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를 지키다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들
나는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조선시대 식으로 가정을 운영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의를 중시한다.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예의를 중시한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과 갈등이 생기곤 한다.
가정 운영에서 나는 상하관계를 만든 것 같다.
직장에서 상하관계에 있어서 나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불편하다고 해도 잘 견뎠다.
30대에 미국에서 성인까지 살았던 사람들과 공부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상하관계의 한국 문화에 고초를 겪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경찰서 조사처럼 묻는 것은
갑을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늘상 질문이 그랬다.
어디살아?
나이는?
아이는 몇 명이야?
그 후로 경찰서 조사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모든 일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20대에 들어야 했던 말이다.
나는 모든 일에 노력했다.
정말 노력했다. 모든 일에.
그래야 옳은 줄 알았다.
노력한 만큼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웠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때 오는 무시에 집중했다.
그래서 노력했다.
매우 노력한 일이 상황에 맞지 않아 모두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성공한 경험은
다른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곤 했다.
그래서 나의 과다한 노력을 칭찬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는 재능이 없어도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나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오랜 노력의 시간 끝에 마침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곤 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집안 일, 요리를 싫어했었다.
지금도 싫다.
요리는 노력한다고는 했지만 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요리를 노력하지 않는다.
재능도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샤브샤브를 하곤 한다.
끓는 물 속에 각자 넣어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요리에 재능 없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식단인 것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이 말은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쉬운 말인 것 같다.
나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리고 예술적인 기질도 있다.
자유로운 영혼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비해 자유롭게 살았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독특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일부러 내가 반항으로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예술적인 기질과 자유롭고 싶은 기질이 그렇게 나를 이끈 것 같다.
그것이 내 기질이고 재능인 것이다.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그다지 연연해 하지 않는다.
지위가 어떻든지 간에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건의한다.
국회의원까지 건의해 봤다.
대통령은 직접 만날 기회가 없어서 말을 못했다.
약자를 위해서 나는 누구든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