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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연수보고서 |
과 정 |
지역전문가 단기과정 (중국) |
기 간 |
2005. 12. 5 ~ 2005. 12. 31 |
연수자 |
전북지사 남원지점 양승근 |
목 차
1. 북경지사 5
가. 중국의 전력산업 현황 6
(4) 향․진급 행정 구역과 그 이하 26
카. 일행과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혼자 갈 것인가 45
(5) 샹그리라 장족(藏族) 전통 가옥에서 하루 지내기 60
(6) 중국에서 만난 일반 중국인과 언어 그리고 한자 63
붙임자료(기차 및 버스 승차권, 기타 門標[입장권] 등) (별책)
Ⅰ. 머리말
요즘 중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창빠이샨(長白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관하여 매스컴에서 연일 보도하고 있지만 직접 개인과 밀접한 관계가 없어서 그런지 대부분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되기 전인 1912년에 손문(孫文)이 중국 대륙에서 이민족(異民族)이 세운 마지막 국가인 청(靑)을 멸망시키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국하였다. 손문(孫文)에 이어 장개석(張介石)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毛澤東)의 중국 공산당보다 10배가 넘는 화력을 가지고도 괴멸 직전의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밀려 왜 대만으로 쫓겨났을까?
그리고 지금 남북 관계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미 관계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지 않아 만약 북한 정권이 붕괴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해봤다.
일반 사람들이나 대부분의 언론 매체,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북한 지역이 한국이나 미국으로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북한의 고립화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만약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중국에서 수년 전부터 준비해온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한 이후 중국에서 지금까지 추진하고 있는 소수 민족 정책으로 동북삼성(東北三省; 黑龍江省, 吉林省, 遼寧省)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과 함께 북한 지역을 중국의 일개 지방 정부인 소수 민족 자치구로 편입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면 지금 중국에는 북한 지역보다 더 광대한 지역에서 흩어져 있는 1,500만 명이 넘는 단일 소수 민족이 한족들과 어울려 아무런 동요 없이 살고 있는 소수민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가 있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성 싶다.
중국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나라와 항상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왔고 현재에도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단된 것도 일부 중국의 영향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해인 1945년 8월 기준으로 장개석(張介石)의 국민당 병력은 370만 명, 대포 6천 문이었는데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병력이 32만 명, 대포는 6백 문이었다고 한다.
누가 보아도 2차대전이 끝나면 중국 대륙은 국민당 정부가 접수할 것으로 생각하여 미국이나 소련에서도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의 기본 방침을 정하는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張介石)을 회담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성급하게도 장개석(張介石)이 일본이 패망하면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주(滿洲), 티베트(西藏), 신강(新疆) 지역은 물론이고 몽골(蒙古)과 베트남(越南)을 포함하여 한국(韓國)에까지 중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야욕을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미영소는 한반도에서 중국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미소가 분할 점령과 분단으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아주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현재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30년 후에는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앞설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러한 중국 대륙을 4주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그렇게 장시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북경 지사와 현지 법인을 통하여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 한전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자 혜택이라고 생각되었다.
본사에서 근무할 때 KEDO원전 사업 추진을 위해 12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경을 경유했지만 이번처럼 부담 없이 중국 곳곳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는 게 무척 고맙고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평소에 중국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 지역이나 짧은 지식과 정보에 한정이 되었는데 직접 스스로 갈 곳을 정하고 일정을 관리하여 짧지 않은 4주 동안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게 약간 버겁고 힘들다고 생각되었지만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체력이 뒷받침할 수 있는 데까지 돌아다녀볼 계획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전에 좀더 충분한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시기상으로 연말이다 보니 업무 때문에 완벽한 준비를 하지는 못했다. 평소에 중국을 자주 다녀서 그런지 그렇게 들뜬 기분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다. 우선 연수 과제를 정하고 둘러볼 곳을 정했지만 워낙 중국이라는 나라가 면적도 인구도 많아서 갈 곳을 선정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일상 업무 처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김갑순 북경 지사장님을 비롯한 주재원 여러분과 무척 현지 법인의 송창현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마도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 북경 지사나 현지 법인의 주재원들이 해외사업처나 KEDO원전사업처에서 함께 근무했었고 해외 사업과 KEDO원전 사업을 위해 북경을 방문하면서 자주 만나서 그런지 그렇게 서먹하지는 않았다. 특히 서문 철 과장과는 개인적으로 학교 후배여서 바쁜 일정에도 직접 나를 안내하여 귀국 직전에 중국에서 개발한 기발한 약품을 소개해 주어 서문과장의 단골 가계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넉넉하게 사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해외경영자 과정으로 북경에서 연수 중인 김동재 부장과도 두 차례 만나서 식사를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해남도(海南島)를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웠다.
한편으로 함께 간 영등포 지점 김창우 씨와 함께 지낸지 10여일 만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서 헤어져 각자 혼자 돌아다니다 북경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는 아쉬움과 불편함이 있기도 했지만 서로 간에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 취향대로 다닐 수가 있어서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이번 연수 보고서에서는 직접 가보았던 중국의 명승지나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설명은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여행용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 보면 아주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어서 모두 생략했다. 그리고 또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 촬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사진도 인터넷에 보면 전문 사진사나 여행가가 촬영한 사진이 많고 또 그 지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너무 멋지고 훌륭한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어서 사진 촬영하는 시간과 정열을 아껴서 다른 곳에 쏟았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다음에 중국으로 연수나 출장 또는 여행을 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되어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지점장님, 인사처 인력개발팀과 직원 동료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Ⅱ. 연수 개요
1. 연수자 인적 사항
소 속 |
직급 |
성 명 |
연락처 |
전북지사 남원지점 oo과장 |
o직급 |
양 승 근 |
0363-211 |
2. 연수기간 : ’05 12. 5(월) ~ ’05. 12. 31(토) (4주)
3. 방문 기관
○ 북경지사
○ 무척발전소
4. 연수 목적
○ 해외 전력 시장 동향 파악
○ 국제 감각 및 위기관리 능력 배양
○ 현지 체험을 통한 중국의 경제 발전 상황 및 이문화(異文化)의 이해
○ 중국 소수민족의 실태 파악 및 현지 확인
○ 해외지사 업무이해
5. 연수 일정
구분 |
’05. 12. 5 ~ 8 (4일간) |
’05. 12. 9 ~ 28 (20일) |
’05. 12. 29 ~ 31 (3일) |
장소 |
북경지사 |
중국 각 지방 및 무척 현지 법인 |
북경지사 |
내용 |
북경지사 및 중국 전력 산업 현황의 개괄적인 설명 청취 |
중국 주요 지방 현지 문화 체험 및 무척 현지 법인 방문 |
중국 전력 산업 현황 자료 수집 및 보고서 초안 작성 |
Ⅲ. 북경지사 및 중국 전력산업 현황
1. 북경지사
가. 임 무
○ 본사가 위임하거나 발전 자회사의 위탁을 받은 외자 구매 및 계약 사후 관리
○ ‘전항’ 관련 납품 독려 및 품질 관리
○ 해외 경영 정보 수집
○ 기타 본사 지시 및 발전 자회사 수탁 업무 처리
○ 해외 사업 관련 정보 수집 및 지원
나. 연 혁
○ 1995. 8. 18 북경사무소 설립 이사회 의결
○ 1995. 12. 28 사무소 설립 등기
○ 1996. 2. 6 사무소 개소 (북경 國貿大廈)
○ 1999. 11. 6 사무소 이전 (亮馬河大廈)
○ 2004. 1. 2 북경지사로 명칭변경
○ 2004. 6. 30 주재원 증원 (발전회사 1, 송변전 1)
○ 2005. 1. 6 해외사업전략실 신설[직제규정 개정(제1860호)]
○ 2005. 2. 19 현 위치로 이전 (凱賓斯基)
○ 2005. 2. 23 주재원 증원(한수원 1명)
다. 인원 현황
구 분 |
3직급 |
4직급 |
현지직원 |
계 |
비고 |
정 원 |
1 |
4 |
2 |
7 |
|
현 원 |
1 |
4 |
2 |
7 |
|
2. 중국의 전력산업 현황
가. 중국의 전력산업 현황
(1) 발전설비 및 발전량
(’05. 12. 기준, 단위 : 만kW. 억kWh)
구 분 |
화 력 |
수 력 |
원자력 |
계 |
발전설비 |
38,413(75.6%) |
11,652(22.9%) |
685(1.3%) |
50,841(100%) |
발 전 량 |
20,180(81.5%) |
3,952(16.0%) |
523(2.1%) |
24,747(100%) |
※ 전년대비 발전설비 7.8%, 발전량 15.3% 증가
(2) 35kV이상 송전전압 및 설비
(’05. 12. 기준)
전압구분 |
220kV |
330kV |
500kV |
750kV |
계 |
선로(c-㎞) |
177,971 |
12,481 |
61,308 |
141 |
251,901 |
용량(MVA) |
579,940 |
25,240 |
258,620 |
3,000 |
866,800 |
※ 배전전압은 1ø220V, 3ø380V, 10kV이며,
※ 주요 송전전압은 110kV, 220kV, 330kV, 500kV(초고압)
나. 중국의 전기 요금 특징
(1) 도시지역 전기 요금
○ 소매 전기 요금표와 사용량에 따라 요금 부과
○ 도시고객에 대해서는 고객 구내 계량기까지 전력회사가 관할
(2) 농촌지역 전기 요금
○ 도매 전기 요금표와 전압 및 사용량에 따라 요금 부과
○ 농촌 지역에서는 향, 진(鄕, 鎭)의 전력관리소 변전소까지만 전력회사가 관할하며 전기요금은 도시에 비하여 훨씬 비싼 수준임
○ 현재 도시와 농촌의 전기요금 체계 단일화 작업 추진 중
※ 비주민 조명, 상업용, 비공업 / 보통공업, 대공업용, 농업용에 대해서는 최대부하 시간대, 일반 시간대, 저부하 시간대로 나눠 시간대별 요금 적용
(3) 중국의 전기요금 구조
○ 북경지역 소매 전기 요금표
(단위 : 元/kWh)
분 류 |
전력량 요금 |
기본요금 | |||||
1kV미만 |
1~10kV |
35kV |
110kV |
220kV 이상 |
최대수요 |
변압기 용량 | |
元/kWh |
元/kWh |
元/kWh |
元/kWh |
元/kWh |
元/kW/월 |
元/kW/월 | |
주거용 |
0.4800 |
0.4700 |
0.4700 |
- |
- |
- |
- |
비주거 조명용(가로등) |
0.7225 |
0.7125 |
0.7125 |
- |
- |
- |
- |
상업용 |
0.7275 |
0.7175 |
0.7175 |
- |
- |
- |
- |
비공업용(소규모공장) |
0.6375 |
0.6275 |
0.6175 |
- |
- |
- |
- |
보통공업용(소규모공장) |
0.6545 |
0.6445 |
0.6345 |
- |
- |
- |
- |
대공업용 |
- |
0.5175 |
0.5025 |
0.4925 |
0.4875 |
22.5 |
15 |
전기로황인등 |
- |
0.5075 |
0.4925 |
0.4825 |
0.4775 |
22.5 |
15 |
중소화학비료 |
- |
0.2900 |
0.2820 |
0.2760 |
0.2710 |
18.0 |
12 |
농업용 |
0.4890 |
0.4790 |
0.4690 |
- |
- |
- |
- |
- 비주민조명, 상업용, 비공업/보통공업, 대공업용, 농업용에 대해서는 최대부하 시간대, 일반시간대, 저부하시간대로 나눠 시간대별 요금 적용
- 북경kWh의 일반용은 약 90원/kWh 정도
- 91.60원/kWh까지 계절별 요금적용
- 북경의 주거용 요금(0.48元/kWh)은 약 60원/kWh에 해당됨
다. 중국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1) 중국의 전력산업 체제 개혁 배경
○ 국가전력공사(國家電力公司)의 독점 타파
○ 전력산업에 대한 경쟁 도입과 효율 제고
○ 합리적인 전력 가격 체제 확립 등
(2) 중국의 전력산업 체제 개혁 방안
○ 발전소와 전력망의 분리를 통한 개혁
국가전력공사가 관리하고 있는 전력 산업 자산을 향후 발전과 송전망 등 업무 분야에 따라 구분하고, 자산별로 조직을 재편. 발전과 송전망 분리 후 국가전력공사의 기존 발전 부문 자산은(화능집단공사[華能集團公司]가 직접 독립발전기업으로 재편하는 자산은 제외) 4개의 전국적인 발전회사로 재편되어 국무원으로부터 개별적으로 경영권을 부여(종전의 발전부문을 5개의 발전회사로 개편)
○ 가격 경쟁을 통한 전력망 접속, 송전
발전부문에 경쟁을 도입하고 송전망 접속가격은 발전단가와 시장경쟁에 의한 전기 생산가격에 따라 결정하게 됨. 독점적 지위에 있는 전력망회사가 송·배전 가격을 결정함에 있어 엄격한 효율 원칙과 원가에 대한 보상, 적정한 가격통제 아래 정부가 확정한 가격 결정 원칙에 따라 최종적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소매 가격을 도출
3) 국가전력공사의 개편(전력망 부문 개편)
○ 기존 ‘전력망부문’을 ‘국가전력망공사(國家電力網公司)’와 ‘남방전력망공사(南方電力網公司)’로 분할
- 국가전력망공사 : 국가전력공사가 관리하던 전력망 자산 출자인을 대표하게 되고, 국유 독자기업 형식으로 발족. 국가전력망공사(國家電力網公司)는 향후 화북(산동성을 포함), 동북(내몽고 동부 포함), 서북, 동(복건성 포함), 화중(중경, 사천 포함) 등 5개 구역의 전력망주식회사(西藏[티베트]전력회사는 국가전력망공사가 대신 관리)를 설립
- 남방전력망공사(南方電力網公司)는 광동, 해남과 원래 국가전력공사 관할이던 운남성(雲南省), 귀주성(貴州省), 광서성(廣西省)의 전력망 자산을 관리
(4) 전력감독위원회 설립
○ 전력감독위원회의 역할
- 전력시장 운전규칙 제정, 시장에 대한 감독과 관리업무 수행 및 공정한 경쟁 유지
- 정부 주관부서에 대한 전기요금 조정 건의
- 전력회사 생산품질에 대한 감독과 전력사업 허가 발급 및 관리
- 전력시장 쟁의 처리
- 사회 일반 서비스 정책 실시에 대한 감독
○ 전력감독위원회의 감독 대상
- 발전회사와 송전망회사
○ 전력감독위원회의 운영 재원
- 주 수입원 : 국가재정 예산 집행
- 보조 수입원 : 전력회사로부터 징수된 비용을 집행
라. 서부대개발의 추진
(1) 추진 배경
○ 중국정부의 3단계 발전전략(1단계; 溫飽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단계, 2단계; 小康 여유 있는 생활단계, 3단계; 現代化)의 3단계 실현을 위해 자원이 풍부한 서부 개발 불가피
○ 동부 공업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중서부지역의 시장과 노동력 및 지하자원 개발이 필요
○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낙후된 서부지역의 생활 수준 향상을 통한 정치적 안정 도모
(2) 주요 프로젝트
○ 서전동송(西電東送) Project
○ 서기동수(西氣東輸) Project
○ 청장공로(靑藏公路) Project
(3) 서전동송(西電東送) Project
○ 추진 목적
서부지역(운남성과 귀주성)의 풍부한 에너지자원(수력)을 개발하여 동부 공업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전력을 공급
○ Project 주요 개요
- 서부지역 수력발전소 건설
- 서부지역 전력의 동부 송전을 위한 전국 송전망 통합 추진(500kV 초고압 송전망 건설)
- 농촌지역 송전망 개보수 사업 추진
Ⅳ. 중국 문화 탐방
1. 중국 개관
가. 개황과 명칭
(1) 개황
중국은 우리 정부보다 1년여 늦은 1949년 10월 1일 건국하였다. 이 날 중국공산당 주석이었던 모택동(毛澤東)은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중국은 건국 이전인 1949년 9월 27일 다음과 같은 4가지 사항을 통과시켰다.
○ 중화인민공화국 수도를 북평(北平)으로 하며 북평을 북경(北京)으로 개명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서기(西紀, 중국어는 西元)를 채택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國歌)가 제정되기 전에는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대신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國旗)는 ‘오성홍기(五星紅旗)’로 한다.
중국의 현행 헌법(1999년 수정) 제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격에 대해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社會主義制度是中華人民共和國的根本制度。禁止任何組織或者個人破壞社會主義制度。)”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건국 이래 사회주의 국가였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다.
건국 이래로 1970년대 말까지는 사회주의의 이념인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평등 추구를 보류하고 개혁개방의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향후 20~30년 내에 중국의 GNP가 일본이나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 정책의 도입과 실행을 ‘중국의 특색을 구비한 사회주의(具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 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구호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는 원래 계획경제로서 경쟁원리를 주축으로 삼는 시장경제와는 반대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사회주의는 유보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국은 건국 이래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이 줄곧 변함없이 집권하여 왔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정부보다 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약칭은 ‘중공당(中共黨)’이다. 중공당의 최고 권력기구는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과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이다. 최고 실력자는 건국 이래로 모택동(毛澤東, 1948~1976), 화국봉(華國鋒, 1976~1978), 등소평(鄧小平, 1978~1997), 강택민(江澤民, 1989~2005)으로 교체되어 왔으며 현재는 호금도(胡錦濤)가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강택민(江澤民)으로부터 물려받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모택동과 화국봉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으나 등소평과 강택민 시기는 대체로 안정을 누려왔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되었으며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국민당(國民黨) 정부 군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당원은 건국 당시에는 450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대략 6,500만 명 정도이다.
중국 정부는 ‘중앙인민정부(中央人民政府)’ 또는 통상 ‘국무원(國務院)’이라고 불리고 있다.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기구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약칭 全人大)’라고 불린다.
우리의 통념상 사회주의 중국에는 일상적인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물론 집회결사, 언론, 거주이전의 자유 등은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일상적인 행동에는 거의 제약이 없다. 특히 1970년대 말 ‘개혁개방(改革開放)’ 이래로 직업선택의 자유 등은 우리와 거의 차이가 없다. 단 우리의 군사정권 시절처럼 정부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모택동 시기에는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가옥과 식량을 배급하고 의료비 및 교육비 등이 거의 무료였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모두 유료화 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어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향후 20년이 지나면 미국의 경제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중국은 미국, 일본, 러시아와 더불어 우리 나라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4개 국가 중의 하나이다. 우리와 중국은 건국 이래 상호 적대와 단절 관계에 있었다. 그 이유는 동서간 냉전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때 양국은 2년 반 동안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1992년 국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적대관계를 벗어나 우호적인 관계를 시작하였다. 나아가 양국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 갈수록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현재 중국은 미국, 일본과 더불어 우리의 최대 수출 대상국이며, 3대 무역국 중의 하나이다. 동시에 우리의 통일과 장래에도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국가이다.
(2) 명칭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中國’이라는 말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약칭이다. 우리는 물론 중국 내에서도 ‘中國’이라는 단어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의 역대 왕조를 통칭하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2년 우리 나라와 수교하기 전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中國’이 아니라 ‘중공(中共)’이라고 불렀다. 대신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은 ‘中國’이라고 불렀다. 중화민국은 1992년 우리 나라와 국교를 단절한 이후에는 ‘대만(臺灣)’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명칭상의 변경은 국제적으로 똑같이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이 분단국가이고 양측의 국제적 위상이 1970년대 발부터 역전되어 발생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북경을 수도로 삼아 건국했다. 중화민국은 그보다 37년 이전인 1912년에 ‘남경(南京)’을 수도로 삼아 건국했으나 1949년에 중국공산당에 패퇴하여 대륙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내주고 대만으로 천도했다. 양측은 현재 대립 상태에 있는데 약측을 동시에 지칭할 때는 ‘양안(兩岸)’이라고 한다.
국제적으로 대만은 1970년대 말 이후 ‘Republic of China’에서 ‘Taiwan’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은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용하는 명칭이고 ‘中華’는 중국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 ‘中華’의 ‘華’ 자는 중국인들이 ‘화하족(華夏族)’이라고 자칭한 데에서 기원한다. 현재는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중국인’ 또는 ‘중화민족’은 한족만이 아니라 중국의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 우리가 우리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용의 자손(龍的子孫)이라고도 칭한다.
