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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도봉공파 족보 사적비 제막식 조선일보인터뷰
조선일보 인터뷰
차례 :1, 언론제보. 2,인터뷰. 3,조선일보 보도기사.
4,만물상 기사와 해설 . 5,대제학. 6,안동유림의 질타.
언론제보
이런 장묘 문화는?
김민철 기자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색다른 발상의 장묘문화를 준비하던 중 5월 19일 발행한
귀사 신문의 수목장에 관한 기사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문은 입향조께서 문호를 여신지 육백년(불천위 향사),
분파조께서 가업 창업 후 이백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소문중입니다.
고향에는 지금 고령의 주손 내외분만이 종사를 받들고 계십니다.
세거지(안동)를 지킬 집안이 한 집도 없으니
그 비보(裨補)책으로 2009년 6월 28일 제막식을 예정으로
사적비(事蹟碑) 건립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사적비 전면부에는 가문의 근본 내력과 명(銘)을 새기고,
비 후면부에는 분파조 이하 고인이 되신 모든 선조님들(20%)과,
생존해 있는 10촌까지의 후손 이백여명 이상의 이름을
족보 형식으로 기록해 바위족보의 사적비를 제작 중에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일족 모두가 기록된 족보 사적비를 중심으로,
모든 제례의식이 행해질 것이고
앞으로 고인이 되실 분은, 묘비명이 되는
사적비 제단 주위 조경수에 수목장의 의식이 치러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 문중의 일족이
족보사적비 중심의 장묘 문화를 시행하는 모델의 첫 사례가 아닐까요?
혈연 집단으로 뭉쳐진 모든 가문들이 저의 문중처럼
분파 또는 소파, 중파 등의 중심으로 사적비 위주의 장묘문화가
보급이 된다면, 경제적 비용과 시간적 절감의 효과와
아름다운 자연에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보자 : 광산김씨 도봉공파 침락회 총무, 선국
2009년 5월 19일
조선일보에 광릉수목원 수목장 개장기사가 보도되었다.
우리 문중이 추진 중에 있는
족보 사적비 중심 장례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월 2일
사적비 비문 건립 내용을 기록한
유인물 50여 통을 집안마다 발송, 저녁에 용기를 내어
조선일보와 대구 00신문에 족보 사적비 건립 내용을 제보하였다.
6월 3일
, 조선일보 김민철 기자로부터 제보확인 전화가 왔다.
반응이 별로라 실망하였다.
6월 22일
10시경, 조선일보 김 기자로부터 사적비 건립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요구해왔다.
제막식 행사용 소책자를 만들기 위해 제막식 의례와
사적비 건립 동기부터, 비문에 새겨진 도봉공파와 관련된
선조님들의 유사를 모아 인쇄소에 맡긴 내용 그대로를
인쇄소를 통해 신문사 이메일로 전송.
11경,
김 기자로부터 메일을 잘 받아 검토 중이라는 연락을 받다.
제막일이 6월 28일인데 제막식 끝나고 기사가 나오느냐고 묻자,
사적비 중심 수목장 장묘문화가 첫 사례라 내일 보도될 것이라 응답.
오후 2시경 정식 인터뷰
기자 : 사적비 중심의 수목장이 도봉공파 전 문중 차원의 결정이냐?
답 : 아닙니다. 정확한 숫자는 몰라도 광산김씨의
수가 백여만 명이 됩니다. 대중소파와 알려지지 않은
소파까지 합이 칠~팔십 파는 될 것입니다.
도봉공파는 소파에 속하며
, 도봉공파 안에도 13개의 소문중이 있다.
그중의 한 소문중이다. 전송한 메일
「건립동기부터 사적비 전후면 비문」 내용을 보면 알 것입니다.
기자 : 문중의 동의 없이 어떻게 사적비를 세우느냐?
답 : 35대 행자두자 분파조의 후손으로 10촌까지 형성된 주손 집안입니다.
선대의 산소가 명당 따라 쓴다고 곳곳에 멀리 따로 흩어져있어,
묘소관리가 무척 힘이 든다. 금년이 윤달이 든 해이고
고령(88세)의 아버님께서 기력이 있을 때 주손인 형님께서
관리차원에 산소를 한곳으로 모실 이장을 생각했습니다.
