峰
북한산 사모바위 비봉(碑峰)산행
연신내역 3번출구
연서시장 앞 7211, 701번 버스 승강장
오늘은 친구들과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에서 10:30 만나 연서시장 앞 정류소 로 이동
시내버스 701번을 타고 15분을 달려 은평 한옥 마을 정류장(하나고 앞)에서 하차 한다.
은평구 뉴타운 한옥 단지 조성지로 이동 한다.
은평 한옥 마을은 서울시가 은평 뉴타운 3-2 지구단독 주택 부지에 과거 한옥의 불편한 점을 개선한
친환경 웰빙 한옥을 100여동 조성해 역사 문화 주거 상품 및 서울의 미래 자산 으로 육성할 계획을
밝힌 은평 한옥 마을을 SH 공사가 2018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에 있으며 한옥 마을이 들어 서는
부지에 수령 600년 이상의 느티 나무 보호수 단지와 맹꽁이 서식지도 조성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꾸밀 계획 이란다.
진관사 일주문을 앞두고 양옆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도착하게 된다. 오른쪽 방향을 선택하면
비봉과 향로봉 방향으로 오르게 되고 왼쪽 방향을 선택하면 암릉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응봉
능선을 통하여 사모바위로 오르게 된다. 오늘은 계곡 산행이기 때문에 계속 진진하여 진관사로
이동한 후에 담장길을 따라서 계곡길에 들어서기로 한다.
우리 일행은 진관사(津寬寺)로 들어 선다.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신라 진덕왕 때
원효(元曉)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고려 7대왕 목종 때의 일이다. 목종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인데 외척 김치양과
사통하여 사생아를 낳았다. 욕심이 많은 천추태후은 자신의 사생아에게 고려의 대통을 잇게 하고
싶어서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후에 8대 현종이 됨)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천추태후가 임신한 것을 안 고려 목종이 이에 불만을 품고 이종사촌인 대량원군에게 선위할 뜻을
대신들에게 알리면서 또 한 번 천추태후와 목종 사이에는 불신이 싹트고 만다.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인데 큰 이모로부터 암살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2살에 개경 남쪽 숭교사(崇敎寺)에서 승려가 된 후 암살 위험을 피해 삼각산 조그만 절로 옮겨
진관대사의 보호를 받았다. 진관대사는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낼 때마다 부처님 단 아래에 굴을 파고
대량원군을 숨겨 그 목숨을 구해 주었다.
강조의 정변으로 7대 목종이 폐위되자 대량원군은 8대 현종으로 등극하 했다.왕이 된 그는 자신이
숨어 목숨을 구한 굴을 신혈(神穴: 신의 도움을 입은 굴)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신혈사로 개칭하는
한편, 진관대사를 위해 번듯한 절을 지으니 그 절이 바로 대사의 이름을 딴 진관사(津寬寺)이다.
그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1) 벽운이 중건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1964년 재건을 시작해 현재 대웅전·명부전·나한전·독성각·칠성각·홍제루·종각·일주문·선원 대방 등이
있으며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우리 일행은 진관사 경내를 돌아 나와
진관사 돌담을 끼고 진관사 계곡으로 들어서서 산행이 시작 된다.
계곡에 들어서자 마자 암반 위에 설치된 층계 구간과 급경사가 연이어 진다. 등산로 아래에
계곡은 메말라 물 한점 없고 간간이 겨우내 얼어 붙은 얼음이 히끗 히끗 계곡을 묶어 놓 았다
암반 위에 잘 정비된 데크길로 오르고 또 오른다.안전시설이 확보된 안전한 바위길 약 1시간 30분
오르니 비봉-향로봉 갈림길에 도착 한다.우리 일행은 잠시 휴식후 비봉 가는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
암벽 오름길 "작은 노적봉"이라 부르는 바위가 웅장 하고 멋 스럽게 위용을 자랑 한다.
2000년대 까지는 바위산을 자일을 깔고 올랐었는데 지금은 남녀가 손잡고 오른다고 해서
"웨딩바위"라고 명칭이 바뀌었단다.웨딩바위는 릿지를 즐기려는 산객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바위이다 .
우리 일행은 웨딩 바위를 지나 암릉길 따라 오르고 또 오른다 오름길 뒤 돌아 보니 멀리
하나고등 학교와 한옥 마을이 눈에 든다.올려 보니 사모바위가 모습을 드러 낸다.산능선이
얼마 남지 않은 느낌 이다
오르고 또 오르니 비봉과 향로봉 갈림 길이다.향로봉(香爐峰)은 수 많은 북한산 암봉 중 에서
가장 다채로움을 자랑 하는 암봉 이다.
이곳에서 올려 보니 비봉이 코앞 이다.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비봉에 다다르니 추락 위험
지역 으로 출입 제한이 되어 있어 우선 좌측으로 비봉을 돌아 가는 길로 돌아 반대편
동쏙 에서 비봉을 오른다.
