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호남진흥원의 호남학산책이란 칼럼 중 '문화재창'에 올려진 글을 옮겨 싣는다. 한세인의 고단한 삶을 보니 갇힌 섬에서 문화적으로 갇히고 사람들로부터 갇혀지낸 것에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또한 한센병을 지원한분들의 고투에 경건한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카페지기 올림
-버려야할 듯한 생활사자료, 의미를 찾으면 문화재가 된다-
○유형문화재(공예품) : 형태․품질․기법 또는 용도에 현저한 특성이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 문화사상 또는 공예사상 각 시대의 귀중한 유물로서 그 제작이 우수한 것.
○민속문화재 : 한국민족의 기본적 생활문화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것으로 농어민 등의 장신구와 음식용구(의․식․주), 농기구와 어렵구(생산․생업), 의료구(민속지식)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기준 가운데 공예품이나 생활유품에 해당할 만한 항목을 뽑아 본 것이다. 민속공예품이나 미술사 유물을 문화재로 볼 때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2016년 초봄, 소록도에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센인 유물들에 대해 문화재 지정 신청을 검토하고 있는데 자문을 해 달라는 것. 문화재학 석사과정을 마친 소록도한센병박물관추진팀 학예사(백미영)의 연락이다.
현장으로 갔다. 오래전 소록도 자혜의원본관을 문화재로 지정할 때의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1999년부터 추켜들었는데 근대시기의 건조물에 대해서 문화재 지정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이다. 결국 2003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그때 소록도 여러 곳을 돌아 보면서 느낀 것은 ‘주인’ 또는 ‘주어’에 대한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소록도의 ‘주어’는 ‘국립소록도병원’과 ‘한센병’이었다. 국가 차원의 기구와 조직이라는 측면에서는 마땅하다 할 것이지만, ‘병원’과 ‘한센병’의 또 다른 주체는 ‘한센인’인데 이들은 설자리가 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
소록도 자혜의원본관의 전라남도 문화재 지정이 계기가 되어 2004년에는 구 소록도 갱생원 감금실 등 소록도의 시설물 12건이 대거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그 건조물들은 한센인들이 피땀이 배들어 있는 곳이다. 일종의 강제 노역 형태였지만 직접 벽돌을 구워 건립하였으니 또 다른 ‘주인’인 셈인데 여전히 한센인은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한채 ‘감금’되고 ‘관리’되었던 건조물 공간이 문화재가 되고 여전히 ‘병원’과 ‘한센병’이 ‘주어’였던 것이다.
소록도 한센인 유물을 하나씩 자세히 보면서 거기에 얽힌 사람들과 이야기에 대해서 들었다. 흔하고 버려야 할 듯한 양은 도구들. 주전자와 냄비도 제 형태를 잃고 이리저리 붙이고 때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붙이고 때웠던 것은 생존의 몸부림이었고, 그들이 실현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손과 발 등 곳곳이 부자유스런은 그들이 살아 오면서 터득한 의식주의 용구였고 생산과 생업의 도구였고 민속지식의 의료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형태, 품질, 기법, 용도에 있어서도 현저한 특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학예팀에서 수집 정리한 자료와 총무팀이 보관한 기록 등을 살펴 가면서 등록문화재 신청서작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전문가의 의견은 사회학, 민속학, 의학사 측면에서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 나경수 전남대 교수(민속학), 채규태 가톨릭대 의과대 한센병연구소장(의학사), 그리고 문화재학 측면은 필자.
2016년 8월 22일자로 국가등록문화재 제663호가 되었다. 문화재명은 ‘고흥 소록도 한센인 생활 유품’. 문화재명칭에 ‘한센인’이 명기된 것이다. 이제야 ‘주인’이요 ‘주어’가 된 것이다. 국가에서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한 것은 1916년 2월 24일. 그 주인공 ‘한센인’은 100년이 되어서야 ‘소록도병원’과 ‘한센병’의 굴레를 일부나마 벗을 수 있었다 할까.
용어에서도 다양한 논의를 했다. 유물, 유품, 도구, 기구, 용구, 용품 등. 1930년대부터 연원이 되지만 지금도 유사한 기구 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유품’으로 선택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최종 ‘생활유품’이라는 문화재 명칭을 부여 하였다.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제도는 2001년에 도입되었는데 2020년 12월 기준 894건이 등록되었다. 전남은 113건, 광주는 20건, 전북은 86건이다. 이 가운데 한센인 생활유품은 어쩌면 가장 특수한 유물일 것이다.