이장을 잘못하면 후손에 불행이 닥친다는 속설이 있다.
이장을 대신하여 추모비를 세워
한 장소에 모아 제례의식을 드릴까 생각했습니다.
다섯 내외분의 비문을 세우려 계획하다가 이왕 할 거
돈이 좀 더 들더라도 문중 전체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비문이 생각났습니다.
입향조께서 가업을 창립하시어 오백년 이상 살아온 가문입니다.
우리는 한 소문중으로
고향에는 현재 고령의 주손 내외분만이 살고 계시는데,
두 분이 고인이 되신다면 애석하게도
고향을 지킬 집안이 한 집도 없습니다.
(입향조 부: 휘 수, 강화부사. 입향조, 휘 용석,
담암공 정조 21년 둔정사와 용계서원에 향사(享祀).
사조에서 향불천.
백형: 휘 여석, 충목공. 이조판서 불천위.
중형: 휘 이석, 공조좌랑.
재종숙: 휘 국광, 광산부원군 좌의정, 불천위)
입향조를 486년이나 제사를 모셔온 불천위 가문의 한 문중이,
고향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 입니다.
안동지방에 불천위로 모시는 분들이 50여명 되지만
시조공을 모시는 가문을 빼면 거의 대부분 400년 전후의 불천위다.
오백년 가까이 제사를 모시는 문중은 손꼽을 정도입니다.
한 문중의 일족이 한 집안도 없이 세거지를 떠나
이런 허전한공백을 메워
위안을 얻는 계책을 풍수학에서는 비보라 합니다.
기자 : 사적비는 어디에 세울 것이냐?
답 :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이 경북 안동에 있다. 비보책의
족보 사적비가 마모될 때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선산을 지키고 있는 사적비의 수명만큼 후손들이 지켜낼 것이고,
고향을 떠난 문중의 자취는 사적비 속에서
영원히 존속되어 기록으로 비석에 남아있을 것이며,
새겨져 있는 분들이 모두 고인이 된다면 추모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문중의 족보 사적비 중심의 장묘문화가 계승된다면,
모든 후손들은 사적비 추모단 한 곳에 몰려와
제례의식을 올릴 것입니다.
벌초걱정도 없고 시간도 절약된다. 이민이다, 해외파견이다,
일이 바빠서 제사에 참석치 못하는 집안이나,
이런 일은 생겨서 안 되지만,
만약 절손된 집안이 생긴다 하더라도
다른 집 후손들이 제사를 드릴 때
모든 넋이 제사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복된 일이 아닌가.
사적비 추모단에서 수백 년의 제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입향조 할아버지처럼 평범한 보통사람이 저절로
현대판 불천위가 되는 것입니다.
기자 : 제막식에 얼마나 모이겠느냐?
답 : 많으면 50명, 적으면 30~40명 예상된다.
기자 : 그 정도냐? (실망스러운 뜻한 물음)
답 : 200여명의 소문중에 어린이, 학생, 직장인을 뺀
어른들만 모일 것이다.
적은수가 아니다. 대가족 중심의 생각은 오산이다.
타(他) 종중의 초대 손님도 있을 것이다.
기자 : 수목장에 관해 문중의 의견일치를 어떻게 보려느냐?
답 : 선대(先代) 개별 비석 추모비를 세우려다 사적비로 방향을 트니
몇 갑절의 큰 돈이 듭니다.
나에게 형님 되는 큰집 주손이 우리 문중 침락회
(주손집 당호가 침락정)
총무인 나에게, 경비가 얼마나 들어가든
모든 경비 일체는 자신이 부담할 것이니,
문중에 돈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경비가 문중의 공동부담이라면 집집마다 의견을 듣는 것이 맞습니다.
사적비는 문중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향하는 사업으로
주손이 문중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싫어할 집안은 없을 것입니다.
사적비 후면에 보면 38대에 두 형제분이 분가되어
두 집안으로 형성되어 있습다.
두 집안의 주손 두 분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사적비 제작이 진행된 것입니다.
우리 문중은 대소사 모든 일에 침락회를 중심으로 움직여
다른 문중에 모범을 보여 온 가문입니다.
협조가 잘 될 것이다. 6월 2일 날 이미 초대장을 모두 발송하였습다.
기자 : 사적비가 무슨 뜻인가?
