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당시 유행한 정형화된 관념 산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정착되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등장하는 기괴한 산세나 안개 낀 경관이 바로 관념적인 풍경이다.
겸재는 중국의 그림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이 땅의 주요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우리 산천의 체형과 표정을 그렸다.
소재를 사실적으로 그리되 단순화하거나 강조하며 화면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진경산수화는 그렇게 태어났다.
남종 문인화가 화단의 대세였던 당시에 진경산수화는 상당히 전위적인 그림이었다.
대부분의 화가가 뜻을 중시하던 '사의적'인 남종 문인화를 진짜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겸재는 실경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왕제색도'에는 두 가지 시점이 섞여 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과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고원법'이 그것이다.
먼저 화면 중앙의 안개와 기와집을 중심으로 한 경관은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하다.
반면에 웅장한 인왕산은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느낌을 준다.
이런 시점의 혼용은 자칫 혼란스러운 광경을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겸재는 전경과 원경 사이에 안개를 배치한다.
자연스럽게 전경과 후경의 두 시점이 섞인다. 산중턱에 걸린 안개의 효과다.
이런 시점의 혼합은 서양미술에서,
여러 시점을 한 화폭에 공존시킨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 결과, 그림은 실제 인왕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파격의 미도 주목할 만하다.
겸재는 인왕산의 웅장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산 정상부분을 과감하게 자른다.
절단함으로써 오히려 산이 클로즈업된 것처럼 꽉 찬 느낌을 준다.
우정 어린 기와집의 정체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른쪽 아래 기와집이다.
미술사가들이 고증한 결과,
이 집은 절친한 벗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취헌록'으로 밝혀졌다.
사천은 1만3000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였다.
당시 사천은 병환 중이었다. 겸재는 그런 벗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그때 76세였던 겸재와 그보다 5세 연상인 사천은 서로 형제 같은 사이였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스승에게 수학하고,
무려 60여 년의 세월을 시와 그림으로 사귄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겸재는 그런 사천이 비 개인 후의 인왕산처럼 당당하게 쾌차하길 비는 마음으로
그림에 혼신을 다했다. 집 주변에는 건강한 소나무를 배치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했다.
이 그림이 완성된 4일 후, 사천은 세상을 등지고 만다.
기와집의 선묘가 유난히 담백하다.
벗의 고결한 인품을 몇 개의 선묘로 명료하게 표현한 것 같다. 기와집은 이병연이다.
그림의 탄생기를 접하고 보면, 기와집에 더욱 눈길이 가게 된다.
병환 중인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 그림을 낳았다.
벗의 기와집이 있고, 그 위로 물기 머금은 인왕산이 싱싱한 자태로 솟아 있다.
그림은 마음이다. 실경으로 화가의 깊은 내면을 드러낸다.
겸재의 마음으로 그림을 보자.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붓질이 없다.
피보다 진한 우정에 그림이 더욱 애틋해진다.
- (주)아트북스 대표,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