‘華’는 단독으로 중국을 가리킨다. 예들 들어 중국을 대표하는 통신사는 ‘신화사(新華社)’인데 ‘新華’는 ‘新中國’을 뜻한다. 중국인들을 ‘華人’이라고도 하며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을 ‘華僑’라고 한다.
한국이 영어로 ‘Korea’인 것처럼 중국은 영어로 ‘China’이다. 이는 진(秦)이 강성했던 시기에 서양에 전해져 음역되었다는 설이 있다. 매우 드물지만 ‘Cathay’라고도 한다. 홍콩에 ‘Cathay Pacific’이라는 유명한 항공사가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소문자로 ‘china’라고 쓰면 ‘도자기’라는 뜻이다. 중국의 도자기가 너무 유명해서 국가 명칭이 특산품을 가리키는 뜻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영어 정식 명칭은 ‘People's Republic of China’이며, 약칭은 ‘PRC’이다. 1970년대 말 이전에는 통상 ‘Red China’라고 불렀다.
중국의 역사상 자국을 중국이라고 공식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중화민국이 건국한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도 사용은 했으나 고유명사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中國’이라는 단어는 주(周)대의 문헌과 ‘시경(詩經)’, ‘예기(禮記)’에 최초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에는 수도지역을 가리키거나 한족이 거주하는 지역 또는 건립한 국가를 통칭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사이(四夷: 강羌, 융戎, 적狄, 만蠻)’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또는 ‘구주(九州)’의 가운데에 있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중국인들이 이들 민족보다 우월한 문명을 가졌다는 뜻으로 ‘中國’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강한 주변 민족에 포위되어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中國’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국가를 높여서 ‘신주(神州)’라고도 칭한다.
나. 중국 지리
(1) 위치와 면적
중국은 우리의 북부와 인접하며 황해 건너 서부와 서남부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대륙의 동부, 태평양의 서부에 위치한다. 중국 영토의 최북단은 북위 53°로서 막하(漠河) 이북의 흑룡강(黑龍江)이고 최남단은 북위 4°로서 남사군도(南沙群島)의 증모암사(增母暗沙)이다. 최서단은 동경 73°로서 신강위구르자치구 서부의 파미르고원(?米兒高原)이고 최동단은 동경 135°로서 흑룡강과 우수리(烏蘇里)강이 만나는 곳이다.
남북간의 위치 차이는 49°, 거리는 5,500km이며 동서간의 경도 차이는 62°, 거리는 5,200km에 달한다. 최동단과 최서단간의 시차는 4시간이다. 신강(新疆) 지방을 제외하고는 수도 북경을 표준시로 삼는다. 중국 표준시는 우리 나라보다 1시간 늦다.
중국의 육지 면적은 약 960만km2로 러시아(2,200만km2), 캐나다(995만km2)에 이어 세계 3위이고, 4위인 미국 영토(935만km2)나 유럽의 전체 면적과 비슷하다.
중국 대륙의 기하(幾何) 중심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부근이다. 난주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중국 영토 전체가 반경 2,500km의 원 안에 대체적으로 들어간다.
중국의 내륙 국경선은 약 2만 2,800km2이며, 무려 15개 국가와 인접하고 있다. 북한(朝鮮), 러시아(俄羅斯), 몽골(蒙古), 카자흐스탄(哈薩克斯壇), 키르기스스탄(吉兒吉斯斯壇), 타지키스탄(塔吉克斯坦), 아프카니스탄(阿富汗), 파키스탄(巴基斯壇), 인도(印度), 네팔(尼泊兒), 시킴(錫金), 부탄(不丹), 미얀마(緬旬), 라오스(老?), 베트남(越南) 등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다. 바다를 건너 가까운 나라는 한국(韓國), 일본(日本), 필리핀(菲律?), 말레이시아(??西?), 싱가포르(新加坡), 인도네시아(印度尼西?), 태국(泰?), 캄보디아(柬?寨), 방글라데시(孟加拉?) 등이 있다. 접경 국가가 많은 만큼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대상 국가가 많은 장점도 있지만 국경 분쟁 등 갈등이 발생할 여지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2) 지형과 산맥
중국 지형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복잡다양하며, 우리와는 반대로 서고동저(西高東低)형이다. 각종 지형이 점하는 비율은 산지 33%, 고원 26%, 평원 12%, 구릉 10% 등이다. 경지 이용 면적은 10% 정도이며 산림지는 13%, 담수 면적이 2%, 사막이 13%이고 초지가 42%로 가장 넓다.
중국의 지형은 서쪽의 높은 지역으로부터 동쪽의 낮은 지역까지 다음과 같은 네 지대(階梯)로 구분되는데, 그 경계선은 지리분계선과 동시에 농업생산 분계선이 된다.
첫 번째는 서남부의 청장고원(靑藏高原)으로 해발(海拔) 4,000m 이상이며,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가장 높은 지역[第一階梯]이다.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산의 주무랑마(珠穆朗瑪)봉, 곤륜(崑崙)산, 기련(祁連)산, 용문(龍門)산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날씨가 추워 내한성이 있는 쌀보리의 일종인 나맥(裸麥)이 주요 농작막이며, 소의 일종인 야크(yak, ?牛)를 교통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고원의 배(高原之舟)’라고 부른다.
중국 지도
두 번째 높은 지역[第二階梯]은 곤륜산, 기련산과 대흥안령(大興安?), 태행산(太行山) 사이의 해발 1,000~2,000m인 곳이다. 청장고원의 북쪽과 동쪽지역인데 대부분 드넓은 고원과 분지로 되어 있다. 서북의 타림(塔里木) 분지의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 사막은 중국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사막에는 키가 큰 백양나무와 농지, 과수원과 마을이 있는 ‘오아시스(녹주, 綠洲)’가 있는데 그것의 물은 높은 산의 눈과 얼음이 녹아 흘러내린 것이다. 과거 실크로드의 통과지역이었던 투르판(吐魯番) 분지, 경치가 좋은 사천(四川) 분지, 내몽골(內蒙古) 고원, 황토(黃土) 고원, 운귀(雲貴) 고원 등이 있다. 제1계제(第一階梯)와 제2계제(第二階梯) 지역은 ‘서부 내륙(西部內陸)’ 지방이라고도 부르며 인구도 매우 희소하고 아직 개발도 덜 된 지역이다. 중국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부개발(西部開發)’의 대상지역이다.
세 번째 지역[第三階梯]은 해발 500m 이하인데 구릉과 평원이 분포되어 있다. 만주의 드넓은 동북평원(東北平原), 북경 남쪽으로 뻗어 있는 화북평원(華北平原), 강과 호수가 많은 장강 중하류평원(長江中下流平原)은 중국의 3대 평원이다. 대도시가 대부분 이 지역에 위치하며 인구의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한다. 교통도 편리하고 경제도 발전되어 있다.
제3계제(第三階梯)의 동쪽 바다와 그 밑의 대륙붕이 제4계제(第四階梯)인데 깊이가 200m 이하이다.
중국의 산맥은 다음과 같은 동서, 북서, 남북의 네 방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숫자는 높이 단위 1,000m)
○ 서북지방에 위치하는 동서 방향 : 천산(天山, 3~5), 음산(陰山, 1~2), 곤륜(崑崙, 5~7), 진령(秦?, 2~3), 남령(南?, 1)
○ 서남지방에 위치하는 북서 방향 : 알타이산(阿兒泰山, 1~3.5), 기련산(祁連山, 4), 히말라야산(喜馬拉雅山, 6), 카라코람산(喀喇昆侖山, 6), 캉디스산(岡底斯山, 6)
○ 동부에 위치하는 북동 방향 : 대흥안령(大興安?, 1.5), 태행산(太行山, 1.5~2), 장백산(長白山, 2), 대만산(臺灣山, 3~3.5)
○ 중부에 위치하는 남북 방향 : 횡단산(橫斷山, 2~6), 육반산(六盤山), 하란산(賀蘭山)
중국에는 전 세계적으로 8,000m 이상 되는 12개의 고봉(高峰) 중 7개가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친근한 산은 이들 높은 산보다 ‘오악(五岳)’이다.
이곳은 역대 황제들이 봉선(封禪),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들인데 동악(東岳)인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 서악(西岳)인 섬서성(陝西省)의 화산(華山), 남악(南岳)인 호남성(湖南省)의 형산(衡山), 북악(北岳)인 하북성(河北省)의 항산(恒山) 등을 일컫는다. 그리고 불교의 4대 명산이 있다. 안휘(安徽)의 구화산(九華山)은 지장(地藏) 보살을, 산서(山西)의 오대산(五臺山)은 문수(文殊) 보살을 사천(四川)의 아미산(蛾眉山)은 보현(普賢) 보살을, 절강(浙江)의 보타산(普陀山)은 관음(觀音) 보살을 각기 모시고 있다. 우리 백두산의 별명인 장백산(長白山), 황산(黃山), 여산(廬山)도 이들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3,000m 이하의 낮은 산들이다.
청장고원, 운귀고원, 내몽골고원, 황토고원은 중국의 4대 고원이며 타림(塔里木)분지, 준가얼(準?爾)분지, 타이다무(紫達木)분지, 투르판(吐魯番)분지, 사천(四川)분지는 중국의 5대 분지로 꼽히고 있다.
(3) 강과 해양
중국의 주요 하천은 청장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하며 하천 흐름의 낙차가 매우 크다. 따라서 수력자원이 풍부한데 포장수력은 6.8억 kW로 세계 1위다.
중국의 하천은 흐름의 방향에 따라 동쪽의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장강(長江), 황하(黃河), 흑룡강(黑龍江), 주강(珠江), 란창강(瀾滄江) 등이 있다. 창장고원의 노강(怒江), 아로장포강(雅魯藏布江) 등은 남으로 국경을 건너 인도양으로 흘러가며 신강의 객강(喀江)은 북으로 국경을 넘어 북극해로 흘러간다. 호수로 흘러 들어가거나 신강의 타림강처럼 사막을 흐르다가 없어지는 신기한 하천도 있다.
중국의 최장의 하천은 우리가 양자강이라고 부르는 장강(長江)이다. 예전에는 사천성 의빈(宜賓)시 이하의 강줄기를 장강이라고 부르고 양주(揚州)시 이하를 양자강(揚子江)이라고 불렀다. 이집트의 나일강(6,600km), 브라질의 아마존강(6,480km)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6,300km)이다. 장강은 청장고원의 탕글라산(唐古拉山)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동해로 흘러든다. 중하유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강수량이 풍부하여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지역이자 수심이 깊고 강폭이 넓어 중국 수상운하의 대동맥이다. 1만 톤급 배가 바다에서 630마일 떨어져 있는 한구(漢口)까지 올라가며 작은 배들은 1,000마일을 더 올라가 티베트 경계까지도 이를 수 있다. 연도의 주요 도시로 중경(重慶), 무한(武漢),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이 있다. 동정호(洞庭湖)와 파양호(?陽湖)는 장강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거의 매년 장강 하류는 홍수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사천선 백제성(白帝城)에서 호북성 남진관(南津關)까지의 240km가 장강 삼협(長江三峽: 瞿塘峽, 武峽, 徐陵峽)인데 경치가 좋은 것으로 유명하며 1992년 공사를 시작해서 2006년 5월에 완공 예정인 삼협댐(三峽大?)이 있으며 이 삼협댐의 공사 책임은 중국삼협댐개발총공사(CTGPC)가 맡아 시공했다. 이 공사는 크게 물막이 제방과 수문 건설, 발전기 26기(기당 70만kW)를 가동해 1일 전기량 1,820만kW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 건설, 1만 톤급 선박 2척이 댐을 넘나들 수 있는 갑문식 운하 건설, 3,000톤급 선박을 20분 만에 끌어올릴 수 있는 대형 리프트 건설 등 4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중국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한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하천으로서 전장 5,464km이다. 물의 색이 황토고원을 지나면서 황색으로 변해 황하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현재는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황하는 중화민족의 요람(搖籃)이라고도 한다. 황하의 유역 토지는 매우 비옥하여 농업에 적당하였으므로 중국인들의 조상은 주로 이곳에서 거주했다. 6,000여 년 전에 서안(西安)의 반파촌(半坡村)에는 모계씨족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중국인의 선조인 황제(黃帝)도 이곳에서 생활했다. 역대 왕조의 수도인 안양(安陽), 장안(長安), 낙양(洛陽), 함양(咸陽), 개봉(開封) 등도 모두 황하 옆에 있다.
황하는 흐름의 낙차가 매우 작아 1마일에 1피트 정도이다. 더구나 하상에 퇴적물이 쌓여 점점 높아지므로 제방을 더 높이 쌓아야 한다. 결국에는 하상이 지면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를 ‘지상하(地上河)’라고 한다. 황하에서 가장 긴 둑은 전장 4,000km인데 옛날에 구축한 것까지 합하면 무려 7,000km에 달하는 ‘황하대제(黃河大堤)’이다. 그래서 한번 홍수가 발생하여 제방이 터지면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황하는 산동반도 남쪽과 북쪽으로 일곱 번이나 물길이 바뀌었다. 심하게 수로를 바꾼 것도 26회에 달하며 역사상 총 1,500~1,600회 이상 범람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황하를 ‘중국의 비애(悲哀)’ 또는 ‘해하(害河)’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흑룡강은 전장 4,370km로 중국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중국 경내와 중러 접경을 3,422km 흐르다가 러시아 경내로 유입하여 오호츠크해로 흘러 들어간다.
남부에 위치하는 주강(珠江)은 서강(西江), 북강(北江), 동강(東江)이 합쳐진 것인데 가장 긴 서강이 2,100km로 중국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회하(淮河)는 하남성에서 발원하여 황해와 장강으로 흘러가는데 전장 1,000여 km이다. 회수는 지형과 기후 등 많은 면에서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는 중요한 자연분계선이다. 황하와 더불어 대표적인 해하(害河)이다.
중국의 호수는 1,000km2 이상이 13개로 모두 7만km2인데 담수호(淡水湖)와 함수호(鹹水湖)로 구분할 수 있다. 파양호(?陽湖), 동정호(洞庭湖), 태호(太湖), 홍택호(洪澤湖)는 중국 4대 담수호이며, 청해호(靑海湖)와 납목호(納木湖)는 유명한 함수호이다.
중국은 동쪽과 남쪽의 일부만이 바다인데 발해(渤海), 황해(黃海), 동해(東海), 남해(南海) 등 4개 해역으로 구분되면 총면적은 470여 만km2이다. 해안선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호형(弧形)을 이루며 총 1만 8,000km이다. 발해는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산동반도로 둘러싸인 바다이며 황해는 요동반도에서 장강 하구까지의 바다이다. 동해는 장강 하구에서 대만해협까지의 바다이며 남해는 그 이남의 바다이다.
해안선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대련(大連), 진황도(秦皇島), 천진(天津), 연대(烟臺), 청도(靑島), 연운(連雲), 남통(南通), 상해(上海), 영파(寧波), 온주(溫州), 복주(福州), 하문(廈門), 산두(汕頭), 심천(深?), 홍콩(香港), 주해(珠海), 담강(湛江) 등의 연안도시가 있다.
중국에는 총 5,000여 개, 총면적 8만여 km2의 섬이 있다. 중국의 최대 도서(島嶼)는 대만도(臺灣島)인데 복건성(福建省)과 마주보고 있으며 우리의 경상도 면적과 비슷한 3만 5,000km2이다. 해남도(海南島)는 두 번째로 큰 섬인데 광동성 남부에 있으면 대만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서 현재 독립된 성(省)이다.
다. 기후와 자연자원
(1) 기후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대륙성 계절풍 기후에 해당한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라시아 대륙을 배후지역으로 삼고 있으면 세계 최대의 해양인 태평양을 향하고 있다. 겨울에는 대륙이 해양보다 기온이 낮고 기압이 높아 시베리아와 몽골고원에서 불어오는 편북풍의 영향으로 인해 한랭 건조한 날씨가 되며 여름에는 그 반대로 편남풍의 영향으로 온난 습윤한 날씨가 된다. 특히 3~4월까지 부는 편북풍을 대단히 심하다. 특히 황사(黃砂)를 싣고 와 북경 시내에서는 눈을 뜨고 걷기 힘들 정도이며,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까지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또한 7~8월의 편남풍은 태풍으로 변해 호우를 몰고 와 장강 유역 등지에 대규모 홍수를 일으키고 있다.
국토의 크기에 어울리게 남에서 북으로 열대, 아열대, 온난대, 온대, 아한대의 다섯 개 기후대로 나눌 수 있다. 최북부에 위치한 동북 만주의 흑룡성은 연평균 기온이 섭씨 5.5°이며 1월과 7월의 평균 기온이 -18.8°와 23,7°인 반면에 최남부에 위치한 해남성(海南省)은 연평균 기온이 25.4°, 1월과 6월의 평균 기온이 각기 19.7°와 29.8°이다. 남북간 여름의 기온 차이는 크지 않지만 겨울의 기온 차는 놀랍게도 최고 섭씨 50~60°에 달한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한대, 온대, 열대의 농작물을 자연 상태에서 모두 생산할 수 있는 유리한 농업 여건을 가지고 있다.
강수량의 차이도 지역에 따라 심하다. 서남과 동남지역은 연 강수량이 2,000mm에 달하지만, 서북 타림분지 같은 곳은 50mm에도 미치지 못한다. 황하 유역도 연 강수량이 600~800mm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중국의 지형과 기후를 살펴보면 ① 서남의 티베트고원(靑藏高原)과 서북의 신강(新疆), 몽골고원(蒙古高原) 지역, ② 만주(滿洲) 지역, ③ 회하(淮河) 이북의 화북(華北) 지역, ④ 회하 이남의 화남(華南) 지역의 네 지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중국 역대 왕조의 영토였던 화북과 화남지역은 진령과 회화를 잇는 선을 기준으로 삼아 구분하는데 상호 좋은 대조를 이룬다. 화남지역은 평균 기온이 높아서 일년 내내 푸른색의 식물이 자라며 겨울에도 눈은 거의 내리지 않고 흐린 날씨에 비가 많이 내린다. 농업을 위해서는 이상적인 기후지만 오랫동안의 경작으로 토지의 양분은 부족한 상태이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겨울에 보리나 채소를 재배하고 여름에는 벼를 경작한다. 2모작 심지어 3모작까지도 가능하며 쌀을 주식으로 삼는다.
화북지역은 건조하고 겨울에는 대단히 춥다. 소위 ‘황진만장(黃塵萬丈)’의 바람도 심하다. 비옥한 황토의 퇴적에도 불구하고 염분과 황토의 모세관 작용으로 지표로 올라와 증발하기 때문에 건조하여 벼농사가 힘들며 건조 작물인 밀과 기장을 많이 재배한다. 따라서 분식을 많이 먹는다.
(2) 자연자원
중국의 토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다. 산지, 고원, 구릉을 합친 면적이 전체 토지의 66%를 차지하며 평지면적은 34%를 차지한다.
농업, 임업과 목축업에 활용되고 있는 면적은 전체의 46% 정도를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96만km2로 전체의 10%를 차지한다. 이것은 전 세계 경지면적의 7%에 해당되는데 중국은 이 크기의 농지로 세계 인구의 22%를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경작지는 위에서 언급한 3대평원과 주강의 삼각주, 사천분지에 집중되어 있다.
동북평원은 송화강(松花江)과 요하(遼河)의 충적으로 이루어져 송요평원(松遼平原)이라고도 한다. 이곳의 토양은 부식토질의 검은 옥토이고 기후도 아주 건조하지는 않지만 기온이 낮고 성장기간이 짧아서 소맥, 옥수수, 고량과 콩 등을 주로 재배한다.
화북평원은 황하, 회하, 해하(海河) 등의 침적토로 형성되어서 지세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지만 수자원이 부족하여 알칼리성 토양으로 변질되기 쉽다. 여름에는 대단히 덥고 겨울에는 대단히 추워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기 때문에 소맥, 조, 면화 등의 농작물과 사과, 배, 복숭아, 포도, 감 등의 과일을 재배한다.
장강의 중하류 평원은 지세가 낮고 평탄하며 강과 호수가 많다. 농업을 위한 기후조건이 좋고 수자원도 풍부하여 식물의 성장 속도도 빠르다. 벼, 귤, 유채, 누에, 콩 등을 재배하고 담수어도 많이 생산되는 등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 부른다.
