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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역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된 29일 낮,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세찬 비가 내렸다. 전국의 장애인운동단체 활동가 1500명이 폭우 속 국회대로에 모였다. 우비를 입고 우산을 썼지만 누구 하나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왕 젖은 거 마음 편하게 비를 맞는 사람도 있었다.
올해로 5회차를 맞은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 1박 2일 전동행진’의 첫째 날 오후 2시, 장애인권리예산·권리입법쟁취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 앞. 1500명은 빗속에서 뛰고, 노래하고, 춤추고, 피켓을 흔들며 장애인 권리를 외쳤다.
결의대회가 끝난 후에는 국회대로부터 마포대교까지 행진했다. 참가자들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캠페이너 노동자로서 일하러 왔다”, “매년 참여 중이라 올해에도 당연히 왔다” 등 다양한 동기로 참여해, 마포대교를 뜨겁게 횡단했다.
마포대교를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강혜민
-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 규탄하는 전동행진
전동휠체어의 행진, 이른바 ‘전동행진’은 2019년부터 시작했다. 2019년 7월 1일, 문재인 정부는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활동지원시간을 판정하는 도구가 인정조사에서 서비스지원종합조사(아래 종합조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종합조사로 갱신 조사를 받은 장애인의 활동지원시간이 삭감되거나 활동지원서비스 이용 자격이 박탈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장애계는 ‘장애등급제는 폐지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판정 도구만 바뀌었을 뿐,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 복지서비스를 제한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장애계는 2019년부터 매해 7월 1일경, 장애인의 삶을 예산에 가둔 정부를 규탄하며 전동행진을 하고 있다. 2019년과 2020년에는 잠수교를 행진했고 올해에는 마포대교를 행진했다.
- 우리는 “같이 살자”고 외쳤는데, 정부는 장애인 권리 조롱 중
전장연은 우선 장애등급제를 ‘진짜’로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본 대회에서 발표한 투쟁결의문을 통해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의 수단으로 종합조사가 도입됐다. 하지만 종합조사는 장애인 권리를 더욱 촘촘하게 칼질했다”며 “문재인 정부의 모든 걸 거부하는 윤석열 정부는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만은 더 강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어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의 중심에는 기획재정부가 있다. 추경호 기재부 장관은 장애인권리예산 1조 3천억 원을 증액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며 “최소 수준의 장애인권리예산은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거의 폐기됐다. 윤석열 정권 1년 동안 장애인 권리의 역사는 퇴행했다”라고 비판하며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와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했다.
장애인권리법안을 입법하라는 요구도 이어졌다.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장애인복지법 개악안 저지 △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 △중증장애인 노동권 보장 및 고용 활성화를 위한 공공일자리 지원 특별법(아래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특별법) 제정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등을 요구하는 중이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센터)를 장애인거주시설처럼 만드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센터는 장애인 권익옹호와 자립생활운동의 사명으로 만들어졌지, 정부 사업 따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건 장애인복지법 개악안 통과가 아니라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따라 장애인등록제와 장애등급제 폐지 내용을 담은 장애인권리보장법을 꼭 제정해야 합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장애인평생교육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장애인평생교육계가 장애인만의 독자적인 법안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기존에 있는 평생교육법이 장애인에게 어떤 도움을 줬습니까? 국회의원은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할 것입니까?” (천성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서울지부장)
- 2년 만의 행진, 마포대교에서 가장 외치고 싶은 것
결의대회가 끝난 후 오후 4시 4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전동행진이 진행됐다. 활동가들은 4km 정도를 장애인의 속도로 천천히 행진했다. 다양한 우비와 우산 색깔 덕분에 비 오는 마포대교가 알록달록 물들었다.
전동행진 투쟁은 올해 다섯 번째지만, 행진 자체는 2년 만이다. 2021년에는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으로 인해 1박 2일 투쟁이 전면 불허됐다. 행진은 취소됐고 장애인권리법안 입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만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전례 없는 폭우가 쏟아져 잠수교 출입이 통제되면서 행진이 결의대회로 대체됐다. 올해에도 장맛비가 쏟아졌지만 결의대회와 마포대교 행진 모두 원활하게 진행됐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캠페이너 노동자 이영애 씨는 마포대교에 “일하러 왔다”고 말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자리다. 최근 서울시의 탄압이 지속되면서 일자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중증뇌병변 와상장애인으로, 자본주의 취업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영애 씨는 막막함을 표했다. 그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계속 일하고 싶은데 걱정이다. 정부와 여당, 서울시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관해) 맞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답답하다”라며 “비가 많이 와서 아주 난감하지만 2년 만에 행진을 하니 좋긴 좋다. 전동행진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 일자리를 없애지 말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포대교를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강혜민
활동가 1500명은 3개 조로 나뉘어 행진했다. 조마다 각양각색의 행진이 펼쳐졌다. 1조에서는 투쟁가가 연속재생됐고 2조에서는 릴레이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3조에서는 노래자랑을 하기도 했다. 중간중간 인기 케이팝이 나와, 춤을 추며 행진하는 사람도 있었다.
각 조는 마포역, 공덕역, 애오개역으로 흩어져 지하철을 타고 다시 국회의사당역으로 돌아왔다. 오후 8시 30분부터는 ‘열차가 어둠을 헤치고’라는 제목의 문화제를 진행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역 지하 1층에 있는 장애인복지법 개악 저지 농성장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30일 오전 8시에는 국회의사당역에서 지하철 선전전을 진행하고, 이어 11시에 장애인시민권열차네트워크 ‘열차 타는 사람들’ 출범선포식을 연 후 1박 2일 투쟁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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