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부터 진행된 대구지역 서원탐방이 이번 북구탐방을 끝으로 종료가 되는군요^*^
(기행코스)
구암서원(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17길20)
~ 서계서원(대구광연시 북구 호국로 51길 45-17)
##연암공원(燕巖公園)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20길2(산격동)
총면적이 328,000m2되는 상당히 큰 공원이지만 대구시내 큰 규모의 공원들이 그렇듯이 여기도 대부분이 야산
인데, 공원내에는 구암서원 말고도 각종 산책로, 유아숲체험원, 다목적 운동장, 배드민턴장, 물놀이장. 서명보
효자각, 연암테니스장 등이 있고, 등산을 위하여 방문하는 시민들도 보이고 공원입구에서 구암서원까지 올라
가는 길이 꽤나 가파르게 보입니다.
(연암이란 지명은 이일대에 제비들이 많았다고 해서 제비의 한자어인 "연"자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연암공원입구로 올라가는 길
*연암공원 풍경
*구암서원으로 올라가는 길
1.구암서원(龜巖書院)
대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암산(해발130m)자락에 자리잡은 구암서원은 복잡한 도시를 한눈에 조망
할수 있으며 조금도 조급하지않고 오히려 넉넉하기만 합니다.
조선초기의 문신인 구계 서침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대구부민이 조선 현종6년(1665) 중구 남산동의 연구산
서남쪽에 숭현사를 건립하면서 출발하는데, 숙종43년( 1717) 동산동으로 한번 이건하여 사가 서거정, 함재 서해, 약봉 서성 3선생을 차례로 추향하였고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철되었고, 2008년 유림이 뜻을 모아 낙재 서사원선생을 추향한 가운데 숭현사는 1975년 도문화재로 지정
되었고 대구직할시 승격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현 연암산부지에 자리잡고 인성
교육과 전통문화재 체험교육장으로 사용중입니다.
구암서원은 배산임수 지형에 전학후묘(前學後廟)로 조선후기 서원의 전형을 갖추었는데, 서원에 들어서면 하늘
높이 날아갈듯한 2층누각인 서원정문 연비루(鳶飛樓)를 맞이하고 연비루아래 좌측에는 관리동인 백인당(百忍堂)
이 있으며 문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강당인 초현당(招賢堂)이 보입니다^^
마당 좌우에는 동재인 경례재(耕禮齋)와 서재인 누학재(耨學齋)가 있고, 초현당의 좌측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우측에는 비각(碑閣)이 있으며, 초현당 뒤쪽엔 내삼문인 경앙문(景仰門)이 보이고 문에 오르면 서원의 가장 상단에 사당인 숭현사(崇賢祠)가 자리잡고 있는데 향사일은 매년 음력 9월1일입니다.
1)구암서원 표지석
2)서원정문인 연비루까지 올라가는 계단길
3)구암서원 안내도
4)백인당(구암서원 관리동)
옛날 중국 당나라 장공예의 집안이 9대로 한집안에 동거함을 듣고 당 고종이 그 비결을 물은 즉 인(忍)자 백개를
써서 임금께 올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참는다는 뜻이며, 1층은 (사)영남선비문화수련원 사무실과 식당으로 꾸며져 있고 2층은 강의실로 활용되고 있음.
5)연비루(구암서원 정문)
시경 대아편에 "연비려천 어약우연"이란 명언속에 있는 연비를 루명으로 취하였는데 직역하면,
"솔개는 하늘위를 날고 고기는 연못속에 뛰놀고 있네"라는 뜻으로 임금의 덕화나 조상의 은덕이 백성이나 후손
에게 미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함.
6)연비루입구 우츧에 전시된 문헌들
(임진왜란때 낙재 서사원선생이 향병을 소집한 격문)
(소학을 권장하는 효유글과 절목 10개항)
(인촌 우재악선생(1734~1814)의 문집인 인촌집(1898년 간행)에 실려있는 구암서원 학규)
7)구암서원내 유적시설
*구암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길
*경례재(동재)와 누학재(서제)
"경례"란 예를 밭갈이하듯 잘 닦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누학"이란 농사를 잘 짓기위해 논밭에 김을 매듯 학문을
하면서 나쁜 것을 털어버리고 제거해야 학문이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1788년3월 착공하여 6월에 준공
하였는데 현판의 이름은 당시 판관 서퇴수가 짓고 기문은 1789년 판서 서유린이 지었다 함.
(경례재)
(누학재)
*초현당(구암서원 강당)
정조12년(1788) 경상 이조원(1735~1806)이 초현으로 명명하였으며, 강당안은 가운데 마루와 양쪽 방으로 구성
되고 초현당 현판과 1796년 중수기[서발(1731~1796)]가 있으며 구암서원 현판글씨는 동곡 이박(1869~1952)이
1924년 서원복설후 썼고, 초현당 현판글씨는 산격동 이건후 서산 권시환이 쓰고 조각가 조양제가 조각하였음.
*전사청
서원 향례시 제수의 마련과 진행과정을 맡아보는 대청 또는 그것을 행하는 건물의 총칭.