답 : 출세한 개인의 행적을 기록하여 가문의 위세를 알리기 위해 세우는 비가,
조선 시대에는 삼품이상 벼슬한 사람의 비를
신도비라 하며 상징물로 거북 조형물을 설치할 수 있답니다.
그 이하의 벼슬한 분의 비는 묘갈문, 묘포라 부릅니다.
큰 벼슬은 못해도 지역사회에 끼친 공로가 크거나,
자손들 중에 크게 현달한 사람이 있어
선대를 위해 세우는 비를 유허비라 합니다.
우리 사적비는 특정 개인을 위해 세우는 비가 아닙니다.
소문중 집안의 이름을 그것도 분파조를 시작으로,
이미 고인이 되신 분과 생존해 있는 분들 간의 이름과
출가한 딸 내외 이름과 4살짜리의 생존해 있는
문중 전체의 이름을 새긴 족보비다.
과거(돌아가신 선조님들)와 현재(생존해 있는 문중 구성원),
미래(고인이 될 분)를 연결한 족보비문은
전국에서 우리 문중이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문중이 고향에 살았다는 사람의 이름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기에
일 사(事) ,자취 적(蹟)을 표기해 사적비(事蹟碑)라 합니다.
기자 : 역사 사(史)가 맞지 않느냐?
답 : 평범한 보통사람의 집안이지 역사적 평가를 받는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기에 역사 사(史)를 표기할 수 없습니다.
문중 차원에
시대가 변화를 요구는 장례 문화(수목장)를 수용하기 위해 세우는
족보사적비는 전국적 첫 사례가 될 것입니다.
매년 여의도 면적의 1~2배가 되는 땅이
묘지로 조성된다는 기사를 며칠 전 본 적 있습니다.
타(他) 가문들도 우리 문중처럼
족보 사적비 중심의 장묘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산천(山川)의 아름다운 자연이
묘지조성으로 파괴되어 상처받은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런 장묘문화가 보급된다면
우리 사적
비는 역사적 사료 가치로 인정받을 때
일 사(事)자가 아니라 역사 사(史)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그때는 진짜 역사적(歷史的) 유물(遺物)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기자 : 수목장을 반대하는 집안도 있지 않은가?
답 : 당연히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오백년 가까이
불천위 제사를 모셔오는 유교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명문가 집안에 반대 의견이 없다면 거짓 말일것입니다.
수목장은 강제 사항은 아닙니다.
전송 메일「건립동기」안에서「이용방법」을 한번 읽어 보세요.
유족이 굳이 매장을 원하면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다.
매장을 원하는 집은 매장 후 고인의 영이 깃든 산소
흙 한줌을 가져다, 사적비 앞에서 합토(合土) 예식으로
의식(儀式)을 치르면 됩니다. 제막식 행사 때
5대조 내외분의 합토의식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소를 이장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다면 마음의 평화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적비 건립의 목적은 시대 요구에 따라
복잡한 모든 의식에서 벗어나 간소화에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의 덕(德)을 은혜(恩惠)라 하고
고인이 되신 조상의 덕을 음덕(陰德)이라 합니다.
매장을 하는 집안은 부모의 산소에 참배하면
두 분만의 음덕을 받습니다.
사적비 추모단에 참배하면 기록된 200여명 이상
선조들의 크나큰 음덕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개별 산소를 쓴다면 자손이 귀한
요즘 세상에 백년도 못가 버림받을 확률이 많습니다.
사적비 추모단에 모신다면 사적비가 존재하는 날까지
불천위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해 제 나이 육십이 됩니다.
우리 세대가 저물어 갈 때 쯤 의식변화로
수목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것입니다.
기자 : 나무에 명패를 다는가?
답 : 사적비 명단에 있는 분이 고인이 된다면 그 때는 위패가 됨니다.
사적비가 세워질 선산은 지방행정 기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외인 출입금지가 되어있고 오래된 자연송이 많습니다.
자연송이 싫으면 자기가 선호하는 나무를 가져다 심으면 됩니다.
영원히 지속될 사적비에 이름이 있는데
굳이 나무에 명패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자 : 기사를 써야겠습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하겠습다.
4시경 한문표기에 대해 물어왔다.
