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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 대망 -
(87) 성전정화(2) 채우기 역대하 29:20-28
인생의 고난이 찾아왔을 때,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멈추거나 힘들어 하곤 합니다. 상황이 환경이 이런데, 내 기분이 이렇고 몸땡이가 이런데 어떻게 예배를 드리냐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성경을 읽을 수 있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고 하나님을 구해야할 때라고 이야기 합니다. 상황이나 환경, 인간의 감정과 육신의 상태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예배는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멈추고 힘들어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 감정과 상태 위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받거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예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 예배는 내게 생명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노하고 내버리신 이유를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낭실문을 닫고 등불을 쓰고 성소에서 분향도 번제도 드리지 아니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칼에 엎드러지고 자녀와 아내들이 사로잡히고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그때,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가지고 이전 왕들의 길을 답습하거나 보다 더 악한 길을 혹은 무기력한 길을 걸을 수도 있었던 그때, 10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할 마음이 있으니”, 레위인들이여, 제사장들이여, 내가 앞장설테니 힘을 보태달라, 다시금 사명을 본분을 기억하며 부지런하게 하나님 앞에 수종들고 섬기며 분향합시다! 그쵸?
그 마음 그대로 히스기야는 성전정화를 시작합니다. 놋뱀을 부수고 수십 년 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반역과 범죄함의 잔재들, 이걸 누가 어떻게 언제 치우냐고 누구도 엄두를 못내고 손 놓고 있던 것들이, 어땠다고요? 마음을 모으고 서로 힘을 내니, 하나씩 치우고 하나씩 정돈하기 시작하니, 고치고 비우니 딱 보름 걸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 듣고 가셔서 그동안 엄두도 못내던 일들 첫 삽을 뜨는 일에 성공을 하셨는지요? 지난주 못하셨다면 이번주 꼭 한번 해보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일에 마음을 먹었노라고 주변에 말씀하시고 함께 돕는 이들과 힘을 내어보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힘도 주시고 깨끗하고 정결하고 복된 새로운 삶이 더욱 시작 될 것입니다. 진작에 할 걸 왜 여태 미뤘나 싶은 마음도 드실 겁니다. 주변의 방해와 냉소를 잘 이겨내시고, 승리하시길, 그 일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들일지 잘 모르지만, 시작하시고 마칠 수 있게, 주변이 다 놀랠, 그 기쁨 누리실 수 있기를 저도 함께 중보하겠습니다.
그래요. 히스기야 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서자, 그 입술에 권세를 주시고, 오늘 그와 함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전을 사랑하여 귀한 마음을 품고 일어나는 한 사람, 게으르고 무기력한 제사장과 레위인들로 다시금 생기있게 일어나 하나님을 섬기시게 만드는 한 사람, 히스기야,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은 그 다음입니다. 성전이 그렇게 아름답게 정돈되고 성결하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가 했던 일, 20절이 기록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일찍이 일어나 성읍의 귀인들을 모아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20절),
여기 ‘일찍이 일어나’로 번역된 히브리어로 ‘바야쉬켐’이라는 단어는, ‘일찍~ 하다, 부지런히 ~하다’라는 뜻인데,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목적으로 쓰여진 단어가 아니라, 역대기 전체에 딱 세 번만 의미심장하게 사용이 됩니다. 여호사밧이 기도할 때(20:20), 그리고 오늘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갈 때(29: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하여 행하신 일들을 설명하실 때(36:15) 그렇게만 사용된 표현인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성실함의 모습을 표현하시는 단어인데, 오늘 여호사밧이 놀라운 성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고, 하나님을 찾고 사모하였다는 증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바야쉬켐’, 저와 여러분의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는 모습도, 히스기야와 같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실하게 사랑하시는 모습을 닮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오늘 히스기야가 닫혔던 성전문을 열고 수리하고, 더러운 우상들을 치고, 성전 기물들을 다시 정돈하고 성결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맺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이렇게 히스기야를 일찍이 일어나게 하였고, 뜻을 모은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 올라오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지요?
자, 여기서 질문,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침부터 일찍이 일어나 사람들을 재촉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이 안장을 지우고 모리아산으로 나아가던 일과 같은 일이시길 축복합니다. 마리아가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던 것과 같은 일이시길 축복합니다.
학교가라 출근해라 밥먹어라, 이제는 나마저도 퍼질러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일이다 예배드리러 가자 하면서 사람들을 깨우고 있나요? 일요일이니 푹 자라, 예배 30분 전에 깨워줄게 그러진 않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날들은 알아서 일어나게 내버려 두시는 어머니가, 주일날만큼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깨우시고 다른 날보다 밥도 맛있게 차려주시고 옷도 신발도 예쁘게 준비해 주셨다는 기억이 우리 자녀들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공부하러 가는 월요일보다. 예배드리러, 힘껏 찬송드리러 가는 주일아침에 더욱 고기반찬을 해주시길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깨끗하게 정돈하고 성결하게 했으니 끝이 아닙니다. 토요일에 교회 청소를 깨끗하게 했으니 주일에 더욱 힘껏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또다시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귀신 하나가 나가더니 깨끗하게 집에 일곱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지요. 굳게 결심하고 우상을 없애버려도 얼마든지 또다시,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쵸? ‘바야쉬켐’! 얼른 냉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성결하게 한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온통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주의 보혈로, 주의 향기로 말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주를 향한 찬양으로요!
