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된 그리스도인을 키우기 위해서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역과 영성 수련회를 가서 느낀 점 중 하나입니다.
1. 수련회에서 리젠트 1세대 교수들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리젠트가 1세대 교수들이 전방에 포진하고 있을 때 어떤 성격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있었는지를 그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과목명 그대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으로 가득 충만하게 되어(영성) 자신을 부르신 그 장소에서 (교회를 포함하고 뛰어넘는 사역)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하는 그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강조하는 훌훙한 수련회며 강의였습니다. 1세대 교수들의 따뜻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환대에 대해서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2. 한편으로 리젠트 칼리지의 아쉬운 점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태생적 한계인 것 같습니다. 분명 리젠트는 사역과 영성의 통합을 통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히 목회자를 양성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가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는 평신도를 내보내고자 하는 학교도 아닙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틀을 신학대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가지고 꾸려가고 있습니다. 주정부가 인정하는 대학원이기에 분명 점수를 주어야 하고 평가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점수주는 대학원으로서의 모습이 결국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대학원은 분명 지적인 것을 다루는 목적을 가집니다. 지적인 것을 분명히 다루고 충분히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원래 추구하는 목적인 진정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만들지만 하나님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점수평가라는 제도가 들어가면서 이미 사람들은 좋은 점수를 가진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평가를 받았는가에 따라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기준이 분명하거나 일관적이지 못할 때 그들의 제도에 대한 불신은 커져갑니다. 무슨 기준으로 그들이 나의 페이퍼를 채점하는가? 그 기준이 정당한가? 를 묻게 됩니다. 이미 거기서 사람들은 리젠트가 추구하는 진정한 통합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훈련에서 어떻게 지적인 것을 잘 다뤄 교수들에게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진짜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점수를 받는 것에 대해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해지는 오히려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충실히 배우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고백들을 합니다. 즉 점수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적용하고 삶에서 훈련하며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학교가 모든 것을 제대로 정말 주님 보시기에 잘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는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학교가 점수를 낮게 주는 이유가 많은 이들을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다고 한다면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일부러 점수를 낮게 주거나 하는 것이 아닌 진실로 합당한 평가를 할 때, 그것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일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리젠트의 점수 주는 체계는 솔직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입니다. 객관적 체계가 있을까 할 정도로 제멋대로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교수마음에 들게 쓰는 것이 점수 잘 받는 비결이라고 한다면 그 교수는 정말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겸손하게 상대방을 그리스도인으로 존중하면서 점수를 채점했는지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객관적인 배운 것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진실로 고민하여 쓴 에세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책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하지만 저는 왜 그들이 왜 점수주는 체계를 유지하며 통합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들겠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점수를 준다는 것은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들겠다는 것에 강조점을 더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의 훈련이 기도와 배움 그리고 나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신앙의 기도 나눔을 평가할 수 없듯이 지적인 것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리지 않도록, 내리더라도 어떤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가에 대한 부분들로 진실히 객관적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통합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내겠다는 꿈은 미완의 이야기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6. 하지만 이것은 비단 리젠트만의 문제점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많은 교회들과 신학대학원들이 통합된 그리스도인을 양성해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경쟁과 평가,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여라 부류로 갈립니다. 성경암송대회, 성경시험,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지적인 채움에 있어서 혹 그들이 가지고 있을 것들에 대한 보완과 도움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을 시상한다는 목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경쟁을 만들고 스스로 그룹을 만들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걸어갑니다.
7. 통합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내기 위하여 지적인 경쟁과 평가를 하는 모든 태생적 한계를 이겨내고자 모든 신학대학원들과 교회들은 몸부림을 쳐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지적인 평가는 사람들을 구분하고 사람들을 지적인 것에 대하여 불편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교수와 목사들은 통합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교수나 목사들이 가르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정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돕는 점검의 차원에서 시험과 평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평가에 대해서 누군가가 질문을 가지고 의문을 가지고 나아온다면 그 어떤 것보다 더욱 시간을 할애하여 마음을 다해 설명해주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평가와 시험이 자칫 가질 수 있는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느끼고 발전시키는 에세이들에 대해서 평가하는 일들은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단코 지적공부만 강조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통합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상 리젠트든 그 어디든 그 태생적 한계에 갇혀버리게 될 것입니다.
8. 글을 마무리하며 한 편으로 1세대 교수들은 이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2세대 교수들이 그 태생적 한계를 깨닫고 부디 잘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함께 모든 마음의 개혁을 바라며...