한센인 생활유품은 개인도구와 공동도구, 그리고 공동 노동 기기로 나눌 수 있다. 등록문화재 신청은 24점이었는데 실제 14점이 등록되었다.
개인 도구는 개인치료용 칼과 단추끼우개가 대표적이다. 개인치료용 칼은 자가치료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강제격리수용정책과 강제노역으로 면역력이 약한 환자의 상처는 아물 날이 없었는데, 병원에는 의료인력이 부족했다. 이 칼을 사용해 직접 상처의 굳은살을 제거하였던 한센인의 필수 생활용품이었다.
단추끼우개는 손이 변형되거나 양손 형태는 있으나 신경마비로 힘이 없을 때 사용하도록 직접 고안하여 만든 것이다. 앞쪽의 고리모양을 단추 구멍에 넣고 단추를 걸어 잡아당겨 사용한다. 한센인들은 신경 세포를 공격하는 나균(癩菌)으로 인해 감각소실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자극에 둔감하게 되어 외상을 많이 입게 된다. 외상이 반복되고 잘 관리되지 않으면 신체 형태의 변화와 피부의 변형을 가져올 수 있고, 심할 경우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공동도구는 국자, 프리이팬, 솥들개, 냄비 등이다. 식기류를 구하기가 힘든 시기에 한센인들은 양은이나 함석을 이용해 물통이나 함지 등을 손수 만들어 썼다. 소록도의 주거형태는 가정사와 독신사로 나뉜다. 독신사에서는 같이 거주해도 개별 배급을 받았다. 받은 곡식과 부식류를 취향에 맞게 조리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 냄비와 국자 등이다.
또한 소록도에서는 부족한 조리기구를 만들어 쓰는 일이 매우 일반적이었고, 본래의 용도와 달리 사용되는 예도 많았다. 놋쇠 요강의 주둥이에 구멍을 뚫어 철사 손잡이를 끼운 뒤 조리기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작은 양푼 두 쪽을 붙이고 위쪽에 구멍을 내 개인 냄비를 만들기도 했다. 용도에 맞는 조리기구가 부족했던 시절을 대변해 주는 유물이다.
“국자”는 철사로 틀을 만들고 함석으로 면을 덮은 것으로 끓인 물과 국물을 여러 식구가 나누어 쓸 때 사용하였다. “프라이팬”은 주전자의 몸통을 반으로 자르고 주둥이에 나무를 꽂아 손잡이를 만든 것이다.
“냄비”는 공동취사를 못할 정도로 아플 때나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바닷물에 곡식 몇 알을 넣고 끓여 먹을 수 있도록 고안된 취사도구이다.
“솥들개”는 곱아진 조막손으로 무거운 솥을 들 수 없어 고안해 낸 것이다. 솥의 입구에 나무를 걸고 쇠부분은 팔에 끼워 사용한다. 뜨거운 솥을 옮길 때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솥의 입구보다 긴 나무 막대에 굵은 철사를 연결해 팔을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공동 노동 기기는 공동노동에 사용되는 기기로 강제 노역의 현장 유물이자 생업과도 연관된 유품이다.
“시멘트블록형틀”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멘트 블록을 직접 만들어 썼다. 장안리와 남생리의 모래를 섞어 만든 시멘트 블록으로 ‘축사’를 지었다.
“기와틀”은 1935년 시작된 확장공사 이후 기와를 제작할 때 사용했다. 건물의 지붕에 사용하기도 하고 외부에 판매하여 수입원으로 삼기도 했다. 소록도에는 본 유물과 같은 기와틀로 제작된 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다.
한센인 생활유품은 제작의 기법이나 공예기술 측면에서는 전통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문화재 환경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공간에서 특수한 집단이 제작, 사용한 생활사 도구라는 점, 특히 일제강점기 강압적인 사회구제 정책과 수탈의 현장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상징인 소록도와 그 주체인 한센인의 상징 유물·유품이라는 점에서 근대기 의학사, 민속문화사, 수공예 기술, 향촌사회사 등의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그무렵 소록도에서 문자가 왔다. “소록도 한센인 유품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보는 눈을 열어주신 혜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소록도 강의원)”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