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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문화적 차이와 인권
장 은 주 : 서울대 강사
【주제분류】 윤리학/사회·정치철학
Ⅰ. 들어가는 말
이른바 수평적 정권교체와 더불어 평화적 정권이양의 전통이 확립되는 등 제 도정치적인 차원에서의 민주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된 지금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이념을 담고 있는 인권 개념은 확실히 아직 친숙한 사 회정치적 개념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인권이라는 개 념은 말의 나쁜 의미에서 실용적인 개념이기는 해도 그야말로 내실 있는 개념은 아니다. 인권의 이념은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조건에서 실용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소극적으로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이념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는 다소간 다른 윤리적 가치관에 바탕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식의 인식이 암묵적으로 우리의 시민사회 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인권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 은 앞으로의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과 관련하여 커다란 장애로 작용할 것임에 틀 림없다. 우리 현대사의 왜곡된 정치과정이 구축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여기서 일단 논외로 한다면, 나는 인권을 둘러싼 그와 같은 사회문화적 지형이 형성된 데에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문화적 민족주의"1)가 중요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예컨대 때로는 "아시아적 가치"의 이름으로 때로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 라는 목표설정이나 다양한 "동아시아 담론"2)의 형태로 또 때로는 "신토불이" 식의 일상적 담론의 형태로 이러한 "문화적 민족주의"가 표출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문화적 민족주의"가 인권 이념의 철학적 이해의 문제와 관련하여 적지 않 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형태의 "문화적 민족주의" 담론에 서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권 문제를 논의하거나 인권 이념에 대해 부 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및 정치적 삶의 규제원리 를 어떤 문화적 타자와의 경계설정을 통해 찾고 또 확인하고자 하는 다양한 형태 의 이 "문화적 민족주의"에서 핵심적인 논제의 하나는 바로 우리 문화가 서구문화에 대해 갖는 "문화적 차이" 또는 "문화적 정체성"인데, 나는 바로 이런 출발점 이 우리 사회에서의 인권 이념에 대한 불투명한 사회문화적 수용과 모종의 연관 이 있지 않은지 우려한다. 왜냐하면 그런 출발점에서 보면, 인권의 이념은 서양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발생했으며 "우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는, 모순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친화적이지 않으며 또 그런 만큼 그 사회적, 정치적, 제도적 실현도 절박한 과제가 아니라는 식의 결론이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이 글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민족주의" 담론들을 "세계 화"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화적 자기주장(cultural self-assertion)", 곧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과 확인 그리고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한 인정의 요 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그러한 문화적 자기주장이 인권 이념과 관련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한 긴장들과 문제들 그리고 양자 사이의 가능한 긍정적 연 관들을 비판적-규범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나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 이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을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한 문화적 민족주의가 표현된 경우들로 이해하고 그 담론들에 대한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문제에 접근해 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은 다른 아시아 사회들에서처럼 인권 이념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은 인권 규범과 동아시아 전통의 긴장관계를 해소해 보려는 시도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담론들에서 여전히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대립 시키는 방식으로 우리 전통과 인권 이념의 긴장관계가 부당하게 강조되고 있다고 본다(II). 나는 앞으로 "인권의 개인주의"와 "인권의 공동체주의"의 상호전제적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그러한 긴장관계의 잘못된 지반을 제거하고(III), 우리의 문화 적 특수성에 바탕한 문화적 자기주장의 규범적 자기이해 자체가 인권 이념을 내 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담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 권 이념과 전통을 관계짓는 한 모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IV).
Ⅱ. "아시아적 가치"의 함정
확실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일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문화적 민족 주의" 담론들이나 전통담론들은 단순히 어떤 맹목적 복고주의나 완고하고 무반성 적인 민족주의 경향의 표출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일차적으로 문 제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리 고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하나의 삶의 단위를 함께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족"이, 단순히 역사와 언어와 인종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모듬살이에 관한 어떤 도덕적, 문화적 이해의 틀도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또 앞으로도 그 공유된 틀이 존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의 당위이기에 앞서 너무 도 자연스럽고 또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지적 유희의 문제 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의 같은 삶의 단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조직하고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절박한 실천적 문제와 결코 사소하지 않은 방식으로 얽혀있다. 이런 맥락에서, 좁게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만 보자면, 최근 다 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은 다름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대화 과정에서 추구된 인권과 민주주의와 같은 새로운 규범적 지향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적 문화유산, 생활양식, 가치지평 등이 그러한 지 향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명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대한 우리 사회 성원들의 얼마간의 공유된 문제의식의 표 현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3) 우리는 인권 이념의 철학적 이해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표출되는 이 "아시아적 가치" 담론의 세 가지 이론적 양식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우리는 전형적인 "아시아적 가치" 담론을 들 수 있다. "아시아적 가치"는 리콴유가 싱가포르의 비민주적 사회 및 정치 질서를 정당화하고 중국이나 말레이 시아의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자국내의 인권 유린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개념 이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의 보장에 초점을 둔 좁은 의미의 인권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더 우선한다는 식의 인권 이해를 대변하는 이 "아시아적 가치" 담 론은, 꼭 그 표현 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예컨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반대하 는 논의들에서나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 같은데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문화적 잔 재의 형태로 낯설지 않게 등장한다: 경제발전이나 다른 우선적인 국가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인권의 잠정적 유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도 이 허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아시아적 가치" 자체가 일방적으로 긍정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이론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경제위기 이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적 가치" 논의는 우리 사회 의 정의주의적 비합리성, 연고주의, 패거리주의, 권위주의 등과 같은 부정적 문화 유산과 그 경제적, 정치적 효과를 지적하는 차원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 