6월 23일, 조선일보 12A면 “수목장하는 명문가”,
“광산김씨 도봉공파, 문중차원 시행 결정”제목의 기사다.
독자의 첫 시선에 호기심을 유도 할 수 있도록 대문자로,
기대 이상의 격찬의 제목을 뽑아 준 것은 좋았는데 인터뷰 내용보다
본 기사 내용이 너무 빈약해 전달 내용이 미흡하다.
광김이 명문가로 소개되고
종친 사회도 잘 모르는 무명의 도봉공파가
전국적인 도봉파로 관심을 끄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노심초사한 5개월간의 작업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특별기사로 보도한 조선일보가 큰 관심을 가져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에 김 기자님에게 전화를 했다.
제목 크기만큼 기사 내용을 많이 썼는데 다른 기사가 넘쳐서,
인쇄과정에 편집되어 이상하게 되었다면서
오히려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
기분이 좋아 몇몇 분의 친척 분들에게
조선일보 신문기사를 한번 보라고 연락하였다.
저녁 6시 30분경, 조선일보
칼럼리스트 김태익이라는 분께서 전화가 왔다.
“김선국씨 되십니까? 축하드립니다.”
“멋진 제목의 기사로 취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도봉공파입니까?”
“아닙니다. 조부께서 연산출신이라 의정공파 계열로 짐작됩니다.”
<조선일보 만물상 기사와 해설>
萬物相
광산김씨 문중의 수목장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로라하는 문중이 많았지만
집안마다 특징이 있었다.
전주 이씨와 동래 정씨, 청송 심씨, 청주 한씨는
정승을 10명 이상 냈고,
안동 권씨, 남양 홍씨, 파평 윤씨는
문과 급제자를 가장 많이 낸 집안이다.
연안 이씨는 정승 8명,
문과급제자 250명, 청백리 6명으로 각 분야에서
인물을 두루 많이 배출해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으로 꼽힌다.
한창 때 안동 김씨는 '금관자·옥관자가 서말'이라고 했다.
정3품 당상관 이상만 망건에 붙이는 금·옥관자가 서말이나 될 만큼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는 뜻이다.
▶이런 문벌 리스트 중에서도 광산(光山) 김씨는 독특한 위상을 자랑한다.
정승은 5명을 냈으니 10위 안에도 못 낀다.
문과급제는 265명으로 6위에 그친다. 왕비도 1명밖에 못 냈으니
다른 외척 집안에 비해 크게 내세울 게 없다.
그래도 조선시대 최고 양반 가문을 꼽으라면
단연 앞 손가락에 오는 게 광산 김씨다.
문신(文臣)의 최고 영예 대제학이 7명으로 가장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광산 김씨의 영광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이가 선조~인조 때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다.
그는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학(禮學)을 집대성,
조선 후기 예(禮)와 풍속의 지침을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두고 "고금의 예설(禮說)을 찾아내 분명히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했다"고 했다.
사계 이후 '광김(光金)' 집안에서 3대 내리 대제학이 탄생했다.
▶경북안동에 선산을 둔 광산 김씨 도봉공파 집안이 28일부터
모든 장례를 수목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산소를 만들지 않고 화장해 선산 주변 나무에 뿌리겠다는 것이다.
수목장이 확산되고는 있다지만
문중 차원에서 수목장을 결정한 것은 처음이다.
▶우리나라 묘지 넓이가 평균 19평이라고 한다.
한 사람 주거면적이 4.3평이라니 죽어서 차지하는 땅이
살아서의 4배를 넘는다.
과거엔 양반이라는 집안일수록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묏자리를 크고 화려하게 썼다.
도봉공파는 사계의 직계 집안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을 배출한 집안의 일원이
새로운 시대 추세에 맞춰 간소하고 친환경적인 장례방식을
먼저 실천하겠다고 나서 뜻깊다.
사계도 "예의 본질은 변치 않지만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대상에 따라 변한다"고 했으니
이 시대의 수목장을 굳이 반대할 것 같지는 않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6월 24일
, 이른 새벽에 서울 형님으로부터 전화가왔다,
지금 사적비를 세울 기초 공사 때문에 고향 가는 길인데
조선일보 만물상BOX 기사에 우리 기사가 또 나왔다는 것이다.
A43면 만물상 제목은 “광산김씨 문중의 수목장”이다.