주강의 삼각주는 아열대 해양성 기후에 속한다. 풍부한 수자원과 높은 기온으로 벼의 이모작이 가능하고 여지(?枝), 바나나(香蕉), 목과(木瓜), 양도(楊桃) 등의 과일이 생산된다.
사천분지의 농업지역은 비옥한 자색토이고 중성의 토양으로 침수성과 통기성이 좋다. 아열대의 고온다습한 계절성 기후에 속해 벼의 2~3모작까지도 가능하다. 유채와 귤 등의 생산량이 많으면 양잠도 유명하다.
1990년을 기준으로 중국의 주요 농산물 품종인 곡류, 고기류, 목화, 유채 씨의 생산량은 세계 1위이며 땅콩과 찻잎의 생산량은 세계 2위이고, 콩의 생산량은 세계 3위, 사탕수수와 사탕무의 생산량은 각각 세계 4,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삼림면적은 115.3만km2로 전국토의 12%인데 세계 각국의 평균 삼림면적 22%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삼림지구는 전국 삼림량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백두산과 대흥안령 북부지역인데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자작나무와 낙엽송이 주종을 이룬다. 기타 히말라야산의 서남 삼림지구와 운귀고원의 남부지구가 손꼽힌다.
중국의 초원면적은 31.9만 km2이다. 초원은 흑룡강의 서부, 황토고원의 북부와 서북부의 산지를 거쳐 청장고원에 분포되어 있는데 전장 3,000km에 달하고 모두 1,000~5,000m의 고지대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연 방목장은 내몽골 대초원으로 8.7만km2이며 서부보다 강우량이 많아 목초지로서의 조건도 매우 좋다. 중국의 축산물 생산 두수는 말과 돼지가 세계 1위, 산양과 면양이 각각 1, 3위이며 소는 5위이다. 기타 유명한 팬더곰(熊猫), 금털원숭이(金絲?), 꽃사슴(梅花鹿) 등의 특산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지하자원의 종류와 매장량이 풍부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160종의 유용광물 중에서 148종의 매장이 확인되었다. 안티모니움, 리치움 등의 비철금속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철, 텡스턴, 주석은 전 세계 매장량의 10% 정도이다. 석탄은 전 세계 매장량의 1/3을 보유하여 생산량과 더불어 서계 1위이다. 산지는 산서성의 대동(大同), 요녕성의 무순(撫順)이 유명하다. 석유의 매장량은 약 200억 배럴로 세계 4위의 산유국이다. 산지는 흑룡강성의 대경(大慶), 산동성의 승리(勝利)가 유명하다.
라. 행정구역
행정구역이란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통제, 관리하기 위하여 여러 조건의 차이에 따라 전 국토를 분할하고 이에 적절한 행정단위를 설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우리의 지방 행정구역의 체제가 대체적으로 도(道), 군(郡), 면(面)의 3등급 체제로 되어 있는 것처럼 중국도 기본적으로 3등급 체제로 되어 있는데 명칭은 성(省), 현(縣), 향(鄕, 또는 鎭)이다.
(1) 성급(省級) 행정구역
성급(省級) 행정구격이란 성과 동일한 수준의 행정단위를 가리키는데 ‘1급행정구역’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성(省), 직할시(直轄市), 자치구(自治區), 특별행정구(特別行政區)의 네 종류가 있으며 모두 중앙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
성은 매우 많아서 22개나 된다(대만을 포함할 경우 23개). 직할시는 4개, 자치구는 5개, 특별행정구는 2개가 있는데 위치하는 지역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동북구(東北區) : 길림(吉林), 요녕(遼寧), 흑룡강(黑龍江)의 3개 성
○ 화북구(華北區) : 북경(北京), 천진(天津)의 2개 직할시와 화북(河北), 산서(山西)의 2개 성, 내몽골자치구
○ 서북구(西北區) : 섬서(陝西), 감숙(甘肅), 청해(靑海)의 3개 성과 영하회족(寧夏回族)과 신강위구르(新彊維吾爾)의 2개 자치구
○ 화동구(華東區) : 상해(上海)직할시와 산동(山東), 안휘(安徽), 절강(浙江), 강소(江蘇), 복건(福建), 강서(江西)의 6개 성
○ 중남구(中南區) : 하남(河南),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동(廣東), 해남(海南)의 5개 성과 광서장족(廣西壯族)자치구
○ 서남구(西南區) : 중경(重慶)직할시와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의 3개 성과 서장(西藏)자치구
동북구, 화북구, 서북구, 서남구, 화동구, 중남구의 6개 지구는 건국 직후부터 1954년까지 ‘대행정구(大行政區)’로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행정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지구별로 협조사항이 있을 경우에 여전히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기타 정식 행정구역의 명칭은 아니지만 화북(華北), 화남(華南), 화중(華中), 그리고 중원(中原) 등의 명칭도 사용된다.
중국에서 기상예보를 할 때는 동북, 서북, 서남, 중부, 동남 연해(沿海)의 5개 지역으로 나누어서 한다.
중국의 각종 건설사업은 통상 성급단위로 진행되며, 각종 사회경제 통계자료 역시 성급단위를 기초로 삼는다. 성급 행정구역의 최고 권력기관은 ‘인민대표대회(人民代表大會)’이며 이것의 집행지구는 ‘인민정부(人民政府)’이다. 성인민정부의 소재지를 ‘성회(省會)’라고 부르며 자치구는 ‘수부(首府)’라고 부른다. 성회와 수부는 모두 각 성과 자치구의 정치,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名 稱 |
略 稱 |
政府 所在地 |
面積(㎢) |
人口(萬名) |
區劃區分 |
北京市 |
경(京 J?ng) |
북경(北京) |
1.68 |
1,082 |
華 北 區 |
天津市 |
진(津 J?n) |
천진(天津) |
1.10 |
879 | |
河北省 |
기(冀 Ji) |
석가장(石家莊) |
19.00 |
6,108 | |
山西省 |
진(晋 Jin) |
태원(太原) |
15.00 |
2,856 | |
內蒙古自治區 |
내몽골(內蒙古 Ne?ime?nggu?) |
후허하오터(呼和浩特) |
110.00 |
2,146 | |
遼寧省 |
요(遼 Lia?o) |
심양(瀋陽) |
15.00 |
3,946 |
東 北 區 |
吉林省 |
길(吉 Ji) |
장춘(長春) |
18.00 |
2,466 | |
黑龍江省 |
흑(黑 He?i) |
하얼빈(哈爾濱) |
46.00 |
3,521 | |
上海市 |
호(? Hu?) |
상해(上海) |
0.58 |
1,334 |
華 東 區 |
江蘇省 |
소(蘇 Su?) |
남경(南京) |
10.00 |
6,706 | |
浙江省 |
절(浙 Zhe?) |
항주(杭州) |
10.00 |
4,145 | |
安徽省 |
환(晥 Wa?n) |
합비(合肥) |
13.00 |
5,618 | |
福建省 |
민(? M?n) |
복주(福州) |
12.00 |
3,005 | |
江西省 |
감(? Ga?n) |
남창(南昌) |
16.00 |
3,771 | |
山東省 |
로(魯 Lu?) |
제남(濟南) |
15.00 |
8,439 | |
河南省 |
예(豫 Yu?) |
정주(鄭州) |
16.00 |
8,551 |
中 南 區 |
湖北省 |
악(鄂 E?) |
무한(武漢) |
18.00 |
5,397 | |
湖南省 |
상(湘 Xia?ng) |
장사(長沙) |
21.00 |
6,066 | |
廣東省 |
월(? Yue?) |
광주(廣州) |
22.00 |
6,283 | |
廣西壯族自治區 |
계(桂 Gui) |
남녕(南寧) |
23.00 |
4,225 | |
海南省 |
경(璟 J?ng) |
해구(海口) |
3.22 |
656 | |
重慶市 |
유(? Wu?) |
중경(重慶) |
8.20 |
3,500 |
西 南 區 |
四川省 |
천(川 Chua?n) 또는 촉(蜀 Shu?) |
성도(成都) |
47.80 |
10,722 | |
貴州省 |
귀(貴 Gui) 또는 검(黔 Qia?n) |
귀양(貴陽) |
17.00 |
3,239 | |
雲南省 |
운(雲 Yu?n) 또는 전(秦 Qin) |
곤명(昆明) |
38.00 |
3,697 | |
西藏自治區 |
장(藏 Za?ng) |
라싸(拉薩) |
120.00 |
220 | |
陝西省 |
섬(陝 Sha?n) 또는 진(? Dia?n) |
서안(西安) |
19.00 |
3,288 |
西 北 區 |
甘肅省 |
감(甘 Ga?n) 또는 롱(? Lo?ng) |
난주(蘭州) |
39.00 |
2,237 | |
靑海省 |
청(靑 Q?ng) |
서녕(西寧) |
72.00 |
446 | |
寧夏回族自治區 |
녕(寧 Ning) |
은천(銀川) |
6.60 |
466 | |
新疆維吾爾自治區 |
신(新 X?n) |
우루무치(烏魯木齊) |
190.00 |
1,516 | |
香港特別行政區 |
항(港 Ga?ng) |
홍콩도(香港島) |
0.10 |
600 |
特 別 區 |
澳門特別行政區 |
오(澳 Ao) |
오문반도(澳門半島) |
0.016 |
43 | |
臺灣省 |
대(臺 Ta?i) |
대북(臺北) |
3.62 |
2,257 |
|
거의 1급행정구역은 단음절의 약칭을 가지고 있다. 이들 약칭은 자동차번호판, 철도노선 명칭, 공문서 등지에 많이 사용한다. 몇 가지 철도 노선의 명칭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경호선(京?線) : 北京 - 天津 - 徐州 - 南京 - 上海
경합선(京哈線) : 北京 - 瀋陽 - 長春 - 哈爾濱
경광선(京廣線) : 北京 - 鄭州 - 武昌 - 廣州
상검선(湘黔線) : 長沙 - 懷化 - 貴陽
성유선(成濡線) : 成都 - 重慶
이들 약칭은 대체로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원래 명칭으로부터 단순히 한 글자만을 취한 유형이다. 이들은 京, 津, 遼, 吉, 黑, 蘇, 浙, 川, 貴, 雲, 藏, 陝, 甘, 寧, 靑, 新, 台 등이다. 둘째는 해당 성에 소재하는 강이나 호수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유형이다.
湖南省 - 湘 - 상강(湘江)
雲南省 - ? - 전지(?池)
江西省 - ? - 감강(?江)
黑龍江省 - 黑 - 흑룡강(黑龍江)
浙江省 - 浙 - 절강(浙江, 별칭은 錢塘江)
靑海省 - 靑 - 청해호(靑海糊)
셋째는 역사 지명에서 유래하는 유형이다.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은 춘추전국시대에 각기 노(魯), 진(晋), 진(秦)나라에 속했고, 사천성(四川省)은 삼국시대 촉(蜀)에 속했다. 하북성(河北省)과 하남성(河南省)은 한(漢)대에 각기 기주(冀州)와 예주(豫州)에 속했고, 광서성(廣西省)과 복건성(福建省)은 진(秦)대에 각기 계림군(桂林郡)과 민중군(?中郡)이었다. 호북성(湖北省)은 청대의 성회인 무창(武昌)이 고악주치소(古鄂州治所)인 데서 유래했다. 광동성(廣東省)은 전국시대에 백월족(百?族)의 주거지였다. 상해 근처 오송강(吳宋江) 하류 일대의 예전 명칭이 호독(?瀆)이었다.
수도인 북경은 4개 직할시 중의 하나로 인구는 대략 우리 서울과 비슷한 1,000만 명의 대규모 도시이다. 10세기 요(遼)나라와 금, 원, 명, 청의 수도였으며 현재 중국의 정치,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국무원(國務院), 중국공산당중앙(中國共産黨中央) 등의 중앙정치조직과 북경대학(北京大學), 청화대학(淸華大學), 인민대학(人民大學) 등이 있다. 북경은 서안(西安)과 더불어 역사 유적이 가장 많은 소위 ‘천년고도(千年古都)’인데 고궁(古宮, 별칭은 紫禁城), 천안문(天安門), 만리장성(萬里長城), 천단(天壇), 이화원(?和園)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이외에 1급행정구역으로 ‘특별행정구’가 있다. 현재는 홍콩(香港)과 마카오(澳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중국과는 다른 정치, 경제제도의 시행이 허용된 지역으로서 법률상 국방과 외교를 제외하고는 중앙정부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것은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식 논리에 따른 것인데 1개 국가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제도가 병존할 수 있다는 뜻이다.
(2) 지급(地級) 행정구역
지급(地級) 행정구역은 ‘2급행정구역’이라고도 한다. 시(市), 지구(地區), 자치주(自治州), 맹(盟)이 설치되어 있는 대도시가 이에 속하며 성의 통제를 받는다. 성급(省級)과 현급(縣級) 사이의 중간에 있다.
지구란 우리의 광역시와 비슷한데 어떤 도시와 그 주변의 몇 개 현(縣)을 포함하여 설정된 도시를 가리킨다. 현재 전국에 17개가 있다.
자치주는 자치구(自治州)와 마찬가지로 특정 소수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지구와 다르다. 길림(吉林)성에 있는 연변(延邊) 조선족(朝鮮族) 자치주가 여기에 해당된다. 연길(延吉), 용정(龍井), 훈춘(琿春), 도문(圖門), 돈화(敦化), 화룡(和龍)의 5개 시와 왕청(汪淸), 안도(安圖)의 2개 현을 가지고 있다.
맹(盟)은 자치주와 같은데 몽고족이 다수 거주한다는 점만이 다르다. 지급시(地級市)도 우리의 광역시와 비슷한데 단순히 관할 구역만을 가지고 있는 것과 여러 개의 현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2004년 말 현재 지급시는 전국에 283개가 있으며, 지급 행정구역은 전국에 모두 333개가 있다.
(3) 현급(縣級) 행정구역
현급(縣級) 행정구역은 ‘3급행정구역’이라고도 한다. 현급시, 자치현, 기(旗)와 큰 도시에 속한 관할구 등이 있다. 성급의 통제를 받는다. 우리의 군(郡)에 해당하는 현급 행정구역은 2004년 말 현재 전국에 2,862개가 있다.
(4) 향, 진급 행정구역과 그 이하
향(鄕)과 진(鎭)은 ‘4급행정구역’이다. 우리의 면(面), 읍(邑)에 해당한다.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이 있는데 우리의 동(洞)에 해당하는 도시의 가도(街道)와 우리의 리(里)에 해당하는 촌(村) 또는 장(莊)이 있다. 이들 행정구역의 명칭은 주소로도 활용되는데 중국의 도시에는 우리의 동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대신에 도로의 명칭으로 주소를 대신한다. 모든 도로에는 명칭이 있는데, 북경 시내를 예로 들면 ‘工人體育場路’ 또는 ‘長安街’처럼 ‘○○路’ 또는 ‘○○街’로 되어 있다. 우리의 번지(番地)를 중국에서는 ‘호(號)’라고 한다. 중국 일반 가정의 주소에는 도로의 명칭과 ‘호’ 사이에 ‘골목’을 뜻하는 ‘항(巷)’이 있다.
直轄市 4 省 23 自治區 5 特別行政區 2 |
地 級 |
縣 級 | ||||||||||
市 |
自治州 |
地 區 |
盟 |
市轄區 |
市 |
縣 |
自治縣 |
旗 |
自治旗 |
特 區 |
林 區 | |
北京市 |
|
|
|
|
16 |
|
2 |
|
|
|
|
|
天津市 |
|
|
|
|
15 |
|
3 |
|
|
|
|
|
河北省 |
11 |
|
|
|
36 |
22 |
108 |
6 |
|
|
|
|
山西省 |
11 |
|
|
|
23 |
11 |
85 |
|
|
|
|
|
內蒙古自治區 |
9 |
|
|
3 |
21 |
11 |
17 |
|
49 |
3 |
|
|
遼寧省 |
14 |
|
|
|
56 |
17 |
19 |
8 |
|
|
|
|
吉林省 |
8 |
1 |
|
|
19 |
20 |
18 |
3 |
|
|
|
|
黑龍江省 |
12 |
|
1 |
|
65 |
19 |
45 |
1 |
|
|
|
|
上海市 |
|
|
|
|
18 |
|
1 |
|
|
|
|
|
江蘇省 |
13 |
|
|
|
54 |
27 |
25 |
|
|
|
|
|
浙江省 |
11 |
|
|
|
32 |
22 |
35 |
1 |
|
|
|
|
安徽省 |
17 |
|
|
|
44 |
5 |
56 |
|
|
|
|
|
福建省 |
9 |
|
|
|
26 |
14 |
45 |
|
|
|
|
|
江西省 |
11 |
|
|
|
19 |
10 |
70 |
|
|
|
|
|
山東省 |
17 |
|
|
|
49 |
31 |
60 |
|
|
|
|
|
河南省 |
17 |
|
|
|
50 |
21 |
88 |
|
|
|
|
|
湖北省 |
12 |
1 |
|
|
38 |
24 |
37 |
2 |
|
|
|
1 |
湖南省 |
13 |
1 |
|
|
34 |
16 |
65 |
7 |
|
|
|
|
廣東省 |
21 |
|
|
|
54 |
23 |
41 |
3 |
|
|
|
|
廣西壯族自治區 |
14 |
|
|
|
34 |
7 |
56 |
12 |
|
|
|
|
海南省 |
2 |
|
|
|
4 |
6 |
4 |
6 |
|
|
|
|
重慶市 |
|
|
|
|
15 |
4 |
17 |
4 |
|
|
|
|
四川省 |
18 |
3 |
|
|
43 |
14 |
120 |
4 |
|
|
|
|
貴州省 |
4 |
3 |
3 |
|
10 |
9 |
56 |
11 |
|
|
2 |
|
雲南省 |
8 |
8 |
|
|
12 |
9 |
79 |
29 |
|
|
|
|
西藏自治區 |
1 |
|
6 |
|
1 |
1 |
71 |
|
|
|
|
|
陝西省 |
10 |
|
|
|
24 |
3 |
80 |
|
|
|
|
|
甘肅省 |
12 |
2 |
|
|
17 |
4 |
58 |
7 |
|
|
|
|
靑海省 |
1 |
6 |
1 |
|
4 |
2 |
30 |
7 |
|
|
|
|
寧夏回族自治區 |
5 |
|
|
|
8 |
2 |
11 |
|
|
|
|
|
新疆維吾爾自治區 |
2 |
5 |
7 |
|
11 |
20 |
62 |
6 |
|
|
|
|
香港特別行政區 |
|
|
|
|
|
|
|
|
|
|
|
|
澳門特別行政區 |
|
|
|
|
|
|
|
|
|
|
|
|
臺灣省 |
|
|
|
|
|
|
|
|
|
|
|
|
合 計 |
283 |
30 |
17 |
3 |
852 |
374 |
1,464 |
117 |
49 |
3 |
2 |
1 |
333 |
2,862 |
마. 인구와 민족
(1) 인구
중국의 인구는 세계에서 최대 규모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통계에 의하면 2005년 11월 1일 현재 중국 대륙의 인구는 13억 628만 명이며 유동인구는 전체 인구의 11%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것은 세계 총인구의 약 1/5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통계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 2,000년간 중국의 인구는 390만 명에서 1,379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진의 통일 이후부터 명(明)대 말년까지 1,800년 동안 중국의 인구는 6,000만 명 전후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혼란 시에는 크게 감소하였으며 평화 시에는 다시 크게 증가하였다. 비교적 안정되게 400년간 유지된 한(漢)대에 이미 5,000~6,000만 명에 달하였다. 드러나 동한(東漢) 말년에서 삼국시대까지 극심한 내전으로 인해 600만 명으로 감소했었다가 진(晋)이 통일하자 다시 1,0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당(隋唐)에 이르면서 다시 5,000만 명 정도로 회복되었다. 오대심국시대에는 다시 감소하였으나 송대에 이르자 7,6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원(元)대에 이르러 다시 감소하였다가 명(明)대에 다시 6,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청(淸)대는 260년간 지속되었는데 강희(康熙)부터 건륭(乾隆)에 이르기까지 130년 동안 경제가 발달하고 사회가 안정되어 인구가 1억에서 2억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런 증가세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건륭 29년(1764년)부터 도광(道光) 27년(1847년)까지 100년도 되기 전에 2억 600만에서 4억 1,300만 명으로 2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0년 뒤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을 때 중국의 인구는 5억 4,160만 명이었다.