나 우리는 이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아시아적 가치" 담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 응이 단순히 서구적 합리주의와 인권 이념의 보편성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방향 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다른 방식으 로이긴 하지만, 훨씬 적극적이고 철학적으로 넓은 의미의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 하는 논의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우선 염두에 두는 것은 함재봉 등의 이른바 "유교민주주의론"이다.4) 이 입장은 "아시아적 가치론"의 첫 번째 버전에서처럼 서구 계몽주의의 성 과나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념을 드러내 놓고 부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의 의미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은 훨씬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다: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발전시킨 가치관은 그와 같은 서구에서 발전된 것을 "넘어설 수 있는", 다시 말해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더 우월하기까지 한 인권 과 민주주의의 이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입 장은 서구적 "근대사상의 모순을 극복"하고 있는 우리의 유교적 전통5)을 토대로 "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제도들을 수용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6) 하는 정치적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자유"와 "발전"과 "평등"만 추구했던 서구 근대사상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와 질서", "자유와 도덕", "발전과 안정"을 동시에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상과 이상을 정립"7)하고자 하는 문화 적 목표도 내세운다. 여기서 우리 사회 성원들의 가치관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유교는 "민주주의의 타자"라기 보다는 더 발전된 형식의 민주주의 원리 그 자체의 새로운 구성원리다. 다음으로 우리는 "아시아적 가치"와 인권을 둘러싼 논의에서 더 철저하게 "문화 적 민족주의"를 옹호하면서도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드 러내는 입장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이승환은 "아시아적 가치" 담론 자체를 아예 서양이 동양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문화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 진 편견적 이미지들로 조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면서,8) "아시아적 가치" 라는 규정 자체의 서구중심성과 반전통성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에 따르면 그런 식의 서구-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아시아적 가치"와 같은 퇴행적이고 전근대적 인 가치들을 서구문화에 대해 방어적인 형태로 내세우는 일 또한 "감히 전통을 욕되게 하는"9) 일이다. 그러면서 이승환이 주창하는 것은 "전통을 전통답게 만드 는" 길, 다시 말해 우리 문화, 특히 유교에서 진보적 전통을 재발견하여 "이고격 금(以古格今)"을 이루어내자는 것이다.10) 우리 전통의 진정하고 참된 정체성적 특질들을 찾아 그로부터 우리 사회의 현재적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로 삼자는 것인데, 그러한 특질들 중에는 "권리"의 존중과 "정의"의 준수와 같은 인권 이념의 기초11)는 물론 그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덕과 공동선의 전통12)도 있다. 그에 게 전통, 특히 "유가"는 오늘날의 맥락에서도 말하자면 거의 자기완결적인 진보적 -정치철학적 원천이다. 그가 "아시아적 가치"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시아적 가치"라는 표현을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아마도 "진정 아시아적 가치론"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13) 우리는 함재봉의 입론이 말하자면 우파적으로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한다면 이 승환은 좌파적으로 "아시아적 가치"를 문제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런 논의들이 우리 전통을 강조하면서 인권 이념의 타 당성 자체를 의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승환의 경우 인권 옹호는 적극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교나 전통을 인권과 민주주 의의 문제와 관련시키는 철학적 방식이다. 예컨대 우리는 그 두 입장 모두에서 우리의 문화적 전통, 특히 유교를 문제 투성이의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나 아가 서구 문명 전반에 대한 대안적 원천으로까지 치켜세우는 논제들을 읽어낼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좌와 우 모두의 "아시아적 가 치" 담론의 참된 규범적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아시아적 가치"는 방어 적이라기보다는 공격적이고, 단순히 우리 문화의 특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적 대안의 문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런 유교적 대안들은 민주주의의 문제 에 대한 어떤 오해의 산물인 것 같다. "유교민주주의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유교"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종교, 계급, 인종, 지역간의 갈등을 긍정하거나 활용하지 않고 보다 공동체주의적이 고 민족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모색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함재봉의 유교민주주의론은 "한국사회의 도덕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통합력을 유지 시키면서 건설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그 핵심적 과제로 삼고 있다14). 아마도 이런 그의 입론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한 심각한 곡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우리가 갈등의 긍정 없이, 그리고 도덕적, 세계관적 다원주의의 인정 없이 인권과 민주주의 의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유교민주주의론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념을, 말로서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수행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만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유교 사회였으며 또 앞으로도 그런 유교적 도덕성의 규범적 이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는 민주적이고 반-보수주의적인 맥락에서 제기된 것처럼 보이는 "진정 아시아적 가치론"의 경우에도 문제설정은 마찬가지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승환이 예컨대 유가사상에서 "권리" 개념을 추적할 때 거기서 일단 정의나 인권의 이념은 그 자체로서는 바람직한 것, 심지어 적극적으 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인권과 민주 적 가치를 우리 전통과 관계 지우는 문제설정에서도 역시 무게중심은 전통에 실려 있다. 그가 유가전통에서 "법치"나 "권리"나 "인간의 존엄성"을 문제삼는 전통을 강조할 때, 정말 강조되고 있는 것은 과장된 전통의 의미15)이지, 그와 같은 민주 적 가치 그 자체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그의 그런 방식의 문제 설정에서는 왜 "우리"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념을 바람직하고 절실하게 추구해 야만 할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한 답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전통 자체 의 관점에서는 도출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전통의 아우라적 위 력을 강조하는 그의 접근법에서는 "바깥"에서 온 인권의 규범을 일차적으로 과거 에 중심을 둔 전통 "안"의 어떤 규범적 요소들과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논의가 이 루어지는데, 여기서는, 앞으로 내가 제시하려는 모델에서처럼, 전통 자체의 발전 의 새로운 형식이 바로 인권 규범이라는 인식이 얻어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 다16) 그의 논점은 오히려 어쨌든 인권은 서구의 것이고 그래서 그 자체로서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그 규범적 타당성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승환의 궁극적 지향점은 자유주의의 권리주장의 문화와 유가가 제공하는 덕과 공동체와 공동선의 문화를 동시에 상호보완적으로 추구하자는 것 이다.17)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의 논의구도에서 예컨대 그 두 지향이 서로 갈등 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득력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처 럼 보이지는 않는다.18) 이와 같은 식의 논의들에는 모두, 좌와 우의 방향 차이는 있지만, 서구에서 발 생한 "모더니티", 특히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정치적 모더니티"의 도덕적 진보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그것도 아주 공격적인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논의들에는 일단 "근대화 = 서구화"라는 도식이 자리잡는다. 이렇게 모더 니티를 서구적 발생 맥락에 가두어 놓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근대화를 경제 개 발, 물질적 풍요 등으로만 등치 시킨다. 