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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고구려(高句麗)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
≪국사(國史)≫ 「고려본기」註 373373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를 가리킨다.닫기에 이른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註 374374 서울대규장각본에는 言으로 되어 있다.닫기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처음에 북부여왕註 375375 ≪동국이상국집≫ 권3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부여왕(夫餘王)”,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부여왕(扶餘王)”이라 되어 있다.닫기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왕은 태백산註 376376 백두산을 가리킨다.닫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柳花)註 377377 주몽의 어머니로, 그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의 자료에서만 전하고 ≪위서(魏書)≫ 등의 중국측 기록이나 광개토왕릉비에는 다만 ‘하백녀(河伯女)’로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동명성왕 14년 8월에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왕이 그를 태후(太后)의 예로 장사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고 한다.닫기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던 중 때마침 한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熊神山)註 378378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와 「동명왕편」에서는 “웅심산(熊心山)”이라 하였다.닫기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사통(私通)하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단군기(檀君記)≫註 379379 ≪제왕운기≫ 에서는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과 비서갑하백(非西岬河伯) 사이에서 부루(夫婁)를 낳았다고 하여 ≪삼국유사≫에 인용된 단군기와 동일한 인물 계보 인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는 같은 실체의 자료명이라 볼 수 있다(이강래, ≪삼국사기전거론≫, 1996, 193쪽).닫기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외간남자를 따랐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註 373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를 가리킨다.
註 374
서울대규장각본에는 言으로 되어 있다.
註 375
≪동국이상국집≫ 권3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부여왕(夫餘王)”,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부여왕(扶餘王)”이라 되어 있다.
註 376
백두산을 가리킨다.
註 377
주몽의 어머니로, 그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의 자료에서만 전하고 ≪위서(魏書)≫ 등의 중국측 기록이나 광개토왕릉비에는 다만 ‘하백녀(河伯女)’로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동명성왕 14년 8월에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왕이 그를 태후(太后)의 예로 장사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고 한다.
註 378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와 「동명왕편」에서는 “웅심산(熊心山)”이라 하였다.
註 379
≪제왕운기≫ 에서는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과 비서갑하백(非西岬河伯) 사이에서 부루(夫婁)를 낳았다고 하여 ≪삼국유사≫에 인용된 단군기와 동일한 인물 계보 인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는 같은 실체의 자료명이라 볼 수 있다(이강래, ≪삼국사기전거론≫, 1996, 193쪽).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왕위계승>계위
사회>의례>관혼상제>혼인
이름 : 동명성제,주몽,해부루,부루,금와,하백,유화,해모수,하백,부루,해모수,하백,주몽,부루,부루,주몽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고구려(高句麗) >이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다
이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끌어 이를 피하였으나 햇빛은 또 쫓아와 비추곤 하였다. 그리하여 잉태하여 알 한 개를 낳으니 크기가 다섯 되(五升) 정도는 되었다. 왕이 이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이것을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갔다. 이것을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려 하여도 깨뜨릴 수가 없어 그만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것을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서 나왔는데 골격이나 외양이 영특하고 신기롭게 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뛰어나게 숙성하여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1백 번 쏘면 1백 번 맞혔다. 이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
정치>왕실>국왕>신상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정치>왕실>왕족>왕모후·왕태후·왕대비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고구려(高句麗) >금와가 아들 일곱이 있어 언제나 주몽과 함께 노는데 재주가 뛰어나다
금와가 아들 일곱이 있어 언제나 주몽과 함께 노는데 재주가 뛰어나다