*구암서원 묘정비(廟庭碑)
약봉의 현손인 퇴헌 서종급이 비문을 지었고 전액은 병조판서 서명신이 썼으며 비음의 글씨는 어모장군 서무수가 썼고 1758년4월 비를 세우고 1789년 비각을 세웠으며 이 비는 숭현사에 봉향된 구계, 사가, 함재, 약봉 4선생을
제향한 연유와 서원의 내력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암서원 이건사적비(移建事蹟碑)
1995년 산격동으로 이건후 그 사적을 적은 비로, 글은 겸암 류운룡선생의 후손 동사 류시벽이 지었고 글씨는 전귀당 후손 서정호가 썼음.
*달성서씨족회사적비(達城徐氏族會事蹟碑)
대구지방에 현존하는 시비중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우란 서희순이 1833년5월 경상감사로 도임하여 1834년 음력9월 달성공원에다 종가 600명을 초청해서 화수회겸 시회를 열었는데 그때의 시를 새긴 비석이며, 닰겅서씨 9명이 각각 일련씩 지어 전체가 한 시작(詩作)이 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9명이 자작련구를 자필로 써 시비에 새겼음.
8)숭현사
대구부민들이 조선초기의 문신인 구계 서침의 덕행을 기려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신위(神位)를 모시는 곳이어서 정면에만 출입문을 내고 나머지 세개의 벽은 두텁게하여 내부를 어둡고 유현(幽玄:깊고 오묘함)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한 특징이 있는데, 정면3칸,측면2칸 규모의 주심포(柱心包:처마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나무쪽인 공포를
기둥머리 바로위에 짜놓는 건축)양식이며,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기단 앞면의 좌우에 계단을 설치하여
동입서출(東入西出:동쪽문으로 들어가고 서쪽문으로 나오는 의례)하도록 하였음.
*숭현사 표지석
*경앙문(구암서원의 내삼문이자 숭현사 정문)
시경 소아편에 "고산앙지 경행행지"에서 나온 말로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는 뜻임.
*숭현사 전경
2.서계서원(西溪書院)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오천 이문화(1358~141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선 정조5년(1781)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순조1년(1801)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대암 이주를 추가
배향하여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으며, 경내에는 전례문(典禮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환성정(喚惺亭), 강학당인 화수정(花樹亭), 동재인 금수랑(琴水廊), 서재인 희리당(希理堂)이 있습니다.
1)서계서원 표지석
2)정려각 3기(서계서원 들어가는 진입로에 위치해 있음)
*효열각(孝烈閣)
1864년11월에 세운 것으로 조선 철종때 효부이고 열녀였던 월성최씨의 지극한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
효열 최씨는 인천이씨가(仁川李氏家) 이익상의 처로서 시모가 병상에 계실 때 젖을 짜서 먹여 드리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약으로 잡수시게 함으로써 시모의 생명을 구하여 오래 사시도록 했을뿐 아니라 가장의 임종시에는
몸소 염습을 하고 돌아가신지 3일만에 남편의 영전에서 순절하였는 바, 이러한 사실이 정각기에 기록되어 있는바, 이 정각은 조정에서 세웠으며 정각기에는 통정대부 전 승정원 우승지 박문현이 지었음.
*창열각(彰烈閣)
조선 철종4년(1854)에 세운 것으로 순조때의 열부였던 밀양박씨의 정열 자질과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
열부 박씨는 인천이씨가 이용섭의 처로서 일찌기 정숙한 자태와 단정한 행실이 뛰어나서 온 집안은 물론 인근의
마을까지 화평하게 만들더니 불행히도 중년에 남편을 여의고 키워놓은 자식하나 없으니 참으로 여자로서는 가엾
다고 할지라 평소 올바른 행실과 뛰어난 절개로 볼진대 곧바로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나 그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손으로 초상 대사를 직접 보살피고 5촌조카를 후사로 세워 상을 맡도록 하면서 한치도 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분명하게 처리하고나서 3년을 기다려 남편을 좇아 한날짜에 절명하였으니 ㅣㅇ러한 정열이 조정에 알려져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도록 하였다고 정려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정각은 조정에서 세우고 벙려기는 달성서씨
서택열이 지은 것임.
*정열각(旌烈閣)
조선 정조2년(1797)에 세운 것으로 영조때 효부요 열녀였던 영양남씨의 극진한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
효열 남씨는 인천이씨가 이만섭의 처로서 몸가짐이 정숙하고 단정하며 언행이 예의바르고 여성으로서의 덕성과
도량이 뛰어나더니 일찌기 시부모 섬기기, 남편 공경하기, 집안 이끌어가기 등에 정상을 다하여 집안과 향리에
이름이 자자하였으며 급가야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가례에 따라 예를 갖추어 모든 것을 처리해 놓고 남편이 하관
될 옆자리에 또 하나의 묘혈을 파게하고 그날밤 남편의 영탁앞에서 자진하였는 바,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포열장이 내려졌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정각은 나라에서 세우고 정려기는 당시 경상도 순찰사 이형원이 썼다고 함.
3)서계서원 사적비
4)향의문(向義門) : 서원정문
5)서원내부 전경
6)서계서원 전경
7)금수랑과 희리당
8)환성정(문화유적 0901-22-057)
임진왜란때 대구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주의 정각으로, 이주는 조선의 학자로 자는 경임, 호는 육휴당
태암이고 당대 명유 정경세 등과 교유하고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군량을 조달하고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관으로 있었으며 뒤이어 체찰사 이덕형의 추천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학문에 전념했으며 서계서원에 배향되었음.
9)전사청(典祀廳)
10)화수정
11)전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