그리고 "인권" 또는 "기본권"이라는 개인의 자유 보장을 위한 근대적 형식은 그러한 물질주의적 근대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수단 정도로 이해된다. 반면에 우리 전통, 특히 유교 전통은 그와 같은 서구적 근 대가 갖지 못했거나 오래 전에 잃어버려서 이제는 기껏해야 향수를 통해서만 만 날 수 있는 상호주관적인 공동체적 가치와 덕과 같은 요소들을 발전시켰으며, 따 라서 서구 모더니티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러나 "모더니티"라는 것은 다양한 요소들과 과정들의 중첩적 효과로서만 가능한 하나의 문화이다. 물론 근대화의 외형에는 "자본주의적 산업화"라고 하는 것이 자리잡고는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중세적인 도덕적 및 세계관적 질서로부 터 해방된 새로운 삶의 양식의 실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우리는 "모더니티"를 그 자체로 모듬살이 양식의 일정한 도덕적 진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왜곡되어 관철된 선택적 근대화과정에서처럼 "잘 살아보세"라는 가치를 삶의 최고의 가치로 삼는 속류 유물론적, 공리주의적 삶의 태도도 분명히 한 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밖에도 개 인의 자율의 이념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축도 함께 들어 있 다. 여기서 이 두 축의 연관은 단지 역사적이고 우연적일 뿐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정치적 모더니티의 핵심적인 이념들은 그 자체로서는 서구적 발생맥 락으로부터 충분히 분리시켜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함재봉과 이승환은 모두 서구 민주주의를 성격 규정하면서 단지 "소유 적 개인주의"에 바탕하는 로크 전통의 자유주의만을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다.19) 재미있게도, 함재봉과 이승환의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거의 대부분 예컨대 "얽매이지 않은 자아(unencumbered self)" 개념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공동체주의자 샌달(M. J. Sandel)의 자유주의 비판20)의 복사판이다: 맥락도 뿌리도 없는 추상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을 상정하는 자유주의적 자아관은 호혜와 헌신과 같은 가치를 통해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좋은 삶"의 관점을 부정하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유적 개인주의의 원자론적 자아관과 평등한 권리의 이념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필연 적 연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그 동안의 성과21) 는 아예 무시하고 있다: 개인의 권리의 규범적 우선성 ―그러나 "존재론적 우선 성"이 아니다!― 은 다름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권리의 전제 위에서만 공동체적으 로 확인되고 실현되는 "좋은 삶"도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왜 그들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서구 내부에서 일어난 공동체주의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그것도 지극히 선택적으로 반복하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동양 대 서양"의 구도로 "구성"하려는 것일까? 여기서 일단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그들 의 이런 문제인식이 의도적이라는 데 있다. 문제는 "유교"다. 다시 말해 유가사상 의 현재적 의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그 유가사상이 갖고 있는 공동체주의적 성격을 부각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서구의 민주주의를 그와 같은 "소유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 묶어두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단지 그럼으로써만 공동 체주의적 유가사상의 현재적 의의가 드러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식의 문제인식의 바탕에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 정이 조장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도덕적 정체성의 혼란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 다고 본다. 이승환의 논의를 빌자면, 우리는 이 근대화과정에서 예컨대 "개인주의의 출현, 전통과 권위에 대한 부정, 사익추구의 정당화, 자율과 자유, 그리고 자기 몫 주장 등"의 현상들이 두드러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새 로운 가치들〔이〕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하여 가치 관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22)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혼란은 중립적인 혼란이 아니다. 그 혼란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자리매김하는 도덕적 지평 자체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문제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모델에 따 라 이해된 근대적-물질주의적 가치들이 우리들이 교육받고 사회화되면서 체득한 전통적인 문화적, 도덕적 정체성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이 전통적이고 습관화된 문화적 정체성 이 해의 방어적 자기주장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함재봉의 단호한 선언: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은 기본권이 보장되는데 그치는 사회가 아니라 도덕 공동체다".23) 근대화의 성과는 인정하되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꾸어왔던 도덕성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판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라 할만하다. 나는 이런 식의 의도적인 문제설정이 단순히 한 두 이론가의 문제가 아니라24) 우리 시민사 회의 전통에 대한 불분명한 자기관계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자기오해를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판 동도서기론에서 문제되는 것은 근대화와 세계화의 필연성에 직면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기주장"이다. 우리사회는 그 동안 많은 부분에서 "주체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지체를 만회해야 한다는 방어적인 차원에서 근대화와 세계화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우 리는 경제발전이라는 수혜도 입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수많은 멸시와 모욕을 겪어 야만 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멸시와 모욕을 내면화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문화적 자기주장"은 일단 서구 자본주의의 "문화적 식민주의"에 의해 무시당하고 능멸 받았던 전통 고유의 삶의 양식과 세계에 대한 관계 양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전통의 문화적 자기주장은 "우리식"의, 우리만의 고유한 인간적 존재 양식이 무시 받고 "상처"를 입은 데 대한 저항의 표시다. 곧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 우리 문화가 서구에 대해 갖는 문화적 차이의 가치와 의미를 문화적 식민주의의 위협에 맞서 지켜내고 그 정당성을 확인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많은 "문화적 자기주장"들이 서구의 문화 적 식민주의에 대한 레쌍띠망Ressentiment(니체)적 반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25) "당신네 문화에만 좋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 라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있다"는 식의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그 "자기"를 고집하 고 "우리"를 내세우는 가운데, 사실은 그 "자기"와 "우리"를 왜곡하고 모욕하고 능멸했던 바로 그 논리에 매몰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 기"와 "타자", "우리"와 "남"을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과정에서 타자의 자율성을 존중 하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자신의 주체성도 건강한 방식으로 확인 받을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기주장은 "나르시시즘적 분노"의 표출 이상 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럴 경우 아마도 그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다름 아닌 서구 의 문화적 식민주의의 효과일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미성숙"26)이 야기한 함정일 것이다. 혹시 우리 사회의 "아시아적 가치"의 담론들도 바로 그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담론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념과 관련하여 전통을 부각시키는 논변은 전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미학적 논변이지 규범적 논변이 아니다. 그 담론 들의 정형화된 논변은 기본권에 초점을 둔 "개인주의"와 보살핌, 호혜, 공동선에 초점을 둔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의도적인 대립설정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런 논변은 첫째로 "인권의 개인주의"가 바탕하고 있는 공동체주의적 전제를 무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둘째로 "인권의 공동체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사회의 도덕적 구성양식의 규범적 지향이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점 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오도하고 있다.
