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넬리어스 밴더빌트 (1784~1877)는 19세기 증기선을 이용한 수상 운송과 철도라는 신개념 교통 산업을 일궈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1877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미국 전체 경제의 약 1.15%를 차지한 것으로 추산됐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기업인으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그리고 코넬 리어스 밴더빌트를 꼽았다. 살아있는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는 그 다음이었다. 미국 웹사이트 ‘셀러브리티 넷워스’는 그의 재산을 현재 시가로 1850억 달러로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인류 역사상 10위의 부자다. 2008년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당시 1674억 달러로 역시 10위에 놓았다. 그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는 2316억 달러로 4위에 올랐다. 그가 만든 물류 제국이 아들 대에 더욱 성장한 것이다.
산업혁명 속에서 기회를 낚아챈 통찰의 부자
미국 자본주의에 기부 전통을 세운 인물
사실 밴더빌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성실함과 인내심에 불굴의 도전 정신,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고 사업에 연결하는 지적 능력, 기회를 잡아채는 순발력을 결합해 사업을 성공시켰다. 막스 웨버가 1904~05년에 학술지에 실었다가 1920년 책으로 묶어낸『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역설한 기업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인물이다. 밴더빌트는 신기술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뼈대와 기부의 전통을 만든 건설가다. 통찰력이 뛰어나고 열심히 일했던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었다.
밴더빌트는 세상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거부가 될 기회를 잡았다. 밴더빌트가 살았던 시기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 독일, 미국 등 후발국들에서 산업혁명이 이뤄진 격동의 시대였다. 생산, 운송, 소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도도한 변화가 이뤄졌다. 밴더빌트는 이런 시기에 작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하는 대신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해 거대한 사업을 이뤘다. 그의 비즈니스 인생은 시대의 흐름을 꿰어본 통찰력도 대단했다. 미국이 산업화를 가속화하면서 물류산업이 필수적이 될 것을 간파했다. 여기에 증기선과 철도라는 신기술의 가치를 알아봤다. 해안을 이용한 수상 운송과 철도를 결합하는 융합에도 능했다.
벌기만 잘한 게 아니다. 쓰기에도 모범을 보였다. 그의 이름은 ‘남부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밴더빌트대에 남아 있다. 밴더빌트가 1873년 100만 달러를 기증해 테네시주 내쉬빌에 세운 대학이다. 당시 미국의 기부에선 최고 금액이었다. 미국에서 모든 계층이 교육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게 기부의 취지였다. 이를 통해 신분 이동이 가능하고 서로 다른 계층이 유대를 강화하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교육 기부로 실천했다. 밴더빌트는 기부만 했을 뿐 설립과정이나 운영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며 그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밴더빌트대의 피바디 교육대는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대학교의 교육연구소대학(Institute of Education)과 함께 세계 최고의 교육학 대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의 수많은 교육학자와 교육자, 교육 관료가 이 학교 출신이다. 환경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 부통령 출신의 앨 고어가 밴더빌트 법학대학원 출신이다. 공과대학과 음악대학, 의학대학원, 간호대학원, 경영대학원, 신학대학원도 최고 수준이다.
밴더빌트는 네덜란드 이민 5세로 뉴욕 토박이다. 그를 이해하려면 집안과 활동 기반인 뉴욕의 유래를 살펴봐야 한다. 원래 뉴욕은 17세기 네덜란드인이 신대륙에 개척한 땅이다. 뉴욕은 1609년 이후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네덜란드인이 고용한 영국인 탐험가 헨리 허드슨(1550~1611)이 그 해 뉴욕시 입구의 허드슨강(그의 이름을 땄다)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해를 한 것이 계기였다. 네덜란드는 이를 계기로 지금의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코네티컷 지역에 ‘뉴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세웠다. 1621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세워 본격적인 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1624년엔 네덜란드인 30가족이 처음으로 허드슨강 입구에 정착했다. 현재의 뉴욕시 초입이다. 이들은 농업과 모피 교역에 종사했다.