금와가 아들 일곱이 있어 언제나 주몽과 함께 노는데 재주가 그를 따를 수 없었다. 맏아들 대소註 380380 동부여 금와왕의 맏아들로, 금와가 죽자 왕이 되었다. 그는 고구려에 적대적이어서, 유리왕 14년 고구려에 교질(交質)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하여 5만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갔다가 폭설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4년). 또 유리왕 28년 8월에는 대소가 사신을 보내 작은 나라(고구려)가 큰 나라(부여)를 섬기지 않는다 하여 꾸짖었는데, 고구려 왕자 무휼(無恤)에게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림만 같지 못하다고 설파당하기도 하였다. 대소는 대무신왕 5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참수당해 죽었다(≪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닫기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매 만일 빨리 처치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먹이게 하였다. 주몽은 그 중에 날쌘 놈을 알아서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도록 만들고 굼뜬 놈은 잘 먹여서 살이 찌도록 하였다. 왕은 살찐 놈을 자신이 타고 여윈 놈을 [주]몽에게 주었다. 여러 왕자들과 여러 신하들이 장차 그를 해치려고 도모하는 것을 [주]몽(蒙)의 어머니가 알고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국인(國人)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너 같은 재주를 가지고 어디로 간들 못 살 것인가?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註 380
동부여 금와왕의 맏아들로, 금와가 죽자 왕이 되었다. 그는 고구려에 적대적이어서, 유리왕 14년 고구려에 교질(交質)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하여 5만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갔다가 폭설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4년). 또 유리왕 28년 8월에는 대소가 사신을 보내 작은 나라(고구려)가 큰 나라(부여)를 섬기지 않는다 하여 꾸짖었는데, 고구려 왕자 무휼(無恤)에게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림만 같지 못하다고 설파당하기도 하였다. 대소는 대무신왕 5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참수당해 죽었다(≪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신이>생물>동물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고구려(高句麗)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씨로 성을 삼다(37년 (음))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씨로 성을 삼다 ( 37년 (음) )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註 381381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와 「동명왕편」에는 “오이·마리·협부 등 세 사람(烏伊摩離陜父等三人)”이라고 하였다.닫기과 동무가 되어 엄수(淹水) 지금은 어딘지 자세하지 않다.까지 와서 물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오늘 도망을 가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고기와 자라들이 나와 다리가 되어 물을 건너게 하고 나서 다리는 풀려 버려, 추격하던 말 탄 자들은 물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졸본주현토군의 지역이다.까지 와서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하였다.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어 그저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따라서 고씨로 성을 삼으니 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이제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여 자신이 높을 고자로 성을 삼았다. 당시의 나이가 열두 살이요註 38238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22세로 되어 있다.닫기,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註 383383 전한 원제의 연호로 기원전 38~기원전 3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고 왕으로 일컬었다. 고[구]려의 전성시대에는 210,508호였다.
註 381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와 「동명왕편」에는 “오이·마리·협부 등 세 사람(烏伊摩離陜父等三人)”이라고 하였다.
註 38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22세로 되어 있다.
註 383
전한 원제의 연호로 기원전 38~기원전 34년에 사용하였다.
사회>의례>신앙>무격신앙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고구려(高句麗)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로 부여왕이라고 하다
졸본부여는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로 부여왕이라고 하다
≪주림전(珠琳傳)≫註 384384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을 가리킨다. 불교와 관련된 서책으로 총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닫기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註 384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을 가리킨다. 불교와 관련된 서책으로 총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이름 : 영품리왕
서명 : 주림전
국명 : 부여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변한(卞韓) 백제(百濟) >변한 사람이 항복하다(39년 (음))
변한 사람이 항복하다 ( 39년 (음) )
변한(卞韓) 백제(百濟)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하니 곧 사비성(泗泚城)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19년 임오(壬午)에 변한 사람이 나라를 바치면서 항복해 왔다. 註 385385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중엽까지 변한 12국이 존속해 있었다고 하므로 혁거세 19년(서기전 39)에 변한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고 한 이 기사와는 서로 모순된다. 이에 대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있던 변한 소국(小國)들이 실제로 항복해 온 것이 아니라 진한의 부용(附庸)하기 시작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천관우, 「삼한고-1부 삼한의 성립과정」,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182쪽) 혹은 변한 12소국 중의 한 나라가 사로국에 투항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3쪽).닫기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에 이르기를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땅에서 살았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致遠)은 이르기를 “변한은 백제이다.”라고 하였다.