Ⅲ. "인권의 개인주의"와 "인권의 공동체주의"
확실히 우리는 서구에서 인권 이념이 등장했던 역사적 상황의 우연성과 그 문 화적 맥락의 특수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의 이념은 일차적으로 "개인"이 그 담 지의 주체인 "주관적 권리(subjective rights)"로서 이해된다. 이 인권의 이념은 그 발생의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고 그럼으로써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원자적 개인을 상정하는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심지어 도덕적으로 경멸스럽기까지 한 문화적 배경과 결부되어 있었다. 또 예를 들어 "천부인권론"과 같은 인권 이념의 철학적 정당화도 특정한, "우리"에게는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서구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배경 위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신자유주 의의 강화와 함께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경제 팽창과 자본축적의 논리를 그러한 발생 맥락에서 이해된 인권 이념을 통해 정당화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 나 우리가 인권의 이념을 발생맥락에만 가두어 놓고 이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입장에서는) 서구적 근대의 우연성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며 (서구의 입 장에서는) 인권 이념의 타당성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권 이념의 타당성은 그러한 발생맥락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서구에서 발생한, 그러나 서구에서조차 아직도 완성 되지 않은 "정치적 모더니티"의 핵심적인 이념을 좀 더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정치적 모더니티"의 핵심적인 이념을, 예컨대 우리가 루소-칸트 전통에서 볼 수 있고 오늘날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나 하버마스의 "담론적 민주주의 개 념"에서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자율" 개념의 정치적 정식화를 통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개인의 자율의 이념 을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 이념을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 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일정한 규범과 규칙과 법적 구속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말고는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그러한 규범과 규칙과 법적 구속을 아무런 내적 동의 없이 외부에서 주어지고 강제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유의 제한과 억압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가 불가피하게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규범과 규칙과 법적 구속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그것들의 "저자"(루소)일 수 있다면,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그것들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 는 그 불가피한 사회적 관계를 자유의 관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회적 규범과 규칙의 제정 과정 및 입법의 과정에 함께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있거나 또 앞으로 이룰 "모든" 당사자들의 "평등"한 참 여가 가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는 그 당사자들 각각에게 자신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자신의 삶과 사회적 문제를 "자유"롭게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 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권리"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 또는 동일한 사회적 관계의 울타리 안에 살아가고 있거나 또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자유"의 보장과 실현이 라는 목적이고 그래서 단지 그러한 목적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규범과 규제와 법적 구속만이 정당하고 타당할 수 있다는 규범적 원칙이다. 모든 사람이, 그 성(性)과 인종과 이념과 빈부의 정도 등과는 무관하게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단지 사람이 라는 이유만으로 누리고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인권의 이념은 바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정치적 정의의 원칙의 최소한의 표현이다. 여기서 각 개인의 "주관적인 자의의 권리"는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공동체적 관 계에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선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권리의 보장 없이는 개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절차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권리는 그와 같은 정치적 자율의 이념을 실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필연적 전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전제는 또한 동시에 모 든 잠재적인 해당 당사자들의 보편적인 정치적 참여라는 목적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27). 그래서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초월적 신과 같은 것에 의해 부여되 는 것이거나 특정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양도불가능"하고 "불가침"한 것으로 선언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들이 상호간에 인정하는 어떤 것이다.28) 사회-존재론적으로는 그리고 "전(前)정치적으로는pre-political" 그들은 결코 "얽매이지 않은 자아"일 수 없으며 타인들과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깊은 관 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대화적 존재이고, 관계적 존재이 며, 상호주관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과정 속에서 누구 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주관적 판단과 선호에 따라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기획을 추구할 수 있는 "불가침의" 자유의 권리를 보장받은 법적 주체로서의 개인 들로서 서로를 인정한다. 이 "소극적" 자유는 그러니까 각 개인들의 "적극적" 자 유를 위한 소극적 전제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개인들로서 그들이 누리는 권리는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치공동체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정치 이후의 post-political" 권리이다. 물론 그 정치공동체는 일정한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권리의 담지자로 서의 각 개인이 단지 자신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자기 와 함께 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거나 또 앞으로 살아갈 모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똑 같이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데서 성립한다. 그들의 도덕적 제한은 이런 것이다: "네 의지의 준 칙이 또한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도 타당하도록 행위하라!"(칸트) 각 개인 의 욕구나 이해관계가 "보편적 의지"와 매개된다는 의미에서의 이 도덕적 제한의 강제가 의미하는 것은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인정, 상호존 중, 관용과 같은 의무다. 그러나 이 제한의 강제 밖에서는 각자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한 요청이 효율적으로, 그러니까 그 보편적 정의의 요청 에 대한 침해는 언제든지 물리적인 강제의 힘을 통해서라도 교정될 수 있게끔 사 회적으로 제재력을 갖추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적인) 법치"의 이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권의 공동체주의"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인권의 이념이 전제하는 이 "도덕공동체"의 이념은 유교적 도덕공동체의 그것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러니까 그 공동체는 "모든 성원들의 평등한 자유 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한 "권리의 공동체"이고 "법공동체"이지 특정한 "좋은 삶" 의 이념에 대한 공유된 이해에 바탕하는 "가치공동체"가 아니다. "권리/법 공동체" 가 인권과 같은 "최소한"의 "얇고" "소극적인" 공동체적 연대의 끈을 통해 유지된다 면, 유교적 도덕공동체와 같은 "가치공동체"는, 그 내적 논리에서 보면, 특정한 우 주론적 형이상학과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이해방식과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 헌 신을 그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에게 요구하는 "최대한"의 "두텁고" "적극적인" 결속 을 지향한다. 전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좋은 것", 곧 "옳음" 이고 후자의 경우 특정한 관점에서만 좋은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전 자의 "옳음"은 후자의 "좋음"에 대해 언제나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하며, 그런 한에서 전자는 후자에 비해 규범적 우월성을 지닌다.