자, 히스기야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요? 무엇으로 성결하게 한 성전을 채웠을까요? 21-24절입니다.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일곱 마리를 끌어다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삼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명령하여 여호와의 제단에 드리게 하니 이에 수소를 잡으매 제사장들이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또 숫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어린 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이에 속죄제물로 드릴 숫염소들을 왕과 회중 앞으로 끌어오매 그들이 그 위에 안수하고 제사장들이 잡아 그 피를 속죄제로 삼아 제단에 드려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게 하였음이더라”(대하29:21-24)
그래요. 히스기야는 나라를 위하여, 성소를 위하여,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나라를 위한 속죄는, 온 이스라엘, 저 앗수르에 의해 멸망직전에 있는 저 북이스라엘의 속죄를 포함하는 것이요, 성소를 위한 속죄는 성소의 성결을 위한 것이며, 유다를 위한 속죄는 아하스를 비롯한 조상들의 국가적인 우상숭배에 대한 속죄였습니다. 그래요.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에 의해 자행되었던 이스라엘 열왕의 길을 넘어서서 악을 행했던 그 모든 타락과 범죄함에 대한 참회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죄악에 대한, 특별히 형제에게 행한 악과 하나님 앞에 범한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입니다. 나와 너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며 드리는 참회의 제사입니다. 그렇게 상한 심령을 우리 하나님은 받으시고 이 땅을 고치기 시작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제사장들이 수소와 숫양들과 어린양들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은 속죄함을 입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정해주신 속죄의 방법이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값이었습니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저 흠없는 짐승의 생명이 드려져야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피로 죄 씻음을 얻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3절, 히스기야왕과 회중은 저 속죄제물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자신들의 모든 죄를 저 숫염소에게 전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 희생제물들이 안수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짐승들의 피를 받으시고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무수한 짐승들이, 매년 수시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어야했던 것, 이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멈춰주시지요? 어떻게 예, 단번에, 온전하고, 영원한 제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도록 하시어, 흠없고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피를, 우리의 죄값으로 받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의 모든 죄를, 그분의 피를 그분의 구원을 그분의 대속제물되심을 믿는 모든 이들을 말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0-14)
그래요. 이때는 아직 예수님의 단번의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 이전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와 모든 백성들이 아침 일찍부터 올라와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모든 제사가 멈추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이 됩니다. 조심스레 두려움으로 올려드린 인간의 부족한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이지요? 그 놀라운 구원과 용서와 회복의 감격은 이제 감사찬양으로 고백되고, 성전은 짐승의 비명소리만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크고 웅장한 찬양소리와 연주소리로 가득 차게 됩니다. 26-28절입니다.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대하29:26-28)
이것입니다. 이래야 교회입니다. 어떻게 해야?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 때문에 울부짖는, 어쩌면 저 짐승들의 비명같은 기도 소리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 찬송하는 찬양 소리로 악기 연주로 채워지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 찬송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울부짖는 기도도 뜨겁게 찬송도 뜨겁게 무엇보다 악기 연주가 뜨겁게 이뤄질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더 기도를 많이 해주시고, 저 레위인들이 각기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것처럼, 박수만 치는 것을 넘어서, 탬버린이든, 짝짝이 캐스터네츠든, 트라이앵글이든, 뭐라도 다들 하나씩 손에 들고 찬양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지금껏 유다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히스기야는 다윗과 선지자의 규례와 명령을 좇아서 온 백성에게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고 악기를 울리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합니다. 말씀 그대로 이사야 4321 찬양은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것을 여태껏 유다와 이스라엘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 찬양이 성전에 울려퍼지고 가득 채워집니다. 고쳐지고 비워졌던 성전에, 찬양이 연주소리가 가득 채워졌던 것입니다.
하나 더 살펴보고 싶은 구절은 이것입니다.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잘 읽으면 예배마칠 때까지 찬양했다, 칭찬받을 모습으로 읽혀지지만, 조금 부정적으로 읽으면 이렇게도 읽혀집니다. “예배가 끝나니 찬송도 끝났다.” 뭔가 서늘한 울림이 있지요?
우리도 예배 때만 찬송하면 된다고 읽으시면 안됩니다. 특별히 오늘 드려지고 있는 번제는 ‘내 생애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제사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일생이 다하도록, 우리 주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하시는 복된 종들 우리 모두가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며 존재하는 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거나 떠나 살지 않는 주의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배가 멈추지 않는 분들, 찬양이 멈추지 않는 분들 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남유다는 히스기야 사후 저 므낫세에 의해 찬양과 기도가 또다시 멈추게 됩니다. 우리 하일교회, 건물성전과 인생성전이 모두 이 찬양과 기도가 멈추지 않는 성전과 성도가 되도록, 내가 더욱 자리를 지키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복 주시길 다시 한번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선택하고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우리들입니다. 그 은혜와 평강, 무엇보다 지식에 넘치는 그 사랑을 알고 깨달아 충만한 우리가 되어, 더욱 우리의 성전에 찬양과 기도를 가득채우는 주의 종들, 더러운 것들이 채워질 수 없도록, 말씀과 기도, 예배와 헌신으로 가득 채우는 우리이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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