중국 역사상 인구는 명(明) 말까지는 대략 6,000만 명으로 증가하지 않았으나 청대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증가하였다. 겨우 200년 동안에 1억 이하에서 4억으로 증가하였다. 이런 증가 추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후 53년 동안에 배 이상이 증가했다. 이런 속도라면 2030년에 이르러서는 15억 명에 도달하리라는 추산이다.
중국의 인구가 이처럼 빠르게 증가한 이유는 첫째로 사회가 안정되고 의료와 위생사업의 발전으로 인해 사망률이 건국 전 25%에서 6%로 감소되었고 평균 수명이 구중국의 35세에서 현재 71세로 배나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구 출생률의 상승이다. 중국 정부는 1971년까지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 출생률이 35%까지 이르렀다. 1970년대 이후에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하여 1996년에는 16% 정도로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중국 정부는 1950년대에 ‘사람이 많아야 국력이 커진다’, ‘사람이 많아야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구 성장이 너무 빠르면 경제와 사회 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일반 민중들도 ‘자식이 많아야 복이 많다’, ‘대를 이어야 한다’,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한다’는 등의 의식으로 인해 특히 농촌에서 일찍 결혼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중국의 산아제한(計劃生育) 정책은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중국 정부의 확고부동한 정책으로 시행되면서 많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산아정책의 내용은 ‘만혼만육(晩婚晩育; 늦게 결혼하고 늦게 낳는 것), 소생우생(少生優生; 한 쌍의 부부가 단지 1명의 아이만을 낳아 아이의 신체 건강과 지적인 발달을 보장하는 것)의 여덟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규정된 결혼 연령은 남자 22세, 여자 20세인데 이보다 3년이 늦으면 만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만혼의 기준이 우리보다 거의 10년은 빠른 셈이다. 여성이 24세 이후에 아이를 낳으면 만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우리의 기준보다 매우 빠르다.
‘소생(少生) 정책은 1980년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첫째 아이가 장애자이면 둘째를 낳을 수 있는 융통성이 있으며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2명까지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의 남녀간 성별 비율은 2005년 11월 1일 통계에 따르면 106.6:100으로 전 세계 총인구의 그것과 비슷하다. 1990년 통계에 따르면 10만 명당 대학 졸업자는 1,422명으로 1.4%, 고등학교 졸업자는 약 8%, 중학교 졸업자는 23%, 초등학교 졸업자는 37%이고, 문맹률은 16%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다.
중국의 인구 분포는 매우 불균등하다. 흑룡강성에서 운남성까지 북에서 남으로 비스듬히 하나의 선을 그려 보면 동반부의 면적은 전체의 43%이지만 인구는 무려 94%를 차지하고 있다. 서반부의 면적은 57%이지만 인구는 단 6%에 불과하다. 평균 인구밀도는 동남부가 km2당 236명이고, 서북부가 km2당 11명으로 22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동반부에서도 양자강의 중하류 지역인 호복, 호남, 안휘, 강서, 강소, 상해에 집중되어 있는데 km2당 663명이다.
건국 이전 농촌의 인구는 전국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나 2005년 말 현재 57% 정도로 감소하였고 이 추세는 계속 진행중이다.
(2) 민족
중국은 스스로 ‘통일된 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的國家)’라고 말하는데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 한족(漢族)이 2000년 기준으로 91.6%로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나머지 55개 민족은 모두 합쳐서 10,643만 명으로 8.41%를 차지한다. 이들은 한족에 비해 훨씬 소수라는 의미에서 통상 소수민족이라고 부른다.
이들 간의 인구수는 차이가 매우 크다. 1,500만 명 이상의 장족(壯族)이 가장 많고 2,300명의 낙파족(珞巴族)이 가장 적다.
100만 명 이상 : 19개 민족
100만 명 이하 10만 명 이상 : 16개 민족
10만 명 이하 5만 명 이상 : 2개 민족
5만 명 이하 1만 명 이상 : 12개 민족
1만 명 이하 : 7개 민족
소수민족의 분포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로 분포지역이 대단히 넓다. 이들은 전국 인구의 1/10 이하지만 거주 지역은 전국의 절반 이상이다. 5개 민족 자치구 이외에도 대부분 성시(省市)에 이들 민족의 자차주와 자치현이 있다.
둘째로 이들은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 흩어져 살고 있다. 재중동포(在中同胞)인 조선족을 예로 들면 전체 중국에 총 200만 명 정도가 있지만 길림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0만 명만이 거주한다. 나머지는 길림성의 다른 지역과 요녕성, 흑룡강서, 내몽골자치주는 물론 북경과 상해에도 살고 있다. 또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총인구 중에는 한족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족과 조선족을 제외한 다른 만족들도 거주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모든 민족이 마찬가지이다.
셋째로 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대부분 국경지역으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이 뒤떨어져 있다. 인구 밀도도 낮고 교통 조건도 열악하며 교육 수준도 낮다. 이들의 선조는 역사적으로 재중동포나 러시아족, 몽골족, 타지크족(塔吉克族)처럼 중국으로 이주했거나 또는 다른 대부분의 민족처럼 한족에 의해 정복된 경우이다. 이들 중에서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한족에 동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소수 민족들은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민족 증의 일부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언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또 사용하고 있다 그 중 21개 민족은 자신들의 문자도 가지고 있다. 회족(回族), 위구르족(維吾爾族), 카자흐족을 포함하여 10개 민족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족은 이슬람교를 거의 믿지 않는다. 장족, 몽골족 등은 불교나 라마교를 믿는다. 기타 소수 민족들은 자신의 조상숭배, 토템숭배, 샤머니즘을 포함한 자연숭배의 여러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의복, 명절, 주택, 오락, 관혼상제 등 풍속 면에서도 모두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民 族 |
人口 |
分布地域 |
한족(漢族) |
115,940.3 |
전국에 분포, 주로 장강, 황하 중하류, 동북 동남 연해 각 성에 분포 |
몽골족(蒙古族) |
581.4 |
內蒙古, 新疆, 遼寧, 吉林, 黑龍江, 甘肅, 靑海, 河北省 |
만주족(滿族) |
1,068.2 |
遼寧, 吉林, 黑龍江, 河北省, 北京市, 內蒙古自治區 |
조선족(朝鮮族) |
192.4 |
吉林, 遼寧, 黑龍江省, 內蒙古自治區 |
헤체족(赫哲族) |
0.5 |
黑龍江省 |
타후루족(達斡爾族) |
13.2 |
內蒙古自治區, 黑龍江省 |
오우엔크족(顎溫克族) |
3.1 |
內蒙古自治區 |
얼룬춘족(顎倫春族) |
0.8 |
內蒙古自治區, 黑龍江省 |
회족(回族) |
981.7 |
寧夏回族自治州, 甘肅, 新疆維吾爾自治區, 靑海, 河南, 河北, 山東, 雲南, 北京市, 天津市, 安徽, 江蘇, 四川, 貴州, 吉林, 遼寧, 黑龍江, 陝西省, 內蒙古自治區 |
통샹족(東鄕族) |
51.4 |
甘肅省, 新疆維吾爾自治區 |
토족(土族) |
24.1 |
靑海, 甘肅省 |
살라족(撒拉族) |
8.8 |
靑海, 甘肅省 |
파오안족(保安族) |
1.7 |
甘肅省 |
유크족(裕固族) |
1.4 |
甘肅省 |
위구르족(維吾爾族) |
839.4 |
新疆維吾爾自治區 |
카자흐족(哈薩克族) |
125.1 |
新疆維吾爾自治區, 甘肅省 |
칼카스족(柯爾克孜族) |
16.1 |
新疆維吾爾自治區 |
석백족(錫伯族) |
18.9 |
新疆維吾爾自治區, 遼寧省 |
타지크족(塔吉克族) |
4.1 |
新疆維吾爾自治區 |
우즈벡족(烏孜別克族) |
1.2 |
新疆維吾爾自治區 |
러시아족(俄羅斯族) |
1.6 |
新疆維吾爾自治區, 黑龍江省 |
타탈족(塔塔爾族) |
0.5 |
新疆維吾爾自治區 |
장족(藏族) |
541.6 |
西藏自治區, 靑海, 四川, 甘肅, 雲南省 |
먼바족(門巴族) |
0.9 |
西藏自治區 |
로바족(珞巴族) |
0.3 |
西藏自治區 |
치앙족(羌族) |
30.6 |
四川省 |
이족(彛族) |
776.2 |
四川, 雲南, 貴州省 |
바이족(白族) |
185.8 |
雲南, 貴州, 湖南省 |
하니족(哈尼族) |
144.0 |
雲南省 |
타이족(?族) |
115.9 |
雲南省 |
리수족(??族) |
63.5 |
雲南, 四川省 |
와족(?族) |
35.2 |
雲南省 |
라후족(拉祜族) |
41.2 |
雲南省 |
나시족(納西族) |
27.8 |
雲南省 |
징포족(景頗族) |
11.9 |
雲南省 |
풀랑족(布郞族) |
8.2 |
雲南省 |
아창족(阿昌族) |
2.8 |
雲南省 |
부미족(普米族) |
3.0 |
雲南省 |
누족(怒族) |
2.7 |
雲南省 |
더앙족(德昻族) |
1.5 |
雲南省 |
둘롱족(獨龍族) |
0.6 |
雲南省 |
지누어족(基諾族) |
1.8 |
雲南省 |
미아오족(苗族) |
738.4 |
貴州, 湖南, 湖北, 雲南, 廣西壯族自治區, 四川, 海南省 |
부이족(布依族) |
254.8 |
貴州, 雲南省 |
통족(?族) |
250.9 |
貴州, 湖南省, 廣西壯族自治區 |
쉬이족(水族) |
34.7 |
貴州, 廣西壯族自治區 |
겔라로족(??族) |
43.8 |
貴州, 湖南省 |
좡족(壯族) |
1,555.6 |
廣西壯族自治區, 雲南, 廣東省 |
야오족(瑤族) |
140.3 |
廣西壯族自治區, 湖南, 雲南, 廣東, 貴州省 |
물라오족(??族) |
16.1 |
廣西壯族自治區 |
마오난족(毛南族) |
7.2 |
廣西壯族自治區 |
징족(京族) |
1.9 |
廣西壯族自治區 |
투지아족(土家族) |
572.5 |
湖南, 湖北省 |
리족(黎族) |
11.2 |
廣東省 |
써족(?族) |
63.5 |
福建, 浙江, 江西, 廣東省 |
고산족(高山族) |
0.3 |
福建, 臺灣省 |
※ 인구는 200년도 기준이며 인구수에 臺灣省은 포함되지 않았음
바. 2005년도 기준 중국의 주요 경제 지표
○ 경제 성장률 : 909%
○ GDP : 182,321억 RMB(세계 4위)
○ GNP : 1,823USD
○ 총 무역 규모 : 1조 4,221억 USD
- 수출 : 7,620억 USD
- 수입 : 6,601억 USD
○ 외환 보유고 : 8,189억 USD
○ 외국인 투자 : 603억 USD
○ 환율(RMB/USD) : 8.0702
2. 역사 및 문화 탐방
가. 탐방 일정, 지역, 교통 수단 및 요금
일정 |
이동 장소 |
교통 수단 |
교통요금 (RMB) |
숙소 |
주요 방문지 및 門票(입장권) 요금 |
12/5 ~9 |
서울→北京空港 |
비행기 대한항공 |
₩787,000 |
|
|
北京空港→ 永安賓館 |
회사차 |
- |
호텔 |
北京支社, 中華民俗博物院小(60), 王府井, 北京市內, 平壤館, 足按摩 | |
北京 滯留 |
택시 |
35 |
| ||
12/9 ~10 |
北京→泰山 |
기차 T107次 新空調軟坐特快臥 |
110 |
기차 |
泰山(65), 보험료(2), 索道(47) |
泰山站→泰山入口 |
택시 |
10 |
| ||
泰山入口→泰安 |
셔틀버스 |
15 |
| ||
泰安→曲阜 |
시외버스 |
4 |
|
孔子故里園(20), 曲阜孔子六藝城(40), 孔府 孔林 孔府(150) | |
曲阜→?州 |
시외버스 |
4 |
| ||
12/10 ~12 |
?州→南京 |
기차 2555次 硬座普快車 |
79 |
기차 |
|
南京→蘇州 |
기차 K33次 新空調硬座快速 |
33 |
|
| |
蘇州市內 |
렌털카(운전기사 포함) |
100 |
호텔 |
拙政園(50), 留園(30), 虎丘(40), 北塔報恩寺(25), 蘇州水鄕風情民俗園(38) | |
호텔→蘇州站 |
택시 |
10 |
| ||
12/12 ~13 |
蘇州→上海 |
기차 T713次 新空調軟坐特快 |
22 |
|
|
上海驛→東方明珠 |
지하철 |
3 |
|
東方明珠(100) | |
上海→杭州東 |
기차 T745차 新空調硬座快速 |
33 |
|
| |
杭州市→西湖 |
택시 |
20 |
|
西湖 | |
杭州→鷹潭 |
기차 1039次 新空調硬座普快臥 |
112 |
기차 |
| |
鷹潭↔龍虎山 |
시외버스 |
10 |
|
| |
12/13 ~14 |
鷹潭→株洲 |
기차 L89次 硬座普快 無座 |
32 |
|
龍虎山, 人民公園 |
鷹潭→向塘 |
|
- |
|
중도 하차 | |
向塘→南昌 |
시외버스 |
10 |
|
南昌站 부근 | |
南昌→廣州 |
기차 K87次 新空調軟座快速臥 |
361 |
기차 |
| |
12/14 ~15 |
廣州→홍콩(香港) |
기차 T501次 高速軟席直通特快客車 |
230 |
|
해양공원, 리펄스베이, 빅토리아 피크 트램 및 야경, 윙타이신 사원, 점보 레스토랑 디너, 야시장 (패키지투어[하나투어])(160USD) |
九龍驛→시내 식당 |
택시 |
23.4HKD |
| ||
홍콩(香港) 市內 觀光 |
관광버스 |
200USD |
호텔 | ||
홍콩(香港)→마카오(澳門) |
선박 |
137HKD |
|
| |
마카오(澳門)市內 |
시내버스 |
2.5MD |
|
마카오 타워(70$) | |
마카오(澳門)→株海 |
도보 |
- |
|
| |
株海→터미널 |
택시 |
25 |
|
| |
株海→深? |
선박 |
80 |
|
| |
深?→民俗村 |
시내버스 |
5 |
호텔 |
錦?中華 中國民俗文化村(120), 世界之窓(120) | |
12/16 |
호텔→深?空港 |
시내버스 |
7 |
| |
深?→昆明 |
비행기 中國南方航空 |
590 |
|
| |
空港→호텔 |
중국인 개인 승용차 |
- |
호텔 |
| |
12/17 |
昆明↔石林 |
관공버스 |
30 |
|
石林(80) |
昆明→大理 |
기차 N986次 硬座快速臥 |
79 |
기차 |
| |
12/18 |
大理站→大理古城 |
택시 |
37 |
|
大理古城, 天龍八部城(82), 寶成白族茶道(50), ?海(200), 天龍洞(68), 南詔風情島(22) |
大理市內 |
렌털카(운전 기사 포함) |
120 |
호텔 | ||
12/19 ~20 |
大理→麗江 |
시외버스 |
60 |
|
|
麗江↔玉龍雪山 |
셔틀버스 |
16 |
호텔 |
麗江古城, ?蓮寺(3), 古城獅子山公園(15) | |
麗江↔虎跳峽 |
렌털카(운전 기사 포함) |
200 |
|
虎跳峽(50), 玉泉公園(20), 長江第一灣, 木府 | |
호텔→터미널 |
택시 |
7 |
찜질방 |
| |
12/21 |
麗江→香格里拉 |
시외버스 |
38 |
|
松贊林寺(10), 納?海自然保護區, 碧塔海(60) |
香格里拉 市內 |
렌털카(운전 기사 포함) |
150 |
민박 |
藏族 짠주(전통가옥) | |
12/22 ~23 |
香格里拉→麗江 |
시외버스 |
29 |
|
|
麗江→昆明 |
비행기 中國民航 |
440 |
|
貴陽 人民廣場, 河濱公園, 在來市場, 역 뒷골목, 貴陽 市內 繁華街 | |
昆明→貴陽 |
기차 T62次 新空調軟坐特快臥 |
245 |
기차 | ||
12/23 ~24 |
貴陽→重慶 |
기차 5608次 新空調硬座普快臥 |
101 |
기차 |
|
重慶→重慶空港정류장 |
시내버스 |
3 |
|
| |
重慶空港정류장→空港 |
오토바이 |
5 |
|
| |
重慶→西安(咸陽) |
비행기 中國東方航空 |
350 |
|
| |
咸陽→西安 |
리무진버스 |
25 |
호텔 |
秦始皇兵馬俑博物館(90), 秦始皇陵(25), 華淸池(40), 秦俑博物館(65), 秦始皇帝陵(25), 臨潼博物館(24) | |
12/25 ~26 |
西安市內 |
도보 |
- |
| |
西安↔臨潼 |
관광버스 |
|
| ||
西安→鄭州 |
기차 4702次 新空調硬座普快 |
55 |
기차 |
| |
12/26 |
鄭州→焦作 |
고속버스 |
29 |
|
|
焦作→武陟 |
시외버스 |
5.5 |
|
| |
武陟→武陟발전소 |
택시 |
10 |
|
| |
武陟→焦作 |
회사차(초작발전소) |
- |
호텔 |
武陟電廠(發電所) | |
12/27 ~28 |
焦作→洛陽 |
시외버스 |
24.5 |
|
|
洛陽↔龍門石窟 |
시내버스 |
2 |
|
龍門石窟(80), 說明內容MP3(5) | |
洛陽→北京西站 |
기차 K270次 新空調軟坐快速臥 |
286 |
기차 |
| |
12/28 ~31 |
北京西站→北京支社 |
시내버스, 택시 |
28 |
호텔 |
|
北京 市內 |
택시 |
45 |
찜질방 |
중국전력출판사, 해당화 식당(북한운영) | |
北京支社→北京首都空港 |
회사차(북경지사) |
- |
|
| |
12/31 |
北京首都空港→仁川空港 |
비행기 대한항공 |
- |
|
|
북경에 머물 때 왕부정(王府井)에 있는 왕부정서점(王府井書店[舊 新華書店])에서 ‘중국 전도(中國全圖)’와 ‘각성 지도(各省地圖)’와 ‘철도(鐵道) 및 버스 노선 관련 지도책’을 구입하고 주로 철도를 이용하여 이동하려고 ‘전국철도여객열차시각표(全國鐵路旅客列車時刻表)’를 구입했다. 또 중국 배낭 여행 가이드북인 ‘중국자조유(中國自助游)’도 함께 준비했다.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여 기차역(火車站)이나 버스 터미널(客運站)에서 그 지역에 관한 상세 지도와 관광 안내도(3~5원)를 구입했다.
국내에서 출발하기 전에 준비한 가이드 북, 전자 사전과 중국어 회화 책도 찾아보기 쉽게 배낭 바깥쪽에 항시 두고 다녔다.
< 여행 필수 준비물>
○ 중국 전도, 각 성 지도, 철도 및 버스 노선 지도
○ 중국 전국철로여객열차 시각표
○ 한국어 및 중국어 가이드북, 전자 사전, 중국어 회화 책
○ 현지에서 구입한 현지 상세 지도와 관광 지도
국내에서 출발하기 전에 중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운남성에 꼭 가보고 싶어서 최종 목적지를 운남성으로 잡고 북경을 출발하여 가능하면 기차로 이동하면서 운남성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우선 오후 6시~9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이용하여 다음 날 오전 8~10시에 도착할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하였다. 일단 열차에서 내리면 다음 행선지를 정하여 미리 열차표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계속 이동하면서 같은 길을 되돌아 나오지 않도록 경로를 설정했다. 그러나 운남성(雲南省) 샹그리라(香格里拉)에서 티베트(西藏) 라싸(拉薩)를 거쳐 우루무치(烏魯木齊)와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북경(北京)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교통편과 비용 관계로 샹그리라(香格里拉)에서 다시 려강(麗江)을 거쳐 곤명(昆明)으로 되돌아 온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다른 곳을 경유하여 중국 동남부와 중부를 일주했다.