어제 저녁 논설위원으로부터 왜 전화가 왔는지
신문을 보고서 의문이 풀렸다.
만물상 박스기사는
수 많은 돈을 준다해서 기사를 취급하는 곳이 아니다.
돈을 주고 우리가 필요한 문중에 대한 기사를
써달라면 아마도 광고부로 보낼 것이다.
만물상 박스 기사는 매일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특별한 이슈를 전문 칼럼니스트가 심층 분석해 알리는 공간이다.
「족보 사적비 중심 장묘문화」의 내용이
국가적 문제로 시급히 보급 확신시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 분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공(公共)의 이익과 공동(共同)의 선(善)을 지향하는
언론의 사명으로
「사적비 중심 수목장」의 장묘 문화의 의미를
세상에 알려 보급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조선의 사대부들과 유림들이
「예문의 종장」이라 존경하는
사계 선생의 후예들로,
유교의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을
조선의 첫째가는 양반의 명문가가
문중 차원에 시도하는, 전국의 첫 사례라
사회를 설득하는데도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을 것이다.
대제학
만물상은 양반을 두 부류로 소개하고 있다.
권력의 힘과 세도의 힘으로 얻어 누리는,
정치 권력형 양반가문과
광김의 선조들처럼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학문적 능력으로 성취해 자력으로 인정받는 양반 가문이다.
학문의 성취로 얻은 벼슬을
문형(文衡) 또는 대제학(大提學)이라 한다.
종신직으로 삼공육경보다 더 명예로운 대접을 해주었다.
대제학 선발 기준이
엄격하고 까다로워 학문을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양반의 기준을 정치 권력형 양반보다
학문 성취형 양반 즉 대제학 배출 수에 두었다.
까다로운 선발 기준답게 조선조가 배출한 대제학수는
61본에 133명이고, 평균 2명 정도로 배출한 가문이 29본으로
대단한 명예요 참된 양반의 기준이 되었다.
광김이 7명으로
3대 대제학, 부자 대제학, 형제 대제학을 둔 유일 가문이다.
전주이씨 7명, 연안이씨가 7명이나
3대 대제학, 부자 대제학은 있으나 형제 대제학은 없다.
양반 가문의 순서를 꼽으라면
전주이씨는 왕손의 성이라 제외되고
「광산 연리」라 하여 광김을 첫 손꼽는 양반가문으로
대접받아 온 것이고 다음이 연안이씨다.
사계 장생 할아버지께서
주자가례를 시대상에 맞게 쓴 관혼상제에 관한
저서들이 후기 조선 사회의 표준으로
왕실과 민가에 보급되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선의 유림들은 선생을
「예문종장」으로 모시고, 광산김씨를 「예문종가」라 불렀다.
아들 신독재 집과 함께 부자분이 조선유교가 선정한
「동국18성현」반열에 오르셨다.
「예문의 종장」 사계 할아버지의
명성을 400년 만에 다시 부활 시켜 천하에 알리고,
미약한 소도봉공파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하고,
광김 일족의 명예를 또 다시 드높여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조선일보에 감사드린다.
2002년에
여름에 광산김씨 중앙청년회 초청으로
돈암서원(사계 문원공 장생. 아들 신독재 집. 두 부자 분의 제자: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4분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과 연산성지를 참배한 적 있다.
사계 선조가 가신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나라에서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조선일보라는 언론을 통해 사계 할아버지의 음덕이 지금
이 순간에 시(時)․공(空)을 초월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우리 문중 역사적 족보 사적비 제막식에
축복의 음덕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 현실 앞에서 선조의 음덕이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놀라움과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6월 24일 10시경 :
구담 큰집 문중의 용자 항렬의 친구 할아버지로부터 긴급전화가 왔다.
문중 고령의 장로이신 OO할아버지께 전화를 해보란다.
전 문중에 비상을 걸었던 모양이다.
전화를 하니 대단히 흥분되시어 화가 나 계셨다.
언어폭력 수준의 과한 말씀이었다.
이유는 신문을 통해 문중 망신, 일가망신을 다 시켰다는 것이다.
또 사적비 제작을 당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했다는 것이다.
