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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뜻하지 않았던 당혹감
초반 마드릳에서의 며칠은, 인야에겐 뜻하지 않았던 당혹감들의 연속이었다.
시차로 밤낮이 뒤바뀐 채 일찍 눈이 떠진 다음 날 아침, 인야는 조용히 노트북을 켜고 사진을 정리했다.
덧창을 열자 엷은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고, 창 너머 가로수에는 어느새 새싹이 돋아 있었다. 여기는 벌써 봄이었다.
비둘기들이 나무에 앉아 그 새싹을 쪼아 먹는 모습까지 보였다.
마야는 이미 출근한 뒤였고, 아침은 산티아고가 차렸다.
인야는 그가 차리는 아침상을 옆에서 지켜보며 호응만 해주었다.
빵을 토스트기로 굽고 각자 알아서(산티아고는 커피를 인야는 우유를) 마실 걸 택했고, 버터와 잼(인야는 살구잼)으로 먹었다.
그리고 인야가 배 하나를 깎아, 한 조각을 산티아고에게 건네고 나머지는 자신이 먹었다.
그런 뒤, 산티아고가 알려준 대로 인야가 자신의 노트북을 인터넷과 연결시키니(비밀번호를 입력했더니), 신기하게도 바로 연결이 돼 주었다.
"아, 참으로 좋은 세상이로구나!"
인야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지난번까지 스페인이 인터넷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렇게 무선 인터넷이 쉽게 접속되는 게 오히려 놀라워서였다. 스페인도 이젠 상당히 발전해 있었던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는 점심을 준비하고 인야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느라 바빴다.
그 사이에 인야는 누리아 한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다소 조심스러운 억양으로,
"인야, 근데... 왜 이번에, 바르셀로나가 아닌 마드릳으로 간 거야?" 하고 물어왔다.
인야가 생각하니, 그 말 속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뭔가 섭섭한 게 있었냐는 의도도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리아, 그런 게 아냐." 하고 부정을 한 뒤, "내가 수년간 바르셀로나에서 살았었잖아? 그래서 내 친구들도 대부분이 바르셀로나에 있거나 살고. 그런데 이제 나도, 스페인의 다른 곳도 좀 알고 싶은 거야. '마드릳'도 그렇고, 또 다른 지방의 도시들에도 관심이 많고......" 했음에도,
"그래도, 인야 니가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으니... 뭔가 좀 이상해." 하니,
"여기 산티아고라는 마드릴레뇨가 작년에 한국으로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거든? 그래서 내가 그 친구 집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조만간 나는, 어딘가 새로운 숙소를 구해 나갈 거야. 그러니... 아무튼, 날 이해 해 줘." 하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이런 경우는 스페인 안에 존재하는 '마드릳'과 '바르셀로나'의 갈등 문제와 연결시킬 사안은 아니겠지만, 인야의 입장에서는 조금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만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되어, 직장에서 돌아온 마야와 함께 세 사람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웃느라 식사를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인야는,
'아, 언제 이랬던가? 내가 이렇게 웃음을 달고 살아본다는 게.....' 하고 잠시 생각에 젖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인야 자신이 웃음이 인색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 산티아고 집에 와서 지내는 며칠 사이처럼, 박장대소하면서 지내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 집에 온 이래, 웃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그런데 당혹감의 첫 관문은 우스울 만큼 사소했다.
며칠 전, 바르셀로나의 장이 보내주었던 핸드폰을 실수로 떨어뜨려 먹통이 돼 있어서... 인야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산티아고와 집 근처 대형 마트에 갔는데, 알고 보니... 고장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켜는 법조차 몰라 벌어졌던 일이란 게 판명되어, 둘은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한국 대사관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한국 대사관은 산티아고가 사는 동네에서 고속도로 위로 난 다리 건너에 있었다.
사실 인야는 그곳에 갈 계획도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산티아고가 자꾸만 그쪽으로 인야를 인도해서, 어찌 보면 끌려가듯 갔던 곳이었다.
산티아고는 작년에 한국에 가서 인야의 방에 가득 쌓여있던 그림들을 보고는, '이 많은 그림들을 쌓아놓기만 하고 어쩌려고?'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인야, 어떻게든 그 그림들을 세상에 내보이거나 팔아야 하지 않겠어?"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로 인야에게 자꾸만, 뭔가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더니...
급기야 자기 동네에 있는 한국대사관으로 인야를 데려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야는, 스스로 그런 곳에 찾아가 뭔가 일을 꾸미거나 만들 줄을 모르는 화가였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기 몹시 싫어해서, 누군가 대신 나서주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마드릳에 온 이래 산티아고가 자꾸만 그런 식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갔던 길이다.
(그러니까 인야는 산티아고의 요청에 의해, 자신은 그저 호응해주고 있었을 뿐인데......)
정작 대사관에 들어가니 산티아고는 뒷전에 물러서 있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뭔가 일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란 걸 깨닫게 되자...