<실제 이동 경로>
北京 → 山東省 泰安(泰山) → 曲阜 → 兗州 → 江蘇省 南京 → 蘇州 → 上海 → 浙江省 杭州 → 江西省 鷹潭 → 向塘 → 南昌 → 廣東省 廣州 → 홍콩(香港) → 마카오(澳門) → 廣東省 株海 → 深圳 → 雲南省 昆明 → 石林 → 昆明 → 大理 → 麗江 → 香格里拉(中甸) → 麗江 → 昆明 → 貴州省 貴陽 → 重慶市 → 陝西省 咸陽 → 西安 → 臨潼 → 西安 → 河南省 鄭州 → 焦作 → 武陟 → 焦作 → 洛陽 → 龍門 → 洛陽 → 北京
중국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신용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서안(西安)에서 4성급 호텔에 투숙하려고 프런트에 가서 보증금(押金 yàjīn)을 내려는데 현금만을 요구해서 그냥 나와 버린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려강(麗江)에서 곤명(昆明)으로 가는 국내선 항공기를 타려고 공항에서 신용 카드를 내밀었는데 현금만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상 현금을 준비해서 다녀야 했다. 허리 배낭에 인민폐를 준비해서 24시간 몸에 차고 다녔다. 야간 열차나 호텔에서 잠을 잘 때는 언제나 도난 방지를 위하여 허리 배낭을 벽 쪽으로 돌려서 몸을 밀착시켜 놓고서 잠을 잤다. 얼마나 불편한지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행여 허리 배낭에 들어있는 현금을 도난당하거나 잃어버리면 비상용으로 쓰려고 또 다시 지갑에도 돈을 분산하여 뒷주머니에 넣고서 다녔다.
거의 기차표나 버스표를 구입할 때는 현금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북경이나 상해를 제외한 지방 대도시나 소도시에서 공중 화장실에 가려면 꼭 1~3전(毛 마오)을 내야했다.
중국의 화폐는 지폐와 동전이 있는데 지폐는 1, 2 ,5角(毛 마오)과 1, 2, 5, 10, 20, 50, 100圓(塊 콰이)이 있는데 대부분 圓단위 지폐에는 모택동(毛澤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角단위 지폐에는 소수 민족이 그려져 있는데 2角에는 조선족이 부이족과 함께 그려져 있다.
교통 수단은 장거리는 될 수 있으면 기차를 이용하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부득이 비행기를 이용했고 시내권이나 공항을 갈 때는 시내 버스나 택시를 이용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관광지로 가는 정기 노선이 별로 없어 기사를 포함하여 차량(한국에서 봉고, 다마스와 유사한 차량과 승용차)을 전세 내어 다녔다.
홍콩에서 마카오, 주해에서 심천으로 갈 때는 선박을 이용했고 상해(上海)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심지어 중경(重慶) 공항에서는 시내 버스 정류장에서 공항 입구까지 오토바이로 이동했으며 짧은 기간 동안 육로로 이동하는 모든 교통 수단과 육해공의 모든 교통 수단을 이용해 보았다.
<실제 이용 교통편>
○ 열차 이용
- 연와(軟臥 ruǎnwò 부드러운 침대) : 특쾌(特快[T])나 쾌속(快速[K]) 열차에만 있는 독립된 공간으로 좌우에 상하로 2단 침대가 있는 제일 쾌적한 침대차(가격은 비싸지만 야간에 숙박과 이동을 겸할 수 있어 아주 편리함)
北京 → 泰安(泰山), 南昌 → 廣州, 昆明 → 貴陽, 洛陽 → 北京
- 경와(硬臥 yìngwò 딱딱한 침대) : 침대차지만 독립된 출입문이 없고 열차 한쪽으로 한 열에 3단으로 되어 있는 침대차(가격이 저렴하지만 도난의 우려나 프라이버시 보장이 되지 않음. 그러나 물건을 도난당한 일은 없었음)
杭州 → 鷹潭, 昆明 → 大理, 貴陽 → 重慶
- 연좌(軟坐 ruǎnzuò 부드러운 의자) : 약간 안락한 좌석(주간 여행에 편리)
南京 → 蘇州, 蘇州 → 上海, 上海 → 杭州, 廣州 → 홍콩(香港)
- 경좌(硬坐 yìngzuò 딱딱한 의자) : 주간에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 좌석
兗州 → 南京, 西安 → 鄭州
- 무좌(無坐 wúzuò 입석) : 보통열차(N)나 임시열차(L)에 좌석 번호가 없이 먼저 승차한 사람이 의자를 차지하는 것으로 기차역마다 정차를 하고 또 특쾌(特快)나 쾌속(快速)열차가 오면 비켜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림. 중국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나 너무 혼잡하여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지럽고 지저분하며 문자 그대도 아비규환임. 도저히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어 4시간 만에 중간에서 내렸음
鷹潭 → 向塘(당초에는 湖南省 株洲(14시간 소요)까지 가는 표를 구입했으나 중간에서 하차했음)
○ 선박 이용 : 오로지 선박을 이용하거나 육로를 이용하면 너무 시간이 걸리는 구간은 선박을 이용
홍콩(香港) → 마카오(澳門), 株海 → 深圳
○ 시외 버스 이용 : 단거리 구간(5시간 이내)이면서 열차 노선이 없는 경우에는 시외 버스와 고속 버스를 이용. 고속 버스나 시외 버스 요금과는 별도로 승객이 별도로 보험료를 부담함(도로의 난이도에 따라 1~3원)
泰安 → 曲阜, 曲阜 → 兗州, 鷹潭 ↔ 九龍山, 向塘 → 南昌, 大理 → 麗江, 麗江 ↔ 香格里拉, 焦作 → 武陟, 焦作 → 洛陽
○ 고속 버스 이용 : 장거리면서 고속 버스가 운행하는 구간 이용
鄭州 → 焦作
○ 시내 버스 이용 : 목적지에 도착하여 단거리를 이동할 경우 이용(각 체류지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였음 요금은 대부분 1원이나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른 경우도 있고 도시마다 달랐으며 낙양(洛陽)에서는 전자식 카드도 함께 이용하고 있었음)
○ 리무진 버스 이용 : 요금은 약간 비쌌지만 아주 편리했음,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2~3배가 비쌈. 공항에서 호텔까지 이용
咸陽空港 → 西安
○ 택시 이용 : 시간이 없을 때나 피곤하여 버스를 탈 수 없을 때 단거리 이동 수단으로 택시를 이용했음. 요금은 대부분 기본 요금에 주행 요금을 받았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도 많았음
○ 오토바이 이용 : 중경(重慶)에서 공항 정류장까지 버스를 타고 갔으나 어디에선가 바람처럼 오토바이가 나타나서 공항 입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음. 배낭이 무거워 흔쾌히 승낙을 했더니 버스 요금은 3원이었으나 오토바이 요금은 무려 5원이었음(이동 거리 약 300m)
○ 도보로 이동 : 마카오(澳門)에서 육로로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도보로 관갑(關閘 Barrier gate)까지 가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주해(株海)로 들어가야 함
○ 항공기 이용 : 육로로 이동하기에 너무 장거리이고 또 시간이 없을 경우 국내선 항공기를 이용했음
深圳 → 昆明, 麗江 → 昆明, 重慶 → 咸陽(西安)
○ 지하철 이용 : 상해(上海)역에서 동방명주(東方明珠)까지 왕복으로 이용했음. 표를 사는 것도 불편했고 또 카드를 반납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빠르고 쾌적했음
처음 북경에 도착해서 북경을 떠날 때까지는 북경 지사에서 알선해준 대로 북경 지사 근처 영안빈관(永安賓館)에서 머물렀다.
북경을 떠나 운남성까지 가면서 주로 야간 침대 열차를 이용하였으나 너무 피곤하여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호텔을 이용하였다. 너무나 강행군을 해서 힘들고 피곤하여 홍콩(香港)에서는 아예 여행사를 통하여 패키지로 관광을 하고 호텔도 여행사에서 알선해준 대로 단 하루만 이용하고 그 이후로는 스스로 골라서 숙박을 했다. 주로 1박당 300원 이하의 중저급 호텔(中低級 賓館)을 이용했고 려강(麗江)에서 하루, 그리고 북경으로 돌아와 이틀간은 찜질방을 이용했다.
호텔(賓館) 요금은 천차만별이었다. 예전에 외국인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호텔에서 숙박하도록 되어있었다고 하지만 지방에 가면 우리 나라의 여인숙이나 여관처럼 시설은 약간 뒤떨어지나 아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들이 많았다. 려강(麗江)에서는 하루 숙박비가 겨우 40원이었지만 시설은 아주 훌륭했다. 12월이 비수기(淡季)인지라 빈 방이 많았다. 그리고 기차역(火車站) 주변에 주숙(住宿)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허름한 숙박 시설이 있는데 숙박비가 10원이었다. 이곳은 중국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거나 새벽차를 타고 너무 일찍 내려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저분하고 방음도 안 되었다. 귀양(貴陽)에서 너무 피곤해서 딱 한번 낮에 4시간 이용했다.
또 하나 아주 편리한 곳이 싸우나(桑拿浴室)나 찜질방이 있었다. 이것은 려강(麗江)에서 머물 때 그 유명한 문 사장이라는 분이 알려주었다. 문 사장은 중국 운남성에서 생활한지 10여 년이 넘었다는데 50대 후반 정도 되는 분이었다. 중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성격이 독특하고 좀 튀는 분이었는데 KBS와 MBC에서 운남성 오지 탐험 다큐멘터리를 촬영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이었다. 그래서 려강(麗江)에서 하루, 북경(北京)에서 이틀간 이용했다. 아주 편리하고 좋았으나 배낭과 소지품을 보관하기가 좀 곤란했다. 요금은 45~55원 정도하는데 북경에서는 아침을 한식 뷔페로 먹을 수 있고 또 인터넷과 TV를 자유롭게 볼 수가 있고 아주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또한 추가 요금을 주면 온갖 마사지를 받을 수가 있고 너무 버거운 서비스까지 받으니까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때밀이는 기본이고 담배, 차와 음료수도 무료로 주며 또 탕 속에서 나오면 멋진 젊은 총각이 전신 타월로 물기를 닦아준다.)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음식이었다. 향신료 냄새가 역겨웠고 메뉴가 너무 다양해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북경에 있을 때는 한국 음식점이 많아서 별로 불편하지 않았지만 북경을 떠나 지방으로 갔을 때는 거의 먹을 수가 없어서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아니면 음료수와 바나나 하나 사서 해결했다. 호텔에서 머물 때는 아침을 뷔페로 해결하면 되었지만 돌아다닐 때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운남성(雲南省) 샹그리라(香格里拉)에 갔을 때는 하루 종일 먹지 못해서 하늘이 노랗게 보였는데 장족(藏族) 가이드(導游)가 조금 참으면 자기 집에 가서 티베트 전통 음식을 주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관광을 하고 조금 일찍 자기 집으로 가서 음식을 주는데 기절할 뻔 했다. 야크 젖으로 만든 우유에 보리를 빻아놓은 가루를 넣어 으깨어서 맨손으로 먹는 데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정말 음식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았다.
이틀에 한번 꼴로 수소문을 해서 한국 음식점을 힘들게 찾아서 김치 찌게를 먹곤 했다.
그리고 라면이라도 먹어보려고 북경 역에서 컵라면을 샀다가 역한 냄새에 먹어보지도 못하고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고 기차로 북경을 출발하여 새벽 4시 반에 태산(泰山)에 도착해서 하도 배가 고파 태산 입구 구멍가게에서 다시 컵라면을 사서 먹다가 손도 못 대고 버려야 했다. 가장 힘들고 해결하기 어려운 게 음식 문제였다.
그렇지만 음식값은 무척 저렴했다. 보통 중국 사람들이 시장이나 길가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면 3~5원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북경이나 상해, 심천 등 부유한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랬다. 심지어 초작시(焦作市)에서는 1.5원을 주니까 한 끼를 흡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조로 만든 죽 같은 거 한 사발과 엄청나게 큰 만두가 나왔는데 먹기도 좋았고 요기도 충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호텔이나 공항에서는 음식값이 100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중경(重慶) 공항에서 하루 종일 굶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 음식(中餐)은 먹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양식(西餐) 식당으로 갔는데 종업원(服務員)에게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사람이 먹을 만한 걸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 종업원이 보지도 않고 가장 비싼 메뉴를 추천해주었다. 또 운남성(雲南省) 대리(大理)에서 소수 민족인 백족(白族) 여자 가이드(導游)와 남자 운전 기사와 함께 세 명이 점심을 먹었는데 요금은 37원이었다. 메뉴 선정을 가이드에게 부탁했는데 5가지 정도를 시켰는데 그 양이 엄청났다. 우리 기준으로는 10명이 먹어도 남을만한 분량이었다. 쌀밥을 세숫대야만한 그릇에 담아 나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경 지사에서 여창규 과장이 나중에 여행하면서 중국 음식 중에서 고르기 힘들면 무조건 ‘어향육사(魚香肉絲 yúxīang ròusī)’를 달라고 하면 먹을 만 하다고 했다. 그래서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갔을 때 한번 시켜 먹었는데 그렇게 썩 입맛에 들지는 않았지만 겨우 먹을 만했다.
중국인들은 먹는 것을 대단히 즐기며 또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의 기본 생활을 통상 ‘의식주(衣食住)’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중국인들은 ‘식의주(食衣住)’라고 말함으로써 먹는 일(食)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생활에서 도덕을 중시한 공자사상의 계승자인 맹자도 ‘식색성야(食色性也: 먹는 것과 남녀간의 성생활은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말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중국에서 통상 만나면 인사가 ‘니하오?(你好? 안녕하십니까?)’인데 ‘니츠팔러마?(你吃飯了嗎? 식사하셨습니까?)’가 두 번째로 많이 쓰는 인사말이다.
음식점은 도시의 거리에 대단히 많다. 많은 중국인들이 아침부터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먹는 게 일상화되었다. 보통 식당을 판띠엔(飯店 fàn diàn), 판꾸안(飯館 fànguǎn), 찬꾸안(餐館 cānguǎn), 찬팅(餐廳 cāntīng)이라고 부른다. ‘반(飯)’자가 들어간 것은 좀 큰 식당이고 ‘찬(餐)’자가 들어가 있으면 좀 작은 식당이다. 호텔은 통상 ‘따판띠엔(大飯店 dàfàndiàn)’이라고 말하는데 좀 작은 규모의 호텔은 ‘지오우띠엔(酒店 jiǔdiàn)’, ‘삔관(賓館 bīnguǎn)’이라고 한다.
흔히 중국 요리를 구분할 때 ‘4대 요리’ 또는 ‘8대 요리’가 있다고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요리 구분이다. 여기서 유명한 세 가지 요리만 소개하고자 한다.
○ 광동(廣東)요리 : 중국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요리로 광주(廣州)요리를 중심으로 복건(福建)요리, 조주(潮州)요리, 홍콩 등의 지방 요리 전체를 말한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의 선교사, 상인 등이 많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토마토케첩, 무스터소스 등 서양의 조미료와 재료를 사용하는 요리도 많다. 맛은 싱거운 편이며 기름도 적게 사용하여 원재료의 맛을 많이 살린다. 대표적인 음식은 구운 돼지고기인 차사오(叉燒 chāshāo)와 광동식(廣東式) 탕수육인 고로육(咕咾肉 gūlǎoròu)이 있다.
○ 사천(四川)요리 : 보통 ‘추안차이(川菜 chuāncaì)라고 부르며 성도(成都), 중경(重慶) 등의 사천성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한 요리인데 마라(麻辣 mála)̀의 독특한 맛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한 사천 분지는 많은 종류의 음식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사천은 중국의 내륙 지방으로 추위와 더위가 모두 심한 지역이다. 그래서 입맛을 돋우기 위해서 시고, 맵고, 톡 쏘는 자극적인 맛의 요리가 많아서 우리 구미에 질 맞는 편이고, 우리 나라에 있는 중국 음식점 요리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모든 지방에도 많이 퍼져 있다. 마파두부(麻婆豆腐 mápó dòufǔ), 궁보계정(宮保鷄丁 gōngbǎo jīdīng), 간소명하(干燒明蝦 gānshāo míngxiā)는 유명하다.
○ 북경(北京)요리 : 보통 징차이(京菜 jīngcaì)라고 부른다. 황하 유역의 요리를 대표하는데 산동성과 태원까지의 요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때로는 산동요리까지 합쳐 경로채(京魯菜 jīnglǔcaì)라고 말한다. 강한 화력으로 짧은 시간에 조리하는 튀김요리와 볶음요리가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이징 카오야(北京烤鴨 běijīng kǎoyā)가 있는데 통째로 구운 오리 고기를 잘라 얇은 밀전병에 춘장, 생대파 조각과 함께 싸서 먹는다. 대표적인 겨울 음식으로는 우리의 신선로와 비슷한 솬양로우(涮羊肉 shuànyángròu)가 있다. 장을 많이 사용하는 짜장미엔(炸醬麵 zhájiàng miàn)도 산동요리의 하나인데 우리가 먹는 그것은 이미 한국화된 것이다.
가장 다양한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운남성을 최종 목적지로 결정하고 북경을 출발해서 차근차근 내려가 시간을 봐가면서 다른 길로 올라오는 길에 무척(武陟)발전소를 경유하여 북경으로 올라오는 길을 택했다.
방문지 결정은 우선 한국에서 관광 상품으로 나오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물론 관광 상품으로 나온 지역일지라도 될 수 있으면 패키지로 갈 수 없는 공원이나 일반 시민들이 자주 가는 재래 시장,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등을 주로 둘러보기로 했다.
남원시와 광서장족지치구(廣西壯族自治區) 흠주시(欽州市)와 자매 결연을 맺었는데 민간 교류 차원에서 남원시 한중문화교류단 일원으로 남원지점에서 근무하는 박종진 씨가 심천(深圳)을 방문한다고 해서 12월 17일 날 심천(深圳)에서 만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동 루트를 정했다. 그래서 북경(北京)에서 산동성(山東省)을 거쳐 강소성(江蘇省), 상해(上海), 이왕이면 심천(深圳)까지 가서 바로 인근에 있는 홍콩(香港)과 마카오(澳門)를 다녀오는 것도 경제적일 것으로 판단되어 1박 2일로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심천(深圳)으로 돌아왔다.
당초에는 운남성(雲南省)에서 티베트자치구(西藏自治區)와 신강위구르자치구(新彊維吾爾自治區)를 거쳐 감숙성(甘肅省)과 산서성(山西省)을 통하여 북경(北京)으로 오려고 했지만 시간이 짧았다. 그래서 운남성(雲南省)에서 귀주성(貴州省), 중경시(重慶市), 섬서성(陝西省)을 거쳐 무척(武陟)발전소가 소재하는 하남성(河南省)을 둘러보고 북경(北京)으로 되돌아 왔다.
처음 여행 일정을 잡았을 때 너무 무리를 했다. 중국 전도(全圖)를 마치 한국 전도(全圖)로 착각하고 한 개의 성(省)을 한국의 도(道) 수준으로 착각했다. 일예로 운남성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운남성(雲南省) 면적(38만㎢)이 우리 한반도 면적(22만㎢)보다 훨씬 넓었다. 그래서 운남성(雲南省) 성회(省會; 省 소재지)인 곤명(昆明)에서 미얀마(緬旬)나 라오스(老撾) 국경까지 열차나 버스로 12시간 이상을 가야 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시(市) 전체를 둘러보는데도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짧은 4주 동안 너무 많은 곳을 들러봤다.
귀양(貴陽)이나 서안(西安)에서 시내에 있는 인민 공원에서 중국인들과 얘기를 해보면 너무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기들은 평생 살면서 자기 성(省) 밖에를 나가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 거의 중국 서부와 북부를 제외하고 중국 전역을 다녔다는 것에 대하여 모두가 감탄을 했었다.
