하면, 가사 강적(强敵)이 와서 우리 나라를 침노한다면 대개 병란(兵亂)을 막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 농간을 부릴 수 있겠으며, 그 붕당이라 지목하는 자는 누구며, 처치하려는 대상은 어느 사람이리이까. 뭇사람이 화목치 않으면 싸우는 대로 패하여 제 몸도 용납할 여지가 없겠거니 어찌 마음대로 꾀를 부리오리까. 하물며 신이 대화(大華)의 말에 참예하지 않았음과, 지상(知常)과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한 것과, 백수한(白壽翰)의 천거에 참가하지 않았음은 폐하께서 이미 통촉하시는 바이옵니다. 신이 한번 강호(江湖)에 떨어진 뒤로부터 이미 여섯 번이나 한서(寒暑)를 바꾸었나이다. 그 동안 녹름(祿廩)이 오래 궐하고 의식을 마련하기 어려워, 친구가 모두 교제를 끊고 처자가 모두 있을 곳을 잃어, 초췌한 몰골이 앙상한 마른 가지 같고 놀란 혼백이 멍하니 술 취한 사람같고 꿈꾸는 사람 같사오니,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오직 성지(聖知)만 믿어온 덕택이옵니다. 거듭 생각하옵건대, 신이 지극히 연약한 몸으로 서정(西征)의 역(役)에 종군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방위했음은 의(義)와 분수에 당연한 일이요, 일을 성공한 것은 다 딴사람에 인한 것이온데 무슨 근로(勤勞)를 말하오리까마는, 이제 말씀을 하려 함은 감히 공이라 함이 아니요 다만 작은 정성을 약간 피력하여 혹 성심(聖心)의 일고(一考)를 빌[乞]고자 함이옵나이다. 지난 을묘(乙卯)년에 중군(中軍)이 적(賊)의 양식이 다될 것을 전략(戰略)으로 삼았사오나, 흉당(兇黨)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시일이 차츰 오래되자 강의 얼음이 다 풀려서 어찌할 계책이 없었사옵기, 신이 3월에 비로소 거인(距堙)을 세울 것을 발의(發議)하였사오나 저지(沮止)하는 사람이 있어 시행치 못하였는데, 11월에 이르러 중군이 비로소 양명문(楊命門)에 거인을 만들면서 지병마사(知兵馬事) 지석숭(池錫崇)과 신(臣) 언이(彦頤) 등을 시켜 번갈아 현지에 가서 흙을 얼마나 쌓을까를 검시(檢視)하게 하시어, 계산하니 두어 달에 이르면 성 위에 붙여 올라감직 하였나이다. 신이 또 전군사(前軍使) 진숙(陳淑)과 더불어 화공(火攻)하기로 의정(議定)하여, 판관(判官) 안정수(安正脩)로 하여금 화구(火具) 5백여 석(石)을 만들게 해서 그달 9일 이른 새벽에 조언(趙彦)이 만든 석포(石砲)로 쏘니, 그 화염(火焰)이 번개 같고 그 크기가 수레바퀴 같은데, 적이 처음에는 또한 쫓아다니며 껐으나 날이 저물자 불기운이 크게 성하여 적이 불을 끌 수 없었고, 밤새껏 포를 쏘니 양명문과 그에 딸린 행랑 20칸 가량과 적이 쌓아올린 토산(土山)이 모두 불타 버렸나이다. 12일엔 적이 모두 궤멸(潰滅)되어 인마(人馬)가 드나들 만하기에 신이 곧 중군에 이르러 본말(本末)을 갖추어 진술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서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설비하지 못하게 하자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화를 내며 불가하다 하기에 신도 격노하여 다투었나이다. 