Ⅳ. 인권의 보편성과 "우리"
적어도 이렇게 이해된 인권 이념은 결코 어떤 서구적 문화와 형이상학의 배경 위에서만 의미 있는 것일 수 없다. 내가 여기서 "정치적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특 정한 서구적 전통에 기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인권의 이념을 "탈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문화중립적으로 정초하려는 시도 그 자체이지 그들의 서구적 배경은 아니다. 나의 논점은 그 전통이 추구하는 규범적 지향이 "소유적 개인주의" 같은 것의 제국주의적-보편주의적 옹호와는 무관하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 인권의 이념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전제 위에서도 타당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권 이념의 타당성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제 인권의 보편성 논제에서 정말 무엇이 문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인권 의 보편성은 서구적 형이상학이 확보한, 그래서 단지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서만 설득력을 갖는 "이성"이라는 외적 권위에 의해 보장된 어떤 실체적 규범의 보편성이 아니다. 만약 인권의 보편타당성이 어떤 플라톤주의적인 "이성"에 의해 보장된 다고 주장된다면, 우리는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를 빌어 그러한 "이성"이 감추고 있는 특수주의적 가면을 고발하고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29) 그러나 인권의 보편성은 다름 아니라 그 보편주의적 지향 그 자체에 있다. 그러니까 인권의 이념에서 표현되고 있는 규범적 요청들은 바로 그 요청들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러니까 민주공동체를 함께 건설할 모든 잠재적인 해당 당사자들에 대해, 그리고 그래서 이제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그와 같은 민주공동체와 적어도 비슷한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무제약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규범적 지향 그 자체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이러한 "절차적" 보편성은 그러니까 "목적"의 보편성이고, 만약 어떤 이유로든 배제된 것이 있다면 그 배제를 자기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30)는 "범위" 의 보편성이다.31) 그렇다면 발생의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우리"가 이 인권의 이념을 자생적으로 명료화하고 사회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인권의 보편주의 자 체를 거부할 이유는 못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권 이념을 매개로 대 화를 갖자는 서구의 제안을 피하지 않기로 한 한에서 또 그럴 수도 없는 한에서, "우리"의 관점에서도 그 보편성을 검증하고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 해답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 인권 이념에서 표현되고 있 는 것은 어떤 서구적 형이상학이나 문화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데서 바로 "우리"를 포함시키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겠다는 목적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인권의 이름으로 서구를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 다는 철저한 개방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그와 같은 인권의 보편적인 타당성주장은 "우리"에게 아직은 소극적일 수 있다. 그러한 민주적 타당성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인권이라는 형태로는 한 번도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우리" 문화가 왜 그 인권을 적극적으로, 지고의 가치의 하나로서 추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답이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설사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그 보편적인 가치보다는 "우리"의 가치가 더 절실하고 더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사회는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심지어 이른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도 포함하여 ―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똑 같은 인간으로서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대내외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그와 같은 의무를 인권이라는, 우리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의 요구라는 차원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왜 그들이, 설사 불 법체류 노동자라 하더라도,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이해 자체가 우리 사회의 성원들에게 개인 적이고 공동체적인 수준에서의 삶의 양식 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 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과 모듬살이의 의미를 이해하는 지평과 배경으로서 작용하는 우리의 심층적인 도덕적 정체 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권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열정 적 헌신으로 추구되어야 할 가치로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권의 이념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발전한 사회적 교통양식에 친숙하게 자리잡 고 있지 못하며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세한 존중의 대상이 되고 있 지 못하다.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왜 인권이 우리의 일상문화에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자리 를 잡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 철학적 차원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 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절차적 보편성의 수용에 바탕하여 전세계적 수준에서의 이질적 문화들 사이의 인권 논의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거기서 그 "우리" 는 결코 말하자면 역사적, 문화적, 도덕적 진공 상태에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 니라는 사실이다. 월쩌의 표현을 빌리자면,32) 우리는 이미 특정한 "두터운" 도덕 적 맥락 속에 존재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도덕적으로 사회화된 존재로서 그러한 논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통", 그 중에서도 특히 "유교"는 "우리"에게는 결정적이고 불가피한 도덕적 원천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문화 상 호간의 대화에 참여할 때 무엇보다도 "유교"라는 압도적인 문화적 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설사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한 상태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문화적 틀 바깥에서는 인권 이념을 이해하고 실천할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인권 이념의 규범적 우월성에 설득 당하고 그래서 인권의 이념을 새로 이 배워나가겠다고 작정한다고 해도,33) 그때 우리는 일단은 기껏해야 예컨대 감정이입이나 추체험적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적 경험에 비추어 인권 이념의 보편성 과 타당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전통적 요소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서이겠지만, 우리는 예컨대 인권 이념에 표현된 "인간 의 존엄성"에 대한 사상을 우리 전통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하는 틀에 비추어 "저들도 우리와 비슷한 도덕적 경험을 갖고 있구나" 하는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reiterative"34) 확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권 이념의 보편성과 적실성을 확인 하고 우리 사회에 적용하고 실현하려 할 경우에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일단은 우 리의 문화와 전통에 비춘 