‘제독님’이라 놀림 받던 화물선 선장나라 규모가 작은 네덜란드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신대륙 식민지 정착인을 모집하는 ‘다국적 전략’을 채택했다. 글로벌 도시 뉴욕은 시작부터 국제적이었다. 그 결과 뉴네덜란드 식민지에는 무려 20개의 언어가 사용됐다. 언어만 보면 유럽이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
당시 유럽에서 네덜란드는 종교적인 관용 정책으로 유명했다.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았던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푸방 당한 유대인 등이 몰려와서 살았다. 당연히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는 물론 종교도 공존했다. 유럽이 신구교도 간에 30년전쟁(1618~1648)을 벌이는 시절 신대륙 네덜란드 식민지에서는 민족, 종교가 다른 사람이 공존하며 번영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문화의 다종교의 공존이라는 뉴욕의 전통은 이미 이때 네덜란드의 시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뉴네덜란드의 총독 페터 미노이트는 1626년 현지 원주민들에게 지금 가치로 24달러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맨해튼 섬을 사들였다. 그는 이곳에 ‘포트 암스테르담’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네덜란드의수도 이름을 따서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렸다. 뉴암스테르담은 신대륙과 유럽과의 모피 교역으로 번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661년 맨해튼 서남부에 있는 섬도 원주민으로부터 사들여 네덜란드식으로 스타튼(Staaten) 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오늘날 뉴욕시의 스태튼(Staten) 섬이다. 뉴욕은 19세기 말까지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아일랜드와 같은 다섯 개의 자치구로 나뉘어 있다가 1898년 뉴욕시로 통합됐다.
문제는 이곳의 네덜란드인들이 롱아일랜드에 정착한 영국 이민자들과 모피교역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1664년 영국의 요크 공작 제임스(1633~1701)는 이 지역에 군함과 해군을 보냈는데 네덜란드 총독은 평화롭게 항복했다. 뼛속까지 실용주의자인 네덜란드 정착자들은 승산 없는 전쟁 대신 영국 식민지의 주민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평화롭게 영국 식민지가 됐다. 뉴네덜란드는 뉴잉글랜드로, 뉴암스테르담은 요크 공작의 칭호를 따서 뉴욕으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요크 공작 제임스는 나중에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재위 1685-1688)가 됐다. 뉴욕은 잔류한 네덜란드인과 유럽 각지에서 이주한 이민자들, 그리고 새롭게 도착한 영국인들로 붐비는 국제적인 교역 도시가 됐다. 뉴욕은 현재 세계 최대의 자연항이다.
첨단 증기선에 과감히 도전하다벤더빌트 가문이 이 글로벌 도시에 이주한 것은 코넬리어스 밴더필드의 고조부인 얀 아트슨 때였다. 얀 아트슨은 뉴암스테르담 시절인 1650년 이 도시에 정착했다. 그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드빌트 마을 출신의 농부였는데 뉴네덜란드에서도 토지를 얻어 농사를 지었다. 그는 이름 뒤에 ‘드빌트 출신’이라는 뜻의 네덜란드어 ‘반 데르 빌트(van der bilt)’를 붙였는데 나중에 영어식인 ‘밴더빌트’라는 발음의 성으로 굳어졌다. 아트슨(Aertson)도 ‘아트라는 사람의 아들’이라 뜻의 네덜란드어 아트존(Aertszoon)을 미국식으로 옮긴 것이어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이 아니었다.
밴더빌트가 된 아트슨과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농사를 지었다. 밴더빌트 집안은 농업으로 모은 약간의 돈으로 돛단배를 사서 수상 운송업을 벌였다. 목선 돛단배는 스태튼 섬과 맨해튼을 연결하는 동맥이었다.
밴더빌트는 네덜란드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고조부가 정착했던 바로 그 스태튼 섬에서 태어났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아버지 코넬리어스와 어머니 피비 핸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밴더빌트는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페리보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소년 노동이 빈번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일을 거드는 수준을 넘어 어엿한 한 명의 일꾼으로 일했다. 그러다 16세 때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 과정에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100달러를 빌려 작은 배를 구입해 허드슨강을 건너 스태튼 섬과 맨해튼 사이를 잇는 선박 운송 사업을 시작했다는 설이다. 네덜란드인들이 디자인한 페리오거라는 종류의 바닥이 편평한 바닥의 쌍돛 선박이었는데 당시 허드슨 강을 건너는 대부분의 화물선이 이 종류였다. 바닥이 편평하다는 것은 그리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보유하게 된 이 배에 ‘재빠르고 확실하다’는 뜻의 ‘스위프트슈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배는 그의 아버지 소유였으며 그는 이 배를 운항하는 조건으로 이익의 절반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미국 역사에 남는 거부인 밴더필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자신의 사업을 한 척의 쌍돛 선박에 승객과 화물을 싣고 직접 스태튼 섬과 맨해튼 사이를 운항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배를 가지게 된 밴더빌트는 활기 넘치고 열정적으로 일했다. 어찌나 정열적으로 일을 했던지 다른 선장들이 농담조로 그를 ‘제독님(The Commodore)’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이 별명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1813년, 밴더빌트는 소피아 존슨과 결혼했다. 결혼 뒤 이들은 스태튼 섬을 떠나 맨해튼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13남매를 낳았다. 자신의 페리를 운항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매제인 존 드 포레스트로부터 샤를로트라는 이름의 범선을 한 척 사서 식료품 운송과 판매 사업을 벌였다. 사업비용은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몇몇 주변 투자가들이 댔다.