14일에 또 전군(前軍)에 이르러 급히 공격하면 적을 파할 수 있다고 의논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흙쌓기를 다한 뒤를 기다려서 그때에 공격함이 가하다.” 하였으며, 적이 벌써 전에 만들었던 목책(木柵)에서 방어하므로 신이 급히 공격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그때도 오히려 결정을 짓지 못하였나이다. 16일에 원수(元帥)가 전군에 와서 오군(五軍)의 막료(幕僚)들을 다 모아 놓고 의논하니, 사람마다 다 앞의 의견을 고집하였나이다. 이날에 적이 또 겹성[重城]을 쌓으니, 그 사세가 도저히 적을 공격함을 지체할 수 없었나이다. 이보다 앞서 지석숭이 군에 있어 역사를 감독하던 중 신과 의견이 맞았고, 이어 부사(副使) 이유(李愈)와 판관(判官) 왕수(王洙)ㆍ이인실(李仁實) 등 8명이 신의 의견에 찬동하니 이에 원수가 비로소 그 의견을 좇아 그리하기로 채택되었으며 19일에는 군사를 세 길로 갈라 쳐들어가니, 그야말로 마른 대[枯竹]를 쪼개듯 하나도 거침과 어려움이 없었나이다. 신은 그날 중군을 전장(專掌)하여 판관(判官) 신지충(申至沖)ㆍ김정황(金鼎黃)ㆍ장군 권정균(權正鈞)ㆍ방자수(房資守), 녹사(錄事) 임문벽(林文壁)ㆍ박의신(朴義臣) 등과 더불어 비밀히 병력을 정비하여 일찍이 칠성문(七星門)에 이르러 나무를 쌓고 불을 지르니, 불이 난 뒤에야 적이 깨달았으나 당황하여 창졸간에 끄지 못하고, 문랑(門廊) 도합 97칸을 태웠습니다. 바라보니 훤하기에 곧장 들어가려 하였사오나 마침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기에 군사를 거두어 영(營)으로 돌아왔나이다. 이튿날 새벽에 적의 괴수 정덕환(鄭德桓)ㆍ유위후(維緯侯)와 소관(小官) 4명이 살그머니 성을 빠져 나오므로 자수(資守)가 부하로 하여금 잡아 영(營)에 이르렀고, 신이 덕환과 위후를 원수부로 보내고, 따로 별장(別將) 김성기(金成器) 등을 시켜 생포한 소관 2명을 거느리고 경창문(景昌門)에 가서 적을 효유(曉諭)하니, 적장 홍걸(洪傑)이 나와 항복하였나이다. 이날에 전군(前軍)이 광덕 함원문(廣德含元門) 밖에 있었는데 적이 아직도 문을 닫고 대항하여 싸우니 걸(傑)이 의민(義民)들과 상의하여 위원수(僞元帥) 최영(崔永)을 잡고 인하여 두 영(領)의 군사를 거느리고 귀순하였사오며, 그런 뒤에 적의 대장 소황린(蘇黃鱗)ㆍ정선곡(鄭先谷)ㆍ박응소(朴應素) 등 문무(文武) 90여 명이 서로 이어와서 항복하였고, 나머지 잡류(雜類)들은 이루 셀 수가 없었나이다. 신이 자수영군사망(資守領軍士望) 이징정(李徵正)과 항적(降賊) 서효관(徐孝寬)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궁궐과 창름(倉廩)ㆍ부고(府庫)를 봉하게 하고, 징정으로 하여금 그 쇳대[鑰匙] 6ㆍ7궤를 거두어 영에 바치도록 하였사온데, 한편 들으니 좌군(左軍)이 북문으로부터 성중에 들어가 군사들을 놓아 대부(大府)의 재물과 비단을 닥치는 대로 뒤져 가지게 한다기에, 신이 의신(義臣)을 보내어 만류했으나 듣지 않음으로 다시 정균(正鈞)을 보내어 만류하여 대부(大府)가 그제서야 완전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신이 신의 아들 양(讓)을 원수처에 보내어 그 사실이 있던 날자를 보고하니, 원수가 그때야 중군에 이르러 다시 이인실ㆍ이식(李軾) 등에게 명하여 궁궐ㆍ창름ㆍ부고를 봉하고 인하여 표(表)를 갖추어 주달(奏達)하였나이다. 