흥분된 상태에 정상적 소통이 어려워서, 내일(25일) 안동에 직접
올라가 찾아뵙고 말씀드리기로 하였다.(필자의 거주지는 대구)
2시경
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소문중으로 하지 않고
도봉공파 전체 문중으로 기사를 내니 항의하는 문중이 있다고 하니,
기사가 편집되어
전달 내용이 부족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3시경
김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종손이라는 분께서 전화가 왔고
O중이라는 분의 이메일이 왔는데 정정기사를 청한다는 것이다.
소문중의 표기로 정정합의.
♣ 바로잡습니다
▲23일자 A12면 '수목장 하는 명문가' 기사와 24일자 A30면 만물상
'광산 김씨 문중의 수목장'에서
앞으로 장례를 수목장으로 치르기로 한 곳은
'광산 김씨 도봉공파'가 아니라 도봉공파의 소(小)문중이다.
주손인 형님께 사적비 작업의 내용을 모르고 있는
종손에게 전화 한번 드리라고 연락하였다.
안동 유림의 질타(叱咤)
6월 25일.
“35세 김행두 후손 소문중” 정정기사가 나왔다.
12시경 대구에서 안동 장로 할아버지께 출발한다고
연락하니, 조심해 오라는 말씀에 어제와는 딴판으로 누그러져 계셨다.
도착 후 행사 책자 10쪽~16쪽까지
모두 읽어 보신 후 이야기하자고 말씀드리니
읽으시면서 궁금한 점은 질문하셨다.
다 읽으신 후 “오늘 정정기사가 나왔으니 이만 됐다.”라고 상황종료.
어제 화를 내신 이유는
서울에서 안동으로 내려오는 도중 차안에서,
안동 유림들로부터 사적비 수목장 기사에 대한
항의 전화를 받고서 무척 당황하셨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도 보지 못하고 알고 있는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광산김씨 도봉공파의 문중 차원의 수목장에 대한 기사에
거부감을 가진 안동 유림들로 거센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신문에 난 내 이름을 보고 우리 문중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더구나 당신 자신이
유학자(휘 용득, 호 청하)인 필자의 조부께서 한학을 배운 제자로서
스승의 문중에서 화장(수목장)의 발상은 꿈에도
예상 못하였기에 당혹감이 더 하셨다는 것이다.
안동에 도착과 동시에 유림들이 모여 담소하는 여러 곳이 있는데
택시를 타고 다니며 공파 전체의 결정이 아니라고
곳곳을 찾아 설명하느라 속이 많이 상하셨고
수목장(화장)도 유교의 뜻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참조: 효경에 효지시야(孝之始也)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하니 불감훼손(不敢毁損)이라.
몸을 다스리는데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모로 나온 것이니 신체를 감히 훼손하는 것은 불효다,
헤어질 때 말씀이
장차 장묘는 네가 생각하는 쪽으로 가야하는 것이 옳지만,
왜 남 따라하면 되지
광김이 앞장서서 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건이라면서
삼 일간 보도된 신문을 봉투에 보관하시면서
봉투 표지에 신문 내용을 메모하시는 것이었다.
꾸지람을 듣고 대구에서 안동에 내려 올 때는 화도 났지만,
대화 중 시대의 변화에도
안동 유림들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보수적 전통이
오늘의 안동을「한국정신문화의 수도」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에 머리가 숙여졌다.
안동을 한국 유교 문화권 중심의 총 본산으로
「한국정신문화유산」의 고장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안동 유림들이 유교의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온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안동 유림을 대변하신 문중 장로 할아버지의 질타는
전통 유교의 보수 가치관과
새 시대의 요구에 새로운 방법으로,
보수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는
문화적 충돌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월 26일.
젊은 시절 초대 민선면장을 엮임하셨고,
유학자(휘 용득, 호는 청하)로 일생을 살며
유림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18년 전 89세로 돌아가신 조부님 산소에 비문을 세웠다.
6월 27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 덕신애 산 초입
800m 지점에 「족보 사적비」를 세웠다.
대로변에 제막식 현수막을 걸고 내일 행사점검을 하였다.
6월 28일. 11시 30분 역사적
「족보 사적비 제막식 겸 수목장 개장」의례식을 거행 하였다.
참석하신 분
제막식 행사를 검소하게 하려고 최소한의 인원만 초래하였다.
초대 손님 : 문중과 일가분들
: 대구 경북 종친회 19대 용달 전회장님과 총무 승호님.