코뿔소 바위
우리 일행은 비봉 허리길을 돌아 산객들이 비봉을 오르 내리는 곳에 선다.비봉을 오른다.
한발 한발 조심조심 최악의 난코스 오르고 또 오른다.네발로 암벽에 붙어 작은 걸음 으로
앞으로 기어 오른다.정상이 눈에 들고 차분 하게 마음을 갖는다.서두르지 말자 !
드디어 비봉 정상(55m)이다.올랐다 우쭐대지 말자 !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바로 추락 이다.
정상 정복 인증 샷을 한다.높은 곳에 있을때 늘 몸도 마음도 낮추어야 한다.산도 인생도
하산길이 어렵다.앉아서 발을 내려 디뎌도 발 붙일 곳이 없다.당황 하지 말고 손으로 몸을
늘리고 발로 더듬어 안전한 곳을 찾아라 한번 삐끗 하면 끝이다.인생도 산행도 연습은
없단다.내림 길 코뿔소 바위가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나도 한 컷 ! 앞를 보니 북한산 봉우리
들이 한눈에 들고 바위 백화점 이다.어렵게 올라 갔다 내리니 기분은 짱 이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北漢山 眞興王 巡狩碑址)는 신라시대 북한산 순수비가 있던 터로,
사적 제228호이다.원래의 비는 풍화가 심하여 1972년에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고,
본 위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어 한반도 전체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한강유역
으로 진출하였다. 진흥왕은 재위 12년(551)에 백제와 손잡고 당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
(竹嶺)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이곳에 10여개의 군(郡)을 설치하였고, 여세를 몰아
14년(553)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진흥왕은 16년(555) 10월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한편 특별사면을 베풀어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조처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순수비는 승가사(僧伽寺) 뒤쪽에 위치한 표고 556m의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여기서 산봉우리
이름인 비봉(碑峰)이 유래되었다. 순수비는 큰 바위의 꼭대기를 파내어 비석 받침[碑座]을 만들었다.
순수비는 건립 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글자가
없는 소위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 오다가, 19세기 초 김정희(金正喜)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로 뒤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임이 알려졌었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비 이외에도 마운령비(摩雲嶺碑), 황초령비(黃草嶺碑), 창녕비(昌寧碑) 등이 있다.
이전 직후인 1972년 8월 25일에 비를 이전했다는 사실을 적어놓은 모조비를 이곳에 세워놓았다가 2006년
10월 19일에 모조비를 철거하고 원래의 비석과 유사하게 만든 복제비를 새로 설치했다.
승가사
우리 일행은 사모 바위 방향 으로 산행을 이어 간다.사모바위는 승가사 뒷편 높이 해발560m에
위치했으며 바위 모습이 조선시대 관리들이 머리에 쓰던 사모를 닮아 부쳐진 이름이라한다
다른 이름으로 장군바위 라고도 하는데 양쪽 어깨에 견장을 올린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가슴 아픈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인조 때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 있었는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남자는 전쟁터로 갔다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 대신 그녀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끌려갔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된다.
해가 바뀌어 청군이 물러가고 전쟁이 끝나도 그녀의 소식이 없자, 남자는 당시 포로에서 풀려
났지만 버린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인들(還鄕女)이 모여 살던 북한산
자락(지금의 모래내와 홍은동 일대)을 떠돌며 사랑하는 여인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만다.
마침내 남자는 북한산에 올라 연인이 끌려 간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가
한 덩이 바위가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모바위’인 것이다. 구기동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과연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사모바위 아래 1968년 1.21사태 당시 김신조
일행이 숨었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우리는 이곳 솔밭에 자리를 잡고 소주 한잔과 간식을 한다
삼천사(三千寺)
하산길 나무 사이로 삼천사가 눈에 든다.삼천사(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津寬外洞 산 34번지) 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흥국사
(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한때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된 암자터에 1960년에 진영이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현재 사찰 이름(삼천 三千)은 과거 삼천사(三川寺)가 삼천(三千) 여 명이 수행할 만큼 대가람
이었던 데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우리 일행은 시간 관계상 계곡길로 내린디.
우리 일행은 응봉 능선 따라 삼천 탐방 지원센타 방향 으로 하산을 한다.하산길 좌우로 백한
봉우리 마다 조망 된다.백운대를 비롯해 인수봉,노적봉,만경대.나월봉.나한봉 문수봉,보현봉
지나온 비봉,사모봉등 바위 백화점 이다.
암능에 밧줄 철주,절벽에 분재 소나무 너무도 멋 스럼고 신기 하다.한참을 내리니 삼천사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 내고 삼천사 계곡이 펼쳐 진다.
삼천사계곡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에 있는 있는 계곡이다.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진관사 계곡과 더불어 여름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인근 에는 해발 333m의 응봉이 있다.
우리 일행은 계곡을 빠져 나와 하나고앞 정류장 에서 7211번 버스를 타고 연신내 시장에서 하차
하산주겸 식사를 하고 귀가길을 재촉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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