우리 식의 인권 해석에 바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 권의 "엷음"은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도덕적 "두터움"의 체계가 형성될 수 있는 출발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도덕적 "두터움"의 바탕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엷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시아적 가치" 담론들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 문화의 도덕적 "두터움"이 인권적 규범에 대해 왜 제한적인 타당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지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도덕적 "두터움"은 인권과는 다른 중요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교"나 "전통"의 의미가 오도되거나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문 제는 "우리"의 가능한 문화적 자기주장들이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는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적 자기주장들이 예를 들어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문화 요소들이나 가부장적이고 반여성주의적인 전승요인들을 온존 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속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는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우리의 문화적 자기주장이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방어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그 문화적 자기주장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물론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 은 버리겠다"는 태도가 원칙적으로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와 같은 식의 취사선택이 전통의 경우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며 가능하더라도 결코 용 이한 일도 아니다. 나아가 그와 같은 취사선택의 기준도 모호하다. 여기에 바로 인권 이념의 비판적 준거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비판적 준거"가 단순히 "우리"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문화적 자기주장과 인권의 관계는 우연적 이고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이고 필연적이다. 우리의 문화적 자기주장은 그 자체가 인권의 이념을 함축한다. 우리의 문화적 자기주장은 그 동안 시장 논리 종속적인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무시받고 유린당하고 상처 입었던 우리 고유의 문화적, 도덕적 정체성의 회복과 그 인 정에 대한 요구가 표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화적 자기주장의 밑바탕에 는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한 긍정적 자기관계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는 "실천적 주체성"― 단순히 "문화적 주체성"이 아니라 ―의 확립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인권의 이념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인간적 존재 양식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상처입지 않도록 함으로써 모든 인간 존재자의 긍정적 자기관계의 가능조건을 확보하고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제도적 장치의 확립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름아니라 그와 같은 "우리"의 저항과 자기주장이 바로 인권 이념의 정당성과 절실한 타당성을 함께 주장하고 있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나아가 어떤 문화적 자기주장도 내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전통은 결코 순수하지도 단일하지도 않다. 전통 안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으며 또 그 요소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가능성들이 서로 긴장 하며 공존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이와 같은 전통 자체의 다원성과 그 해석학적 차원의 깊이와 다양성을 고려한다면, 누군가가 만약 어떤 것을 "우리의 전통"이라 고 하면서 문화적 통일성을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 나오기까지의 보편적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 바깥을 향해서나 내부적으로나 단수의 "우리"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다 양한 해석가능성들을 용인하고 고무하고 "중첩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게끔 해 주는 민주적 문화와 모든 문화 주체들의 평등한 자유와 참여의 보장이라는 전제 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을 부정하거나 주변으로 내모는 어떠한 문화 적 자기주장도 정당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문화적 자기주장은 특정한 권력관계나 문화적 헤게모니의 표현35)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권은 전통에 대한 모든 자기주장의 필연적인 규범적 자기전제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의 민족적 모듬살이 양식의 실천적인 내적 필연성이 인권의 사회적 실현과 제도화를 절실하게 요구하 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모든 사람 들의 평등한 자유"를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우리의 모듬살이 양식을 건설하고 재 조직하는 것이 문제라면, "우리"로서도 우리 모듬살이의 도덕적-정치적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인권의 정치"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아마도 지금 현재로서는 유 일한 선택지일 것이다.36)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러한 과제의 실현을 통해서만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실천적 주체성"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도덕적-정치적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낡은 봉건적 도덕 지 평이 우리의 처지로서는 불가피한 근대화의 압력 아래에서 이전과 같은 사회통합 적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지 단순히 "서구 개인주의"가 우리 사회의 유교적인 도덕적 통합을 제국주의적으로 침입하고 해체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한 마디로 옛 것은 죽었지만 새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 다는 데 있다. 비록 "우리" 문화의 자생적 발전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우리"로서도 일단 봉건적인 위계적 신분질서를 극복하고 이해관계와 가치관의 다원성을 인정 할 때에만 가능한 "근대화"의 노선을 쫓는 것이 불가피한 이상, 유교적 "도덕공동 체"는 더 이상 오늘날의 "도덕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인권의 "권리/법 공동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도덕적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그 동안의 야비하기까지 했던 선택적 근대화의 위세 때문에 인권의 도덕성이 아직도 문화적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 지 못했고 나아가 충분하게 정치적으로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인권 이념의 저 편에서 예컨대 "유교"를 통해 도덕공동체를 건 설함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모든 주장들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서구의 정치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유교"의 의미를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인 봉건적 발생 맥락에만 묶어 두겠다고 작정하기 때문에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도덕공동체"의 건설을 유교라는 특정한 형이상학과 세계관과 가치관에 맡기자는 제안의 반보편주의적, 특수주의적 성격을 거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유교"가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거나 그 자체로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교는 얼마든지 다양한 관점에서 현대화될 수 있을 것이고 오늘날의 맥락에서도 훌륭한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유교가 심지어 정치적으로도 단순한 폐해로서만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유교"가 몇 몇 한국판 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이 주장하듯 이 우리가 지금 건설해야 할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도덕적 기초로 삼기에는 부적 절하다는 것이지 "유교"가 그 자체로서 잘못되었다거나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다. "유교"나 "전통"의 정치적 의미는 다른 곳에서 찾아져야 한다. 