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 前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작업을 앞장서 추진했던 인물이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만 4년 동안 서울시장직을 맡으면서 수많은 개발을 추진했고, 이를 통해 수도서울의 기본틀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재임 중 '불도저' 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각종 개발을 앞장서 추진해 나갔고, 이처럼 '밀어부치기'식으로 이루어진 개발을 통해 수도서울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되어 나갔다.
강변로, 북악 스카이웨이,공항로 등의 신설 및 확장, 수많은 지하도와 육교 건설, 세운상가,낙원 상가 등 도심 재개발, 한강과 여의도 개발, 그리고 수백동의 시민 아파트 건설까지, 그가 추진한 각종 개발은 서울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돌격'이라는 구호가 새겨진 핼멧을 쓰고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는 서울시장 부임 2년째 되는 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서울이 65년도를 100%로 했을 때 올해 목표가 1,100%, 즉 11배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40년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을 4년 동안에 해 치웠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된 김현옥式 '돌격 건설'은 1970년 4월 8일 그가 세운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끝이 나고 만다. 그의 서울 개발에 관한 평가는 찬사와 비난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서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평가가 있는 반면,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 임명권자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시 효과를 노리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했다는 부정적 인 평가도 있다.
그는 직접 쓴 한 수필에서 "후세에 '푸른 유산'을 남겨 주겠다"고 썼다. 살기 좋은 도시 서울을 후대에 남겨주고자 했던 김현옥. 그는 과연 그의 표현처럼 '푸른 유산'을 후세에 남겼을까?
부산시장으로 재직하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발령된 것은 1966년 4월 1일이었고 4월 4일에 부임해 온다. 1926년 출생인 김현옥 시장의 학력은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공식 이력서에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졸업으로 되어 있으나 그 성장기에 관해서는 전언(傳言)이 있을 뿐이다. 그 전언에 의하면 향리인 진주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진주농업학교의 사환으로 근무하다가 일제말기 육군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으며 8 · 15 광복 후에 귀국, 국방경비대 때부터 군인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군 경력에 관해서는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1954년 7월∼1955년 육군수송감실차감(陸軍輸送監室次監)(대령), 1955년 2월∼1957년 3월 육군수송학교장, 1957년 3월∼1960년 4월 제1야전사(野戰司) 수송참모부장, 1960년 4월∼1960년 12월 다시 육군수송감실차감, 1960년 12월∼1962년 4월 육군 제3항만사령관(港灣司令官)(준장)을 역임하였다.
이상에서 기술한 그의 배경을 볼 때 그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으로서 근대적인 관리기술이나 지식은 피라밋식 군사교육제도를 통해 습득하고 관리 및 조직능력도 장기간의 고위관리참모 및 지휘관(특히 수송분야)으로서의 경험을 통하여 습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는 5 · 16 군사정변 당시 육군 제3항만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쿠데타를 지지 · 협조하였었다는 점이 계기가 되어 1962년 12월 부산 시장직에 임명되어 1966년 4월 서울특별시장으로 전임되기까지 4년간 부산시정을 주도하였다. 그의 부산시장 재직시의 가장 주목할만한 공적으로서 획기적인 부산항만지구(釜山港灣地區) 구획정리사업을 들 수 있으며, 이것이 그의 능력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되었고 또한 서울특별시장으로 발탁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성취욕 한가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부산시장 재직시인 1963년 1월 1일에 처음으로 정부 직할시제도를 창설하는데 성공하여 그가 초대 부산직할시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4년간의 부산시장 재직의 경험은 대도시 문제에 새로운 안목과 식견, 그리고 나름대로의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정관(市政觀) · 신념 · 태도 및 가치관을 그의 취임사 중의 몇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취임사에서 '서울시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및 군사 등 모든 부문의 중추적 요소가 총집결되어 있는 이 나라의 수도일 뿐 아니라 서울시 행정은 이 나라의 현실과 그 가능성을 상징하고 판가름하는 종합 행정으로서 서울의 근대화는 바로 조국의 근대화와 직결됨'을 강조하고 '결코 오래 묵은 법률이나 조례나 명령지시를 지키는데 급급하여 피동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지난 날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신념과 철학을 가진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이요 창의적 자세에로의 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역설한「적극적 · 능동적 · 창의적」이란 표현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의 인사(人事)에서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종전까지 재직했던 부시장 · 국장들을 대거 축출하고 그 자리에 그가 당시 부시장으로 거느리고 있던 내무부 지방국장(이기수)을 데려와 제1부시장으로 앉혔으며, 그 후임으로 부산시장이 된 제2부시장(김대만) 자리에는 행정의 문외한일 뿐 아니라 나이도 36세밖에 안되었던 연대 조교수 차일석(車一錫)을 앉힌다. 9개의 국장 자리 중에서 유임 또는 전임된 것은 3명의 기술직, 1명의 행정직뿐이었고 2명은 내부 승진, 3명은 외부에서 데려와 앉힌다. 부시장 · 국장들의 연령을 보면 어느 시정기보다도 젊은, 평균 연령 41세였고 제1 · 제2부시장, 내무 · 관광운수 · 수도국장 등 5명은 33∼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또 그의 인사(人事)의 특징은 부산에서 30∼40명에 달하는 직원을 데려와 비서 · 인사 · 예산 · 감사 등의 요직에 앉혔다는 점이다. 그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던 것은 부산시 보건사회국장(4급 서기관)이었던 김정오(金正五)였으며 그는 3년 후에는 1급인 제1부시장으로까지 승진하였고, 역시 부산에서 데려온 6급 주사(主事) 30여명이 4년간의 김현옥 시정기(市政期)에 6급 주사(主事)에서 4급 서기관까지 승진하여 인사과장 등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인사(人事)의 두 번째 특징은 이른바 서열이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하다. 행정과에 한 5급(사무관) 계장이 있었는데 그 직속부하로 6급(주사) 주임이 있었다. 편의상 계장을 A로 하고 주임을 B로 한다. B가 시장에게 인정을 받아 B도 계장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B는 행정과장이 된다. 같은 과(課) 안에서 직속상관의 지위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인사의 질서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인사가 이러하였으니 상하의 전 직원이 '어떻게 하면 시장에게 인정을 받느냐'라는 한가지 점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육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