≪본기(本紀)≫를 보면 온조(溫祚)註 386386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닫기가 일어난 것은 홍가(鴻嘉)註 387387 한(漢) 성제(成帝)의 연호로 기원전 20년~기원전 17년에 사용하였다.닫기 4년 갑진(甲辰)(17년)이라 하였은즉 혁거세나 동명보다도 40여 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당서(唐書)≫에서는 이르기를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살았다.”라고 한 것은 온조의 계통이 동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아마 낙랑 땅에서 어떤 인물이 나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함께 대치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요, 그 도읍한 데가 낙랑 북쪽에 있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구룡산(九龍山)註 388388 현재 평양 동북쪽에 있는 지금의 대성산을 가리킨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 산천조)닫기을 또 함부로 변나산(卞那山)이라 한 때문에 고구려를 변한(卞韓)이라 하는데 대체로 잘못이다. 마땅히 옛날 어른(古賢)註 389389 여기서는 최치원을 이른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변한백제조와 진한조에서 변한이 백제와 연결되고, 진한이 신라와 연결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일연은 삼한→삼국으로의 계승관계에 있어서는 최치원의 삼한관을 누차에 걸쳐 인용하고 있다.닫기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백제 땅에는 원래 변산(卞山)註 39039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4 부안현 산천조에 그 명칭이 보인다. 변한이라는 명칭의 연원을 ‘변산’에서 구하는 것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마한조에서 마한의 이름을 ‘마읍산(馬邑山)’에서 구하는 것과 같은 이해로 볼 수 있다.닫기이 있었으므로 변한이라 한 것이니 백제 전성시대에는 호수가 152,300호였다.
註 385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중엽까지 변한 12국이 존속해 있었다고 하므로 혁거세 19년(서기전 39)에 변한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고 한 이 기사와는 서로 모순된다. 이에 대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있던 변한 소국(小國)들이 실제로 항복해 온 것이 아니라 진한의 부용(附庸)하기 시작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천관우, 「삼한고-1부 삼한의 성립과정」,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182쪽) 혹은 변한 12소국 중의 한 나라가 사로국에 투항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3쪽).
註 386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註 387
한(漢) 성제(成帝)의 연호로 기원전 20년~기원전 17년에 사용하였다.
註 388
현재 평양 동북쪽에 있는 지금의 대성산을 가리킨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 산천조)
註 389
여기서는 최치원을 이른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변한백제조와 진한조에서 변한이 백제와 연결되고, 진한이 신라와 연결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일연은 삼한→삼국으로의 계승관계에 있어서는 최치원의 삼한관을 누차에 걸쳐 인용하고 있다.
註 39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4 부안현 산천조에 그 명칭이 보인다. 변한이라는 명칭의 연원을 ‘변산’에서 구하는 것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마한조에서 마한의 이름을 ‘마읍산(馬邑山)’에서 구하는 것과 같은 이해로 볼 수 있다.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왕실>국왕>신상
이름 : 혁거세,치원,온조,혁거세,동명,온조,동명,온조
국명 : 변한,백제,변한,변한,변한,마한,진한,변한,백제,변한,변한,마한,변한,백제,변한,백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진한(辰韓) >진한은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 나라를 일컫다
진한은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 나라를 일컫다
진한(辰韓)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耆老)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 망명자들이 한국으로 오매 마한이 동쪽 지역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으로 이름했다.’고도 하며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써 나라를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또 최치원註 391391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伽倻山)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닫기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탁수(涿水)註 392392 연(燕)에 있던 강 이름으로 현재 거마하(拒馬河)를 이른다. 중국 하북성 탁록현 탁록산에 근원을 두며, 하류에 이르면 협하(俠河)가 된다.닫기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沙涿)註 393393 사로 6촌의 하나로 사량부(沙梁部)이다.닫기·점탁(漸涿)註 394394 사로 6촌의 하나로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이다.닫기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
註 391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伽倻山)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註 392
연(燕)에 있던 강 이름으로 현재 거마하(拒馬河)를 이른다. 중국 하북성 탁록현 탁록산에 근원을 두며, 하류에 이르면 협하(俠河)가 된다.
