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늙어
[창 27:2 ]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못하노니..."
어느 날 죽을는지(욤모티) - 직역하면 '나의 죽음의 날을'이다. 이삭은 현저하게 나타나는 노쇠 현상과, 현재 자신의 나이와 같은 137세의 나이로 14년전에 죽은 이스마엘의 죽음에서(25:17) 어떤 암시를 받아 임종을 대비코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사망한 것은 180세 때에 이르러서였다(35:28).
[창 35:29]"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 아브라함의 임종을 묘사할 때와 같다. 에서와 야곱이 - 이삭의 죽음이 임박하자, 야곱은 형 에서에게 통지하여 아비 이삭의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당시 에서는 급히 마므레로 올 수 있을 정도로 멀지 않은 세겜에 살고 있었다(32:3). 그를 장사하였더라 - 가족 묘역인 막벨라 굴에 안장되었다(49:31).
이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리브가와 레아가 함께 묻혔고 훗날 야곱의 시신도 이곳에 안치되었다(23:17-20;50:13). 한편 히브리인들은 매장(埋葬)이나 화장(火葬)보다는 인조 또는 자연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때 대부분한 동굴을 가족 묘소로 지정해두고 가족 중 누가 죽어갈 때마다 그곳에 보관하여 자연적으로 부패 소멸토록 했었다. 이는 죽음은 영원한 멸절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형태의 세계(스올)로 들어가는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내세관을 잘 반영해 준다.
[삼상 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하 19: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세라 저는 거부인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 여기서 '공궤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쿨'은 `떠받치다', `유지하다','제공하다' 등의 뜻으로, 특별히 물질적인 필요를 제공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이는 길르앗의 거부 바실래가 다윗 왕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는 동안 내내 왕과 그의 일행들을 공궤하였다는 말이다.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 그동안 자기를 공궤해 준 바실래에게 보답하겠다는 다윗 왕의 말이다.
[대하 24:15]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세라..."
여호야다가...죽을 때에 일백 삼십세라 - 비평학자들은 여호야다의 나이 130세에 대해 의문점을 시사한다(Myers, Curtis). 그러나 이 장수는 축복의 표지(Williamson)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야다를 통해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를 오랫 동안 살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내가...백수(白首)가 될 때에도...버리지 마시며 - 9절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으며, 죽움이 가까운 노년에도 자신을 계속 보호해달라는 간구이다. 이것은, 시인이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17절 주석 참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 '주의 힘'의 '힘'은 원래 '팔'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방 열강들을 엄중히 징벌하실 때의 도구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사 48:14;52:10;겔 30:21). 한편 '후대에 전하고'는 말로써 그렇게 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경우, 그것이 곧 의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중명하는 일과 다름없음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Calvin).
[시 92:14]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늙어도 결실하며 -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장수하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망하였는데, 그 최고의 모범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모세였다(신 34 : 7). 그와 유사하게 여겨진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은 다윗이었다(대상 29 : 28).
저자는 여기서 경건한 자는 늙어서까지도 원기와 생산력이 있는 삶을 살 것을 암시하고 있는 바,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는 모세와 다윗이라는 표본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 익으면 개당 평균 무게가 100kg, 최대로는 200kg까지 나가는 종려나무 열매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다(Perowne).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 본절의 핵심을 찾기 위해 먼저 살펴볼 단어는 '가르치라'로 번역된 '하노크'인데 이것은 그 문자적인 뜻이 '훈련시키다'이지만 '일생을 바치다'의 의미 역시 포함된 단어임을 고려할때 '그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훈련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차적으로 찾아낸 본절의 핵심은 아이를훈련하는 목적인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 그 아이의 일생을 바치는 일이다. 시작 나이는 16-24세로 보는 탈무드의 견해와는 달리 훨씬 이른 2-3세로 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아이'는 일반적으로 '젖먹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현대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3-7세의 시기가 한 개인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때라고 한다. 앞서 찾은 핵심 외에 또 다른 핵심을 찾기 위하여 살펴볼 단어는'길'인데 '마땅히 행할 길을'의 문자적 번역은 '그의(그 아아의) 길을 따라'이다. 이'길'에 관한 최근의 해석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천 여년 전에 동일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기 때문이다(Saadia). 교육에 있어 피교육자의 자질이나 성격들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지지할 만한다. 물론 피교육자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것이 그의 이기적 자아의 소욕을 배려한다는 뜻은결코 아니다. 본절의 요점은 아이의 능력, 잠재력, 본성, 기질 따위를 잘 고려하되그 아이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라는 것이다.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는 '동족' 혹은 '친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리사벳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이레니우스 그리고 키푸리안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잉태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르마토스'는 남성의 정액을 생산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헬라 관용구이기 때문에(Lucian) 이를 사라에게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란 말을 주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격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사라 자신과 함께...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Bruce).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