북경, 상해나 심천에서는 외국인이 많고 수준이 높아서 그런지 한국인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류 열풍이 대단하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느낄 수가 있었다. 심천에서 안마(按摩)를 받고 있는데 종업원(服務員)이 한국 탤런트, 가수 이름을 들먹이며 아느냐고 물었고 ‘你好!’ ‘謝謝!’ ‘再見!’이 한국말로 뭐라고 하냐고 물었다. 또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의 어느 호텔 내 식당에서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식당의 모든 종업원(服務員)이 우리 식탁 주변에 빙 둘러 서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아예 일을 하지 않고 ‘大長今 Dàzhǎngjīn’을 한국말로 뭐라고 발음하느냐 ‘이영애’를 잘 아느냐 또는 여러 가지 간단한 중국말을 한국말로 어떻게 말하느냐고 물어왔다. 또 한국 여자들은 모두가 아름답고 옷 입는 것도 세련되었다며 어쩔 줄을 몰랐다. 특히 내륙 지방에는 외국인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거나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엄청 모여들었다.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을 둘러보고 도로 가에 있는 음식점에 앞에서 쉬고 있는데 아주 아름다운 30대 후반의 중년 부인이 내 모습을 보고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까 어떻게 한국 사람들은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잘 생기고 멋지냐고 물어왔다. 내가 보기에는 그 중년 부인이 우리 한국의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아름답고 멋있어 보였는데 아마도 유행병인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한류 열풍이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특히 외국인의 접촉이 드문 내륙 오지일수록 더 심했고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또한 휴대 전화 로밍 서비스를 신청해서 가지고 다녔는데 휴대 전화에 대하여 한국의 삼성이나 LG에 대한 선호도가 엄청났다. 강소성(江蘇省) 남창(南昌)에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가는 야간 침대 열차에 우리와 함께 타고 가는 30대 중반의 중국 젊은이가 있었는데 본인은 남창(南昌)에서 항공기를 제작하는 회사에 다니는데 광주(廣州)로 출장을 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돈이 없어서 삼성 휴대폰을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의 모든 대도시에 있는 휴대 전화기 대리점에는 삼성 휴대폰이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어디를 가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Sānxīng(三星)!’이라는 말이 동시에 나오곤 했다.
북경 거리를 질주하는 새로 나온 택시의 절반 이상이 현대의 ‘엘란트라’였다. 그 중 절반은 중국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上海大衆’이란 차였으나 어디를 가나 현대 ‘엘란트라’가 눈에 띄었다. 북경에서는 2008년도 올림픽을 대비해서 지저분한 택시를 점차 새 차로 교체하고 있었다. 종전에 자주 북경으로 출장 갔을 때 보았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쇠창살도 점차 없어지고 있었다.
가이드 없이 오로지 지도책과 가이드북만 가지고 중국 각지를 혼자 돌아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음식 문제였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겨우 겨우 찾아서 이틀에 한 번꼴로 한국 음식을 먹었는데 한국 음식점을 찾기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일단 관광객이 많이 투숙하는 호텔 주변으로 가서 중국인에게 이 근처에 한국 음식점이 있는 곳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충 알려주거나 아니면 아예 모른다고 했다. 심지어 다음 목적지를 가기 전에 한국 음식점이 어디 쯤 있는가를 미리 알아보고 가서 그 근처에서 중국인에게 물어보면 없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했다.
아마도 호객꾼(삐기)인 중국인이 자기가 알선한 곳은 가지 않고 한국 음식점만 찾으니 가르쳐 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렵게 곤명(昆明)역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힘들게 ‘동북장백산(東北長白山)’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이 식당은 2층에 있었는데 아주 넓었다. 대부분 중국 식당은 규모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크고 종업원도 엄청 많았다. 그것도 아주 어린 소녀들이었다. 곤명(昆明)은 운남성(雲南省) 성회(省會)여서 그런지 종업원 모두가 소수 민족이었다. 대부분 베트남(越南), 미얀마(緬旬)나 라오스(老撾) 국경 근처에서 온 나이가 아주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렇지만 1층 입구에서 호객을 하거나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종업원은 아주 시골티가 좔좔 흐르는 소녀였는데 한복을 입고 있었으나 어쩐지 어설퍼 보였다.
오랜만에 가는 한국 음식점인지라 음식은 김치찌개 하나면 충분했지만 매상을 올려주려고 이것저것 시키면서 말을 걸어보았다. 40대 초반의 부부였는데 원래 고향은 길림(吉林)인데 아저씨께서 한국에서 5년 동안 일을 해서 한국 관광객이 점차 늘고 있는 곤명(昆明)으로 와서 음식점을 차렸다고 한다. 아직 부모님과 아이들을 고향에 있는데 길림(吉林)에서 곤명(昆明)까지 오는데 기차로 4일이 걸렸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려강(麗江) 고성(古城) 입구인 아주 길목 좋은 곳(물레방아가 있는 곳인데 강택민(江澤民)이 직접 ‘世界文化遺産’이라고 쓴 대형 벽면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아마도 임대료가 엄청 비쌀 것으로 생각되었다. 머리도 손질하지 않고 내실에서 반쯤 누워있는 약간 뚱뚱한 40대 초반의 몽땅한 남자가 주인이었다. 그 부인도 거기에 걸맞게 아주 작으면서 약간 뚱뚱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내실로 들어와 배낭을 맡기고 구경하라고 해서 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아저씨도 한국에서 8년 동안 일을 해서 이 음식점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식당 주인이 그 유명한 ‘문 사장’이라는 분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문 사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식사도 하고 사우나도 함께 가고 잠도 하루 함께 잤다. 그래서 바로 이곳에서 북경을 제외하고 중국 각 지방을 돌아다닐 때 유일하게 한 장소에서 이틀간을 머물렀다.
그 분들은 한국에서 마치 돼지처럼 생활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하려고 수년간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한 것 같았다. 인건비가 저렴해서 30~40명 정도 아주 어린 20살 미만의 소녀들을 종업원으로 거느리면서 합숙소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한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 나와서 돈을 모아 모두가 다 그렇게 성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내가 보기에도 아주 좋았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아직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미흡한 면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장기간의 교육이나 출장 중에 여러 명이 함께 연수를 떠나게 되면 숙소를 정하고 함께 지낼 파트너를 정해야 되는데 파트너를 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각자 습관, 관심사, 종교, 잠버릇, 흡연 여부를 따져서 짝을 짓는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이다.
예전 1995년도에 캐나다 토론토로 9주간 ‘해외 경영 관리 과정’의 연수를 한광희 지사장님을 팀장으로 10명이 다녀온 바가 있는데 그 때도 여러 번 짝을 지었다 풀었다 했다. 종교가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냥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서로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함께 지내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코를 고는 사람과는 함께 지낼 수도 없었다. 또 취향이 맞지 않아서 고생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연수에서는 일행이라고는 김창우 씨와 나 이렇게 단 둘이었기 때문에 함께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북경에서 영안빈관(永安賓館 Yǒng’ān bīnguǎn)에서 5일간을 함께 지냈는데 거기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김창우 씨는 잠을 자자마자 코를 심하게 골았다. 나는 그때 ‘해외전력정보’에 수록할 내용을 번역하기 위하여 늦게 자야했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자는 사람을 이리저리 눕혀도 보고 화장지로 코를 막아도 봤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김창우 씨가 중국에 처음 오는 거고 나야 10여 차례 와봤기 때문에 혼자 다니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12월 17일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 도착해서 소통(昭通)으로 가기로 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잠을 며칠간 설친 경우에는 가끔 방을 따로 쓰면서 함께 다녔다.
회사에서 어렵게 시간과 기회를 주었는데 하나라도 더 체험을 하고 가야 된다는 생각에서 내가 제안을 했다. 김창우 씨와 10여 일을 함께 중국 여기저기를 다녀보니까 김창우 씨 혼자서도 충분히 다닐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둘이 함께 다니면 유사시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고 여행 비용도 절감되고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간의 차이 때문에 고통이 될 수도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해외 연수나 장기 출장을 다녀온 직원 중에서 귀국할 때 원수가 되어 돌아온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곤명(昆明)에서 호텔 체크아웃을 하기 전에 비용을 서로 정산하고 각자 취향대로 돌아다니다가 12월 28일 북경 지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여행 중에 지켜야할 유의 사항을 얘기하고 북경 지사 주재원들의 전화 번호를 적어주고 헤어졌다.
장기간 해외 연수나 출장 중에 함께 지내기가 곤욕스러우면 과감하게 혼자 지내는 것도 좋을 성 싶다. 물론 장단점이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귀국해서도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기차역은 우리의 서울역과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을 해서 어느 정도 몸에 배었지만 처음에는 정말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우선 열차표를 사려고 대합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우리의 공항에서처럼 소지품에 대한 엑스레이 투시기를 이용하여 검색을 받아야 했다. 35kg이 넘는 배낭을 벗었다 다시 메었다 하기란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또 어느 역에서는 신분증 검사까지 했다.(낙양(洛陽)역과 또 다른 어떤 역인가에서 그랬다) 정말 불쾌했다. 심지어 버스터미널(焦作)에서도 엑스레이 검색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기차역이나 기차 안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어 얼마나 열차를 이용하면서 보안 검색에 신경을 쓰는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爲了您和他人的安全嚴禁携帶危險品․易燃品․易爆品進站上車。(당신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하여 위험한 물건이나 가연물이나 폭발하기 쉬운 물건을 역으로 들여와 열차에 싣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또 규모에 놀랐다. 우선 표를 사는 곳과 검표(檢票)를 하기 위하여 대기하는 곳이 달랐다. 상해(上海)역 같은 곳에서는 아예 표를 파는 곳이 기차역 길 건너편 다른 건물에 있었다.
기차역에는 우리 나라와 같이 매점이 있었는데 규모가 엄청 컸다. 각종 과자, 음료수, 먹을거리, 잡동사니 물건과 잡지 등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큰 곳은 약국까지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電話超市(전화 수퍼마켓)’라고 하는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현장에서 전화 신청을 하면 들어갈 부스를 지정해 준다. 역 규모에 따라 크기가 달랐지만 성회(省會)에 있는 역에서는 규모가 엄청 컸다. 자주 이용을 했는데 요금이 아주 저렴했다. 중국에서도 휴대 전화가 많이 보급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런 공중 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제일 먼저 아침에 기차역에 도착하면 ‘中國鐵路旅客列車時刻表’를 꺼내서 목적지까지 가는 열차 번호와 이용할 좌석(軟臥, 硬臥, 軟坐, 硬座, 無坐와 침대차의 경우 軟臥는 上鋪, 下鋪, 硬臥의 경우는 上鋪, 中鋪, 下鋪)을 결정하여 창구에 표시된 노선을 보고 열을 지어 한참을 기다렸다가 미리 저녁에 출발할 표를 사야 한다. 물론 매표원이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있으나 당황하지 말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표가 없다고 하면 그 이후에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표를 달라고 하면 되었다. 어떤 매표원은 말투와 외모를 보고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친절하게 종이에 글씨를 써서 시간과 요금을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미리 요금을 준비해서 시간이 지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 열차표는 현금으로 사야 한다.
기차 대합실은 노선에 따라 다르다. 출입구에 전광판으로 몇 호 열차 대합실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그 대합실로 가서 열차 번호 라인에 따라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가 전광판에 ‘檢票(검표)’라는 글씨가 나오면 일어서서 검표를 한 후에 열차에 탑승하면 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어디를 가나 물건 보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어떤 경우는 마대 자루로 몇 개를 끌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면서 해바라기 씨를 쉼 없이 먹으면서 씨 껍질을 바닥에 함부로 내버리고 심지어 어린아이가 대합실 바닥에다 그대로 소변을 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고 역무원도 청소하는 사람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정말 이상한 나라다. 너무 지저분하고 어지를 가나 요일에 관계없이 인산인해다.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질려버린다. 추석이나 명절 때 서울역은 아마 이 보다 나을 것 같았다.
모든 역 대합실에는 ‘침을 함부로 뱉지 마세요.(請勿隨地吐痰)’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리세요.(拉圾請投入拉圾筒)’이라고 붙어있지만 일반 중국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함부로 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서 환경미화원이 쓸고 지나갔는데 곧바로 쓰레기를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열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와(軟臥)나 경와(硬臥)는 그렇지가 않지만 특히 경좌(硬座)에서는 대합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열차 안으로 동일하게 이동했을 뿐이다. 먹고 남은 쓰레기는 아무데나 버리고 어린아이의 소변도 바닥에 그대로 보고 그랬다. 그렇지만 곧바로 청소부가 끊임없이 쓸고 닦았다. 우리 열차 안에서 ‘홍익회’에서 물건을 파는 것처럼 그들도 밀고 메고 다니면서 음식이나 음료나 잡지 등 온갖 것을 다 팔고 있었다.
또 더 참기 힘든 것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규모가 큰 성회(省會)에 있는 기차역 대합실에서는 어느 정도 금연이 지켜지고 있었으나 대부분 대합실과 기차 내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워대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있었다.
중국은 흡연자의 천국 같았다. 심지어 초작(焦作)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호텔 사우나의 대형 욕탕 한 가운데에서도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본 경우도 있었다. 피우는 사람이나 종업원이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피워대고 있었다.
중국의 기차 운행 시스템은 우리보다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기차역이 아주 합리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단시간에 승하차를 할 수 있도록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쾌(特快)나 쾌속(快速)열차는 시속 160km 이상 운행하고 보통 열차도 시속 120km 이상 달렸다. 그렇지만 임시열차(기차표에 ‘L’자로 되어있음)는 모든 간이역에서 정차를 하고 또 특쾌(特快)나 쾌속(快速)열차가 지나가면 멈춰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디게 운행하였다. 또 연착을 밥 먹듯이 하고 연착 시간도 엄청 길었다.
특이한 것은 중국에서 기차의 아동 요금을 나이로 결정하는 게 아니고 신장으로 결정하는 것 같았다. 열차마다 승차하는 곳에 눈금이 매겨져 있는데 1.1m와 1.4m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신장이 1.1m 이하는 무임 승차, 1.1~1.4m는 아동 요금을 받고 1.4m 이상은 성인 요금을 받는 것 같았다.(‘溫馨提示小朋友, 恭喜你又長高了! 身高1.1米~1.4米享受兒童票, 超過1.4m應購買全價票’라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중국 열차는 길림성(吉林省) 장춘(長春)에 있는 열차제작소(火車製作廠)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기계 제작 공장 규모가 가장 큰 곳이 장춘(長春)에 있고 그 다음이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 있다. 무척(武陟)발전소의 발전기와 보일러 설비는 제남에서 제작한다고 한다.
강소성(江蘇省) 응담(鷹潭)에서 호남성(湖南省) 주주(株洲)까지 가려고 이 임시열차를 탔다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차량은 지저분하고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일년 내내 세수 한번 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보였고 몸집도 아주 왜소하고 의복도 너무 남루했다. 열차 안에 설치된 선반에는 무지막지하게 물건이 많이 실려 있고 객차와 객차 사이에 있는 화장실이나 음료수대에까지 사람이 올라가 있거나 물건이 실려 있고 통로까지 사람들로 꽉 차서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상당히 부피가 나가는 배낭을 가지고 있어서 보관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 나라 ‘홍익회’와 비슷한 판매원으로부터 음식을 사서 그냥 차내에서 온 식구 아니면 동료끼리 떼를 지어 먹고 있는데 냄새며 그 지저분함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열차는 상해(上海) 바로 아래에 있는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에서 출발하여 귀주성(貴州省) 귀주(貴州)까지 가는 임시열차인데 승객 대부분이 아주 생활 수준이 낮은 귀주성(貴州省) 사람들로 상해(上海) 등 대도시에서 일용 노무자(打工)로 일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노숙자로 공안에 발각되어 무료 승차권으로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내 생전에 이런 열차는 두 번 다시 탈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무려 14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데 그것도 서서 아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면서 어떻게 갈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중간에 아무 곳에나 내렸다. 열차를 탄지 4시간이 넘었었다. 그런데 이 열차가 기차역에 도착하면 이동 상인들이 차창 가까이로 물 믿듯이 몰려와 먹을거리와 여러 가지 잡스런 물건을 팔곤 했다.
그래서 여러 번 열차를 이용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장거리를 이동할 경우는 야간 열차를 이용하는데 경와(硬臥; 독립된 칸막이가 없고 열차 한쪽에 3단으로 되어 있는 침대차)를 이용하면 된다. 이것도 제일 아래 침대(下鋪)가 요금이 가장 비싸고 다음으로 中鋪, 上鋪 순으로 저렴하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면 경와(硬臥)를 사용해도 충분히 잠을 잘 수가 있으나 칸막이가 없기 때문에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다 들린다. 중국 사람들치고 조용히 지내는 사람 못 봤다. 몇 놈만 모이면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시끄럽다. 그렇지만 술 한 잔 하고서 자면 된다. 배낭이나 귀중품은 통로 반대쪽 구석에 밀어놓고 베개 삼아 자면 된다. 여름철에는 발 냄새로 심하게 난다고 하는데 마침 겨울인지라 냄새는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가장 안락하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열차가 연와(軟臥)이다. 이 열차는 독립된 칸막이에 출입문이 있고 좌우로 상하단 침대가 있으며 탁자에는 그 날자 일간지와 끓인 물(開水)이 담긴 보온병과 일회용 슬리퍼가 있으며 깨끗하게 세탁하여 다림질한 침대 시트와 베개 카바가 있고 출입문 천정에 가방이나 배낭을 놓을 수 있도록 공간이 확보되어 있고 독서등도 구비되어 있다. 요금은 하단(下鋪)이 비싸고 상단(上鋪)이 약간 저렴하다. 내가 이용해본 결과 오히려 상단이 편리하고 다른 사람이 출입할 때도 방해를 받지 않고 배낭이나 물건을 보관하기도 좋았다. 그렇지만 요금은 항공 요금하고 거의 비슷하다. 항공 요금은 비수기(淡季)에는 아주 저렴하다. 그렇지만 연와(軟臥)를 이용하면 이동과 숙박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너무 피곤할 때 이걸 이용했었는데 아주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승객 중에서 잠잘 때 코를 골면 거의 잠을 잘 수가 없다는 점이다. 강소성(江蘇省) 남창(南昌)에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까지 연와(軟臥)를 타고 갔는데 몸집이 비대한 중국인 한 사람이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았다. 잠을 뒤척이다 괴로운 소리를 냈더니 그 중국 동료가 코를 골고 있는 중국인을 깨워서 ‘조심해라(小心 xiǎoxīn)’이라고 일깨워 주어서 거우 잠을 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초저녁이나 아침이 되면 중국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안락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경좌(硬座)와 연좌(軟坐)는 주간에 이동할 때에 차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또 옆 자리에 앉은 중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기에 아주 편리하다. 남경(南京)에서 소주(蘇州)를 갈 때 이걸 이용했는데 아주 운치가 있었다.
무좌(無坐)는 돈이 없는 중국 현지인들이 주로 단거리를 이용하는데 입석 열차표이다. 그렇지만 선착순으로 좌석을 차지할 수 있어서 검표(檢票)를 하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계단에서부터 전력질주를 한다. 먼저 앉은 사람이 주인이니까. 그런데 정말 돈이 없는 중국인들은 이런 입석표를 가지고 서서 14시간 이상을 버티고 목적지까지 간다고 하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물론 우리 나라도 60년대나 70년대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니면 목표까지 가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기차는 정시에 도착해서 정시에 출발했다. 그러나 특쾌(特快)나 쾌속(快速)열차가 아닌 보통 열차나 임시 열차인 경우에는 연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주성(貴州省) 귀양(貴陽)에서 19:00에 중경(重慶)으로 출발하는 보통 열차의 경와(硬臥)를 타려는데 무려 6시간 30분이나 지난 00:30분에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특쾌(特快)나 쾌속(快速) 열차를 이용하는 게 시간을 맞출 수 있고 이동하기도 편하다. 특쾌(特快)는 열차번호 앞에 ‘T’라고 표시되어 있고 쾌속(快速) 열차는 열차 번호 앞에 ‘K’라는 표시가 있다. 보통 열차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고 그냥 열차번호만 표시되어 있고 임시 열차는 ‘L’자가 표시되어 있다.