갑자기 머쓱해진 건 물론, 산티아고로부터 '왜 그런 일을 남의 힘을 빌어서 하려느냐'는 무언의 핀잔까지 듣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가 바늘 방석이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야 인야는 겨우 산티아고에게,
"그들이 필요하면, 그들 스스로가 나를 찾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서봤자, 그들의 관심이 없으면(뻔한 일일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안 될 거야." 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아무튼 인야는 그랬다. 본인 스스로 나서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일에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으려는 자세였던 것이다.
그래봤자 자기만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대사관까지 찾아갔음에도 어정쩡하게 대사관의 정식 담당자도 아닌 직원에게,
"혹시, 대사관 차원에서 한국과 스페인 화가들의 미술 교류 행사 같은... 뭔가 문화 사업을 하지는 않습니까?" 하는, 뜬구름 잡는 물음만을 던지고는,
"지금 현재로선 그런 일은 계획에 없고, 혹시 그런 일에 관심이 있으면... '한국 문화원'에 가서, 문의를 해보세요." 하는 답을 듣고는,
민망한 얼굴로 돌아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인야로서는 평생 처음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고서도 인야는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려 내심 후회까지 하고 있었는데, 산티아고는 한 술 더 떠서...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예 '한국 문화원'에 직접 문의해 보라며, 자기네 집 전화기까지 손에 쥐여주며 채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야는,
"산티아고, 내가 며칠 뒤에 신시아 할머니를 만나야 하는데... 그날 여기 한국인 조각가 여인이 함께 나온다니, 그 사람에게 먼저 여기 미술계의 동향 같은 걸 물어본 뒤... 뭔가 궁리를 해 보는 게 순서일 거 같아." 하는 말로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한국에서도 하지 않던 일을, 여기까지 와서 해야 하나?' 하는 마음 한구석이 개운할 리 없었다.
이건 마치, 산티아고가 한국에 와서 뜻하지 않게 미사에 참석했던 것과 비교되는... 인야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산티아고의 인야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래서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인야로서는, 너무 당혹스런 일임에는 분명했던 것이다.
그 날 아침, 마야는 출근길에,
"인야, 오늘 오후에 우리 집안과 오랜 친분을 맺고 있는 아르헨티나인 젊은 부부가 점심을 먹으러 오거든? 그러니, 그들과 함께 점심을 해야 할 거야." 하고 나갔었다.
아무래도 초대된 손님이 있어선지 산티아고는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래서 그가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사이 인야는 인터넷을 하다가... 바르셀로나 마놀로의 사무실 번호를 찾아 걸어보니, 놀랍게도 그대로 연결이 되었다.
그 집 딸 '마리'를 거쳐 마놀로에게, 다시 까르멘에게까지 이어진 반가운 목소리들.
까르멘은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인야, 언제 바르셀로나에 올 거야?" 하고 반겨주었지만,
"까르멘, 이번에는... 지금 당장은 바르셀로나에 못 가. 내가 여기서 다른 일을 좀 하다가, 나중에나 갈 수 있을 거야......" 하고 자신의 뜻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야가 돌아왔고, 산티아고가 점심 전에 아뻬리띠보로 한 잔 하자고 불렀다.
인야는 식당에 가서, 전날 먹다 남았던 문어에(따파 식으로) 한 잔 하는데... 그것도 좋았다.
그렇게 부부와 있었는데, 빰쁠로나의 크리스티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그녀는 긍정적이고 친절한 목소리로 인야를 반기더니,
"인야, 우리 집에 방이 있으니... 여기 와서 얼마든지 머물어도 돼!" 했지만,
"크리스티나, 나는 이번에 조용히 처박혀서 글작업을 하려고 왔거든? 그러니, 어딘가 나만의 독립된 공간에 가 있을 거야..." 하고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크리스티나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지금 한창 살림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부담이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드디어 애기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도착했다.
그들은 이태리 토리노에서 방금 도착한 것으로, 다음 날 세고비아의 한 결혼식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는데, 얘기가 길어졌고 또 애들 때문에 아무런 정신도 없어서...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었던 인야는 피곤한 건 물론 게다가 식사 중 몇 잔 마신 비노 때문에, 눈이 아프기까지 했는데...
아까부터 인야는 기분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 아르헨티나 젊은 부부 중 여자가 인야를 대하는 표정이 영 떨떠름한 표정이어서, 어떤 인종차별을 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키가 훌쩍하게 큰 남자는 소박하고 순진한 모습이었지만, 여자가 문제였다. 그녀는 가능하면 인야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들의 얘기에 인야가 다소곳이 경청하느라 어쩌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상당히 싸늘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보통 상냥한 사람이라면 웃는 얼굴로 친근미를 드러내는 게 일반적인데, 이 젊은 여자는 친절은커녕... 어쩌면 '내가 왜 이런 사람과 앉아 있다지?' 하는 듯한, 아주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야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산티아고 부부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아무 관심도 없는 그들간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자리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인야로써는 산티아고 부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뿐더러, 초대된 그들에게도 최대한의 배려였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여자의 그런 투의 행동이 지속되자, 되레 짜증까지 났다.
그러면서 인야는 문득, 그동안 여러 차례 겪어온 비슷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스페인의 옛 식민지 출신들에게서 종종 느껴온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을 때는 다들 세상 얌전하고 순종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그 스페인 사람들이 자리를 뜨는 순간—동양인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태도가 싹 바뀌는 사람들.
