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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궁궁통1
임소연 소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연구소의 이름은
‘아름답고 푸른 지구를 위한
교육 연구소’.
뭔가 느낌이
다르지요?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학이
단순한 수학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숫자는 자유를 동경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한의 숫자와 연결되기를 갈망한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위로 새가 날아가고 있다. 백성호 기자
삶의 이치,
세상의 이치,
존재의 이치로
가르치는
수학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종교의 깃발도 없고,
명상의 나팔소리도
없었습니다.
대신
아이들에게
수학을 통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마음이
오롯이 있었습니다.
#궁궁통2
임 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수학을
따분하고,
어렵고,
지겹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수학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임 소장은
1, 2, 3, 4라는 숫자가
사실은
우리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숫자들이 찾는 궁극의 수, 궁극의 빛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다. 그걸 찾게끔 다리를 놓아주는 게 종교의 역할이다. 백성호 기자
나는 1,
너는 2,
그는 3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2=2는 누구나
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4가 참이라고 하면
동의를 구하기 힘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1=1만 참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만 나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1도, 2도, 3도, 4도
모두 생명의 작용입니다.
1도 살아 있고,
2도 살아 있고,
3과 4도 모두
살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작용에는
근원이 있습니다.
그 근원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공통분모가 있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숫자는
각자가 따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흥미로운 설명이더군요.
#궁궁통3
만약 우리가
모든 숫자의 근원에 있는
공통분모를 알게 되면
어찌 될까요.
1이
자신의 근원을 알고,
2가
자신의 근원을 알고,
3이
자신의 근원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개별 숫자에
깔려 있는
공통분모를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임 소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2=4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알게
되겠지요.”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의 바탕에는 창조주의 숨결이 흐른다. 그걸 수학에서는 1 속에 0이 있다고 표현한다. 백성호 기자
그렇다면
모든 숫자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분모는
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생명의 작용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 뿌리가 바로
초월된 생명입니다.”
#궁궁통4
수학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철학 이야기가 되고,
다시
종교 이야기가 되더군요.
그렇다면
수학으로 표현하면
어떨까요.
1과 2와 3의 공통분모가
무엇일까요.
1=2가 되고,
2=3이 되게 하는
초월된 생명은
무엇일까요.
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나왔다. 1, 2, 3 하는 자연수만 있다가 0이 나오는 순간, 수학은 철학이 되고 종교가 됐다. 백성호 기자
이 물음에
임 소장은
‘0’을 꼽았습니다.
“수학에서
수의 근원은
0입니다.
동시에
0은 무한의 수이기도
합니다.”
왜 0이
무한의 수가 되는 걸까요.
“0이라는 숫자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기에
무한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1에도 0이 깔려 있고,
2에도 0이 깔려 있고,
3에도 0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너, 우리의 근원이
0으로 하나입니다.”
궁금하더군요.
1이라는 개별 숫자가,
2, 3, 4라는 개별 숫자가
그걸 알게 되면
각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입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의 근원이
0으로 하나임을 알면
우리가 가진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겁니다.
다 나누어 주더라도
본전은 항상
보전이 되는 겁니다.
0으로 말입니다.
0은
무한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0을 깨닫고,
2가
자신의 내면에 깃든
0을 깨닫는 일.
그게 바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되는
일이기도 하더군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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