이상이 그 대략이옵고, 모두 갖추어 진술하기는 어렵사옵나이다. 그때를 당해서야 신은 나라 일에 작은 공을 세웠다 생각하였사온데, 어찌하여 그 뒤에 손바닥 뒤집듯이 갑자기 무사(誣辭)를 얽어매어 마침내 이 어리석은 몸으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함에 빠지게 하였사옵나이까. 생각하옵건대, 평소에 저지른 바는 역시 미신(微臣)의 탓인가 하옵나이다. 신이 엎드려 소식(蘇軾)의 폄직(貶職)된 때에 임금에게 올린 표를 읽으니, “신이 먼저 서주(徐州)에 재임할 때 하수(河水)가 성안에 범람하여 성이 거의 함몰할 지경이었는데 밤낮으로 막아 지켜 우연히 안전함을 얻었고, 또 일찍이 기주(沂州) 백성 정비(程棐)를 선용(選用)하여 그로 하여금 흉당(凶黨)을 현상(懸賞)으로 잡게 하여, 그 모반한 요괴한 도적인 이탁(李鐸)ㆍ곽진(郭進) 등 17명을 잡을 수 있었사오나, 바라옵건대 혹시 요행히 공과 허물이 서로 면제(免除)될 수 있었으면” 하였사오나 자첨(子瞻)의 호일(豪逸)한 재주로도 오히려 이렇듯 잔소리로 변명하거든, 하물며 언이(彦頤)의 외로운 몸으로 어찌 입을 다물고 잠잠하오리까. 하도 사정의 궁박(窮迫)함이 이렇사온대 우러러 진술함을 어찌 그만둘 수 있나이까. 또한 김정(金精)은 일찍 형리(刑吏)의 문초를 받았으나 일곱 달 만에 다시 현관(顯官)으로 복직되었고, 추충(推忠)은 같이 강남(江南)으로 귀양갔으나 3년 만에 옛 벼슬로 돌아갔는데 오직 신만이 불초하여 세상과 어긋남이 많아서 이름이 이미 가혹한 법조(法條)에 걸려 있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뜬 비방을 일삼아 죄를 논하기에 쉴 날이 없어 지금까지 몇 해를 겪어 오는 중이옵니다. 감히 자살하여 심사를 밝히기를 아끼었으리까마는 진실로 성군(聖君)이 알뜰히도 그립사와 오래도록 제법 욕을 참고 잔 목숨을 보전하면서 억울함이 퍼지기만 고대하였사온대 뜻밖에도 이제 황자(皇慈)께옵서 특히 큰 도량을 베푸시어 신의 몹시 궁한 꼴을 딱하게 여기시고, 신의 둘이 없는 마음을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번 유사(有司)를 시켜 훈유(訓諭)하옵시고, 먼 귀양살이에서 고충(孤忠)을 다시 일으켜 주옵시니, 우러러 새 교화(敎化)에 훈도되어 버젓이 평민 속에 끼였사오니 끝내 악명(惡名)을 씻도록 다시 후일을 기약하옵나이다. 이는 대개 지극한 인(仁)은 밖이 없고, 두터운 덕은 거친 것도 포용하사, 개와 말에게도 혹 개유(蓋惟)의 은혜를 적시우고, 비녀와 신짝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생각으로, 뭇사람들의 노여움이 번갈아 일어나는 때에 신의 여생(餘生)을 구해 주시고, 몇 해 동안 유락(流落)하던 중에서 신의 쇠약한 몸을 거두어 주시어, 특별히 새로 벼슬을 제수하시고 옛 녹(祿)으로 다시 돌림이옵나이다. 무망(誣罔)이 다 풀림에 해가 뜨려 하자 음집[蔀屋]도 밝아지는 듯, 시들고 썩었던 몸이 회생되어 봄이 벌써 돌아와 단비가 내리는 듯하니 진실로 이 몸이 목석(木石) 같은 무지한 물건에 비할 것이 아니온대 감히 천지ㆍ조화의 사사로운 은혜를 모르오리까. 장한 기운이 이미 쇠하여 평소의 옛모습에 방불치는 못하오나, 단심(丹心)만은 아직도 있사오니, 맹세코 만절(晩節)의 구치(驅馳)를 다하여 비록 구학(溝壑)을 메울지라도 감히 결초보은(結草報恩)을 잊사오리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