또 기차역 대합실에서 여러 번 목격했던 일이 있는데 인민 해방군에 입대해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치를 받는 군인들이 떼를 지어 대합실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듯한 건물에 대형 현수막으로 ‘한 가정에 한 명 군인을, 해방군에 입대하는 것은 애국하는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보였다. 현재 중국은 한 가정에 한 자녀만 가지는 게 국가 정책인데 이러한 선전 문구가 얼마나 일반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방군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신체 조건과 여러 가지 조건이 양호해야 한다고 한다.
KEDO 사업을 위하여 10여 차례 이상 북한을 다녀봤는데 북한 주민들도 최고의 직업이 군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경제 개발이 덜 된 중국의 지방에서는 최고의 직업이 해방군(군인)이 되는 길인 것 같았다.
또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호객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주로 숙소와 음식점 또는 관광 가이드들이었다. 어떤 경우는 60~70년대 우리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도 있었다. ‘쉬었다 가세요. 예쁘고 젊은 여자 있어요, 할 거요?(休息吧! 漂亮小姐, 要不要?)’하면서 계속 뒤따라오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사람들이 매춘을 알선하는 사람들이었다. 기차역 근처에는 어김없이 이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장난삼아 얼마냐고 물으니 ‘이빠이콰이(一白塊 yī bái kuài; 백 원이요, 우리 나라 화폐 기준으로 12,000원 정도)라고 했다.
우리 나라도 산업화가 되기 이전인 60~70년대에도 그랬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좀 희박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아직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겠다고 생각되었으나 정말 불편하고 예측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북한에서도 그런 일을 수없이 경험했는데 중국에서도 그러다니 역시 공산주의 체제는 이렇구나 하고 위안을 해야만 했다.
나는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혹시 시간이 있으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이나 라오스 또는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올까 해서 미리 중국 복수 비자를 준비했다. 그런데 함께 간 김창우 씨는 인사처에서 처리해준 대로 단수 비자로 중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마카오(澳門)에서 광동성(廣東省) 주해(株海)로 들어가면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마카오(澳門)에서 주해(株海)를 통해 중국으로 입국하려면 도보로 관갑(關閘; Barrier gate)에서 입국 수속을 받아야 하는데 입국이 거절 되었다. 그래서 그 건물 내에 있는 여행사에서 비자 발급을 대행하고 있었다. 사진과 여권을 주면서 비자 발급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느냐고 물으니까 20분 정도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20분이 지나서 다 됐느냐고 물으니 다시 20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또 20분이 지나 물으니 또 20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때마나 무조건 20분 걸린다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결국 4시간 후에 비자가 발급되었다.
또 다른 경우는 광동성(廣東省) 심천(深圳)에서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으로 중국 국내 항공기로 갈 때 비행기 옆 좌석에 젊은 중국 여자가 타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하게 사귀게 되었다. 그 아가씨는 원래 운남성(雲南省) 북부에 있는 소통(昭通)에 사는데 심천(深圳 Shēnzhèn)에 사는 친구 집에 왔다가 다시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곤명(昆明 Kūnmíng)에 가면 자기 사촌 오빠가 고향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자기 고향에도 소수 민족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왕이면 그 아가씨와 동행하여 그곳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곤명(昆明)에 도착하니까 일이 생겼다. 그곳은 철로가 없고 버스나 승용차로 가야하는데 지금 눈이 많이 와서 승용차가 밤에 갈 수가 없고 내일 오전 9시 정도 출발하면 6시간 정도 가면 고향에 도착한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자기 사촌 오빠기 자가용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서 그 오빠 승용차로 그가 알선해준 대로 호텔로 갔는데 고맙게도 숙박비를 무려 공식 가격보다 절반 이상 저렴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날 일어났다. 그 날 저녁 그 아가씨와 사촌 오빠 우리 일행 둘 이렇게 4명이 그 오빠가 손수 자기 자가용으로 곤명(昆明)에서 가격이 저렴하고 음식 맛이 좋은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중국 음식과 술을 먹고 다음날 오전 호텔로 9시까지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전화 연락도 없고 프런트에 메모도 없고 10시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가볼 곳은 많고 마음이 급하여 나는 김창우 씨와 헤어져 그날부터 나 혼자 다니게 되었다. 김창우 씨에게 12월 28일 북경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석림(石林 Shílín)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떠났다.
중국인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이주 희박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중국인과 시간 약속을 한다는 것은 약간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로 중국인과 비슷한 것 같았다. 북한 사람들이 흔히 쓴 말 중에 ‘인차’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곧’이란 말인데 이 말은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중국말에도 ‘마샹(馬上 mǎshang)’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곧 된다고 하면 기약이 없다는 말이다. ‘마샹(馬上 mǎshang)’이나 ‘인차’라는 말은 10분 후가 될 수도 있고 1시간 후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4주 동안 중국을 두루 다니면서 제일 기분 나쁜 것은 중국인들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었다. 몇 번 당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 당해야지 수 없이 마음 속에 다져 놓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당하곤 했다.
가장 흔하게 당하는 것이 택시를 탈 때 발생한다.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 등 대도시에서는 대부분 메타기에 표시된 대로 요금을 받는다. 그런데 지방으로 내려가서 특히 관광지에서는 외국 사람들은 그들의 밥이었다. 우리 나라도 한때는 김포 공항에서 택시 기사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문제가 되어 매스컴에 많이 보도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 어디를 가도 그런 경우는 없다.
운남성(雲南省) 샹그리라(香格里拉)에서 서장(西藏)자치구의 라싸(拉薩)에 가려다 교통편이 원활하지가 않고 교통 요금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다시 여강(麗江 Líjiāng)으로 되돌아 나와 곤명(昆明)으로 가기 위해 여강(麗江)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공항까지 가는데 얼마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 기사가 외모를 보고(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지도와 가이드북을 들고 있었음) 100원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서 버스 터미널을 향해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가 차를 길가로 대면서 다시 타라고 손짓을 했다. 하도 화가 나서 그대로 횡단 보도를 지나 버스 터미널로 가서 공항으로 가는 시외 버스를 탔는데 요금이 겨우 6원이었다. 이 얼마나 바가지란 말인가. 물론 택시로 가면 시간이 단축되고 요금도 25원 정도 나올 것이다. 그런데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닌가.
또 하나의 정말 어처구니없이 당한 경우가 있었다. 문화 체험을 위해 북경(北京)을 출발해서 첫날은 태산(泰山)을 보고서 시외 버스를 타고 힘들게 공자 고향으로 유명한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Qūfù)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우선 간단히 요기를 하고 터미널에서 지도를 보면서 서성거렸는데 한 허름한 중국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디를 가려고 하냐고 물어 우리는 공묘(孔廟 Kǒngmiào), 공림(孔林 Kǒnglín), 공부(孔府 Kǒngfǔ)를 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중국인이 자기 차에 타라고 하면서 요금은 1원이라고 했다. 차를 타기는 했지만 의심이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지도를 펴놓고 확인해 보니 공부(孔府)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도착하여 매표소에 가서 문표(門標 ménbiāo; 입장권)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무려 1인당 60원이나 했다. 우리는 그곳이 공묘(孔廟)인 줄 알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공자 시대의 각종 의상과 집기들이 널려있는 박물관 비슷한 곳을 여기저기 구경하고서 공자상이 있는 건물 내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는 관광객은 하나도 없고 중국인 두 명이 어서 들어오라고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수작을 부리는 구나 생각하고 얼른 그 자리를 떴는데 김창우 씨는 두 명이 손을 붙잡고 끌고 들어가 억지로 참배를 시키고 40원을 뺏겼다고 한다. 확인해 보니까 바로 그곳이 공묘(孔廟)가 아니고 공자고리원(孔子故里園)이었다. 하도 기분이 상해서 공자육예성(孔子六藝城)의 입장권도 있었는데 보지도 않고 나와 버렸다. 아까 우리를 태우고 온 그 중국 아저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곡부(曲阜)라는 도시는 평지에 있는 아주 조그만 곳으로 도시 전체가 자기의 직계 선조인 공자를 팔면서 사는 공자의 후손이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사기꾼이었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관광 안내원과 기사, 인력거꾼, 자전거로 일주를 시켜주면서 돈을 받고 있는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사기꾼이었다.
가이드북에 그러한 내용들이 수없이 나와 있었지만 여행 첫날이라 어쩔 수없이 당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이 받쳤다.
운남성(雲南省) 려강(麗江)에서 그 유명한 옥룡설산(玉龍雪山)을 가려고 조선족 음식점 주인에게 자문을 구하여 그가 외출한다고 하여 함께 그 쪽으로 가는 관광차가 대기하고 있는 터미널까지 동행했다. 그 조선족 식당 주인이 중국인 기사에게 이 사람은 내 친구이니 안전하게 잘 옥룡설산(玉龍雪山)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했다. 그 기사는 몇 번이나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려강(麗江)을 출발해서 옥룡설산(玉龍雪山)으로 가는 도중에 발생했다. 그 차량은 정기 노선 차량이 아니라 손님이 있으면 가고 없으면 터미널에서 대기하는 그런 차량이었는데 우리 봉고차와 유사했고 승무원은 모두가 가족이었다. 중년 부부와 젊은 딸이 함께 관광객을 수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옥룡설산(玉龍雪山)으로 가자고 했는데 도중에 세 명이 무엇인가 상의를 하고서 그 젊은 딸이 나에게 관광 팸플릿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지금 옥룡설산(玉龍雪山)에 가면 시간이 늦어 케이블카가 운행을 하지 않아 구경도 할 수 없으니 그 중간에 괜찮은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갈 거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에 처음으로 온 한국 사람이어서 잘 모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10여 km를 달리고서 도중에 이상한 벌판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는데 아마도 여름에는 넓은 초원에 말을 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12월이라 그런지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정말 엉성해서 전혀 볼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매표소에 들어가 문표(門標 입장권)를 사오라고 하는데 입장권 요금도 만만찮은 금액이었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속았는가.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관광객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운전 기사나 가이드가 관광객을 유치하면 그 입장료에서 일정 금액을 리베이트로 되돌려 받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들어가지 않고 버텼더니 곧바로 려강(麗江)으로 출발하지 않고 15분 이상을 그곳에서 뭉그적거렸다. 괜히 시간과 차비(車費)만 날렸다. 중국인들은 눈앞에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능청스럽게 사람을 열 받게 만들곤 했다. 아니 어떻게 온 식구가 일심동체가 되어 그 멀리서 온 외국인을 이렇게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기야 먹고 살기 위하여 그러겠지 하면서 또 위안을 했다.
또 하나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외국인들에게 해 먹은 수법은 가격이 저렴한 것부터 제안을 한다. 일례로 안마를 요구하면 가장 저렴한 것부터 소개를 하고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없어서 간단하게 족(足)안마를 받으려고 하면 일단 족안마를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해보지 않을 거냐고 물어온다. 대부분 집나온 남자들인지라 약간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중에서 가장 비싼 흔히 말하는 터키탕 식의 안마를 권하면서 가장 많은 요금을 받아낸다. 안마를 받으면서는 철저하게 대비를 해서 바가지를 쓰지는 않았다.
정말 순식간에 당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귀주성(貴州省) 귀양(貴陽)에 도착해서 시내를 둘러보고 다시 역으로 갈 때였다. 며칠 동안 양말도 갈아 신지 못하고 신발이 더럽고 해서 길가에 열 지어 서있는 정말 불쌍하게 보이는 구두닦이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래서 모처럼 신발을 깨끗하게 닦으려고 얼마냐고 물었는데 3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발을 통에 올려놓고 구두를 닦고 있는데 그 아주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뭐라고 하면서 구두 솔에 이상한 구두약을 묻혀서 신발에 댔다가 다시 맨땅에 댔다가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 약으로 신발을 닦으면 흙이나 먼지가 전혀 신발에 달라붙지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구두를 다 닦고 나서는 10원을 달라고 했다. 아니 아까 3원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따졌더니 이 약은 특수한 약이기 때문에 10원이란다. 정말 순식간에 또 사기를 당했다. 아~ 정말 열 받게 만드네.
또 한 가지 사례는 중경(重慶)에서였다. 운남성(雲南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국의 날씨는 안개가 심하게 끼거나 아니면 황사로 하늘이 항상 뿌옇게 흐렸다. 귀양(貴陽)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이른 아침에 중경(重慶)역 도착했다. 원래는 임정 건물과 몇 군데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10m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안개가 끼었다. 그래서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지도를 꺼내서 보고 있는데 손살같이 조그만 노인이 목봉을 들고 다가왔다. 목봉은 물건을 나르기 위하여 어깨에 둘러메는 도구였다. 그런데 그 노인이 워낙 빨리 말을 해서 도저히 제대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3, 5, 8이라는 숫자였다. 마음은 급하고 안개가 워낙 짙게 깔려서 어서 빨리 중경(重慶)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 노인을 따라갔다. 바로 지하도를 건너 반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 번호를 알려주면서 그 차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야. 공항까지 가는 버스 요금이 3원인데 그 노인이 길을 안내해준 대가로 나에게 5원을 요구했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따졌더니 아까 설명할 때 버스 요금이 3원이고 자기가 알려준 값이 5원 모두 8원이면 공항까지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단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했다. 아뿔싸, 또 당했구나. 그 노인이 동행한 거리가 바로 지하도를 건너 반대쪽 버스 정류장이었다. 150m 남짓한 거리였다. 사례치고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크게 당한 사례는 이렇다.
운남성(雲南省) 대리(大理)에서 정말 너저분하게 생긴 그리고 아주 촌스러운 백족(白族) 여자 가이드(導游)와 운전 기사를 포함하여 승용차 한 대를 150원에 렌탈했다. 여기저기 다섯 곳인가를 가기로 하고 관광을 시작했다. 물론 문표(門標; 입장권)는 별도로 주었는데 결정적으로 얼하이(洱海) 중간에 있는 아주 멋진 남조풍정도(南詔風情島)를 가려고 할 때였다. 분명히 사전에 관광을 시작할 때 그곳에 가는 선비(船費)를 포함하여 계약을 했었다. 그런데 부두에 가보니 커다란 배에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 가이드가 하는 말이 손님이 절반 정도 차야 출발하는데 쾌속선을 이용하면 2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금이 문제였다. 편도가 무려 100원에 왕복 200원이나 요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없이 추가 요금을 내고 갈 수 밖에 없었다. 200원이라고 하면 대수롭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중국 시골에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대도시 건설 노동자(打工)의 하루 일당이 45원 정도한다고 한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가이드와 운전 기사를 포함하여 하루 차량을 임대하는 금액이 보통 100~200원 정도하니까 하루 관광 비용을 날림 셈이다.
이 외에도 무수하게 많이 바가지를 썼다. 한번 당하고 나면 그 여파가 2~3일은 영 기분이 안 나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한번 당한 일은 두 번 다시 안 당하려고 해도 중국의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인데도 불구하고 정기 노선 버스가 별로 없고 또 입구까지 차량이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차량을 이용하더라도 2~3km는 더 걸어가야 입구가 나온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면 조그만 셔틀 차량이 나와서 대기하고 있다. 물론 이용자 옵션이다. 그런데 요금이 만만치가 않다. 보통 수십 km를 달려온 시내 버스나 시외 버스 요금이 1~5원 정도인데 이 셔틀 차량을 이용하려면 5원 남짓한 돈을 내야 한다. 물론 중국에 있는 대부분의 관광지나 유적지가 나무 광대해서 구내를 한번 둘러보려면 걸어서 다닐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일단 입구를 통해 들어와 구내를 돌면서 셔틀 차량을 이용할 수도 있겠으나 이건 입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차량을 이용해야 하니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중국어로는 보통 측소(厠所 cèsuǒ 처쑤어)라고 하고 위생간(衛生間 wèishēngjiān 웨이셩찌엔) 또는 공항이나 고급스런 건물 내에서는 세수간(洗手間 xǐshǒujiān 시쇼유찌엔)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길을 가다가 또는 관광지에서 볼일을 보려면 공중 화장실(公共厠所)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에서 오피스 빌딩이나 호텔 등을 제외하고 공중 화장실이나 유명한 관광지 또는 시골의 공중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려고 하면 정말 곤욕스럽고 난처했다. 특히 여자분들은 거의 볼 일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에 온지 처음 며칠간은 시간 안배를 잘 해서 기차 내에서 아니면 숙소에서 볼 일을 봤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운남성(雲南省) 려강(麗江)에서 북쪽으로 80여 km를 가면 호도협(虎跳峽)이라는 곳이 있다. 이 호도협(虎跳峽)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이 큰 폭으로 흐르던 長江(揚子江 / 金沙江)이 폭 약 30m 정도로 좁은 지역을 지나는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설화에 의하면 옛날에 포수에게 쫓기던 호랑이가 이곳을 건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아주 유명한 관광지인데 입구부터 마지막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가거나 아니면 인력거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이가 수 km나 되어서 중간에 공중 화장실이 몇 군데 있었다.
참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들어가서 큰 걸로 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도저히 일을 볼 수가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목에 두르고 있는 목도리로 앞을 가리고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나왔다.
중국에 다녀오거나 아니면 다녀오신 분들의 말을 들어 잘 알겠지만 중국의 화장실 구조는 앞이 터져 있고 또 좌우측 벽이 어깨 높이 정도로 되어 있다. 물론 여자 화장실과 남자 화장실은 별도로 되어 있다.
왜 중국의 화장실 구조가 이렇게 되었나 하는 데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중국에서 오래 거주하고 있는 어느 한국 사람이 말하길 중국인들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게 아주 기본적인 생리 현상이라 구태여 문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서 옷을 입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또 어떤 사람은 1960년대 문화 혁명 당시 중국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모사를 꾸미는 사례가 많아서 아예 당국에서 문을 없애버렸다고도 했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도 2008년 올림픽을 대비해서 서서히 화장실 구조를 바꾸고 또 한국에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으로 인하여 화장실이 엄청 깨끗해졌다고 벤치마킹을 한다고 한다. 이후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문 없는 중국 공중 화장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가 있는 곳에서는 변기 쪽으로 바짝 다가서서 볼 일을 보지 않고 멀리서 일을 치르다 보니 소변이 자주 바닥에 떨어져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표어를 화장실에 붙여놓을 걸 보았다.
여행 초기에 태산(泰山)을 올랐다 내려와 태안(泰安)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공중 화장실을 갔는데 우리의 화장실 표어인 ‘아름다운 사람은 머무는 곳도 아름답습니다’인데 반하여 중국인들의 화장실 표어는 좀 독특했다. 지금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면 당신은 문명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문구가 남자 화장실에 쓰여 있었다.
(5) 샹그리라 장족(藏族) 전통 가옥에서 하루 지내기
당초 운남성 려강(麗江)에서 샹그리라(香格里拉)를 거쳐 티베트자치구(西藏自治區) 라싸(拉薩)로 가기 위해 려강(麗江)에서 시외 버스로 무려 5시간 반을 타고 샹그리라(香格里拉)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3,400m 고지여서 그런지 려강(麗江)에서 샹그리라(香格里拉)로 오는 길은 너무 험했다. 정말로 등골이 오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백 미터 낭떠러지를 버스가 추월하면서 갈 때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12월인데도 위도가 북위 27°쯤 돼서 그런지 낮에는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지도를 펴고서 갈 곳을 정하고 있는데 몇 사람이 내게로 다가와 어디를 갈 거냐고 묻는다. 중국에서는 대부분 1일 관광에서부터 10일 관광까지 여러 가지 상품을 가지고 관광객에게 다가온다. 나는 하루 관광 중에서 중요한 몇 곳을 제시했다. 우선 다마스처럼 생긴 차량을 반나절 빌리는데 100원에 계약하고서 벽탑해(碧塔海)를 가고 있었다. 그 날도 하루 종일 먹지 못해서 무척 배기 고팠다. 지금까지 중국에 와서 2주 정도 둘러보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의 유적지와 관광지가 대부분 비슷한 건물에 규모만 엄청나게 커서 싫증이 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곳은 1950년에 중국이 티베트를 정복하기 이전에는 티베트 영토여서 그런지 가옥이나 사람들의 모습이나 사원이나 모두가 특이했다.