인권의 이념은 세계 각 문화 단위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러한 문화적 정체성 주장의 보호와 문화적 차이의 포용을 전제로 한다. 인권은 한 문화 내적으로는 그 문화를 공유하고 있 는 성원들 사이의 도덕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상호작용의 역사적 자기반성의 의식 적, 제도적 표현이다. 따라서 인권이라는 "도덕적 최소"는 "전통" 또는 "문화적 두 꺼움"이라는 "도덕적 최대"의 바탕 위에서만 사회-역사적으로 관철되고 제도화될 수 있다37). 때문에 인권의 보편성은 미리부터 전제된 어떤 주어진 보편성일 수 없고, 다양한 문화적 차이들을 관통하는 문화간의 대화라는 매개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인되고 확대될 수 있는 보편성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적 차이와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는 인권의 보편성의 확인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인권 개념에는 그 보편성의 이념이 요구하는 보편주의와 그 발생과 실현과정의 역사적 우연성에서 생기는 특수주의가 서로 긴장하며 공존하고 있다.38) 아마도 이러한 긴장이 그 동안 부분적으로나마 인권의 이념이 비서구 사회에서 관철되는 데서 "문화적 차이"에 대해 "불의不義"를 감행하게 했으며 또 그래서 "문 화적 식민주의"에 대한 경계를 불러일으키게 했는지도 모른다. 인권의 이념이 서 구에서 최초로 발생하고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우연성이 과장되어 서구중 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또 때로는 제국주의적인 현실국제정치의 논리에 따라 예 컨대 헌팅턴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 대 비서구"의 문화주의적인 대립구도가 형성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담론들은 이론적으로 보면 바로 이와 같은 긴장의 동아시아적 문제인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권 이념의 그러한 "불의"조차도 그 보편성을 전제로 해서만 제대로 감지될 수 있다. 인권의 제국주의는 바로 인권 이념의 수행적 자기모순이기 때문 이다. 서구 자체 내부에서도 인권의 이념이 단지 제한적으로만 실현되고 있다거 나 서구가 인권의 이념을 비서구 사회와 문화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간섭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다거나 하는 현실의 왜곡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논점은 인권의 보편성은 끊임없는 자기검증의 내적 강제를 통해 바로 그 현실의 왜곡을 발견하고 고발하고 교정하는 비판적 잣대로서 사용될 수 있는 그러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39). 그래서 나는 우리가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인권의 보편성 의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보편성의 이념이 불가피하게 불의를 행사하지 않고는 비서구 사회들에서 관철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는 사정이며, 만약 인권 이념의 발전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부여된 적극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가 그러한 불의에 대한 민감성을 바탕으로 인권의 이념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주 의와 특수주의 사이의 긴장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규범적 지평 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어설프게 인권의 규범적 지평을 넘어서려 하기보다는 인 권 논의에서 "문화적 차이"에 적절한 자리매김을 해줌으로써만 가능하다. 세계화 의 과정은 또한 문화적 통합의 과정이다. 만약 이 불가피한 문화적 통합의 과정 이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시장만 개방된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레쎄 페 어 문화다원주의"의 방향으로 향한다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시장 논리의 바 깥에서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설자리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 한 과정이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공동의 문제해결을 위한 포괄적 연대의 이념으로 발전하여 각 문화 단위들이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문화적 차이가 일종의 지구적 차원에서의 "협업"과 "공동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결 코 고정되고 확정될 수 없는 성격의 ―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추구하는 방향으 로 향한다면, 문화적 정체성의 자기주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강하면 강할 수록 바람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의 전통이나 유교가 "인권의 정 치"와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정치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권은 각 문화 단위들이 그와 같은 "선의의 경쟁"에 참가할 수 있기 위한 최소한의 소극 적인 규범적 전제로서(그러나 또한 적극적 제약으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 다. 그것은 인권을 향한 규범적 지향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요구 자체를 대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떠한 전통의 문화적 자기주장도 인권이라는 규범적 경계 아 래에서는 아무런 정당성도 획득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각주
1) 참고: 장은주, [전통의 도덕적 메타모포시스 ― 한국 시민사회의 "문화적 민족주의"에 대한 규범적 반성 ―], 수록: {철학논구}, 제27집, 1999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2)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개괄과 비판에 대해서는 참조: 백원담, [왜 동아시아 인가?], 수록: {실천문학}, 1999년 겨울호. 여기서 그는 "창작과 비평" 계열을 포함한 문 학계의 논의, 우리도 앞으로 제한된 시각에서나마 살펴보게 될 함재봉, 이승환의 논의 등을 이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범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컨대 김용옥 의 "노자와 21세기"나 김지하의 "율려운동" 등도 이 범주로 묶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이삼열([아시아적 가치는 있는가?: 문제의 상황과 논점], 수록: {철학연구} 제44집, 1999년 봄)도 다양한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논쟁들이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수 천년 동안 기르며 다듬어왔던 유교적인 가치관이나 윤리의식, 혹은 전통사상이나 가치 관에 대하여 새롭게 정체성을 찾고 음미하기 위한 반추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3쪽)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4) 함재봉, [아시아적 가치와 민주주의: 유교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수록: {철 학연구}, 제44집, 1999년 봄; 같은 저자, {탈근대와 유교: 한국정치담론의 모색}, 특히 제 2 부, 나남출판, 1998; 같은 저자 편저, {유교민주주의. 왜 & 어떻게}, 전통과 현대, 2000. 5) 함재봉(1988), 258쪽. 6) 함재봉(1999), 33쪽. 7) 함재봉(1998), 275쪽. 8) 이승환, ["아시아적 가치"의 담론학적 분석], {열린 지성} 제4호, 1998 가을 (이하 1998a). 9) 이승환, [누가 감히 전통을 욕되게 하는가], 수록: {전통과 현대}, 1997년 여 름 창간호. 10) 참고: 같은 글, 196쪽. 11) 참고: 이승환, [유가에 "권리" 개념이 있었는가?], 수록: 같은 저자, {유가사상 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8(이하 1998b). 