'내가 굳이 동양인한테까지 굽실거릴 이유가 있나?' 하는 알량한 자존심과,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인데' 하는 노골적인 거부감을 대놓고 표출하는 식이었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유독 자주 마주쳤다. 한두 번의 우연이라 하기엔, 인야에게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이상하네? 왜 유독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그런 특징이 있는 걸까? 연구대상이네......' 하면서도, 심히 불쾌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참고로 해도, 스페인의 식민지를 거쳤던 나라 사람들은(주로 중남미) 스페인을 원수의 나라로 보기보다는 어떤 선진국으로 동경하는 입장이었던 게 보통으로.. 이들도 그런 처지일 것이었다.
그러면 소박하게 있을 게 아니고, 이 집에 초대되어 있는 동양 사람인 인야 같은 사람에게 왜 화풀이 비슷한 행동을 하는지......
인야는 그 여자의 j시선을 아예 무시하기로 했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니 문제일 뿐이다.' 하면서.
그런데 이들이 그렇듯, 식사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그리 많은지... 다 저녁 때가 돼서야 그들이 돌아가, 인야는 그제야 자신의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다 노크 소리에 깨어 나가 보니, 산티아고 부부는 저녁 초대에 나가야 된다며... 인야더러 냉장고 안에 먹을 게 많으니 어떻게든 저녁을 챙겨 먹으라고 하기에 알았다며 그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집을 청소하는 페루 출신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래서 인사를 하니 아주 환한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를 해 오는 모습이 좋았다. 그렇게 그 청소부 여자와 인사를 한 뒤 인야는 바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멍- 한 상태로 시간만 보내다, 인야가 물을 마시러 나가 잠시 주방의 냉장고 문을 열다가 그녀와 마주쳤는데...
어?
그녀의 인야를 대하는 태도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인야는 고개를 갸웃했고, 다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돈을 받는 산티아고 부부 앞에선 세상 천사같은 얼굴에 굽신거리기까지 했던 여인이, 이제는 굳이 그런 것과 상관없는 동양인에 대해 저자세를 취할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인야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다시 자신의 방에 돌아오는데, 기분이 영 찝찝하기만 했다.
'오늘 웬 일이지? 남미 출신 것들한테 다 인종차별을 받는 기분이네......'
그런데 얼마 뒤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는데, 그녀는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더구나 아까 그토록 상냥한 인사까지 했던 경우라면... 최소한, '나, 갑니다'하는 말이라도 던지고 갔을 법한데,
굳이 인야 같은 손님에게까지 보고(?)는 하기 싫었던 걸까?
그것 역시, 인야에겐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참, 재수가 없으려니......' 하는 생각에,
'우리 말에 '사람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단다. 너는 나 같은 동양인에게 '좋은 사람'으로서의 인간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구나. 너도 그 착하기만 했던 것 같던 가면을 니 스스로 벗어버리고 본색을 드러낸 꼴이니, 내가 너를 인간으로 존중해 줄 수가 없구나.'
그 어수선함 끝에, 인야는 문득... 작년 '은의 루트'에서 만났던 '켄'이라는 친구가 떠올랐다.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던 참이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번호를 다시 눌렀다.
신호가 두어 번 울렸는데, 이번엔 받았다.
"여보세요, 당신은 켄인가요?"
"에, 켄인데요..."
"저 혹시, 재작년 가을... 까미노에서 만났던 한국 친구, 기억나나요?"
"그럼, 당신은 꼬레아노... 인야?"
"예, 맞습니다."
"그래요? 인야!"
"네, 내가 지금 마드릳에 와 있어서... 그래서..."
"아! 인야, 잘 지냈어요?"
갑작스런 그의 환대에 인야는 스페인어가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1년 반, 그 진했던 기억이 잊힐 리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으라더니, 자신이 다시 걸어왔다.
둘이는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야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지낼 곳을 찾는다는 말을 하자... 아주 적극적으로 나섰다. 언제 살라망까에 올 것인지, 자신은 늘 그곳에 있다며... 최근 수술을 받아 당분간 일을 쉬는 중이니, 함께 집을 찾아보자고도 했다. 방세도 구체적으로, 200, 250유로 정도는 될 것 같다며, 도심이면 400유로쯤은 염두에 둬야 한다고도 했다.
인야가 시골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싶다고 하자, 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살라망까로 오라고까지 했다.
전화를 끊고도 인야는 한동안 들떠 있었다. 살라망까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지내는 나날을, 어느새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켄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며칠 뒤, 인야는 그 하루를 떠올리며 다시 켄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계속 통화 중이어서, 끝내 통화할 수 없었다. 그가 바쁘리라는 건 짐작이 됐지만, 어쩐지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만 같아 씁쓸함이 앞섰다. 그리고 두어 차례 더 걸었지만 그에게선, 답 전화가 아예 없었다. 이미 인야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음에도......)
실망이 컸다.
그래서 인야는 그 이름을, 자신의 기억(인명 사전) 속에서 조용히 지워버리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