그래서 벽탑해(碧塔海)를 가는 외부 풍경이 아주 색달라서 가이드에게 저런 티베트 전통 가옥에서 하루 지내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가이드가 하는 말이 자기 집도 저런 전통 가옥이라고 한다. 관광을 마치고 배도 고플 테니까 자기 집에 가서 식사도 하고 하루 지내라고 했다. 벽탑해(碧塔海)와 송찬림사(松贊林寺)를 둘러보고 시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 가이드 집으로 갔다. 먼저 티베트 전통 가옥을 둘러보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외부에서 보면 꼭 성곽처럼 생긴 담장이 사각으로 빙 둘러쳐 있었다. 이 담장은 높이가 3m 정도 되는 아주 높은 토담으로 사면을 둘러싸고 규모가 엄청나게 큰 목조 건물로 3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창고와 가축우리로, 2층은 티베트 불교 법당과 주방, 거실 및 침실로 되어 있고, 3층은 가축을 잡아 날 것으로 시렁에 걸어서 말려두는 곳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가이드는 장족(藏族)으로 36세였지만 보기에 아주 나이가 들어보였고 가족으로는 74세인 어머니, 33세인 아내, 아들이 둘이었는데 큰 놈은 중학교에 다닌다고 시내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집에 없었고 소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은 집에 있었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 승려인 형님이 있는데 현재 인도에 있어서 그 형수와 조카도 함께 살고 있었다.
2층은 추울 것 같아서 별채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곳은 겨울철에 주방으로 사용하는 장소로 이 곳에서 하루 지내라고 했다. 먼저 배가 고파 그 아내와 어머니가 난로에 나무로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먼저 씻으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길어놓은 줄로 알고 문간으로 나가봤더니 조그만 컵에 물을 담아서 그걸로 손과 얼굴을 씻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조금만 물 컵 하나로 손과 세수를 다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시골 중국인들이 지저분하지만 특히 장족(藏族)은 더 심했다. 머리는 감지도 않아서 항상 새집을 짓고 옷은 여기 저기 흙과 얼룩이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아까 관광하면서 하루 종일 먹지를 못했다고 하니 커다란 우유 통에 뭔가를 계속 휘저으면서 이물질이 여기 저기 떠다니는 우유를 한 사발 나에게 건네주었다. 생각 같아선 버리고 싶었지만 성의를 봐서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주식은 보릿가루 비슷한 것을 이 우유에 개서 손으로 그냥 먹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숟가락을 주면서 먹어보라고 권해서 먹었는데 도저히 한 그릇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집에 외국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온 집안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가장 즐거워하는 사람은 바로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이었다. 이 놈도 옷이 너무 지저분하고 감기가 걸렸는지 항상 콜록콜록하고 누런 코가 주르륵 흐르다 다시 둘러 마시곤 했는데 내가 건네준 전자 사전에 나오는 게임을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이 집에서 보통화(普通話 중국 표준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가이드와 아들 둘 뿐이란다. 그래서 주로 그 가이드와 아들놈하고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그 가이드가 통역을 해주었다.
또 특이한 것은 집집마다 소나 돼지를 기르고 있었는데 돼지는 우리가 없었다. 낮에는 밖에서 마치 우리가 기르는 닭처럼 여기 저기 쏘다니다가 밤만 되면 대문 밖 두엄자리 근처에 모여서 밤을 지새우고 또 낮에는 지 맘대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바퀴 돌아봤는데 바로 근처에 아주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고산에 있는 만년설이 녹아 계속 흐르기 때문에 수량은 아주 풍부했으나 주위가 하도 지저분해서 청소 좀 해주고 세수를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소를 몰고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곳은 고도가 높은 곳이고 또 가옥 자체가 난방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모든 사람이 감기나 백일해가 걸려있는 것 같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기침을 하고 있었다.
또 근처에 소학교(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적별 돌로 지었는데 볼품은 없었다. 담장에 무언가 동판으로 쓰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 학교를 지으면서 찬조나 기부를 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장족(藏族)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 한족(漢族)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그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장족(藏族)들은 돈이 없이 기부를 못했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초등학교 담장에 산아 제한 정책에 관한 표어가 아주 크게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소수 민족과 농민들은 아직도 한 가정 한 자녀가 아니어서 그런지 시골로 갈 수로 그런 표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다음 날 가이드는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걸 보고서 그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數碼照相機)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인도에 계시는 자기 형님에게 보낼 가족 사진을 좀 찍어달란다. 몇 커트를 찍어서 시내에 있는 사진관에 맡겼는데 내가 크게 현상하지고 하니까 인도로 보낼 때 항공 우편 요금이 비싸니까 조그마하게 뽑아달란다.
며칠 더 머물다가 라싸(拉薩)로 가려고 버스 터미널로 가서 물어보니 일주일에 두 차례 버스(臥鋪 汽車; 침대 장거리 버스)가 있는데 라싸(拉薩)까지 가는데 무려 3박 4일이 걸리고 또 요금도 586원에 외국인들에게만 추가로 받고 있는 신변안전기금이 요금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래서 비행기를 이용하려고 민항 사무실로 갔더니 이건 웬걸. 이것도 일주일에 두 편에 요금이 무려 2,500원에 거기에 다가 또 800여 원에 달하는 신변안전기금을 내야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 날 되돌아가는 항공편이 없어서 급하게 서둘러 려강(麗江)으로 다시 시외 버스로 되돌아 나와야 했다. 시내에서 그 가이드 집으로 되돌아 갈 때 사진 현상비를 내가 지불하고(7원) 어제 하루 숙박하고 지낸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과일을 25원어치 사서 주고 집을 나오면서 아들에게 20원을 주었다.
특이한 것은 장족(藏族)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초등하교 3학년인 아들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拉茸扎識’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빠 이름을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만 ‘格茸知識’이란다. 아직 확인은 안했지만 예전에 장족(藏族)의 혼례 문화는 1처다부제였다고 한다. 여자 하나에 여러 형제가 함께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일 큰 형님이 아버지이고 나머지 동생들은 모두가 다 삼촌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그게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6) 중국에서 만난 일반 중국인들과 언어, 그리고 한자
혼자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의 중국인들을 만났다. 거래 관계상 만나는 가이드나 운전 기사를 제외하고도 시장, 공원, 관광지, 음식점, 버스나 열차에서 많은 중국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관광지에서나 호객꾼들에게 너무 많이 바가지를 써서 마음은 상했지만 거래 관계가 전혀 없는 일반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고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한국의 경제 성장과 IT산업에 대하여 부러워했지만 일본에 대하여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에서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가는 야간 열차 안에서 젊은 중국인과 함께 탔는데 회사에서 중국 문화 체험을 위하여 1개월간 우리를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하니까 가장 효과적인 여행 경로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조심해야 할 사항들도 사례를 들어가며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려강(麗江)에서 머물 때 중국에서 생활한지 10년이 넘었다는 문 사장이란 한국분이 말하기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관광을 오면 쉬지도 않고 너무 강행군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 좀 여유롭게 한 곳에 쉬면서 재래 시장도 가보고 공원도 가보고 더 용기가 있으면 여자 있는 곳도 가보라고 조언을 했다.
그래서 귀양(貴陽)에서는 걸어서 공원과 시장 그리고 시내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귀양(貴陽)역 1층에 있는 소화물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5원) 하빈공원(河濱公園)에 있을 때였다. 그날이 평일인지라 공원에는 주로 노인들이 나와서 산책을 하고 어떤 노인은 새장을 가지고 나와 있었다. 내가 지도책과 중국어로 된 배낭 여행 가이드 북(中國自助游)을 가지고 갈 곳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말쑥한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중국에 온 사정 이야기와 지금까지 중국 전역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니까 대단히 부러워했다. 그 노인은 현재 74세로 13년 전에 퇴직을 했는데 원래는 절강성(浙江省)이 고향이라고 했다. 나보고 정말 보통화(普通話)를 잘한다고 칭찬을 했다. 퇴직하기 전에는 철도 회사에서 철로 건설 업무(修建鐵路)를 했는데 이 노인분도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교전을 하면서 중국 전역을 다녀보았다고 했다. 너무 이야기하는데 신이 났는지 이야기하는 도중에 틀 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또 귀양(貴陽)시 인민광장(人民廣場)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떼를 지어 전통 무예를 하거나 일부 노인들이 직접 제작한 무선으로 조종하는 모형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천태만상이었다. 우산대를 이용하여 만든 모형 비행기는 정말이지 기발해보였다.
중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친절한 중국인은 태안(泰安)에서 만난 젊은 남자 대학생이었다. 곡부(曲阜)에서 가는 곳마다 어찌나 바가지를 썼는지 기분이 잡쳐서 볼 곳도 다 보지 못하고 얼른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주(兗州)로 가기 위하여 시외 버스 터미널로 가려고 하는데 중국어 실력이 짧아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자꾸 지체되고 여기 저기 물으니 똑같은 이야기만 해주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터미널에 상주하는 안내소 직원에게 물으니 또 같은 얘기만 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젊은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영어로 자기는 태안대학(泰安大學)에 다니는 학생인데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고 물어왔다. 연주(兗州)를 가려면 열차 노선은 없고 버스 노선만 있었는데 여기서 물어도 저기서 물어도 태산(泰山)역으로 가라고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대학생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영어와 중국어로 이야기하면서 친절하게 큰길가로 나와서 우리를 연주(兗州)까지 가는 버스 터미널까지 실어다주도록 삼륜 오토바이꾼에게 알려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연주(兗州)로 가는 버스는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태산(泰山)역 바로 앞에 있는 간이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중국어 실력이 짧아서 일어난 에피소드였다.
또 하나 짧은 중국어 때문에 일어난 재미있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섬서성(陝西省) 임동(臨潼)에 있는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을 둘러보기 위해 서안(西安)에서 관광 전용 버스를 탔다. 왕복 교통비와 모든 입장권(門標)을 포함하여 사전에 한꺼번에 가이드에게 지불했었다. 일부 박물관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나서 계속 관광을 하기로 했다. 나는 중국 음식이 입에 도저히 맞지가 않아 식당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일행이 아닌 다른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참을 지나서 어떤 젊은 중국 남자가 나보고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에 가야 하니 얼른 자기를 따라 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호객꾼(삐끼)에게 하도 당해서 나는 이미 다 보았다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젊은이는 우리가 서안(西安)에서 출발할 때 버스를 운전한 사람인데 인솔자가 나만 없어서 이 운전 기사에게 찾아오라고 했는데 내가 오해를 한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가 입구에 가보니 나를 기다리려고 10여 명이 입장을 못하고 있었다.
중국은 공통어인 표준 중국어(普通話) 외에도 많은 방언들이 있지만, 이 방언들도 하나의 언어에서 분화되어 나왔다. 다라서 동일한 한자를 문자로 쓰고 있으며 기본적인 어휘나 문법 구조도 비슷하나. 그러나 발음은 각 방언이 서로 소통되지 않을 정도로 다르다.
방언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크게 여덟 개의 방언군으로 나눌 수 있다. 북경어(北京語)로 대표되는 북방방언(北方方言), 상해어(上海語)로 대표되는 오방언(吳方言), 호남어(湖南話)라고도 부르는 상방언(湘方言), 남창어(南昌語)로 대표되는 감방언(竷方言), 매현어(梅縣語)로 대표되는 객가방언(客家方言), 복주어(福州語)로 대표되는 민북방언(閩北方言), 대만에서 쓰고 있는 방언이 속해 있는 만남방언(閩南方言), 홍콩에서 쓰고 있는 방언이 속해 있는 월방언(粤方言)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북방방언(北方方言)은 분포 지역이 넓어 다시 ‘관북관화(北方官話), 서남관화(西南官話), 하강관화(下江官話)’로 나누기도 한다.
대부분 중국인들은 보통화(普通話 중국 표준어)를 구사했는데 노인이나 일부 운전 기사는 전혀 보통화를 못 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보통화(普通話)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륙이나 시골에 갈수록 그 지방 언어가 아닌 보통화(普通話)로 대화를 나누기가 그렇게 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TV에서는 보통화(普通話)를 쓰고 있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그 지방 방언을 주로 사용했다. 그래서 내가 보통화(普通話)를 하면 어디서 배웠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정말 보통화(普通話)를 잘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가이드나 호객꾼들은 보통화(普通話)를 했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지방 방언을 했다. 그런데 관광 전용 운전 기사 중에서도 전혀 보통화(普通話)를 하지 못하는 중국인을 만나 고역을 치른 경우가 있었다. 려강(麗江)에서 호도협(虎跳陜)을 가기 위해 200원에 기사를 포함하여 차를 임대했다. 보통 차량을 하루 임대하는데 100~150원 정도하는데 호도협(虎跳陜)은 려강(麗江)에서 거리가 멀어(80여 km) 200원이나 했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하나 있었는데 대부분의 시골 길 가로수 중간에 흰 색 횟가루를 발라놓아서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느냐고 물었으나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아예 보통화(普通話)를 할 줄 몰랐다. 서로 동문서답을 하면서 한참을 다녔다.
현재 대륙에서는 한자(漢字)를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번체자(繁體字)를 사용하지 않고 간화자(簡化字)를 사용하고 있다. 번체자(繁體字)는 대만이나 홍콩․마카오와 싱가폴과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일부 한자를 자기들 나름대로 간략하게 약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원래 한자는 획수가 많아 배우고 쓰기가 복잡하여 오래 전부터 어떻게 간략한 문자로 바꿀 수 없을까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러던 차에 1956년 국무원에서 515개의 간화자(簡化字)를 수록한 ‘한자간화방안(漢字簡化方案)’을 공표하였고 1964년 ‘간화자총표(簡化字總表)’를 만들 게 되었다.
그런데 홍콩이 중국에 귀속된 이후 홍콩에서도 공식적인 한자는 번체자(繁體字)가 아닌 간화자(簡化字)를 공식 문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일반 간판이나 안내 책자에는 아직 모두가 번체자(繁體字)로 되어 있고 홍콩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를 비롯한 심천(深圳), 주해(株海) 등에서도 번체자(繁體字)로 쓰인 간판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간화자(簡化字)를 모르는 분을 위하여 한자를 번체자(繁體字)로 사용했다.
Ⅴ. 맺음말
회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업무를 떠나 짧지 않은 4주간의 연수를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상당한 혜택이었다.
그래서 북경에서 머문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초인적인 강행군을 하면서 한 곳이라도 더 가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35kg이 넘는 배낭을 항상 둘러메고 다녀야 했고 오는 길을 되풀이해서 오지 않기 위하여 코스를 너무 무리하게 잡다보니 심신도 너무 피곤했다.
귀국해서 한 달 이상이 지나도 허리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또 다시 그런 조건에서 4주 동안에 그렇게 많은 곳을 다니라고 한다면 할 수 없을 것 같다. 음식이 맞지 않아 심지어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오로지 바나나 1원어치와 음료수 한 병만 가지고 하루를 버틴 경우도 있었다.
무척(武陟)발전소에 들렀을 때 송창현 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누가 본다고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 다니느냐, 힘들면 어디 휴양지에서 며칠 푹 쉬면서 다니지 그랬느냐고 위로를 해주었다. 4주 동안 겪은 이야기를 하려면 몇 권 분량의 책을 써도 다 못할 것 같다.
운남성(雲南省), 귀주성(貴州省)과 중경시(重慶市)를 둘러보고 무척(武陟)발전소를 가기 위해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야간 열차(침대차가 아닌 좌석)를 타고 정주(鄭州)로, 정주(鄭州)에서 다시 고속 버스를 타고 초작(焦作)으로, 초작(焦作)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무척(武陟)으로 마지막으로 택시를 타고 서안(西安)을 출발한지 하루 만에 무척(武陟)발전소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현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게양대에 걸려있는 낮 익은 우리 회사 사기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서울 한전에서 왔다고 하니 젊은 중국인 소녀 경비원이 무척 반가워하면서 너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우리 직원 여러분들의 노고를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국내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근무 환경은 아니었다. 날씨도 거의 매일 먼지 바람과 안개 때문에 하루 종일 우중충하고 위락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고 또 주거에 필요한 비용도 회사에서 모두 지원해주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정말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다. 필리핀 현지 법인이나 북한 금호 지역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곳에서 너무 피곤하여 송창현 사장님과 박종창 과장님의 배려로 반나절을 초작(焦作) 시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우리 연수자 때문에 북경 지사나 현지 법인에서 근무하는 직원 여러분들께 평소 업무도 바쁜데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항상 들었다. 이 단기 연수 과정의 목적이 해외 전력 현황 파악과 현지 문화 체험이라면 현지 지사에 부담을 주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발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사에 출근하는 시간을 최소한도로 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현지에 도착해서 해외 지사에 도착 인사를 하고 방문 기관에 대한 알선을 받고 귀국 직전에 귀국 인사 정도로 끝냈으면 서로 간에 부담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좀 아쉬운 것은 당초에 연수 과제를 ‘중국 전력 시장의 개편 과정’에 대한 자료와 여러 가지 중국 전력 산업에 대한 생생한 모습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현지 전력 회사나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자 했는데 시기상으로 연말이다 보니 워낙 북경 지사의 업무가 정말 숨 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북경 지사에서 상황 설명과 나중에 현지 체험을 마치고 북경 시내에 있는 전력에 관한 전문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서 구입한 자료에 의존해야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4주간의 이번 연수가 그 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중국에 대하여 속속들이 직접 경험해 보았다. 중국은 대단했다. 그러나 아직 내륙 지방에는 우리의 60~70년대 수준보다 더 열악한 상태였다. 그 많은 인구가 굶지 않고 먹고 산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개방이 일찍 시작된 동남 해안 지방의 경제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다. 특히 광동성(廣東省) 심천(深圳)은 계획 도시로 미국이나 캐나다의 도시보다 더 깨끗하고 고층 빌딩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녹지 공간이나 도로 등 인프라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 일반 주민들은 주로 30대 중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생활이 서울 못지않게 풍족하고 편리했다. 그러나 내륙 지방인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작은 도시(그렇지만 인구는 40~50만 규모)는 주민들이나 생활 모습이 너무나 현격하게 구별이 되었다. 이런 도시와 농촌간의 심한 격차를 장차 중국 정부나 중국 위정자들이 해결해야 할 몫인 것 같았다.
혹시 나중에 다시 개인적으로 중국을 여행하는 직원들을 위하여 이번 연수보고서에 다 기록하지 못한 내용들은 시간을 내서 여행하면서 메모한 내용과 자료를 가지고 좀 더 보완하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또 시간이 없어 모든 내용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이번 연수에서 유명한 유적지나 관광지에서는 사진 촬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을뿐더러 인터넷에 전문가들이 멋지고 훌륭하게 촬영하여 올려놓은 것들이 많아서 직접 눈으로 보고 현지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치중했다. 그리고 이 연수 보고서에서도 그 동안 둘러보았던 관광지나 유적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것 또한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 아주 상세히 나와 있어서 나와 같은 비전문가가 이야기하는 게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대신 직접 체험하고 느낀 내용을 담았는데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한 것 같다.
이번 연수에서 아쉬운 것은 원래 소수 민족 실태를 확인하고자 운남성에서 무려 일주일 정도 체류했는데 남쪽 국경 근처에 많은 소수 민족이 분포되어 살고 있는 서쌍판납(西雙版納)에 가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서 북쪽으로 대리(大理), 려강(麗江)과 샹그리라(香格里拉)까지만 가 본 게 좀 아쉬웠다. 돌이켜 보면 운남성(雲南省)만 해도 우리 한번도보다 훨씬 광활한데 모두 가보려고 했으니 무리인 것 같았지만 아쉬웠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중국에서는 온갖 흉악한 범죄가 판을 치고 또 한국 관광객이나 상사원이 실종되거나 피살되고 또 조류독감(非典)이나 에이즈(艾滋病)에 감염된 사람들이 득실거린다고 해서 내가 과연 그런 내륙 지방을 모두 둘러보고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그리고 각종 언론 매체에서 중국 시골의 치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각종 범죄가 많다고 보도를 했었다.
그런데 혼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오지까지 가보고 또 수 없이 많은 각종 차량을 타고 이동했는데 바가지를 쓴 것 외에는 도난당한 물건도 없이 또 피곤한 것만 제외하고는 몸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라고는 북경에서 구입한 철도 여행 안내서(27원)를 서두르다가 마카오(澳門)에서 마카오 타워에 두고 내린 게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중국에서의 4주 간의 일정이 너무 무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이상 없이 돌아오게 되어 퍽 다행스러웠다.
이런 연수 기회를 주신 관계자 여러분과 중국 현지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북경 지사와 무척발전소 근무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