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와 개신교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천주교와 개신교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어렸을 때에 관절이 아파서 자다 말고 눈물로 통증을 호소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특별히 어디가 병이 있어서 오는 통증이 아니다. 성장할 때에 오는 통증이다. 이것을 흔히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이때에 엄마들은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면서 그 아픔을 이겨내도록 했다. 교회도 2000년 동안 여러 번 성장통을 겪었다. 이것을 겪을 때에 아프지만 놀라운 성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회피하고자 할 때에 교회는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
“교회의 성장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한다면 “2000년의 역사에서 교회의 가장 큰 issue는 무엇이었는가?”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교회 질서이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안정이 필수적이다. 내부적으로 담합된 에너지가 있어야 외부로 뻗어 나갈 수가 있다. 교회 질서란 성경 해석과 성직의 체계, 예배 의식에 대한 일관성 등으로 교리의 일치성이다. 교리란 교회의 존재의 이유와 방법과 목적을 알게 한다. 이런 교리가 교회 안에 있어야 이방인과 이단에 대한 강력한 복음 전파와 변증이 가능하다.
교회사 전체를 보면 유대교나 천주교나 개신교가 꾸준히 추구한 것이 교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질서를 유지하느냐? 성장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혼동(chaos)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혁신적인 혼동(chaos)이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고자 하셨지만 기존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범하는 자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혼동을 방관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질서는 필연적으로 혼동을 몰고 온다. 그러나 혼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주님 오신 후 400년 동안 종교회의를 수년씩 수 차례를 열었다. 이 때에 수천번의 회의를 거쳐 삼위일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성령론 등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교회사의 운명이 보이지 않을 만큼 혼동의 시기였다. 교회는 크게 3지역으로 나누어 졌다. 로마 교회(서방교회)와 안디옥 교회(동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남방교회)가 있었다. 이 세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으로 인하여 신앙의 스타일이 달랐다. 이 교회들이 교리를 세워가면서 일치하는 부분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각 지역의 교회들이 종교회의에서 논쟁을 통해 신약의 교리들을 만들 때에 서로 감정 싸움과 지역 이기주의가 작용했다.
종교회의가 거듭되면서 교회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고 서로를 교리적으로 정죄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교리 논쟁에 휘말려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분리되어졌고 남방(알렉산드리아)교회는 무너지게 되었다. 교회가 살아 남기 위해서 택한 마지막 카드가 교리 논쟁 종식이었다. 논쟁을 종식시켜서 무너지는 교회를 세우고자 교회 질서를 강조했다. 안정과 화합이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교회는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권력을 찾았고 그 결과 로마의 서방 교회는 황제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했다. 종교회의를 주관했고 교리 논쟁의 원인이 되는 성경 배포를 제한함으로 교회가 분리되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교리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이런 효과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 이단들은 사라지게 되는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된다.
천주교가 성경을 감춘 것은 이단을 막고 교회 질서를 세우려는 우교충정에서 나온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저지른 위대한 실수였다. 성장통을 인위적으로 거부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논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이삭이 죽을 것 같아 야곱은 에서로 변장하여 축복을 받아냈지만 이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살았다. 인간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은 분명히 다르다.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단속할 수는 있었지만 신학은 더 이상 예전처럼 발전하지 못했다. 성경을 아무나 보지 못하게 되자 신부와 성도들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성경에 없는 많은 예식이 생겨났고 구원의 방법과 결과을 혼동해서 선행을 통한 구원과 연옥설과 성모 마리아 이론들이 교회의 본질을 가리게 되었다. 즉 성경을 감춘 천주교의 실수가 어마어마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잘못을 보고 루터와 칼빈을 대표해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자국어로 나누어 주면서 종교 개혁을 했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예식들은 과감하게 없앴다. 말씀을 바탕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천주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과격하게 청소한 것이다. 그리고 오직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종교개혁의 운동의 결과로 대각성 운동과 선교 운동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성령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고민은 성경이 보급되자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이단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성령운동이 일어나서 은사중심의 목회자들이 생겼다. 교회가 은사중심이 되면서 질서가 문란하게 되었다. 이적과 은사 중심의 목회 운동이 기존 교회의 질서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았고 교리를 무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목회적 리더쉽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령론과 은사론을 제한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기적과 성령의 역사를 제한적으로 해석했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윤리적으로 접근했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나누어주고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역사적인 실수가 반복된 것이다. 은사는 성도의 영적 무기이다. 성도가 구원 받은 삶 그 이상의 영적 삶을 풍성하게 하려면 성령론과 은사론에 대한 신학적 제한적 조치보다는 재조명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한 철학자의 사상을 알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을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의 정체성을 알고자 한다면 천주교가 저지른 실수를 살펴보면 된다.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 개념이 개신교의 입장이다. 예를 들어 천주교는 신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면 안 된다. 개신교는 결혼 할 것을 전제로 목사 안수를 준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천주교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보완이었다. 참으로 잘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400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는 또 다른 실수를 범하고 있다. 천주교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성경을 감추었고 개신교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 성경 해석을 제한했다. 특히 성령론과 은사론에서 이성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은 역사적으로 오래 동안 실수로 기억될 것이다. 교리와 신앙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역사는 한 번도 완벽한 “주의-ISM”와 “주의자-IST”를 낸 적이 없다. 우리는 개혁주의가 완벽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우리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오류에 동참하는 것이다. 개혁주의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다.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찾았지만 완전한 신앙을 위한 진리는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계시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성장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교회는 성장한다. 교회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교회의 성장이다. 성장을 위한 혼동은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위한 서곡이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개혁과 변화를 계속 해야 한다.
갓피플 소재찬 목사의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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