12) 특히 참조: 이승환, [유가는 "자유주의"와 양립가능한가?], 수록: 위의 책(이 하 1998c). 13)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는 송영배([세계화 시대의 유교적 윤리관의 의미], 수 록: {철학} 제62집, 2000년 봄호.)에게서도 비슷한 동기를 읽을 수 있다. 14) 참고: 함재봉(1999), 32쪽. 15) 김혜숙은 이승환 식의 유교적 권리 논의(1988b)에 대해 그러한 논의가 침소 봉대(針小棒大)의 성격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예컨대 이승환이 유교 사회에서의 권 력남용을 막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근거로 정의와 권리의 존중의 전통을 지적하는 것은 커다란 무리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치는 전제 군주 체제 하나 독재체 제 하에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의 헌법이 명 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 평등권은 우리의 전통 안에서는 새로운 것으로서 우리 의 삶 안에서 그 함의와 실천을 배워나가야 하는 종류의 것"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참고: 김혜숙, [아시아적 가치와 여성주의 - 책임의 도덕과 권리의 정치학 -], 수록: {철학연구}, 제44집, 1999년 봄, 70-71쪽. 인용은 모두 71쪽. 16) 우리 전통 안의 민주적 전통에 주목하고, 나아가 그러한 우리의 민주적 전통 을 최근 예컨대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형식으로 표출된 서구 자체에서의 인권 이해의 일정한 난맥상을 치유할 대안으로까지 발전시키자고 제안하는 한상진의 논의(한 상진, [인권논의에서 왜 동아시아가 중요한가?], 수록:{계간 사상}, 1996년, 겨울호)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그는 "인권논의에서 동아시 아가 왜 중요한가?"를 묻고 있지 "동아시아 논의에서 왜 인권이 중요한가?"를 묻고 있지 않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입장이 전통과 인권의 이념을 관련시킬 때, 인권은 단지 전 통 바깥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17) 특히 참조: 이승환(1998c). 18)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송영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유교적 윤리관의 현대적 의미를 제대로 실현시켜내기 위해서라도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투명한 민주주의적 제도가 실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공론"의 사회적 제도적 보장이 밑받침되지 않는 "온정주의적인 (paternalistic)" 공동체주의는 언제나 "패거리주의(cronyism)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송영배 2000, 29쪽). 그러나 그는 유교주의적 공동체주의가 민주주의의 원리 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성을 진행시키지 않는 듯하다. 19) 함재봉에게 자유주의는 "개인의 기본적인 이해관계와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가족과 국가 등 모든 제도를 도구화시키는 사상"([아시아적 가치와 민주주의], 위의 글, 33쪽)이고, 이승환도 예컨대 "인간을 개체적이고 독립적으로 보는 자유주의 윤리체계 안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만의 이익과 관심을 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유기는 "자유주의"와 양립가능한가?], 수록: 위의 책, 245쪽)는 식으로 자유주의를 파악한다. 송 영배의 논의도 마찬가지다. 20) M. J. Sand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1982 21)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참조: R. Forst, Kontexte der Gerechtigkeit, 1994, Frankfurt/M., 특히 제 1 장; 황경식.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수록: 차인석 외 지음, {사회철학대계 2}, 민음사. 22) 이승환(1998c), 252쪽. 23) 함재봉(1999), 33쪽. 24) 예컨대 김용옥은 "노자와 21세기"라는 한 TV 강의에서 "서양의 자유와 평 등의 사상은 죽음의 사상"이라고 선언했다. 25) 참고: 장은주(1999). 특히 52-59쪽. 26) I.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 rung?", 수록: 같은 저자, Schriften zur Anthropologie, Geschichtsphilosophie, Politik und P dagogik 1, Werkausgabe Band XI, Frankfurt/M., 1968, 53쪽. 27) 하버마스는 이러한 연관을 "사적 자율과 공적 자율의 동근원성"이라고 표현한다. 참 고: J. Habermas, Fatizit t und Geltung. Beitr ge zur Diskurstheorie des Rechts und des demokratischen Rechtsstaats. 특히 제 3 장. 28) 참고: G. Lohmann, "Menschenrechte zwischen Moral und Recht", 수록: Stefan Gosephath/ GeorgLohmann (Hg.), Philosophie der Menschenrechte, 1998, Frankfurt/M. 86쪽 아래. 29) 함재봉(1998)은 전체적으로 바로 이 사유노선에 서 있다. 30) 참고: J. Habermas, Einbeziehung des Anderen, 1996, Frankfurt/M. 31) John Rawls, "The Law of Peoples", in: Stephan Shute/ Susan Hurley (Ed.), On Human Rights, New York: Basic Books, 1993, 특히 43-47쪽 참조. 32) 참고: M. Walzer, Thick and Thin, Moral Argument at Home and Abroad, 1994,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London; 마이클 월쩌, [보편성의 경험에 대한 간략한 고찰], 수록: {유네스코 포럼}, 제9호, 1999 여름. 33) 위의 각주 15에서 김혜숙의 논의 참조. 34) 참고: M. Walzer, "Two Kinds of Universalism", 수록: Peterson, G. B. (Hg.), The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 XI, 1990, 제 1 부. 35) 참고: S. M. Okin, "Konflikte zwischen Grundrechten. Frauenrechte und die Probleme religi ser und kultureller Unterschiede", 수록: Stefan Gosepath/ Georg Lohmann(Hg.)(1998). 36) 그러나 이런 논점은 서구에서 논의되는 "인권의 철학"에서는 너무 약하게 포 착되고 있다. 롤즈(1993)는 인권 이념의 보편성을 증명하기 위해 인권 이념이 심지어 "비자유주의적 사회", 다시 말해 불충분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타당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는데, 이런 관점은 "개인의 자율"이라는 핵심적인 인권의 이념이 단순히 서구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삶의 양식의 필연적인 내적-민주적 발전 의 산물일 수도 있음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서구중심적이다. 그에게는 무엇보 다도 "인권"이 "민주주의"와 필연적, 개념적 연관을 가진다는 점이 너무 약하게 포착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동근원성"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하버마스적 관점이 우리에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아시아적 가치"를 직접 다루면서(J. Habermas, "Zur Legitimation durch Menschenrechte", 수록: Hauke Brunkhorst und Peter Niesen (Hg.), Das Recht der Republik, 1999, Frankfurt/M.), 아 시아 사회들이 무엇보다도 경제적 발전의 내적 요구 때문에라도 인권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의 이론 전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능주의적인" 인권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데, 나는 하버마스의 이런 관점도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 를 호도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기능주의적" 논변은 그 자체로는 인권의 규 범적 타당성과 선차성을 확보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37) "도덕적 최소"와 "도덕적 최대"라는 표현은 왈쩌의 것이다. 참고: M. Walzer(1994). 38) 참조: A. Wellmer, "Menschenrechte und Demokratie", 수록: Stefan Gosepath/Georg Lohmann (Hg.)(1999). 39) 그러나 예컨대 이승환의 입장에서 보면, 서구, 특히 미국의 "인권외교"는 단순히 "자 국이기주의와 전지구적 헤게모니의 장악이라는 야심"을 숨긴 "정의로운 훈수"에 불과하 다(이승환1998a,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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