밴더빌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17년 11월이었다. 당시 최첨단 교통기관인 증기선으로 대형 화물선 영업을 하던 해운업자 토머스 깁슨이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박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고 수상 화물운송 사업 수완도 좋은 데다 열정까지 지닌 밴더빌트를 눈여겨봤던 인물이다. 깁슨은 밴더빌트에게 자신의 증기선 선장을 맡아볼 것을 제안했다. 밴더빌트는 자신이 원래 하던 쌍돗배 사업을 그대로 하는 조건으로 깁슨의 증기선 운항을 맡기로 했다. 당시 증기선은 지금의 벤처산업에 해당하는 첨단산업이었다. 기회인 동시에 불확실한 비즈니스이기도 했다. 고위험 고수익의 신사업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을 알아보자.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선박은 기본적으로 돛이나 노를 이용해서 항해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래도 조선 기술의 발달에 따라 수많은 돛을 장착한 거대한 목조 범선이 개발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18세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풍력 대신 증기기관을 이용해 선박을 운항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제임스 와트(1736~1819)가 실용적으로 개량한 증기기관은 방적기 개발로 이어져 영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교통기관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다.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선박에 응용하는 기술 개발에도 나섰다. 미국 정부는 발명가 로버트 풀턴과 로버트 리빙스턴에게 증기선에 대한 특허권을 부여했다. 이들이 기술력과 정치력을 모두 갖춘 덕분이었다. 이들은 특허를 바탕으로 뉴욕주와 뉴저지주에서 증기선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 사업권이 아론 오그라는 사업가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 아성에 도전한 것이 밴더빌트에게 증기선 선장을 제안한 깁슨이었다. 깁슨은 오그의 독점권에 도전해 법적인 소송을 벌였다. 재판 결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오그의 독점권은 무너졌으며 깁슨과 밴더빌트는 사업에 날개를 달게 됐다. 깁슨은 임시 허가를 받은 증기선의 운임을 대폭 내려 오그의 아성에 도전했다. 밴더빌트는 깁슨을 멘토 삼아 거대 기업의 경영 노하우를 배웠다.
1826년 깁슨이 세상을 떠나자 밴더빌트는 그의 아들인 윌리엄 깁슨과 일하며 증기선 운항 노선 확대에 나섰다. 밴더빌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은 미국의 대대적인 산업혁명이었다.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에 수많은 섬유공장이 생기면서 원료와 상품을 운송할 교통 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강과 바다를 이용한 증기선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 철도 건설 붐이 생기게 됐다. 뉴욕과 뉴저지 등에서 증기선 사업을 좌지우지하던 밴더빌트는 이 새로운 기회를 낚아챘다. 증기선이 운항하는 항구와 연결되는 철도 건설과 운영에 나선 것이다. 그는 운임 인하를 통해 경쟁 철도업체의 주가를 떨어뜨려 이를 인수하는 전술을 펼쳤다.
증기선과 철도를 연결해 물류 혁명
1840년대 밴더빌트는 자신이 운영하던 뉴욕 프로비던스 앤 보스턴 철도의 운임을 낮춰 경쟁업체인 스토닌턴의 주가를 크게 떨어뜨린 뒤 이를 인수 합병했다. 1867년 밴더빌트는 미국 동북부 최대 철도회사인 뉴욕 센트럴 철도를 운영하면서 미국의 ‘철도왕’으로 군림했다. 운항 노선이 1만8643km에 이르렀으며 보유 철도 길이가 4만2479km에 달했다. 미국 동북부 대부분이 그의 사업 영역에 들어왔다. 밴더빌트의 철도는 뉴욕주는 물론 펜실베이니아주, 매사추세츠주에 중서부의 오하이오주, 미시간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까지 뻗었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의 노선까지 보유했다. 이 회사는 1970년까지 유지됐다. 증기선과 철도를 연결한 그의 사업은 미국 물류산업의 핵심이 됐다.
성실함으로 작은 화물선 사업에서 두각을 보이고, 첨단 증기선 운항과 철조 사업으로 신종 기술 사업의 재미를 봤으며 독점 배제와 경쟁 업체 인수로 사업 확장 노하우를 익힌 셈이다. 그런 그에게 1861년의 남북전쟁은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자신이 운항하던 증기선 중 가장 크고 성능이 좋았던 밴더빌트 호를 북군 해군에 기부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가장 아끼는 재산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해군을 위해 수상함 장비를 기증하기도 했다. 밴더필드는 똑똑한 막내아들 조지워싱턴 밴더빌트에게 사업을 물려줄 생각으로 웨스트포인트에 보냈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 이름을 딴 막내 조지워싱턴은 남북전쟁에 참전하지도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밴더빌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일이 자식이었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