註 393
사로 6촌의 하나로 사량부(沙梁部)이다.
註 394
사로 6촌의 하나로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이다.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이름 : 최치원
서명 : 후한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진한(辰韓)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호수가 178,936호에 1,360방, 55리, 35금입택이다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호수가 178,936호에 1,360방, 55리, 35금입택이다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註 395395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李丙燾,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702~703쪽).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역에 대한 지리적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2).닫기에 1,360방(坊)註 396396 ≪삼국유사≫ 권5 피은 염불사(念佛師)조에는 360방 17만 호라고 하여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닫기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註 397397 실제로는 39개의 금입택이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닫기부잣집 큰 저택을 말함이다.이 있었으니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亏比所宅)·본피택(本披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 본피부·재매정택(財買井宅)註 398398 현재 경북 경주시 교동 91번지에 재매정(財買井, 사적 246호)의 우물터가 남아 있어 이 우물 일대가 김유신(金庾信)의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닫기김유신(庾信)공의 조상집(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 반향사(反香寺)하방(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 반향사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 양부의 남쪽·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 법류사 남쪽·판적택(板積宅) 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별교택(別敎宅) 개천 북쪽·아남택(衙南宅)·김양종택(金楊宗宅)註 399399 김양종은 헌덕왕 2~3년경에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한 인물로(≪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조)과 동일인으로, 김양종택은 그를 시조나 중시조로 하는 가문의 택호(宅號)로 볼 수 있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185쪽).닫기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 개천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亏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 청룡(靑龍)이란 절(寺) 동쪽이니, 못이 있다.·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 본피부·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다.
註 395
‘17만 호’에 대해서는 이를 호구수로 보고 5(명)을 곱하면 85만여 명이 되는데 경주의 면적을 감안하면 이 인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호구수로 보지 않고 인구수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李丙燾,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702~703쪽). 그러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서 백제 멸망 당시 인구가 620만이라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의 인구를 85만명 정도로 추측하는 것이 결코 타당성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기봉,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역에 대한 지리적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02).
註 396
≪삼국유사≫ 권5 피은 염불사(念佛師)조에는 360방 17만 호라고 하여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註 397
실제로는 39개의 금입택이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부명(部名)을 갖는 양택(梁宅), 사량택(沙梁宅), 본피택(本彼宅), 한기택(漢岐宅) 등 4개의 금입택은 왕실의 이궁(離宮)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註 398
현재 경북 경주시 교동 91번지에 재매정(財買井, 사적 246호)의 우물터가 남아 있어 이 우물 일대가 김유신(金庾信)의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註 399
김양종은 헌덕왕 2~3년경에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한 인물로(≪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헌덕왕조)과 동일인으로, 김양종택은 그를 시조나 중시조로 하는 가문의 택호(宅號)로 볼 수 있다(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진단학보≫ 45, 1978, 185쪽).
정치>행정>군현>都·道사회>사회조직>신분>주택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은 구지택, 겨울은 가이택이다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은 구지택, 겨울은 가이택이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東野宅)이요,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이요, 가을은 구지택(仇知宅)이요, 겨울은 가이택(加伊宅)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있어서 노래와 풍류소리가 길에 가득 차 밤낮 그치지 않았다.