안동종친회 창복 회장님
: 국회의원 2분(제막식 전날 오셔서 1박 후 일찍 떠났음.
이름 밝히기를 사양하여 기록치 않음)
: 고향 초대 분과 타(他)문중 종손(15분)
: 대전 거주 남양 양씨 문중 종손 내외분.
◆조선일보 보도이후
광산김씨를 조선 명문가로
첫째가는 양반 가문으로 연 이틀 보도이후
장묘 문화를 개선시키려는 생각을 가진 타 문중에서
수목장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되느냐는 문의 전화가 많았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 사는 다른 다섯 문중 종손들은
직접 참관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대전 거주 남양 양씨의
한 문중 종손께서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해왔기에
주손께 동의를 얻어 참관 허락을 하였던 것이다.
행사 전과정을 찰영해갔다.
제막식 이후에도 사적비 수목장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을 찾아온 문중이 열 집도 넘었으니
언론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8월 20일 경
남양 양씨 문중 차원에서 사적비 추모단을 견학하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0
4월 13일 조선일보 만물상에 장묘 문화를 개선시킬 문중으로
광산김씨 도봉공파 소문중이 사례로 소개되었다.
2010년 6월
「족보 사적비 제막식 겸 수목장 개장식 1주년」을 맞이하여
사적비와 수목장에 대해한 관심으로 문의하는 분이 많으므로
이 글을 기록으로 남긴다.
양간(대파), 퇴촌(중파), 담암(입향조), 도봉(소파)공파
침략회 총무 41세손 선국
◆변화되는 장묘문화 사례(조선일보)
전란 중이던 1951년 경주 어느 고택(古宅)에
스웨덴 의료참전단 간호사들이 찾아와 부엌과 안채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촬영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가 내린 특별임무였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타프 6세는
1926년 왕세자 시절 신혼여행 길에 일제하 조선에 들렀다.
경주 고분 발굴현장에선 봉황 모양 금관을 직접 들어내기도 했다.
그 고분이 '스웨덴(瑞典)'과 '봉황'에서 한 글자씩 딴 서봉총(瑞鳳塚)이다.
▶경주에서 왕세자 부부는 교동의 고택 사랑채에 묵으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왕세자는 이 기품있는 명문가에 감명받았지만
남자가 못 들어가는 부엌과 안채를 못 본 게 아쉬웠다.
그가 25년 뒤 한국에 파견된 간호사들에게
사진을 찍어오게 한 집이 경주 최부자 99칸 집이다.
'진사(進士) 이상 하지 말라. 길손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이 없게 하라….'
최부잣집이 12대 200년을 이어온 힘은 수신(修身)과 절제였다.
▶그 경주최씨 문중의 진사공파 소(小)문중이 그제
보건복지부 표창을 받았다. 2002년부터 잔디밭에
분골(粉骨)을 묻는 자연장지(葬地) '인덕원'을 운영해온 데 대한 격려다.
경북 영천 도덕산 자락에 있는 이 가족공원은 복판에
소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605㎡ 잔디밭이다.
표지석이라곤 자연장에 동의한 문중 가족 50여명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입구 명단석 하나뿐이다.
▶이 중에 돌아가신 분이 생기면 잔디를 들어낸 뒤
흙과 유골을 1 대 1로 섞어 묻고 다시 잔디를 덮는다.
그리고 표지석 이름 옆에 '몇 년 졸(卒)'이라고 새겨넣는 것으로 그만이다.
빙 둘러 갖가지 꽃들을 심어놓아
마을회의나 자연학습, 가족소풍 장소로 내준다고 한다.
잔디 위는 산 사람들의 공원,잔디 밑은 영혼의 안식처인 셈이다.
▶경북상주엔 진주강씨 집의공파 소문중이
분골을 창호지로 싸서 묻는 가족묘원을 꾸리고 있다.
▶ 작년엔 광산김씨 도봉공파의
한 소문중이 모든 집안 장례를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퇴계 집안인 진성이씨문중은 지난해 서랍식으로 유골을 모시는
문중 납골묘를 만들었다.
시대에 맞춘 변화의 바람이 주로 유교적 전통이 짙게 남아있는
경북지역에 일고 있어서 더 눈길이 간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걸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