사회>사회조직>신분>주택
이름 : 헌강대왕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32년 (음))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 32년 (음) )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註 400400 사로국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을 이른다. 본 기사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따르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육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육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上·下) ≪역사학보≫ 1·2, 1952)와 경주시와 월성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82, 22~23), 그리고 경주 내지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976, 599~603| 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5~12쪽|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김정배,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322~329) 등이 있다.닫기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註 401401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6쪽).닫기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瓢嵓峰)註 402402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이 탄강한 곳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닫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의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여 처음에 형산(兄山)註 40340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산천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였고 중사(中祀)를 지냈던 곳으로 안강현 동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上, 塙書房, 1975, 420~421쪽).닫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양을 도로 읽고 혹은 탁으로 쓰니 음은 역시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南山部)라 하니 구량벌(仇良伐)註 404404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해당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쪽).닫기·마등오(麻等烏)註 405405 경주 남산의 남쪽에 있는 고위산 기슭의 천룡사(天龍寺)와 접한 땅이었던 듯하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쪽).닫기·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일러서라고 말한 것은 태조가 설치함을 말함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3은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俱) 구를 仇로도 쓴다.례마(禮馬)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漸梁) 양(梁)을 탁(涿)으로도 쓴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賓之 또는 賓子·氷之라고도 한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智伯虎)라 하여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니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皇龍寺)註 406406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닫기 남쪽과 미탄사(味呑寺)註 407407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서쪽에 있던 사찰이다. 현재 3층 석탑을 복원한 사지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9쪽)닫기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侯)註 408408 최치원을 말한다.닫기의 옛 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里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註 409409 경상북도 경주 동천리에 있는 절로, 528년(법흥왕 15)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817년(헌덕왕 9)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1377년(고려 우왕 3) 서루(西樓)를 중건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재건한 것이며 이 절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국보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손성우 편저, ≪한국지명사전≫, 경인문화사, 1973).닫기북쪽 산이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祗沱) 只他라고도 쓴다.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明活山)註 410410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닫기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上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虎珍)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註 411411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닫기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니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彌村)·궐곡(闕谷)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註 400
사로국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을 이른다. 본 기사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따르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육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 육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김철준,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上·下) ≪역사학보≫ 1·2, 1952)와 경주시와 월성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82, 22~23), 그리고 경주 내지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이병도, 「신라의 기원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976, 599~603| 김원룡, 「사로육촌과 경주고분」, ≪역사학보≫ 70, 1976, 5~12쪽|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194쪽| 김정배,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322~329) 등이 있다.
註 401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의 남쪽에 위치했던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6쪽).
註 402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이 탄강한 곳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박씨를 심어 이 바위를 덮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註 40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산천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였고 중사(中祀)를 지냈던 곳으로 안강현 동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은 경주 북방의 고허촌과는 방향이 맞지 않으므로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선도산을 형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上, 塙書房, 1975, 420~421쪽).
註 404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 해당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쪽).
註 405
경주 남산의 남쪽에 있는 고위산 기슭의 천룡사(天龍寺)와 접한 땅이었던 듯하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쪽).
註 406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
註 407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狼山) 서쪽에 있던 사찰이다. 현재 3층 석탑을 복원한 사지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9쪽)
註 408
최치원을 말한다.
註 409
경상북도 경주 동천리에 있는 절로, 528년(법흥왕 15)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817년(헌덕왕 9)에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1377년(고려 우왕 3) 서루(西樓)를 중건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재건한 것이며 이 절에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국보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손성우 편저, ≪한국지명사전≫, 경인문화사, 1973).
註 410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할 목적의 석축 산성이 있다.
註 411
경주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불렀다(≪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산천).
사회>사회조직>신분>촌락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이름 : 혁거세왕,알평,소벌도리,례마,지백호,최치원,지타,호진
지명 : 알천,양산촌,표암봉,급량부,돌산 고허촌,형산,사량부,남산부,구량벌,마등오,도북,회덕,무산 대수촌,이산,점량,모량부,박곡촌,취산진지촌,화산,시파,금산 가리촌,명활산,상·하서지,내아,동촌,명활산,고야촌,금강산,물이촌,잉구미촌,궐곡
국명 : 진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